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2
1부 1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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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융은 칙서를 받으라.”
혹시나 트집거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예를 갖추었다. 새 황제가 처음 보내온 칙서다. 정성껏 받아야 한다.
내가 절을 한 뒤 경건하게 자세를 잡자 정사인 한림원 시독(翰林院侍讀) 서목(徐穆)이 돌돌 말린 칙서를 들어 펼쳤다. 그리고 장중한 목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우리 명나라는 크게 천명(天命)을 받아 천하의 백성과 물건의 주인이 되었다. 조종(祖宗) 열성의 넓은 규모와 큰 훈계가 자손에게 전해 있어 황고(皇考, 죽은 선황제)께서 황통을 이은 지 18년에 깊은 인덕과 지극한 혜택이 해내(海內)에 뻗쳤으며, 정치와 교화의 융성함은 예전에도 드물게 듣던 바이다.
다시 백성들이 궁한 것을 민망히 여겨, 새로운 정치에 정신을 가다듬어 이롭고 폐단이 되는 것을 널리 찾아 바야흐로 장차 크게 변혁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윤음(綸音)을 반포하기에 앞서 갑자기 세상을 버렸으니, 땅을 두드리고 하늘에 부르짖어도 미치지 못하겠노라.
온 천하의 슬픔이니, 어찌 나 한 사람 뿐이겠는가. 요사이에 친히 유명(遺命)을 받았는데, 주기(主器)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 하였고, 종친과 문무 제신과 군민(軍民)·기로(耆老) 등이 여러 번 글을 올려 나아가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거절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는데 정성이 더욱 간절하므로, 깊이 생각해 보니 종묘와 사직은 중하여서 감히 굳이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삼가 이달 18일에 하늘과 땅, 그리고 종묘사직에 삼가 고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올랐노라. 국가의 창조하기 어려움과 이 몸이 짊어진 중임을 돌아보아, 오직 옛 훈계와 성헌(成憲)을 따르고 황고의 마치지 못한 뜻을 이어서, 그를 넓혀 행함으로써 나의 많은 백성들을 편히 하고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하리라.
그리하여 명년을 정덕(正德) 원년이라 하고, 크게 천하의 죄인을 놓아주면서 백성과 더불어 고쳐 새롭게 하리라. 아! 천자의 자리는 지극히 크고 백성의 일은 지극히 어려워, 중외(中外)의 신료(臣僚)가 마음을 합하여 바루고 도와주어, 짐(朕)의 미급함을 보충해야 선업(先業)을 잘 계승하여 함께 억만 년 끝없는 아름다움을 보전하겠기에 만방(萬邦)에 고하여 다 알게 하노라.
짐(朕)은 이에 천명을 받아 나의 조종 대통(大統)을 이어 만방(萬邦)에 군림하였으니, 무릇 하늘이 맞닿고 땅이 끝나는 데까지 판도(版圖)에 실려 있고 성문(聲聞)과 교화가 미치는 곳은 모두 은택(恩澤)을 펴노라. 왕의 나라가 비록 멀지만, 예로부터 문헌(文獻)으로 일컬어졌으며 대대로 충정(忠貞)을 다하였으니, 그 전장(典章)에 있어서도 마땅히 우대해주어야 할 것이므로, 이제 정사(正使) 한림원 시독(翰林院侍讀) 서목(徐穆)과 부사(副使)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길시(吉時)를 보내 조칙(詔勅)을 내려 왕에게 유시(諭示)하고, 아울러 왕과 비에게 폐백(幣帛)·문금(文錦)을 내려 못 잊어하는 마음을 보이니, 왕은 더욱 예의를 두터이 하고 직공(職貢)을 힘써 닦아, 함께 태평을 누리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겠기에 유시하노라.”
젠장, 어려운 소리가 길기도 하군, 이제 다 끝난 건가?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당연히 나는 중국어를 전혀 모른다. 대신 중국어에 능통한 이조판서 임사홍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통역해 주었다. 사정을 헤아려주려는지 칙사도 매우 천천히 읽어나갔다.
“폐하께서는 개조 이래 조선이 보여준 충성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과거와 같이 충심을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낭독을 마친 서목이 두 손을 맞잡고 내게 예를 표했다. 나 역시 마주 절했다.
“우리 조선은 폐하께서 베푸시는 은덕으로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어찌 잊겠습니까.”
참자, 참자. 이 입에 발린 말들을 입 밖에 내놓을 때마다 속이 열 번은 뒤집어지지만 참자. 혹시라도 내 속이 일말이라도 드러났다가는 엄청나게 피곤해질 게 뻔하다.
칙사가 온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내 추문을 담은 ‘찌라시’ 때문에 속만 부글거리고 있던 2월 초였다. 아무래도 놔둘 수가 없다 싶어 의금부와 포도청 인력을 동원해서 도성을 뒤집어엎으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트럼프는 딸이랑 염문이 나도 태연할지 모르지만 난 아니다.
결심을 굳히고 정호찬과 포도대장을 불러들여 내 앞에 세웠다. 점진적인 수사고 뭐고, 죄다 집어치우고 싹 잡아 처넣으라고 막 명령을 내리는데 명나라에서 칙사가 온다는 연락이 왔다. 제기랄!
칙사가 오는데 찌라시 배포자를 색출한다고 도성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 수는 없다. 방금 내린 지시는 곧바로 철회되었다. 대신 칙사를 영접할 준비가 시작되었다.
칙사들이 오는 길은 이번에도 요동을 거쳐 오는 육로였다. 해난사고가 두려운 모양이었다.작년 겨울부터 정비에 들어갔던 의주까지 가는 서북쪽 도로는 마침 이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공사가 끝났다. 다행히 견고하게 잘 돼서 사신들이 지나가는데 무너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를 보니 이렇게 몇 년에 한 번씩만 칙사가 와도 도로 유지에는 충분한 명분이 될 듯하다. 굳이 내가 순행을 가면서까지 도로를 관리하지 않아도, 이렇게 사신이 한 번 올 때마다 도로상태 확인이 되니까.
사실 황제가 칙사를 보내 ‘취임 기념사’를 보내리라는 예상은 이미 하고 있었다. 하필 내가 도성을 한번 싹 쓸려고 결심한 타이밍에 올 줄은 몰랐다만.
한 가지 더 예상하지 못한 건 칙사가 중국인으로 바뀐 점이었다. 홍치제는 조선에 보내는 모든 칙사를 조선 출신 환관들 중에 선발했다. 아무래도 조선을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칙사로 오던 조선 출신 환관들은 조선말도 알고, 내 속셈도 다 들여다보았다. 또한 자기를 이국에 보낸 조선 조정을 미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뭔가를 숨기고 비밀을 유지하기가 참 힘들었다.
분명히 장점도 있었다. 일단은 같은 핏줄이라 서로 통하는 바가 있고, 조선에 대한 애정이 남아서 문제가 될 사안을 눈감아주는 경우도 많았다. 북경에 돌아가서 우리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온 이들은 분명한 중국인이다. 조선을 잘 모르고 우리에 대한 원한도 없지만 잘 대해주려는 생각도 없다. 그만큼 내 속내를 들킬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뭔가가 들켰을 때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기 전에 쉽게 수습할 수 있을 가능성도 낮아졌다.
“예전에 정사로 왔던 태감 이진은 어찌 되었소?”
내 질문을 받은 서목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단,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눈은 장악원 무희들의 춤을 보느라 넋이 나가 있었다. 죽은 임숭재가 심혈을 들여 키운 바로 그 무희들이다.
“태감 이진은 이제 연로하니 쉬게 하라는 황명이 있었습니다. 황제께서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든 내관들 몇에게 휴양하라는 지시를 내리셨고, 또한 주요한 국사는 가능하면 내관보다 조정 신하들에게 맡기려 하십니다.”
이것도 일종의 황권 강화인가. 젊은 황제가 자기 주변을 정리하려는 행동일 수도 있겠다. 숙청 대상이 단지 내관에서 그칠지, 아니면 조정 고관들에게까지 확대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황제께서는 조선이 동쪽 변방을 굳게 지켜 주는 점을 매우 크게 사고 계십니다. 장차 달단 토벌에 있어서도 한 몫을 단단히 해주시리라고 기대하고 계시지요.”
제기랄, 올 게 왔군. 황제가 명령하면 우리도 파병해야 하는 건가. 새 황제 정덕제가 어떤 성격인지는 모르겠다만, 설마 홍치제가 죽은 뒤 3년 상도 치르지 않았는데 올해 안에 몽골로 원정을 나가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학문도 많이 닦았다니, 그 정도 상식은 지키겠지.
“때가 되어 황제께서 명하시면 마땅히 우리도 군사를 낼 거요. 천자께서 내리는 명을 어찌 따르지 않겠소? 우리 선왕께서도 선제께서 내리신 명에 따라 군사를 내어 건주위를 치신 바 있소.”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건주위 토벌과 몽골 원정은 난이도 레벨이 다르다. 성종 때 명나라 요구에 따라 벌인 건주위 토벌은 압록강 너머를 잠깐 찍고 오는 정도로 끝났지만, 진짜 몽골 원정이라면…생각하기도 두렵군.
“우리 조선은 번국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황제께서 내리시는 명을 받들 거요. 황제께 아뢰어 부디 심려치 마시라고 말씀드려 주시오.”
나중에 정말로 출병 요구가 오거든 그때 가서 어떻게든 뭉개면 되겠지. 지금 당장은 듣기 좋은 말로 적당히 둘러대 놓자.
“믿겠습니다. 헌데 전하께서 일본 원정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젠장, 도대체 어떤 놈이 제보한 거야? 이놈이 알면 분명히 귀찮아질 텐데!
하긴 생각해 보니 칙사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었겠지 싶다. 도성과 삼남에서 차출한 우리 군사들은 겨울에 접어들자마자 훈련에 들어갔고, 지금은 부여주에서 동원한 여진족 기병들도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당연히 전국이 대마도 정벌 소문으로 떠들썩하다.
칙사가 지나온 평안도 연변에서도 그 소문은 화제였을 게다. 평안도 군사는 이번에 하나도 동원하지 않지만, 선봉에 서서 진격할 대마도 왜병들이 평안도에 있었으니 사실상 평안도도 한 몫 하는 셈이다.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대마도는 본래 우리 속령으로, 잠시 버려두었더니 왜인들이 들어와 살았기에 우리가 수년 전 다시 정벌하였소. 헌데 지난 가을에 구주에 있는 왜적들이 그 섬을 침탈하여 빼앗았으니, 어찌 그대로 둘 수 있겠소? 마땅히 탈환해야 하지 않겠소.”
“허나 일본에는 황제께서 책봉하신 일본국왕이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조선과 일본 양쪽은 모두 황제께 책봉을 받은 나라들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군사를 일으키실 게 아니라 마땅히 표를 올려 황제께서 처결토록 하셔야 합니다.”
아 젠장. 역시 중국놈이 칙사로 오면 이딴 소리 할 줄 알았어. 조선 출신 환관이랑은 같이 ‘왜구 놈의 새끼들’ 욕이나 좀 하다가 선물이나 적당히 쥐어주고 보내면 끝나는데, 중국인이다 보니 그런 감정적인 동조가 안 된다. 전쟁을 벌이려는 판인데 규칙이나 따지고 있다.
“법도대로 하면 마땅히 그래야 하겠으나, 선제께서 붕어하시어 천조에서도 경황이 없는 이 시기에 어찌 사소한 일로 황제께 괴로움을 끼쳐드리겠소? 더구나 일왕 의징이 직접 대마도를 공격한 것도 아니고, 소이전이라 하는 일개 지방 호족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오.”
지금 일본국왕, 즉 무로마치 막부 쇼군 자리에 있는 이는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다. 내가 알기로 이 자는 군사를 일으켜 조카인 전대 쇼군 요시타네를 내쫓고 그 자리에 앉았다. 수양대군 같은 놈, 아니 적어도 조카를 죽이진 않았으니 그보다는 나은 놈인가?
사실 조카를 살해한 악당은 수양대군만이 아니다. 명나라 영락제도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어 죽이고 권좌에 올랐다. 세 나라 모두 같은 짓을 한 번씩 한 셈이다.
“그렇다 해도 법도를 지키지 않으셔서야 되겠습니까? 일단 황제께 표를 올려 일왕 의징을 나무라고 대마도를 내놓게 해달라고 청하십시오. 조선은 중화에서 첫째가는 번국이니, 어찌 황제께서 소홀히 하시겠습니까?”
아오, 이게 진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는 국경분쟁이면 이 자식 말도 의미가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일본은 그 꼬라지가 아니잖아. 오죽하면 내가 십년 전부터 전쟁 말고 다른 해결방안은 생각도 안 하고 있을까.
“지금 왜국은 정세가 심히 어지러워 일왕은 지방 호족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소. 그 결과 일개 호족이 멋대로 우리 땅을 침탈하는 사태가 벌어진 거요. 나 역시 일왕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소. 단지 도적과 같은 호족 하나를 토벌하려 할 뿐이오.”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젠장, 만주도 아니고 규슈 원정에서 명나라 눈치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러다가 대놓고 전쟁하지 말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서담은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무희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용케 내 말에 대답은 꼬박꼬박 했다.
“그만하면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알겠습니다. 허나 황제께서는 일찍이 각 번국이 함께 평화를 지키며 지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적(蠻賊)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도 벅차거늘, 어찌 각 번국이 서로 싸우며 힘을 낭비해야 하겠습니까.”
뭐? 만적? 세 나라가 만적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도 벅차다고? 정덕제가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만적을 상대로 싸울 생각이기에 명-조-일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싸워도 벅차다 하는지 모르겠다. 세계정복이라도 할 생각인가?
“허나 전하께서 토로하시는 바를 들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신 사정도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황제께서는 선뜻 납득하지 못하실 수도 있으니, 방금 제게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표로 써서 주십시오. 이틀 뒤 북경으로 돌아갈 것이니, 제게 주시면 제가 바로 황제께 올리겠습니다.”
“이틀?! 이제까지 칙사가 오면 두어 달 정도는 여독을 풀고 쉬어감이 상례였소. 어찌 그리 서두르시오.”
깜짝 놀랐다. 칙사가 오래 체류하면 당연히 접대비가 많이 든다. 하지만 그 비용을 들이는 만큼 이득도 분명 있었다. 접대와 향응을 통해 칙사를 구워삶고,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점도 황제께서 조선 출신 태감들을 칙사로 보내지 않기로 정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 칙사는 황명을 전하는 임무를 마치면 바로 돌아옴이 도리인데, 그간 조선에 온 태감들은 산천 유람과 잔치로 소일했습니다. 이 어찌 번국에 과한 짐을 지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야 이 자식아, 그게 다 우리 입장에서는 로비였다고. 나도 처음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싫었지만, 우리로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명나라 조정에 연줄을 만들 재주가 없단 말이다.
“물론 선제께서는 고향을 떠난 태감들이 잠시라도 향수를 달래게 하시고자 하는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그런 휴양을 허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새로이 등극하신 황제께서는 그보다는 번국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함이 더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배려다. 황제의 말을 전하고 있으니, 서담이 하는 말을 도중에 끊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께서는 저를 파견하시며, ‘소중한 번국인 조선에 폐를 끼치지 말고, 피로만 풀고 바로 귀로에 오르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선물도 일체 받아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하로서 황명을 따라야 하기에 어쩔 수 없으니, 부디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자세를 바로하고 황제를 입에 올리면서도 서담은 무희들 쪽을 계속 흘깃거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다.
그래, 이틀밖에 시간이 없다면 그 이틀이라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겠지. 방법은 찾았다.
“알겠소. 그럼 내일은 모화관에서 잔치를 베풀 테니 부디 그 자리에서라도 즐겨 주시오.”
서담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공연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슬쩍 일어나 잠시 뒤로 물러나왔다.
“내관. 장악원에 일러서 지금 칙사가 주목하는 무희를 오늘 밤 차사 침소에 넣도록 하라. 물론 내일 밤에도 보내서 칙사가 출발 전에 충분히 만족하도록 하라.”
까짓 거, 금은보화만 뇌물이냐? 성접대도 뇌물이다. 현대적 관점으로는 분명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지만, 지금은 이런 게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다. 칙사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
이틀 뒤, 그동안 실컷 질펀한 밤을 보낸 서담은 아주 흐뭇한 표정을 하고 북쪽으로 떠났다. 부사인 길시 역시 만만찮게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틀 밤 내내 그의 침소에도 미녀 한 명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영은문 앞에서 두 사람을 환송하는 기분은 정말 더러웠다. 젠장, 환관들이 사신으로 왔을 때는 접대하기 힘은 들어도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는데, 멀쩡한 사내놈들이 오니 이런 짓까지 하게 되는구나. 포주가 된 기분이라 정말 기분이 뭣 같았다.
그래도 서담과 길시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정덕제가 조선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 건 사실인 듯하다. 아마 우리가 바친 총과 니마차 정벌 성과 때문인 모양인데, 규슈에서 거둔 전과를 보고하면 평가가 더 올라갈 거라고 했다.
기쁘면서도 불안한 이야기였다. 우리 군사적 역량을 경계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지만,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는 자기 전장에 끌어낼 궁리를 한다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모아 말하기를 정덕제가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적은 몽골이라고 했다. 하지만 적어도 3년 상을 다 치르기 전에는 먼저 공격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라고도 확인해 주었다,
3년 뒤…그때까지는 몽골에 파견할 수 있을 만한 정예병을 양성해 두어야겠다. 이번까지 세 번이나 전쟁을 치르고 나면 경험 있는 지휘관도 장병도 웬만큼 축적될 테니, 그 정도 병력은 준비할 수 있겠지.
우리 쪽도 피를 흘리지 않으면 명나라 쪽에서도 보다 대등한 관계를 수립해 주지 않겠지. 이미 얻어낸 땅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 희생은 어쩔 수 없다. 몽골인들은 부여주 쪽으로도 약탈을 나오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헛된 희생도 아니다.
하아, 그것도 올해 규슈 원정이 끝난 뒤에 고민할 일이다. 일단은 그쪽에만 신경을 쓰도록 하자. 그러고 보니 그 찌라시 뿌린 놈들은 언제쯤이나 꼬리를 잡을 수 있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