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28
4부 312화(1928화)
4.
김재정의 매일 일과는 한림원에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오전 내내 박규원에게 따로 수업받는다. 점심은 한림원 내부 식당 – 한림원 관원들만 따로 밥을 먹는 전용 식당이 있다 – 에서 먹고, 오후에는 자습한다. 그리고 퇴궐하는 길에 종종 딸을 만난다.
“진실로 제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미주에서는 그래도 양반입네, 사대부입네 하고 살았는데 대학사 영감과 마주 앉아 있으면 제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폐하께서도 늘 말씀하십니다. 아버님께서 이제라도 마음을 바꾸셨으면 된 것이지요.”
동빈 김씨 역시 미주인으로서 부친의 심정에 절절히 공감했다. 그녀 역시도 딱딱한 궁궐 법도에 숨이 막혀 죽을 뻔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너그럽게 봐주는 태황태후의 배려 덕분에 겨우 숨을 쉬고 살 수 있었다.
“아마 중전마마처럼 살라고 했으면 저는 피가 말라 죽었을 겁니다. 중전마마까지 갈 것도 없이 수빈만큼도 못 하겠던걸요.”
김씨와 동갑인 수빈 송씨는 도성 출신이다. 심양에서 태어나 벼슬에 오른 부친을 따라서 이주한 귀비 최씨와도 다른, 진짜 도성 출신 ‘서울내기’다. 그래서인지 셋 중에 중전과 가장 친한 후궁도 같은 도성 출신인 송씨다.
“동빈께서도 황후마마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으시잖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 아버님.”
중전은 김씨의 미주 출신다운 자유분방한 태도를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다. 경망스럽게 굴지 말라고 가끔 주의를 줄 법도 하건만, 간택 때 처음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김씨에게 품행 문제로 뭐라고 하지 않았다. 태황태후도 손자며느리 격인 네 사람에게 언제나 너그러웠고, 주상도 활기찬 게 좋다면서 웃어줄 뿐이니 김씨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다. 그래도 궁궐에서 아무 예법도 안 지키고 살 수는 없는 법이고 보니, 그것만으로도 김씨는 숨이 막혔다.
“중전께서 너그럽게 보아주셔서 잘 지내는 것이지요. 만약 소녀를 계속 작년처럼 엄하게 대하셨다면 아무리 폐하께서 배려하신다고 해도 제가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작년에 엄하게 대했다는 건 김재정의 방문 관련해서 태황에게 청을 올렸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던 그때를 말한다. 그날 이후로 김씨는 중전을 정말로 무서워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중전마마와의 일로 드렸으면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김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부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명 부의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를 자기 아버지가 중전과의 일 로 무슨 할 말이 있다는 말인가?
“한림원에서 들었습니다. 요즘 조정에서 귀비 최씨를 황귀비로 책봉하자는 문제로 논의가 오가고 있다지요.”
“……네. 밉살맞아 죽겠습니다.”
분명 시작할 때는 똑같은 양원이었다. 그런데 먼저 회임했다는 이유만으로 최씨만 품계가 올랐다. 김씨와 송씨가 선시일 때는 혼자 재인이더니 두 사람이 빈일 때 혼자 비가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여전히 빈인데 혼자 귀비가 되고, 이제 황귀비까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좋게 보이겠습니까. 이건 투기가 아닙니다. 부러워서 배가 아픈 거지요.”
다른 사람과의 대화였다면 이렇게까지 속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 김씨와 마주 앉은 사람은 부친이다. 부친 앞에서 무슨 이야기인들 못 하겠는가. 측근 상궁들이라고 해도 혈육만큼 가까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떡하려고 하십니까?”
“소녀에게는 그 일에 끼어들 힘이 없습니다, 아버님. 저 같은게 반대해 봐야 폐하께서는 들은 체도 안 하실 거예요.”
“반대한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찬성하신다면 다를 겁니다.”
“그 들소한테 밟힐 계집애가 황귀비가 되는 데 찬성하라고요?!”
얼결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풀에 놀란 김씨가 자기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고, 김재정이 인상을 썼다.
“목소리가 크십니다. 이 아비가 대궐에 별로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큰소리를 내시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압니다.”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왜 최 귀비가 황귀비가 되도록 도와주라는 거죠? 저는 싫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가. 만약 주상께서 최씨를 황귀비로 올려주시면, 자가께는 아무것도 안 주시겠습니까?”
김재정은 설명했다. 금상은 공평하게 보이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성품이고, 세 후궁에게 고루 정을 주려고 애쓴다고. 그런 사람이라면 최씨에게 황귀비를 책봉한다면 김씨에게도 비 품계 정도는 줄 거라고.
“소인이 본국에 올 때, 도중에 하와국에 들렀었습니다. 그때 하와국왕 전하를 뵙고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요. 폐하의 성품에 관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본래 김재정이 탄 배는 하와국왕을 방문할 예정이 없었다. 하와첨사진에서 식량과 식수, 연료만 보충하고 출항할 예정 이었다. 그런데 김재정이 타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하와국왕이 배를 보내 김재정을 초청했다.
“태원백 그대는 폐하의 장인이시니 마땅히 내 장인처럼 모셔야 마땅할 일이오. 장인께서 내 나라에 오셨는데 어찌 술 한 잔을 드리지 않겠소? 또한 본국에 있을 때 동빈께서 왕비와 친하게 지내주신 바도 있으니, 마땅히 대접해야 할 인연 이오.”
그렇게 해서 김재정은 호송을 담당한 도찰원 도사 최준연과 함께 하와국 왕궁을 찾았다. 그리고 성대한 대접을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자기 사연을 털어놓은 뒤 물어보았다. 주상에게 밉보이지 않고, 자기와 딸의 목숨을 모두 건지려면 어떻게 하는 편이 좋겠느냐고.
“폐하께 잘 보일 방법?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만사를 솔 직히 털어놓으시오. 폐하께서는 거짓말을 무엇보다 싫어하시니까. 그분을 속이려다 들키면 처음에 솔직히 고백했을 때보다 훨씬 큰 횡액을 맞이하게 될 거요.”
김재정의 일에 관해 이미 알고 있던 하진교는 간단하게 조언했다. 절대 잡다한 군소리로 주상을 속이려고 하지 말라고. 그냥 솔직히 털어놓고 납작 엎드리라고.
“그분은 태원백의 심장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분이시오. 십 년 전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만 생각하시고 어설프게 속여넘기려고 하면 불벼락이 떨어지게 될 거요. 홍제원 호랑이 동산에 벌거벗은 채로 던져질지도 모르지.”
호랑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김재정이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 하진교가 크게 웃어젖히더니 한 마디 던졌다.
“농담이오.”
“태도가 짓궂기는 하셨으나, 그 말씀은 진실이었습니다.”
김재정은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주상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한 뒤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주상은 별다른 처벌 없이 그를 용서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런 주상이십니다. 자가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눈 딱 감고 귀비를 황귀비로 올려주시라고 청하십시오. 그러면 폐하께서도 자가를 더 좋게 보실 것이고 은총도 더 많이 내려주실 겁니다. 품계든, 재물이든….”
“그런데 그게 왜 중전마마와 관련된 이야기가 되나요?”
“중전마마께서도 찬성하실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김재정은 정치적인 지식이 미숙해서 이번 사고를 터트렸다. 하지만 시앗 다툼이란 결국 대궐에서든 반가에서든 기생집에서든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없는 법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두고 다투는 여자들이 보이는 모습은 미주에서든, 대궐에 서든 비슷할 터였다.
“중전마마가 반대하시면 속 좁은 여편…아내가 되십니다. 그러니 찬성할 수밖에 없지요. 이럴 때 자가께서 먼저 나서서 폐하께 최씨를 황귀비로 책봉하라고 청하신다면, 중전께선 ‘후궁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폐하께서도 받아들이소서’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중전께서는 최씨가 황귀비가 되는 걸 반기지 않으실 텐데요? 확신할 수 있어요.”
“내심으로는 싫더라도 드러내 반대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아비의 말을 믿어보십시오.”
딸은 믿지 않으려고 하지만, 김재정 나름대로는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익힌 지식이다. 부친의 간곡한 설득을 받고 겨우 마음을 정한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이 자기 침소에 들면 황귀비 책봉 문제를 꺼내 보겠다고 약속했다.
5.
중전이 비단으로 싼 큼직한 꾸러미를 내밀었다. 자신의 ‘십년무자(十年無子)’신세를 중전 앞에서 하소연하던 수빈 송씨가 놀란 눈을 크게 뜨면서 반문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중전마마?”
“순비탕일세. 최 귀비와 동빈을 보며 한참 애가 탈 자네를 위해서 내가 준비했다네. 역시 잉태에는 순비탕만한 약이 없지 않은가.”
세 후궁 중 유일하게 자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송씨다. 혼인하고 12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으면 친정에서라도 순비탕 정도는 지어줄 법한데 송씨의 친정에서는 여태 약을 지어주지 않았다. 이를 알고 있던 중전이 내의원 태의들에게 몸소 약을 주문했다.
“순비탕을 먹으면 딸밖에 못 낳는다는 건 그저 세간에서 오가는 속설일 뿐일세. 순비탕을 먹고 아들을 낳은 이들도 많이 있지. 그러니 수빈도 이 순비탕을 먹고 얼른 용종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네.”
중전이 건네는 부드러운 위로에 송씨의 두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다른 세 사람보다 유독 키가 작아서 혼자 어려 보이는 그녀라서인지 그 눈물도 순수해 보였다. 나이는 그녀 역시 스물셋이나 되는데 말이다.
“아닙니다, 중전마마. 제 처지에 무엇을 가리겠습니까, 딸 이라도 낳을 수만 있다면 기쁘게 낳아야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중전마마….”
송씨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중전이 웃으며 옷고름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그리 우는가. 우리는 같은 지아비를 섬기는 동기간 같은 사이 아닌가? 우리가 서로를 아끼지 않으면 누가 아끼겠는가. 마땅히 남는 것을 서로 나누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어야지. 나는 그러고자 할 뿐이라네.”
중전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웃자 송씨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은 송씨에게 순비탕을 꼭 챙겨 먹으라고 다독이며 돌려보냈다. 약 보따리를 든 나인들이 뒤를 따랐다.
“욕심쟁이 송씨 집안 같으니.”
중전이 혀를 찼다. 아들 낳는 다른 보약은 지어주었다면서 순비탕은 안 지어줬다니, 송씨 집안은 딸이 아들을 배어 일발역전을 이루기를 바라며 순비탕을 안 지어준 게 분명했다. 혹 아이를 배어도 옹주를 낳는다면 다른 후궁을 앞서지 못하니까.
지금 수빈의 상황으로는 아들이 문제가 아니다. 본인이 석녀가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한테는 아들이건 딸이 건 상관없으니 일단 하나 낳고 보는 게 중요하다. 상감께서 고작 자식이 없다고 해서 수빈을 외면할 사람은 아니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가 순비 전하처럼 십년무자로도 주상 폐하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 것도 아니고……’
이렇게 울먹이던 걸 생각하면 참. 어쨌든 수빈은 다루기 쉬운 사람이다. 동빈도 마찬가지다. 미주 출신인지라 망아지 같은 성정을 감추지 못하는 게 문제 라면문제지만, 중전으로서는 동빈이 그런 성품인 게 좋았다. 그따위로 행동하는 이상 후궁에서 동빈이 득세할 날은 죽어도 오지 않을 테니까.
태황태후도, 황태후도 전형적인 사대부 가문 출신들이다. 천방지축인 동빈의 태도를 정말 좋아해서 넘어가 주는 게 아니다. 그저 손자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미주 백성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참아주는 거지. 동빈은 그런 사정을 깨달을 머리도 없는 사람이고. 세 후궁 중 중전이 견제해야 하는 유일한 상대가 귀비 최씨다. 미모도 제일 뛰어날뿐더러 수빈에게 없는 야심이 있고 동빈에게 없는 교양과 참을성이 있다. 이제는 아들까지 있다.
“심지어 내가 내 손으로 날개를 달아주었으니….”
일이 이렇게 번질 줄 알았으면 봉선에 여제관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제안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으리라. 자기가 주상과 같이 봉선에 가고 싶어서 한 제안이었는데 엉뚱하게 최씨 하나만 득을 보았다. 귀비로 책봉됐고 곧 황귀비가 될 판인 데다 아들까지 얻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중전 자신이 수를 잘못 두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어야 하는데 괜히 미련을 가지고 매달리다가 엉뚱한 사람이 과실을 챙겼다. 자신이 상감께 여제관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지 않았으면, 최씨도 도성에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일은 벌어졌다. 북인들은 최씨를 황귀비로 책봉해야 한다고 난리가 났다. 중전의 본가가 속한 동인은 달갑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있고, 서인은 자기들끼리 패가 갈려 황귀비 책봉이 필요하다, 필요 없다 하면서 다투고 있다. 남인은 한발 물러나서 방관하는 중이다. 어차피 권력 중심에서 언제나 한참 떨어져 있는 자기네 당여와는 상관없는 문제라는 태도다. 중추원에서는 반대 의견이 대세다. 이쪽에서는 여태 살아서 황귀비가 된 후궁의 전례가 하나도 없었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기반이 부실한 주장인지라 설득력이 약하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찬성하는 수밖에. 조모님도 그리 말씀 하시니…”
조모 신혜옹주도 늙었다. 이제는 대궐 출입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방에 누워서 지내는 신세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달에 병문안을 갔을 때도 중전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조언했다.
‘늘 이기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마마. 가끔은 양보하는 시늉도 하셔야 합니다. 그게 지금 손해처럼 느껴지더라도 종국에는 마마에게 유리한 결과로 돌아올 겁니다.”
최씨를 봉선과 북순에 따라가게 한 일도 마찬가지다. 최씨에게 날개를 달아주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봉선과 북순이 더 잘 진행되고 주상이 자신에게 크게 고마워한 것도 사실이다.
“조모님 말씀대로 내게 유리해지기는 했지. 최귀비에게 아들이 생긴 것만 빼면.”
최씨가 낳은 아들, 황자 목이 과연 어떤 자질을 품고 있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가 만에 하나라도 보위에 손을 뻗치는 상황을 막으려면 중전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적자를 더 생산해야 한다. 만약 원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 자리를 바로 채울 수 있도록. 중전은 조용히 머릿속에서 계획을 정리했다. 중전은 절대 자기가 계획한 바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게 누구 손에 들어갈지 어떻게 알고 그런 부주의한 짓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