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37
4부 321화(19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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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조모가 기력이 쇠하여 대궐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도 1년이 넘었다. 올해 봄부터는 대궐 정원에 나가는 것도 힘겨워 해서 자주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매일 문안드릴 때 보면 정신은 맑고 판단도 명확해서 아직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무슨…….
“태황태후께서 흉사(事)를 당하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한양에서 온 급보를 들었을 때 내가 타고 있던 말은 마침 부케팔로스였다. 선황이 황태자 책봉 기념으로 선물한 말, 도성 최고의 명마 소리를 듣는 한혈마.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뒤꿈치로 옆구리를 걷어찼다. 호위고 뭐고 미친 듯이 달렸다. 내가 질주하는 기세 그대로 대궐 정문에 뛰어들었을 때, 뒤처지지 않고 내 뒤를 따르는 호위 병은 친위대 소속 오도리 기병 다섯뿐이었다.
“할마마마!”
대비전으로 들어가는 현관 앞까지 말을 타고 달려드는 게 무례한 짓인 줄은 안다. 하지만 법도대로 궁문에서 말을 내려 차분하게 걸어갈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으니까.
“폐하!”
“이러시면 아, 안 되십니다!”
이성이 회복된 건 현관 안쪽까지 뛰어들 기세인 부케팔로스를 가로막느라 얼굴이 파랗게 물든 태황태후전 궁인들의 얼굴을 보고 난 뒤였다. 급히 고삐를 잡아당기자 부케팔로스가 울부짖으면서 두 발로 섰다. 허공을 휘젓는 앞발에 하마 터면 가로막던 내관이 맞을 뻔했다.
“폐하, 폐하!”
“오, 중전!”
부케팔로스의 안장에서 뛰어내리자, 앞에 중전의 모습이 보였다. 고삐를 뒤따라온 오도리 군관에게 던져준 뒤 급히 중전의 손을 잡았다.
“할마마마께서는? 할마마마의 용태는 어떠시오?”
“아직은…아직은 괜찮으십니다. 그러니 부디 진정하십시오.”
그제야 겨우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발걸음으로 현관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중전이 아무 말 없이 옆에 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할마마마, 소손이 왔습니다. 눈을 뜨시옵소서!”
“…주상?”
누워 있던 조모가 눈을 떴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 할미는 아직 안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크게 고함 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마마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오는 도중에 중전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점심을 드시고 모처럼 바깥에 나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궁인들이 모시고 나가다가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태의들이 진맥한 바로는, 연로 하신 탓에 풍을 맞으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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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모는 평소 섭생에 신경을 쓴 편이었다. 늘 소식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조금이라도 걸으면서 체력을 유지하고 황실 내에서 전해지는 체조와 안마 – 전부 상빈 시절의 상희가 만든 – 로 몸을 단련하고는 했다. 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다. 일흔을 넘기면서 조모의 체력은 급격하게 약해졌고 급기야 이런 날이 오고 말았다.
“몸이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주상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으니 답답하군요.”
“좀 쉬시면 쾌차하실 것이옵니다. 저는 또 할마마마께서 돌아가신 줄만 알았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군요.”
“그러게요. 이 할미가 어찌 주상을, 원자를 두고 가겠습니까.”
조모가 슬며시 웃었다. 나도 마주 웃으면서 주름진,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보이는 조모의 손을 잡아 내 뺨에 갖다 댔다. 부드럽고 따뜻한, 사고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던 나를 부드럽게 안아 달래주던 그 손이 닿자, 나도 모르 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상, 왜 우십니까. 이 할미는 괜찮다니까요.”
“예, 압니다. 예, 할마마마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나를, 중전이 말없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26.
당연한 소리지만 조모의 용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내의원 태의들의 침도 탕약도 효과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알 수 있었다. 내가 상희가 아니라서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지만, 조모는 아마도 뇌경색에 걸린 듯했다.
‘언어 중추에는 영향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몸은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감각이 살아있고 대화는 나눌 수 있다. 옆에서 일으키면 앉아 있는 정도는 할 수 있다. 누가 먹여주기만 하면 식사도 할 수 있다. 몸이 굳지 않도록 궁인들이 붙어 열심히 팔다리를 주무르고 접었다 펴면서 운동을 시켰다. 하지만 조모는 일어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원체 나이가 들어 그만큼 기력이 약해졌고, 같은 병을 앓아도 젊은이만큼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이러다 2차 발작이 오면 아마도 끝이 되리라.
“최선을 다해 모셔라. 태황태후께서는 내 조모님이시다.”
예전 생 같았으면…할마마마께 흉사가 닥치면 태의들을 모조리 전부 유배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위협은 아무 의미가 없다. MRI는커녕 뇌수술도 못 하고, 혈전용해제 같은 약도 없는 시대에 의원들을 족쳐 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조용히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만 했다. 그리고 조모의 손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자주 찾아가고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음을 입에 넣어드렸다. 9년 전에 조부가 세상을 떴을 때 미처 하지 못해서 아쉬웠던 모든 일들을 했다.
“주상. 나랏일이 바쁘실 텐데 자꾸 찾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효야말로 세상의 근본이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할마마마 아니면 누구한테 와서 응석을 부리겠습니까. 제게는 할마마마뿐이십니다.”
내 진짜 나이는 조모의 두 배쯤 되겠지. 그래도 살다 보면 가끔은 누구한테 기대고 싶고 응석도 부리고 싶다. 그리고 내가 기대고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조모뿐이다. 태후는 계모고 생모 순원황후는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니 그 외에 누가 있겠는가.
어쩌면 순원황후 김씨는 살아있었더라도 딱히 응석을 부릴 상대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선황이 태자답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호되게 질책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면 나나 운이를 대할 때도 무척 엄했을지 모르지. 하지만 할머니는 다르다. 아무리 엄한 할머니라도 손자에게는 너그럽게 마련이다. 조모는 내게 늘 너그러웠다. 이야기도 안 하고 비행선을 탔을 때만 빼고. 물론 이야기부터 했으면 못 타게 했겠지만.
“이리 말하면 안 되는 줄 압니다만, 주상이 이리 자주 찾아 주니 좋기는 좋습니다.”
조모가 세운 이화학당에서 온 학생 대표들이 병문안을 다녀간 날이었다. 조모가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이 늙은 몸을 보살피느라 바쁜 국사를 미루게 해서 미안합니다, 주상.”
“아닙니다, 할마마마. 강무도 끝났고, 겨울이라 그리 급한 일도 없습니다.”
“세밑인데 급한 일이 없을 리 있습니까. 이 할미도 그 정도는 압니다.”
조모가 누운 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잠시 망설였다. 아마 어려운 부탁이 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주상, 이 추위에 무리인 줄은 압니다만….”
“말씀만 하시옵소서. 산중에 들어가 산딸기라도 따오겠습니다.”
결연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조모는 밝게 웃을 뿐이었다.
“주상. 농담은 좀 더 재미있는 표정으로 하셔야지요. 딸기라면 사포서 토실에 가면 바로 딸 수 있는데 산에는 왜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소손도 말로만이라도 이야기 속에 나오는 효자가 되어보고 싶었사옵니다.”
흔한 이야기 아닌가. 병든 어머니를 위해 한겨울에 산딸기를 따러 산에 올라갔다가 선계 사람 같은 귀한 인연을 만나 복을 받는 효자 이야기. 조모도 이를 알고 있기에 웃으면서 내 농담을 받아준 거고. 덕분에 분위기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 조모도 더 망설이지 않고 원하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창덕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제야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경희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창덕궁으로 가게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창덕궁, 한양에 있는 여러 궁궐 중 가장 넓고 아늑한 궁궐. 경복궁은 성리학적인 법도에 맞춰 격식대로 지어 답답한 면이 있고 경희궁은 과시용으로 크고 화려하게 서양식으로 지은 탓에 기본적인 구조가 불편한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3층씩 올라가야 하는 계단 같은 거. 전통 한옥에는 그런 거 없지 않은가.
“그때, 주상이 태어났을 때 머물던 궁전이 바로 창덕궁이 었지요. 폐하와 함께 주상을 안고 기뻐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조모가 ‘폐하’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조부뿐이다. 선황을 지칭할 때는 그냥 ‘선황’이라고만 한다. 조모는 창덕궁에서 조부와 함께 보낸 세월을 계속 이야기하며 그리움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습니까, 주상. 이 할미가 창덕궁에 가서 지내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할마마마. 당장 궁인들에게 채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지금은 한겨울이다. 며칠에 한 번꼴로 눈발이 날린다. 하지만 봄이 오면 창덕궁에 가자고 조모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조모가 곧 죽음을 맞이할 자신을 위로하려고, 눈을 감을 장소를 찾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27.
“폐하, 한겨울에 이어하는 것은 무리니 봄이 오면 옮기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태황태후께서 창덕궁을 원하시니 도리가 없다. 다만 겨울인 것은 맞으니 옮기는 인원과 짐은 최소한으로 하겠다. 나머지는 봄이 오면 마저 옮기도록 하라.”
어소(御所)를 창덕궁으로 옮기겠다고 결정하고 보니 문득 후회하는 감정이 들었다. 겨울 전에 내가 이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현실이 되다니.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했다면 조모에게도 이런 일이 안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설마… 내가 원숭이 손에 소원을 빈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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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들어주되 이상하게 들어준다는 원숭이 손 이야기는 예전 생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이쪽으로 넘어온 뒤에도 이런저런 민담 같은 걸로 여러 번 접했고. 하지만 이번 이어가 내 소원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세상이 무슨 소설도 아니고 내가 소원을 빈다고, 아니 소원을 빈 것도 아니고 희망사항 하나 정도 내밀었다고 조모를 앓게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이어하는 날은 눈보라가 날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주 든든한 마차를 만들고 모피로 안팎을 둘러싸서 추위를 막았다. 중전과 태후는 태황태후의 마차에 동승했으나 나는 일부러 마차 대신 부케팔로스를 타고 조모가 탄 마차 옆에서 수행했다.
“폐하, 따뜻하게 마차를 타시지요.”
“되었다. 밖에서 태황태후 마마를 모시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짐이 추위를 겪을까 염려가 된다면 길을 정비하여 빨리 움직이도록 하라.”
용산로와 남대문로, 태평로를 지나 창덕궁까지 가는 길은 대략 30리쯤 된다. 말로 빨리 달리면 15분이면 충분하지만, 조모가 마차를 타고 가야 하니 천천히 간다. 도로를 말끔하게 비워놓게 했으니 1시간이면 되겠지.
“가자.”
“예, 폐하.”
눈발이 날렸지만, 초피(貂皮)로 만든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니 까딱도 없었다. 겨울에는 역시 질 좋은 모피가 최고로구나.
조모는 창덕궁에 돌아와서 기쁘다며, 역시 여기가 진짜 궁궐이라고 했다. 다행히 도중에 추위가 들지는 않았는지,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에도 조모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궁으로 옮긴 덕분에 도리어 기력이 더 좋아진 듯했다.
“고맙습니다, 주상.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할마마마. 당연한 일입니다.”
12년 만에 돌아온 탓인지 나는 적응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12년 전에도 나만은 창덕궁 생활을 거의 안 했으니 말이다. 조부가 선황과 마주치지 않게 해준다고 창경궁에 다 보내버렸었으니까. 하지만 말이 좋아서 다른 궁궐이지, 내가 지내던 경희궁 통명전과 조부의 침전인 창덕궁 희정당 사이에는 담장 하나 뿐이고 거리는 고작 걸어서 3분이었다. 통명전이 선황의 처소인 낙선당보다 도리어 희정당에서 가까웠다. 내가 태손궁으로 쓰던 창경궁은 지금은 선황의 비빈들과 그 소생들로 가득하다. 내년부터 슬슬 혼처를 찾아 하나씩 내보내야지.
급하게 이어한 뒤에도 대궐 살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중전은 처음 살아보는 창덕궁 생활이면서도 능숙하게 만사를 처리했다. 낯선 궁궐에서 수시로 어리둥절해하는 세 후궁과 대비되는 그 모습을 보니 신혜옹주가 창덕궁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조언해줬나 싶었다. 창덕궁에서 설날을 보내고, 대보름도 보냈다. 새해맞이로 조정에서도 바쁜 일이 많아지다 보니 조모를 찾을 여유도 줄?어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짬을 내려고 했지만, 하루를 걸렀다.
“오셨습니까, 주상.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
하루 만에 나를 보는 조모의 목소리가 밝았다. 노골적으로 내색하지 않아도 조모가 무척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상, 이 할미의 손을 좀 잡아주시겠습니까.”
“예, 할마마마.”
조모의 부드럽고 포근하던 품이 생각났다. 그 끔찍했던 마차 사고를 겪은 후, 1년 가까이 나를 안아서 재운 품이다. 조모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번 생에서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했을 거다.
“주상. 폐하께서 가장 슬퍼하셨던 게 마지막에 주상을 보지 못하고 떠나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할미는 그러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봄이 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후원에도 나가셔야지요. 이 창덕궁의 후원을 즐기러 여기 오신 게 아닙니까.”
애써 웃었다. 엄습하는 불안감을 쫓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알 수 있었다. 이제 조모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있음을. 뇌경색과 노환에서 비롯된 죽음이 코앞에 닥쳤음을.
“주상, 성군이 되세요. 이 나라의 사직이 주상의 어깨에 올려져 있음을 잊지 마시고 일개 범부(凡夫)처럼 행동하지 마 세요. 이 할미가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입니다.”
“예, 할마마마….”
“그거면 되었습니다. 주상은 잘하고 계시니까요.”
조모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겠습니다. 주상, 이 할미의 손을 좀 잡아주겠습니까?”
“예, 할마마마.”
조심스럽게 조모의 손을 잡았다. 조모는 금방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약 30분 가까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던 숨소리가 차츰 간격이 벌어지더니 완전히 멈추었다.
“할마마마…?”
떨리는 손으로 맥을 짚어보았지만 전혀 뛰지 않았다. 몸은 아직 따뜻했지만 숨은 완전히 멈추었다. 조모는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난 뒤였다. 입이 열렸지만 거기서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폐부를 찢어내는 듯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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