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45
4부 329화(1945화)
16.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임금을 만나고 싶다고 알현 신청을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사관을 설치하고 정식으로 외교를 시작한 이후로는 그런 사례는 거의 없어졌다. 외국과의 접촉 자체가 대부분 정식 외교 계통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알현 신청을 하는 여행자들이 요즘도 가끔 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방문객은 전부 자국 공사관 선에서 알아서 막힌다. 개중에 공사관이 없는 나라 출신 여행자들이 와서 알현을 신청할 때도 있지만, 그건 내직사 선에서 정리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특별한 예외였다. 아무 직함도 없는 일반인인데도 프랑스 공사관에서 털어내지 않고 알현 신청을 넣어준 거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름을 본 순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놈, 나폴레옹 3세잖아?
‘분명히 누벨 프랑스 후계 구도에서 탈락한 뒤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집안 망신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나폴레옹은 내게 자기 조카가 얼마나 무능한지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벌리지는 않았다. 그저 아칸소 대공의 아들이 잠시 곁에 머물다가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적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나폴레옹 3세의 능력을 모를 수 있겠는가. 그 양반이 원래 역사에서 저지른 숱한 뻘짓을 뻔히 아는데.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상한 점. 내가 제물포에서 하진교를 환송하면서 본 프랑스 상선에 타고 온 거야 뭐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알현 신청이 누벨 프랑스 공사관이 아니라 프랑스 공사관에서 들어왔다? 이거, 지금 나폴레옹 3세가 루이 19세 편이라는 뜻이잖아?
나폴레옹 3세가 백부 편에 있다면 알현 신청도 당연히 마르슬랭 자작을 통해 올라왔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 공사 루아젤 남작이 나한테 알현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건 이놈이 국왕 편에 붙었다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다. 이 인간, 설마 백부한테 축객령을 당했다고 자기 가문 원수인 부르봉 왕가에 붙은 거야?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더니,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부르봉 왕가 편에 붙을 수 있는 거지.
‘재미있네, 이 상황.’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과연 희대의 영웅인 백부를 버리고 원수 편에 붙은 이 못난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원하던 황태자 책봉을 못 받아서 홧김에 저지르고 본 걸까? 아니다. 다른 가능성도 있겠다. 어쩌면 혹시 나폴레옹의 밀명을 받고 이중첩자로 파리에 잠입하기라도 했나? 나폴레 옹의 파리 귀환을 위해서 프랑스를 내부에서 뒤흔들라는 지시를 받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꿍꿍이가 있을 공산은 커 보인다. 내가 기억하기로 나폴레옹 3세는 군재는 분명히 없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역량 자체는 또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법 인기도 얻었고.
이놈이 정말 철저하게 무능했으면 제2제정을 수립할 수도 없었고, 그전에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도 없었다. 그 양반도 어느 정도 능력은 있다. 세상을 휩쓴 천재였던 백부하고 하도 비교가 돼서 그렇지.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 3세는 자기 나름대로는 다 계획이 있는 걸까? 궁금하네?
“알현 신청을 받아들이겠다. 신불랑 황제의 조카 아니냐? 신불랑이 아닌 불랑국 본국에서 왔다고 하지만, 그거야 사정 이 있겠지. 답장을 공사관으로 보내 입궁하라 이르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봐야겠다. 설마 백부가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졌다며, 제위를 손에 넣으려면 누벨 프랑스로 직접 진격하는 방법밖에는 없으니, 병사를 빌려달라거나 하는 종류의 개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아, 그리고 앞으로는 그냥 ‘나삼’이라고만 불러야겠다. 나폴레옹 3세라고 계속 부르려니 은근히 길고 귀찮다. 그리고 나삼이라고 하니 어째 우리말로 ‘춘삼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서 더 정감이 가잖아.
17.
태평양을 지배하는 대제국, 한국이 가진 부에 관해서는 이미 익히 들었다. 백부의 황궁과 팔레루아얄에 장식된 갖가지 한국제 장식품이나 가구만 보아도 한국인들이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부유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와서 보며 받는 인상은 또 달랐다. 항구는 각 국에서 몰려온 배들로 가득하고 도시에는 포장된 도로 위를 수레가 가득 메웠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도 아직 시내 도로가 포장되지 않은 도시가 흔한데 말이다.
“저 가로등은 혹시 가스등이오?”
“그렇습니다.”
프랑스 공사관에서 안내역으로 붙여준 올리비에라는 서기관은 충실한 왕당파였다. 그래서 샤를 루이를 사뭇 의심스럽다는 태도로 대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현재는 공식적으로 백부와 거리를 두고 국왕 편에 선 상태이므로 노골적으로 경계하지는 않았다.
“한성은 파리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번영하는 도시입니다. 가스등도 이미 몇십 년 전에 들어왔고, 모든 대로가 포장 되어 있습니다. 또한 도시 전체에 우리 프랑스 왕실과의 인연이 묻어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왕실과의 인연?”
“오시는 도중에 보셨을 유럽식 궁전은 루브르를 본떠 세웠지요. 그리고 도성 서쪽에 있는 노트르담 드 한성은 무려 240년 전에 앙리 4세께서 파견하신 건축가들이 세운 성당입니다. 그 주변에는 그때 이주한 기술자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혁명 소동에 휘말려 탈출한 귀족들도 소수지만 정착했다. 개중에는 왕정복고의 소식을 듣고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한 이들도 있지만, 기왕 자리를 잡았으니 계속 눌러 앉아 사는 이들도 상당수다. 개중에는 한국인 아내를 얻은 이들도 많다. 외교관과 학자들이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건 너무도 당연해서 강조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군대 내에도 친프랑스파 인맥이 확고하다.
?
“한국군 총사령부에는 프랑스인 고문관이 다섯 명이나 있어서 한국군을 프랑스 방식으로 훈련하고 있습니다. 단, 국왕 폐하의 충신들이 아니라 반역자의 옛 수하들이라는 점이 조금 유감스럽지만….”
그래도 그 프랑스인 고문관들은 프랑스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원하기만 하면 바로 누벨 프랑스 국적으로 갈아탈 수 있는데도 안 바꾸는 걸 보면, 과거에 반역자의 군대에 복무했던 건 그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렸을 뿐임을 알 수 있다.
“그쯤은 상관없지 않소? 백부 – 인간으로서의 도리상, 백부라고 칭할 수밖에 없음은 부디 이해해 주시오 – 에게 원수장(元帥仗)을 받은 장군들 절반이 루이 18세께 충성을 맹세을 한 전례도 있으니.”
샤를 루이는 자신도 그들과 비슷한 전향자임을 피력했다. 나폴레옹과 가까운 이들도 많은 수가 부르봉 왕가 편에 섰음을 언급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 역시 루이 19세에게 충성할 의사가 있다고 드러내는 수법이었다. 그리고 통했다. 올리비에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요즘 프로이센 공사관 주재무관이 임금을 자주 면회하고, 총사령부에도 자주 드나들고 있지만 우리 프랑스인 고문관들의 영향력은 여전합니다. 전 유럽을 누비며 경험을 쌓은 노장들이고, 한국에 20년을 머무르면서 쌓아온 인맥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실전 경험도 없는 애송이 프로이센인 따위에게 질리 없다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서기관 본인도 왕당파지만 나폴레옹 전쟁 끝자락에 참전한 노병 출신이라, 더더욱 프로이센 애송이 장교 따위는 가볍게 보고 있었다.
?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미국….. 다들 한국과 조금이라도 관계를 진전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중 우리 프랑스보다 앞서 나가는 나라는 없습니다. 유럽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는 우리 프랑스입니다.”
한국의 중흥군주, 기사왕은 루이 14세를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스승처럼 숭배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당시에 어떻게 양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을 상대로 싸웠겠는가.
“유럽에서의 전쟁이었습니다. 한국은 전혀 끼어들 필요가 없었죠. 그런데도 우리와 함께 싸워주었습니다. 유럽에 나라는 많지만, 그중 한국과 동맹을 맺고 함께 싸워본 나라는 우리 프랑스 하나뿐입니다.”
“지난 대전쟁 때 한국 임금인 고래왕은 우리 쪽에 포를 겨누지 않았소? 연합군에 대량의 무기까지 제공하고.”
“그거야 반역자를 상대하기 위해서였지요. 고래왕은 언제나 우리 왕실에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루이 18세께서 귀환하시자마자 바로 선물을 보내실 정도로요.”
현 임금의 조부인 선선대 임금이 ‘고래왕’이라고 불리는 건 그가 바로 북태평양에서 유럽 포경선들이 조업하지 못하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한 성향인 인사들이 많은 프랑스에서도 포경업자들은 그를 싫어한다.
“임금 앞에 나가면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하십시오. 그분은 프랑스어가 유창하고 유럽식 예절에도 익숙합니다. 젊지만 박식하기 그지없지요. 혹시 실수라도 범하면 큰일이니 주의를 잊지 마십시오.”
“알겠소.”
?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마차가 ‘창덕궁’이라고 하는 궁궐 정문에 도착했다. 마차를 탄 채 궁궐로 들어가는 건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특혜였으므로,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내려서 보니 왕궁은 궁궐(팔레)이라기보다 성(샤토)에 가 까워 보였다. 두껍게 쌓은 벽돌 성벽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 는데 그 높이는 4.5m가량 되었고, 궁궐 정문도 요새화된 상태로 엄중히 경비하고 있었다. 시내를 둘러싸는 성벽에 있는 옛 관문과 크기가 비슷할 정도였다.
“기사왕이 즉위하기 직전에 그 이복형제인 대공이 쿠데타를 시도했는데, 이 성벽을 넘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반란군이 궁궐을 점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기사왕이 진압군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파했고요. 그 공으로 형에게 제위를 물려받았지요.”
약간 와전되었으나 실제 역사적 사실과 아주 다르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듣고 있는 샤를 루이는 그 차이를 알 만큼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쪽이든 막는 쪽이든, 방비를 굳힌 요새지를 점거하는 건 아주 중요하다는 것.
“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임금께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궁문 안에서 나온 한국인 관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짐마차에 따로 싣고 온 선물들이 뒤를 따랐다. 궁궐 정문은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흰담비 가죽 모자를 쓰고, 착검한 소총을 든 백인이나 흑인 혼혈로 보이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통과해서 궁궐 안으로 들어가자 생전 처음 보는 별천지가 펼쳐졌다.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이국적인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과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궁인들을 보며, 샤를 루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임금 앞에서 잘만 행동하면 이 모든 게 자기에게 우호적인 자산이 될 테니까.
18.
방해 없이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명분으로 서기관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옆에 국왕의 충성스러운 수족이 감시하고 있어서야 나삼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독대한다고 해서 자기가 꾸민 계획을 몽땅 실토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자기 옆에 올리비에가 함께 있으면 그만큼 더 조심할 건 분명하다. 루이 19세에게 충성하는 척 열심히 주워섬기느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 하겠지.
그래서 혼자 들어오도록 했다. 짐을 운반하는 시종들이야 이런 자리에서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니까 함께 들어와도 상관없는 거고.
“태평양의 지배자이신 대한의 임금께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소.”
자기소개와 의례적인 안부 인사가 오가고 선물이 놓였다. 내관을 시켜서 상자를 열어보니 내용물이 꽤 호화스러웠다. 나삼, 의외로 수완이 좋은 모양이다. 파리에서 괜찮은 파트?롱을 잡은 모양이지. 아니면 부친인 아칸소 대공 루이가 아직도 생활비를 대주고 있거나.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의문을 품은 건 나삼이 자신을 ‘메스칼레로 백작’이라고 소개한 부분이었다. 나폴레옹한테, 나삼한테 작위를 줬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메스칼레로라면 아파치 지파가 아닌가. 그곳 백작으로 봉해지다니, 메스칼레로 기병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받기라도 한 건가.”
“네. 하지만 실제 연대를 지휘해 보지는 못했지요. 백부께서는 명예연대장이라는 명목으로 제게 백작 작위만 주셨습니다.”
살짝 혼란스럽네. 나폴레옹이 나삼을 유럽으로 쫓아내기 전에 선심 쓰듯이 백작위 하나쯤 던져줬을 수도 있기는 하니까. 누벨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새로 임명한 남작, 자작, 백작이 수천 명은 된다는 걸 생각하면 나삼한테도 작위 하나쯤 줬을 법도 하기는 하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백부의 나라가 아니라 유럽 본국에서 왔는가? 심지어 짐을 알현하는 신청도 본국 공사관을 통해서 넣고?”
누벨 프랑스인들, 특히 프랑스계 주민들은 여전히 유럽에 있는 프랑스 본국을 본국으로 부른다. 그 나라가 ‘누벨’ 프랑스인 이상 그건 어쩔 수가 없다. 고향에 대한 애착은 부르봉 왕가에 대한 적대감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탓이다. 이게 중요한 건 나삼은 지금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 아니, 어느 편으로 보이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걸려 있어서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내 대응도, 나삼의 쓸모도 달라진다.
?
“그야 당연히 제 백부이신 황제 폐하의 편이지요. 폐하께서는 제게 먼저 본국으로 돌아가 장차 귀환하실 발판을 닦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파리야말로 진정한 프랑스의 수도고, 파리가 곧 프랑스 아니겠습니까.”
“대외적으로는 루이 19세를 따르는 척하면서 실상은 내부에서 배반할 준비를 하겠다는 건가.”
“배반이 아닙니다. 저는 오직 누벨 오를레앙에 계시는 백부께 충성을 바치니까요. 그분을 위해서 하는 일이 어찌 배반이겠습니까.”
나삼의 얼굴에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지금 제가 하 는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그대로 믿기에는 내가 너무 오래 살았고 너무 많은 사람을 관찰했다. 저거,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