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5
1부 195화
– 17 –
“전부 해서 열 사람을 보냈는데, 네 명만 돌아왔단 말인가.”
“예, 대감.”
유순정은 안쓰러운 감정을 담아 혀를 찼다. 4개월 가까이 산중을 숨어 다니면서, 동료까지 넷이나 잃었으니 그 고초가 오죽할까 싶었다.
“그래, 그대들 각자 부하를 얼마씩 잃었는가?”
주상은 분명히 명령을 내려 두었다. 두 형제가 파견한 첩자들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돌아왔는지, 그리고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세심하게 적어서 올리라고 말이다.
“소관이 둘, 아우가 넷을 잃었습니다.”
종성순이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이번 작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수를 보면 종성순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셈이다. 종성가가 보낸 대원들 중에는 단 한 명만 살아서 돌아왔으니까.
임금이 무슨 생각으로 두 형제가 거둔 성과를 비교하라는 명령을 내렸는지 유순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눈앞에 선 첩자 네 명과 종성순, 종성가 형제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생이 많았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수천이나 되는 적이 우글거리는 섬에서 여러 달 동안 밀행을 했으니 어찌 그 일이 쉬웠겠는가.”
지협을 중심으로 해서 섬 북부에는 종성순, 남부에는 종성가가 각각 부하들을 보내게 했다. 누가 어느 쪽을 정탐할지는 제비를 뽑아 결정하려고 했는데 종성순이 먼저 나서서는 북부를 택했다.
“훨씬 넓은 곳이니, 더 탐색이 힘들 것입니다. 제 수하들이 잘 해내리라 생각합니다.”
종성가는 별 말 없이 양보했다. 사실 수도 이즈하라와 주요 항구가 남부에 있으니만큼 보다 중요한 방면이 남쪽임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종성순이 북방을 택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탐색해 보니 섬 북방에는 소이전의 군사 1천 명이 있었습니다. 식량과 무기는 상당한 양을 비축했으며, 적어도 석 달 정도는 농성하며 싸울 수 있을 양입니다. 해안에 있는 각 포구에는 목책을 쌓아 배를 대기 힘들게 했고, 산중에도 든든한 성책을 만들고 군사를 두었습니다.”
종성순은 정탐한 내용을 보고하면서 왜군이 진을 친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함께 제출했다. 지도에는 왜군이 진을 친 주요 포구, 산중에 구축한 성채 위치 하나하나가 모두 나와 있었다.
“수군은 없었느냐?”
“수군이 집결한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작은 전선 1백여 척이 여러 포구에 나뉘어 숨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아군이 방심하고 지나가면 뛰쳐나와 기습할 심산이 아닐까 합니다.”
대마도 북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지는 없되 그 넓이가 무척 넓다. 유순정도 남부를 우선 공략하고 북부는 방치한 채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적이 섬 북부에 거점을 두고 남쪽에 있는 아군을 계속 괴롭히려든다면, 토벌할 수밖에 없게 된다.
비록 수가 많지 않은 적이라도 험한 지형을 무기로 삼아 신출귀몰한다면 쉽게 잡기 힘들다. 물론 이쪽에는 대마도 토박이 출신인 왜인병 1천이 있으니, 그 점에서는 소이전의 군사들보다 훨씬 유리하긴 하다.
“돌아오지 못한 대원 두 명은 어찌 그리 되었느냐.”
“하나는 적이 구축한 성채에 들어가려다가 파수병에게 들켜 활을 맞아 즉사하였고, 하나는 포구에서 적선 숫자를 세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도망칠 수 없자 목을 그었나이다. 모두 당당히 최후를 마쳤사옵니다.”
“장하도다.”
칭찬을 받은 종성순은 입가에 약간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치하를 마친 유순정이 이제 종성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별장 종성가에게도 위로를 전하노라. 그대 수하들 중에는 하나밖에 돌아오지 못하다니, 그대들이 가진 힘을 초과하는 임무였나 보구나.”
지난 신유년 때 사례도 있으니만큼 조선군이 아무래도 남부를 먼저 치리라는 점은 적에게도 명확했을 터, 방비도 철저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유순정 자신이 대마도 남부에서 요소가 될 곳은 전부 가보았고, 적이 어디를 지키고 있을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수하도 모두 잃었건만 대감께서 격려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종성가는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시종일관 태연한 표정에 차분한 음성을 유지하던 종성순과 달리 목소리가 떨렸다. 약간 울음기까지 맺힌 기색이었다.
“섬 남방에는 적 2천이 있었습니다. 주력은 도주의 성관이 있는 엄원(?原, 이즈하라) 고을 일대에 집중해 있으나 나머지는 전역에 골고루 흩어져 있으며, 작은 산채 수십 개를 만들어 각 산채에 병사 수십 명을 두었습니다.”
“성책은 든든히 만들었는가?”
“아닙니다. 두 시진이면 만들만큼 허술합니다. 다만 그런 것이 섬 전체에 수백이나 흩어져 있어, 진짜 적이 매복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번거롭게 했습니다.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기는 했으나, 그사이 또 많이 만들었을 것이기에 큰 의미는 없을 것이옵니다.”
“어쩔 수 없겠지.”
종성순의 보고로 볼 때 섬 북부에 있는 왜군은 강력한 요새를 십여 개소 구축하여 방어를 집중하고 있었다. 다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형을 골라서 세운 탓으로 공격하기에는 난관이 많을 게 분명했다.
남쪽에 있는 자들은 그와 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북쪽에 있는 왜군을 공격하는 일이 곰이 사는 동굴을 찾아 곰을 잡는 곰사냥이라면, 남쪽에 있는 왜군을 소탕하는 일은 출구가 수없이 뚫린 쥐구멍에서 쥐를 소탕하는 쥐잡이와 같았다.
“전선은 작은 소선 2백여 척을 요소요소에 숨겨두었습니다. 역시 현황을 파악해 오기는 하였으나, 무슨 생각인지 매일 포구를 옮기며 배를 숨기고 있어 우리 군사가 치러 갈 때쯤이면 또 숨은 장소가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자를 보내 정탐하고 있음을 눈치 채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네 수하들 중 넷이나 돌아오지 못했으니, 혹시 그중 한둘이 붙잡혀 우리 사정을 실토한 게 아니냐?”
이쪽은 대원을 넷이나 잃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종성가가 대답하기에 앞서 한숨을 쉬었다.
“대감께서 의심하시는 바도 당연합니다. 허나 제 수하들은 지난 넉 달 동안 대마도 남부를 누비고 다니면서도 단 한 명도 적에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럼 대원 네 명은 어떻게 잃었단 말인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유순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종성순 역시 움찔했다.
“소관이 파견한 대원들은 넉 달 동안 섬 남부에서 적의 방비태세를 탐색했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복귀하려던 참에, 산중에 숨어 있는 대마도 백성들을 마주치게 되었사옵니다. 노인과 아녀자가 섞인, 스무 명 남짓한 무리였습니다.”
“대마도 백성들은 모두 구주로 끌려갔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헌데 산중에 숨어 겨울을 버티며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사옵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대마도 백성들이 배를 타고 도망쳐서 동래를 향해 왔다. 유순정은 이들 피난민들이 한 진술을 통해 적이 대마도 백성들을 구주로 끌어가고 있음도, 그리고 일부 이를 피해서 숨어있는 이들이 있음도 알고 있었다.
“적을 피해 숨어 있은 지 수개월, 양식도 다 떨어지고 구원받을 희망도 없던 그 백성들은 끝이 없는 고난에 슬퍼하다가 소관이 보낸 대원들을 만나 빌었사옵니다. 제발 데려가 달라고, 살려달라고 오열하는 동포들을 어찌 버릴 수 있겠나이까.”
종성가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주변을 채운 장수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저희 대원들은 동포들을 동래로 데려오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허나 숨겨둔 배를 이용해 돌아오자니 고작해야 너덧 명 정도나 더 태울 수 있겠기에, 어쩔 수 없이 적의 배를 훔치기로 마음먹고 포구로 내려갔습니다.”
주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끼어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망을 보는 적병을 단칼에 처치하고, 부녀자들부터 배에 태운 뒤에 막 배를 띄우려는 참에 적에게 들키고 말았사옵니다. 적병이 개미떼같이 몰려오는데 그대로 출발했다가는 화살세례를 받아 전원이 수상고혼이 될 판이었고, 순간 결단을 내린 대원들이 뭍에 남아….”
잠시 말을 멈춘 종성가가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울먹였다.
“돌아와서 보고할 자 하나만 남기고, 넷이 칼을 뽑아 적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나이다. 그 사이 배는 돛을 올렸고, 뒤늦게 날아든 화살에 노인 두 명이 절명했으나 나머지 열여덟 명은 살아서 동래까지 도착했습니다.”
“그…그 참, 큰일을 하였네.”
유순정이 더듬거리며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종성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계속했다.
“제 수하들이 눈을 감고 자기 목숨만 살리고자 했다면 모두 무사히 돌아왔겠지요. 하지만 검을 든 자라면 주군과 백성을 위해 그 목숨을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네 사람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백성들은 지금 저쪽 막사에서 쉬고 있습니다.”
좌중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무능한 수하들을 거느렸다고 은연중에 비웃음을 사던 종성가는 동포를 구하고자 목숨을 바친 용감하고 의로운 군사들을 거느린 자가 되었다.
“정말 수고하였네. 그대들이 모아온 탐보는 모두 정리하여 주상전하께 보내도록 하지. 곧 바다를 건너 적을 치게 될 테니, 다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수하 군사들을 다독이도록 하게. 다른 장수들도 모두 마찬가지일세. 이제 출정까지 보름!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 하게.”
종씨네 두 형제는 대마도 출신 왜병 5백 명을 각자 거느리고 있다. 유순정은 대마도 남북에 이들을 하나씩 보낼 작정이었다. 조선군을 이끄는 길잡이 노릇으로 말이다.
“예, 대감.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두 왜인 형제는 물론 다른 장수들도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지금 집결한 군사는 2만, 닷새 안에 나머지 전군이 집결한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출정 준비를 해야 하리라.
– 18 –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군.”
유순정이 보낸 장계를 보니 두 형제 간 성격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임무 자체는 둘 다 문제없이 수행했다. 두 사람 중 종성순은 임무 수행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신경을 쓰지 않는 냉철한 모습을 보였다. 그에 반해서 종성가는 동포인 대마도 백성을 스무 명이나 구해서 데리고 왔다. 둘 다 직접 움직인 건 아니지만 태도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도성에서 행동하던 양태를 생각해 보면 이번에 보인 모습들도 큰 차이는 없었다. 둘 다 좋게 보자면 볼 수 있고 나쁘게 보자면 그렇게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일장일단이다. 다만 상희는 나와 견해가 달랐다.
“연기 아냐? 둘 다 하는 게 좀 어색해 보이는데? 아니, 어색하다기보다는 과장된 태도라는 표현이 맞아 보여.”
내가 들고 나온 장계 사본을 읽은 상희가 심드렁한 태도로 평했다.
“장계가 원래 이렇게 장황하게 감정적으로 쓰는 거야? 용건만 확실하게 쓰는 게 아니고?”
“이번 건은 내가 도체찰사한테 좀 자세히 쓰라고 했어. 형제들 중 하나를 차기 대마도주로 확실히 낙점해야 하게 됐거든.”
종씨 형제를 데리고 온 사정과 두 사람에 대한 내 평가는 상희에게도 다 들려주었다. 한국 이야기를 제외한 화제는 일체 나누지 않던 예전 관계와 비교하면 요즘은 정말 큰 차이가 있는 셈이다.
“적어도 몇 년은 전임 도주가 더 살 거라고 생각했어. 쇼니 씨가 그렇게 대마도를 칠 줄은 예상 못했지. 덕분에 둘 중 누구를 다음 도주로 세워야 할지 생각해볼 시간이 없어졌어.”
“아예 경상도에 속한 직할령으로 만들어서 직접 다스리는 건 어때? 제주도처럼.”
제주도는 본래 탐라국이라는 독립국이었다. 당나라나 일본과 사신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에 복속하여 자치권을 가진 속령이 되었고, 백여 년 전 태종 때 자치권을 완전히 뺏겼다. 그리고는 조정에서 직접 다스리는 땅이 되었다.
“명분이 부족해. 솔직히 대마도가 조선 땅이야? 일본 땅이지. 그걸 확실히 조선 영토라고 천하에 공표하려면 최소한 막부의 쇼군이 공인해야 돼. 안 그러면 탈환하겠다면서 규슈에서 계속 레이드가 들어올 거야. 끝없는 소모전을 할 생각은 없어.”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형식적인 공유, 변경으로 일단 남겨둔다. 힘이건 회유건 쓸 수 있는 방법이라면 모두 써서 무로마치 쇼군에게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공식 인정하게 만들 수 있는 그날까지. 그날이 오면 정말로 경상도 대마현을 만들어야지.
“그거야 네가 결정할 일이긴 하지. 그런데 너무 시간을 끄는 게 좋아보이진 않아.”
상희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이 두 형제 내가 보기엔 둘 다 수상해. 형은 의도적으로 자기가 냉철하고 충실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것 같고, 동생은 정이 많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는 것 같아. 태도가 너무 과장되어 있어. 그동안 직접 만나거나 한 건 아니라 이 장계만 보고 하는 말이지만.”
으음, 연기? 그동안 종씨 형제가 의도적으로 내 앞에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5년 동안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을 자주 접한 조정 중신들도 나와 다른 평가를 내놓지는 않았다.
“연기를 5년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타고난 성격 같은데. 종성순은 그동안 사람을 따로 만난 적도 없어. 동료들이랑 술도 마시지 않고, 근무시간 외에는 집에서 나오지도 않아. 심지어 동생 집에도 안 가지. 그 평정이 깨진 건 아버지 종재성이 죽었을 때, 한 번뿐이었어.”
종성가가 말하기를, 종성순은 도성 밖 작은 암자에 부친을 위한 염불을 부탁했다고 했다. 자기도 가보겠다면서 어디인지 물어봤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며칠에 한 번씩은 쌀자루를 가지고 그 암자에 불공을 드리러 간다고 했다. 그 정도야 특별히 뭐랄 것도 없다.
“종성가는 반대로 사람들이랑 잘 놀지. 감동을 받으면 눈물도 잘 흘리고, 주변 사람들도 잘 챙겨.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 다 평소랑 똑같아 보이는데.”
“그래? 뭐, 난 두 사람 다 잘 모르니까 별 말 더 안 할게. 그냥 내가 보기에 이 장계에서 묘사한 모습을 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거야.”
상희도 나름 사람은 많이 만나보았다. 예전 한국에서도, 여기 조선에서도.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사람은 내가 상희보다 훨씬 오래 알고 지냈다. 내가 보는 눈이 더 정확할 거다.
“사실 이 문제로 더 고민하지 않아도 되게, 가능하면 두 형제 중 하나가 전사하기를 바라는 생각도 있어. 대마도 넘어서 규슈까지 가서 전쟁을 할 계획이니까, 그 와중에 둘 중 하나는 죽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고.”
“너무한다. 둘째는 정 도사 아저씨 사위잖아? 아들도 둘이나 낳았고. 그쪽을 더 밀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
“마음 같아서야 종성가를 편들어주고 싶지. 하지만 그건 정실인사잖아. 정 도사도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걸.”
예전 한국에서 대통령 주변에 있던 자들이 정실인사로 해 처먹은 비리가 얼마였는지, 그게 떠오를 때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기분이다. 그래서 합법적인 정실인사가 가능한 조선의 왕이 되어서도 그건 절대 용납하지 않고 있다. 정호찬 사위라고 도주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
“물론 조선인 와이프에 혼혈 아들을 둔 종성가가 조선에 좀 더 호감을 가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능한 놈을 앉힐 수도 없고, 작정하고 배신하려고 들면 처자식 정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을 걸. 그런 사례는 드물지 않아.”
친형제, 친아들도 칼을 들고 싸우게 만드는 유혹이 권력이다. 외국 출신 아내와 그 사이에 얻은 아들 따위, 상대가 진심으로 배신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효과적인 족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제 개전이 코앞이야. 군사들도 거의 다 집결했을 거고, 군선들도 모였겠지.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어.”
“저번에 눈 왔을 때는 좀 식겁했겠네.”
4월 10일 밤에 도성 일대에 난데없는 눈이 내렸다. 출병을 꺼려하던 조정 중신들이나 지방 유생들이 이 기상이변에 힘을 얻었는지 한 차례 또 폭발적인 상소 공세를 벌였다.
물론 죄다 무시해 버렸다. 늦은 봄눈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자연현상일 뿐인 기상현상을 가지고 하늘의 뜻이 어쩌고 하면서 떠드는 건 다 미신이다.
“난리였지. 한 주 뒤에 과거시험 결과 발표하는 걸로 묻어버렸지만.”
“잘 됐네. 그런데 계속 도성에 있을 거야? 친정할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전쟁터 가까이라도 가고 싶지 않아?”
“가고야 싶지. 하지만 아직 제대로 행차할 수준으로 도로 정비도 안 됐잖아. 게다가 부여주 지배가 아직 확고하다고 말하기 힘들어. 웬만큼 안정화되기 전까지는 내가 도성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거야.”
아아, 내 생각대로 적어도 2,3년은 더 안정적으로 부여주를 다진 뒤에 전쟁이 일어났어야 했다. 그랬으면 직접 친정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부산까지 가서 원정군을 격려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 역시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겠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한 가지 이야깃거리가 생각났다.
“참, 올해 과거 합격자 말이야. 그러고 보니까 뭔가 웃기더라. 수석 합격자가 김안로였어.”
“김안로?”
상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라? 중종 때 최강의 권신. 아주 조정을 뒤흔들었던 사람이야.”
김안로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조정을 손에 넣고 세자 교체까지 시도할 만큼 권력을 누렸다. 그러다가 중종이 변심하면서 결국 제거되긴 했지만.
“그런 사람인 줄 알면서 합격시켜? 그냥 잘라버리거나 등수라도 떨어트려서 출세 못 하게 만들지.”
“등수는 점수대로 매기는 거잖아. 공정해야지.”
걱정하는 상희를 보며 웃었다. 확실히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난 연산군도 아니고 중종도 아니니까, 괜찮아. 김안로가 우리 역사에서 무슨 행동을 했건, 이쪽에서는 그런 문젯거리로 만들지 않고 적당히 통제할 수 있어. 적절히 관리하면 돼.”
김안로가 괴물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중종이 신하들을 번갈아 숙청하고 등용하며 왕권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왕권이 불안했던 중종과 달리 나는 탄탄한 왕권이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김안로에게는 권력을 잡을 기회조차 없을 거다.
“이제 열이틀 뒤에는 출정이야. 잘 되어야 할 텐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갑자기 밖에서 후두둑거리며 뭐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서서 밖을 내다본 상희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우박이야.”
“우박?”
5월에 우박이라니. 조금 놀라웠다. 농사에 피해가 있겠는데. 게다가 또 하늘의 뜻 운운하는 상소도 무더기로 날아들겠지. 모두 무시하긴 하겠지만.
도성 일대에 우박 좀 내린다고 해도 출정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이제 며칠 뒤면 원정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오겠지? 이미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다. 앞으로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