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55
4부 339화(1955화)
3.
현토도는 우리 강역에 있는 섬 중에 두 번째로 크다. 남한, 그러니까 양강 이남 한반도의 ⅓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가장 큰 섬은 누손이고, 세 번째는 대남도다. 지형은 대부분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고 평지가 없다. 날씨까지 춥다 보니 농업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주된 산업은 임업과 어업이다.
“요즘은 종이 생산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막대합니다.”
현토도 관찰사는 전에 내가 미주 순행을 다녀올 때 하와국 주하사로 있었던 김홍근이다. 그동안 여기저기 관직을 역임하다가 지금은 현토도에 관찰사로 부임했다. 안동 김씨가 지금 쥔 권세를 생각하면, 기왕 관찰사 직책에 앉을 바에는 따뜻하고 편안한 본국에 있는 게 상례일 거다. 하지만 굳이 이 추운 북방 땅에 와 있는 속셈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챙길 게 많아서인 걸 누가 모르겠는가. 본국은 지내기 편한 대신에 어사대와 도찰원의 감시도 그만큼 철저하다. 하지만 여기처럼 춥고 험한 땅에는 어사대 관원들도 잘 찾아오지 않는다. 감시의 눈이 없으니, 수령들로서는 살판이 난다는 소리다.
물론 토인들도 입이 있어서 말할 수 있고 발이 있어서 도성으로 달려갈 수 있다. 그리고 도성에는 송사 거리를 찾아 혈안이 된 대송인들이 언제나 우글거리고 있으므로, 가렴주구를 일삼는 부패한 수령을 관에 고발하는 건 마음만 먹 으면 어렵지 않다. 뱃길을 막을 수도 없다. 항구에 드나드는 상선과 어선이 한두 척이 아닌데 무슨 재주로 그걸 다 막는단 말인가. 그리고 내수사나 송방이 소유한 상선을 잘못 건드리면 어사대에서 탄핵당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파직당할 수도 있다.
고로 이런 원지에 나온 수령들은 사복을 채우면서도 그 적당한 선을 지키는 법을 익혀야 한다. 현지 토인들이 참아 줄 수 있는 선 이상으로 쥐어짜다가는 분노한 토인들이 도성으로 몰려가서 임금에게 고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날에는 그럴 때 가끔 민란이 터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탐관오리라고 해도 임금이 보낸 관리를 함부로 죽였다가는 마을 전체가 역적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토인들이 확실히 인식하면서, 그런 사례는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은 수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그 선을 맞춰 뜯어내는 방법에 통달하고 있다. 그걸 못 맞춘 놈들은 죄다 어사대에 탄핵당하거나 부민들의 고소에 유죄 판결을 받고 파직당했으니, 그걸 통과한 자들 만 남아서 출세한 거다. 이런 관행은 한두 해 된 것도 아니다. 드러내진 않았으나 장조 시절에도, 중종 시절에도 그랬다. 그리고 그 정도 부 수입도 용납하지 않으면 누가 변방에 가서 근무하겠는가. 그저 지나치게 도를 넘는 착취만 벌어지지 않도록 적당히 기강을 잡을 뿐이다.
변방 고을을 맡은 이에게 녹봉을 가증하는 조치도 해보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녹봉은 녹봉대로 받고 토색질은 토색질대로 계속하는 자들이 허다했던 탓이다. 그런 놈들을 샅샅이 잡아내는데 소모되는 행정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적당히 눈을 감아 주는 게 낫다. 김홍근 역시 권문세가의 일원으로서 티 나지 않게, 도가 지나치지 않게 적당히 챙겨 먹는 데 익숙했다. 나도 알고 있지만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김유근이나 김좌근도 지방관을 지낼 때는 똑같이 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곳 현토도에는 무진장한 삼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재와 종이를 생산하여 벌어들이는 돈이 막대합니다. 어비 판매로 벌어들이는 수익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듣기는 했지만, 현장에 와서 보니 정말 막대한 규모로구려. 그리 돈이 될 만하오.”
여기서 종이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건 목재 펄프를 이용한 종이의 대량 생산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이것도 내가 계획한 돈줄 중 하나였지만 내가 네 번째 왕생을 시작하기 전에 다른 누가 발명해 버렸다. 이번 생에 각성하니 이미 대량으로 만들고 있더라.
그렇다고 닥종이나 아마지, 파초삼지(마닐라삼으로 만든 종이), 사탕수수지 같은 기존에 사용하던 종이들이 다 사라진 건 아니다. 기존 종이들은 도리어 고급화 전략으로 시장에서 여전히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사람이란 습관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하여간 목재 펄프를 사용하면서 종이가 대량으로 공급되자 출판물의 양도 늘었다. 신문과 책이 더 많이 나오고 문해율이 올랐다. 물론 질이 낮은 활자 쪼가리들도 많지만 원래 이런 시장이라는 게 고급품과 저급품이 공존하는 거 아니던가.
“석탄을 캐고 나무를 베는 일손은 모자라지 않소?”
“거리가 멀어서 묘노를 제때 구할 수 없는 탓으로 본국에서 건너오는 죄수들을 투입하여 아쉬운 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중노동을 하는 노역수들은 대개 경제사범이 많다. 단순한 일반 채무 때문에 여기까지 오지는 않는다. 술이나 노름에 빠져 도저히 빚을 청산할 가망이 없는 악질 채무자 또는 대놓고 남을 속인 사기꾼들이 이쪽으로 보내 진다.
그리고 부동산이나 주식이 망해서 파산한 자들이 일종의 개인회생 차원에서 들어오기도 한다. 이들은 형사범은 아니지만 몸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 건 같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놈들은 자기가 채취한 통나무와 석탄으로 빚을 갚아야만 하지요. 자기 앞으로 된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석방되지 않습니다. 물론 일하는 동안 밥은 먹여 줍니다.”
그 밥값도 죄수들이 내야 한다. 도박에 빠져서 큰 빚을 진 주인공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사채업자들이 운영하는 지하 공사장에서 강제로 중노동을 해야 했던, 원래 세계에서 읽었던 어느 만화에서의 상황과 비슷한 조건이다.
“잘못을 범한 자들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한 일. 불쌍할 일도 없지.”
제지공장과 원목 야적장을 조금 더 둘러보았다. 여기서 일하는 일꾼들은 공장 측이 따로 채용한 정식 노동자였다. 죄수들은 벌목장에만 있다고 했다. 해변에 있는 어비 공장까지 시찰을 마친 뒤에는 다시 배에 올랐다. ‘은둔하는 삶을 살고 계시는 숙부님’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4.
단정을 타고 해변에 내렸다. 미리 통지해 두었던 덕분인 지 해변에는 이미 백여 명은 되는 군중이 몰려나와 있었다.
“폐하!”
옛날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초췌해진 소왕이 내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복색이야 지금도 그럭저럭 부끄럽지 않을 만큼 차려입었지만,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이 아닌가 싶어서 좀 안쓰럽다.
“일어나시지요, 숙부. 아직 바닥이 찹니다.”
소왕 하나만이 아니다. 왕비와 자식들, 하인들까지 죄다 나와서 엎드려 있으니, 기분이 영 불편하다. 내가 뭐 굳이 소왕한테 옛날 일 사과받자고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닌데.
“북방에서 고생하시는 것만 해도 고생이 크신데 이리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알…..겠습니다, 폐하.”
소왕은 역적으로서의 처벌을 피했다. 원래 가졌던 재산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지만, 1만 냥에 달하는 재산도 유지했다. 그만하면 적어도 2천 냥에서 3천 냥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 생활하는 데는 걱정이 없을 터였다. 대놓고 역적으로 선포되었다면야 이런 배려는 꿈도 못 꿨겠지. 하지만 눈감아주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임금의 숙부이자 군왕으로서 어느 정도 살림은 유지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뭐.
역시 생활에 곤란한 점은 없는 모양인지, 잠시 둘러본 저택 안팎은 무척 깔끔했다. 불에 탄 옛 소왕저처럼 호화스럽지는 않았지만, 보온이 잘되도록 튼튼하게 지은 벽돌집이었다. 약간 특이한 점은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가 따로 있는 건 당연한데,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별당이 두 채 덧붙어 있었다.
“자식들을 장가는 들여야겠기에….”
소왕이 무척 주저하면서 말을 흐렸다. 남은 아들 둘이나 이가 들어 혼인은 시켜야 하는데 차마 집을 따로 내줄 수는 없어서 별당을 지었다는 뜻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이 상황을 보면 나이가 찬 아들을 장가보내는 게 뭐가 문제가 된다고 그렇게 눈치를 보냐고 할 거다. 하지만 소왕은 자기가 대역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런 문제에서도 내 눈치를 볼 수밖에.
“당연하지 않습니까. 종성공이 너무 일찍 유명을 달리했으니 명천공과 길성공이라도 어서 장가를 들어 대를 이어 야지요.“
모르는 척 적당히 넘겼다. 어차피 이 현토도에서 소왕 일가의 진짜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인 소왕 일가를 빼면 거의 없을 거다. 그러니 남들이 보는 자리에서 공연하게 이상한 소리 같은 걸 할 필요는 없다. 그 용건은 은밀하게 전하면 될 일. 그보다는 다른 게 궁금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두 형제와 맺어줄 배필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종친부에 알리지도 않으셨는데.”
“이곳…토관들의 딸입니다.”
여기 토관이면 원주민이잖아. 현토도 남부 지역 원주민은 대부분 아이누다. 북한이었다면 그래도 행세하는 토호 집안 딸 정도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종친부에 아들들이 결혼했다고 알리지 않은 것도 사돈 가문들이 한미해도 너무 한미한 탓이었나.
하지만 소왕이 좋은 가문 출신의 며느리를 들이고 싶어도 현토주에는 한인 인구가 거의 없다. 일부 있는 한인들도 본국에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부임한 관리나 상단원들 약간밖에 없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완전한 가문의 몰락 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떠나보낸 머슴아이의 소식이 몇 년째 끊겨서 걱정하신다지요.”
“어, 어떻게….”
내가 화제를 살짝 바꾸었더니 소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예상했듯이. 비글호를 타고 도망가기 전에도 해우도 관원들은 ‘거동‘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섬에서 어떻게 지내는 지 같은 소식을 소왕에게 전해줄 리가 만무했다. 즉, 소왕은 지난 8년 동안 맏아들에 관한 소식을 거의 듣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안으로 안내해 주시지요. 그 머슴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드릴 테니.”
소왕이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나를 사랑채로 안내했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다른 이는 아무도 들이지 않고 종성공 이훈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주었다.
“그렇습니까. 2년 전 그 잉글국 배로….”
“그렇습니다, 숙부.”
비글호가 현토도를 지나 해우도에 간 일은 소왕도 알고 있었다. 그 배가 해우도에 가면서 바로 이 마을 앞바다를 거쳐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우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기 아들을 태우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제가 8년 동안 그 아이를 위해 보낸 옷과 음식은….”
“섬에 있는 다른 군사들이 잘 받아서 입고 먹었겠지요.”
소왕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 역시 자식을 둔 부모로서 지금 소왕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에, 아무 말도 걸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여기가 서당입니다. 인근에서 모인 토인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벽돌집을 다소 어색하게 여겨서 일부러 통나무집으로 지었습니다.”
소왕이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린 뒤에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소왕저 안팎을 돌아다니며 안내를 받았다. 까르르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서 보니 김씨가 그새 소왕비 최씨와 소왕저 며느리들과 어울려 신나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김씨는 제지공장 시찰 때는 별 흥미가 없다며 배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소왕저를 방문한다고 하니 집안 어른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도리가 아니겠냐며 선뜻 내렸다. 본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갖춰 주면 나도 좋기는 하지.
“그래도 참 쉽게도 어울리는군. 미주 출신이라 그런가.”
권위적인 중전이나 최씨 같았으면, 아니 도성 출신인 송씨만 되었어도 현토주 토인들인 소왕저 며느리들과 저렇게 어울리는 건 언감생심이었으리라. 하지만 김씨는 미주 출신이다 보니 출신과 같은 문제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마 미주에서는 토인 혼혈인 집안을 흔하게 볼 수 있으니 그렇겠지. 이주 초기만 해도 토인 아내를 얻는 건 가난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상대편 토인 가문의 위상에 따라서 다른 취급을 받으니까.
“동비, 인제 그만 배로 돌아갑시다. 떠나야 하오.”
“폐하. 오늘은 소왕저에서 하루 묵어가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옹주도 이렇게 머물고 싶어 하는데요.”
김씨는 소왕저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머물 생각이 없었고, 소왕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여기는 너무 누추해서 폐하와 동비 자가와 같은 귀한 분들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부디 소신이 불충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속셈이 빤히 보인다. 그냥 나하고 얽히는 일 자체를 거부 하고 싶은 거잖아. 공연히 나를 재웠다가 무슨 사소한 사건이라도 있으면 그땐 정말 끝장날 것 같으니까. 물론 나한테 소왕에게 딱히 해코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그냥 40칸 정도밖에 안 될 이 작은 집에서 굳이 쉬고 갈 생각이 없을 뿐이다. 소왕에게 괜히 부담을 주고 싶은 생각도 없고.
“미주에 갈 일정이 바쁘니 여유가 부족하오. 배에서 쉬도록 합시다.”
“알겠사옵니다…”
김씨는 샐쭉한 표정으로 소왕의 며느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도 소왕에게 부디 건강하시기를 빈다고 덕담을 건넸다. 조모의 상을 치를 때도 도성에 돌아오지 못한 처지니, 아마 앞으로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현토도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시 돛을 올렸다. 끝이 없는 바다만 보일 뿐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를 달리려니 다시금 호연지기가 차오르는 듯했다. 중전이, 원자가, 도성이 그립지만 참아보자. 이번 여행이 나폴레옹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말이다. 가는 김에 미주 백성들의 충성심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하와국과 누손에도 들르고…간단한 여행 같으면서도 할 일 참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