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56
4부 340화(1956화)
4.
“한국인? 한국인이라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한국인이 서쪽 누벨 프랑스도 아니고 동쪽인 프랑스에서 건너왔지? 그리고 자네 영어 억양은 꼭 뱃사람 같은데.”
“세상 구경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영국 상선을 탔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흠….”
입술을 내밀고 눈매가 처진 윌리엄 스미스라는 늙은 백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빤히 바라보았다. 종성공 이훈은 잔뜩 긴장한 채로 눈앞에 있는 백인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상대가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이곳 미국에서의 호구지책이 결판난다. 지금까지는 다윈이 보너스로 준 돈을 아껴 쓰면서 버텨왔지만, 그 돈도 이제는 바닥이 보이는 참이다. 어서 일자리를 얻지 않으면 마른 방도 먹지 못하게 될 판이었다.
“영어로 말은 할 수 있는데 읽고 쓰는 건 아직 서툴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곧 더 나아질 겁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미국에 와서 살기로 했으니 이곳 말을 공부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도 동네 교회에서 목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나가 영어로 읽고 쓰기를 배우고 있다. 무척 진도가 빠르다고 칭찬도 들었다.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고, 중국어를 말은 못 하지만 읽고 쓸 수 있고, 라틴어를 서툴게 구사할 수 있고, 프랑스어를 약간 하고,”
전부 어릴 적에 배워둔 것들이다. 사대부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부친과 종학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르느라 열심히 익혔다. 해우도에 처박혀 있는 동안은 공부에서 손을 놓은지라 한자를 제외한 나머지 말들은 많이 잊어버렸다. 하지만 다윈을 따라 유럽으로 건너오니 다시 조금씩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이게 유럽과 미국에서도 꽤 쓸모가 있는 자산임을 깨닫고 다시 공부했다.
“이 정도로 외국어를 익히다니, 한국 귀족 출신인가?”
“귀족은 아닙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좋아해서 많이 익혔습니다. 본래는 가난한 집 출신이라 어떻게든 공부해서 출세해 보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안 됐습니다.”
집이 가난한데 학자로 출세하려고 시도한다는 건 유럽이 나 미국에서는 정신 나간 소리로 취급된다는 걸 배웠다. 이 쪽 세상에서는 유한 계층 출신이 취미로 수행하는 게 학문이었다. 집이 가난하고 머리는 좋은데 장사꾼은 되기 싫으면 의사나 변호사, 군인이 된다. 하지만 고국에서는 다르지 않았는가. 이들도 그건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안 될 건 없다. 출신이 어떻든 학문만 익히면 출세할수 있다는 건 상당히 많은 유럽인과 미국인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특징이다.
“이만한 재주라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나?”
“한국에서는 재벌이라고 해서 대대로 장사에 종사한 집 안 출신이 아니면 상회에 들어가 봐야 허드렛일만 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기회를 찾아 대륙을 넘어왔습니다. 선교사들이 말하기를, 이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기회의 나라라고 했으니까요.”
아부를 위해 약간의 사탕발림이 추가되었다. 실제로 건 너와 보니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만만찮은 수준이었다. 이곳 뉴욕은 그나마 다양한 외국인이 존재하는 곳이라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차별은 명백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취직에 도움이 안 될 터. 여기서 면접이 끝나지는 않았다.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 나서야 마침내 스미스 씨가 코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좋아. 자네를 채용하지. 스미스 앤 스크루지 상회에 들어온 것을 축하하네, 화이트 군.”
“감사합니다!”
비로소 안정된 일자리를 얻었다. 이훈의 얼굴에 웃음꽃 이 피었다.
“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라니.”
이훈, 존 화이트는 ‘스미스 & 스크루지’ 상회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주된 업무는 편지 작성. 다른 상품도 종종 취급하지만, 상회가 판매하는 주요 상품인 애팔래치아산(産) 인삼을 매입하는 거래처들과 주고받는 편지를 주로 작성한다. 애팔래치아산맥 일대에서 채취한 인삼을 처음 약으로 판매한 건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한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선교사들이 북아메리카에도 비슷한 식물이 서식하며 인디언들이 그 식물을 약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덕 분이다.
인삼은 유럽에서도 퍽 인기 있는 약재다. 그래서 미국산 인삼이 가장 많이 팔리는 시장은 유럽이다. 가장 약효가 좋다고 명성이 자자한 한국산 인삼보다 인지도는 떨어지지 만, 값은 훨씬 싸기 때문이다. 싼 가격을 무기로 해서 아시아 쪽으로도 물량이 나간다. 이훈이 주로 담당하는 것도 이쪽 거래처들과의 편지 작성 이다.
“이보게, 화이트군.”
미국에 오면 바로 바꾸겠다고 계획했던 성은 결국 바꾸 지 않았다. 미국 땅에서 ‘화이트’와 ‘블랙’을 성으로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기 때문이다. 굳이 바꾸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그 안에서 묻혀 지내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이들을 쫓아온 추격대는 하나도 없었다. 그 판단이 합당했다는 증거였다.
“예, 플렌티 씨.”
앤드루 플렌티는 이훈을 비롯한 사무원들을 관리하는 담당 지배인이었다. 급히 달려가니 플렌티가 고개를 까딱였다.
“남작님이 부르시네. 들어가 보도록.”
“예, 플렌티 씨.”
이훈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사장실로 향했다. 윌리엄 스미스와 더불어 이 상회의 공동 경영자인 프레데릭 스크루지는 누벨 프랑스 정부에 10만 달러라는 거액을 기부하고 남작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다들 그를 ‘남작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작님, 화이트입니다.”
“들어오게.”
꼼꼼한 성격인 스크루지는 이훈이 작성한 계약서를 펼쳐 놓고 자구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가 실수한 부분, 의미가 명확하지 않거나 모호한 부분을 철저하게 따졌다.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5.
지친 몸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자네가 먼저 왔군.”
“그러게.”
고깃국 냄새가 구수하게 코를 자극했다. 이 좋은 냄새가 어디서 나나 했더니 쿠아이와가 느긋하게 스토브 위에 있는 솥을 국자로 젓고 있었다. 전혀 작은 솥이 아닌데, 쿠아이와가 젓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솥이 아니라 수프 그릇 같았다.
“스크루지 늙은이가 또 괴롭힌 모양이야? 이렇게 늦게 오다니.”
“응. 글자 좀 틀렸다고 얼마나 면박을 주는지.”
그나마 봉급은 먹고 살 만큼 주면서 일을 시키니 다행이다. 돈도 제대로 안 주면서 지금 하듯이 쥐고 흔들었으면 진즉에 때려치웠으리라.
“그랬으면 차라리 서부로 가서 농사나 짓고 말았을 테지.”
“글쎄. 나는 생각이 달라. 일단 농토를 구하는 것부터 문제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는 뉴욕 같은 대도시가 낫거든. 훨씬 눈에 띄지 않고 살수 있단 말이지.”
미국인들 대부분은 유럽계 백인이다. 하지만 뉴욕과 같은 해안도시에는 배를 타고 들어온 외국인이 그래도 꽤 많은 편이다. 장사 때문에 건너온 아시아인들도 있고 선원으로 건너온 아프리카인이나 태평양 원주민들도 있다. 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가면 거의 전적으로 백인들밖에 없다. 눈에 띄는 이국인은 주변의 눈총을 피할 수 없다. 두드러지지 않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
“그리고 농사짓는 법도 모르잖나. 밀이건 목화건. 그러니 기껏해야 품팔이꾼 노릇밖에 못 할 텐데, 그보다야 지금이 낫지.”
“그건 그러려나…그나저나 자네 쪽은 오늘 어땠나.”
“나야 뭐 늘 똑같지. 힘쓰는 일이니까 일도 간단하고. 시비 거는 놈들이야 세 놈쯤 바다에 처넣고 나니까 그 뒤로 아무도 안 건드리잖나. 자네도 그러면 좋을 텐데.”
“그건 리틀 존, 자네니까 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조심해. 여기서 사람 잘못 건드리면 총 맞는다고.”
“일하는 중에 나한테 총 겨눈 놈이 하나 있기는 했지. 그 놈도 바로 바다에 처박았지만.”
쿠아이와는 부두에서 하역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철저하게 그날 하루 일하는 데 따라서 일급으로 돈을 받기 때문에, 사무원으로 주급을 받는 이훈보다 수입이 좋을 때도 많다.
“힘 좋지, 돈 잘 벌지, 사내구실 잘하지…아, 피곤해. 피곤하다고.”
쿠아이와가 엄살을 부리며 자기 손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이훈이 눈을 흘겼다.
“자랑하는 거지?”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그랬지만 미국에 와서도 쿠아이와 주변에는 흘긋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여자들이 많았다. 보통 백인 사내들을 능가하는 체구에 전신이 울퉁불퉁 한 근육으로 다져진 몸이다. 거기에 이국적인 검은 피부, 여자들이 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기에 한인인 외할아버지 덕분에 하와인 치고 콧대는 높단 말이지.”
쿠아이와는 절대 자기가 먼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괜찮아 보이는 여자가 나서서 먼저 유혹할 때만 못 이기는 척 넘어가서 재미를 보고 돌아왔다. 상대가 미혼이든 기혼이든 과부든 그건 상관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들킨 적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어떤 남편도 쿠아이와가 정면에서 자기를 한껏 내려다보며 ‘이 여자가 나한테 당신 얘기는 안 하던데’라고 묵직하게 한마디 하면 반박하지 못하고 그냥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어서 나가만 달라고.
“내가 나온 뒤에 자기 여편네를 때려잡든 말든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임자 없는 여자인 줄 알고 품었다가 유부녀 인 걸 알고 마음을 다쳤으니 , 나야말로 피해자라고!”
“어, 그래. 국 다 끓었으면 어서 주발에 옮겨 담으라고. 나는 빵을 자를 테니.”
두 사람은 이처럼 잡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상을 차렸다. 사내 둘이 함께 지낸 지도 여러 해다 보니 이런 식으로 음식을 마련하고 식사하는 게 익숙해졌다. 물론 늘 이렇게 먹는 건 아니다. 애초에 둘 다 일찍 집에 들어오는 날이 별로 없다. 어느 하나가 술에 취해 – 대개는 쿠아이와가 – 곤드레만드레 상태가 되거나, 야근 때문에 – 이건 이훈이 – 지쳐서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다. 둘 다 늦을 때도 있다.
일찍 들어오더라도 귀찮으면 수프 없이 빵과 소금에 절인 고기만 뜯어 먹고 말기도 한다. 그것도 귀찮으면 술집에 가서 간단한 음식을 술과 함께 주문해서 먹고 끝낸다. 오늘처럼 꽤 정성을 들인 식탁은 어쩌다 마음이 동했을 때나 차린다. 식탁에 앉은 두 사람은 각자 조상에게 짧은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뜨면서 쿠아이와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웃 사람들이 우리를 좀 이상하게 보더라. 넌 모르지?”
“이상하게 보다니?”
“네가 내 여편네인 줄 알더라고.”
“쿨럭, 푸헷!”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흠칫하다가 사레가 들렸다. 후추를 잔뜩 넣은 국물이 기도로 잔뜩 들어가는 바람에 이훈은 5분 가까이 고개를 처박고 격한 기침을 해야 했다.
“괜찮아?”
이훈이 격하게 숨을 토하는 동안 느긋하게 밥을 먹고 있던 쿠아이와가 놀리듯이 말했다.
“네가 중국인인 줄 알고 그러는 것 같아. 그래서 말해줬지. 너는 중국인도 아니고 남자랑 하는 거 즐기는 놈도 아니라고.”
미국과 누벨 프랑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일대에서 중국인이 남색의 대명사가 된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누벨 프랑스에 노동자로 팔려 온 쿨리들이 성적 욕구를 해소 할 곳이 없어서 자기들끼리 해결하는 풍속이 있다는 사실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쿨리는 남자뿐이었다. 중국인 여자는 남자만큼 일을 시킬 수가 없으므로 쿨리가 되지 않았다. 창녀로 수입되는 중국인이나 일본인 여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네들은 돈 내는 손님들을 상대하러 오는 거지 쿨리들의 배필이 되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다. 현지에 거주하는 백인이나흑인, 토인, 한인 여자들이 자기들을 상대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쿨리들은 여자를 원하는 욕구를 자기들끼리, 패거리 중 약한 자에게 풀 수밖에 없는 거다. 그게 소문이 퍼지면서 ‘중국인 같다’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남색가를 뜻하게 되었다.
“그 빌어먹을 놈들이….”
하지만 이훈의 입에서 나온 욕은 이 정도였다. 출신이 워낙 귀공자였던 탓이라 그런지, 그 거친 선원 노릇을 몇 달이나 했으면서도 상스러운 욕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 소리를 안 듣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부를 얻는 거지. 장가를 들라구.”
“자네는 그렇게 말하네만,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는걸.”
본국에서 결혼할 뻔했던 게 벌써 8년 전 일이다.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워낙 큰 탓에 여자라곤 영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쿠아이와와는 달라서 자기하고 생판 다르게 생긴 양인이나 흑인 여자들에게는 별 흥미가 생기지 않 았다.
“게다가…혼인하면 자네와 따로 살아야 하잖나. 그게 영 내키지 않아.”
“빅 존, 자네가 이러니까 이웃에서 자네를 보고 내 여편네라고 하는 거야. 지금이야 일단 지나간다고 치고, 나중에 내가 먼저 혼인할 테니 자네보고 나가라면 어쩔 건가?”
“자네 혼인할 건가?”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하려고만 하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훈은 쿠아이와가 교제하는, 아니 살을 섞는 여자가 지금 몇 명쯤 될지 떠올려 보려다가 말았다. 분명히 두 손에 붙은 손가락을 다 동원해야 하리라. 두 사람은 수프를 뜨고 방을 씹으면서 좀 더 가벼운, 잡다한 화제로 돌아갔다. 지금 하는 일과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군대에 들어가 볼까? 잘할 수 있을 텐데.”
쿠아이와는 하와국 최고의 용사로 불렸던 사람이다. 분명히 미군에서도 출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훈의 생각은 달랐다.
“자네는 양인이 아니잖나. 군관은커녕 군교도 못 될걸.”
엄청난 공을 세우면 훈장은 하나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높은 계급에 올려 백인 병사를 지휘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을 거다. 지난 2년 동안 본 미국 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군인이 될 거라면 차라리 누벨 프랑스로 가는 게 나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누벨 프랑스는 한국인들이 많이 드나든다. 그 말인즉슨 이들이 본래 정체를 들킬 위험도 커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던 일을 생각하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문제 가 있었다. 이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아무래도 한국 공사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 같아.”
“아니, 왜?!”
쿠아이와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훈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소금통을 집었다.
“스크루지 남작이 한국에 인삼을 팔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거든.”
스미스와 스크루지는 어떻게 같이 회사를 경영하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만큼 가진 성격이 다르다. 스미스가 안정 지향적인 성품인 데 반해 스크루지는 과감하고 도전 정신이 투철했다. 그래서 한국에 미국산 인삼을 팔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거다.
“한국 공사관 서기관을 만나서 어떻게든 판로를 뚫어 보래. 그래서 오늘 더 늦은 거야.”
“그럴 거면 제물포에 상선을 보내서 직접 들이미는 편이 낫지 않나?”
“내 말이! 하지만 그 늙은이는 한국에서는 관(官)이 더 강 하다는 사실을 잘 알아. 그래서 배를 보내기 전에 뭔가 확 답을 받아두고 싶은 거야.”
예전과 다르게 수염도 기르고 머리도 깎고 양복도 입었으니, 예전에 좀 알던 사람이라고 해도 이제는 못 알아보리라는 확신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기왕이면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게 가장 좋지 않겠는가. 만날 상대가 부디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만 바랄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