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72
4부 356화(1972화)
15.
한참을 울리던 포성이 잦아들었다. 교전 중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기 마련인 분노 섞인 함성도 함께 사라졌고, 이제는 승리를 축하하는 함성과 패배를 슬퍼하는 흐느낌이 그 뒤를 메웠다.
“이제 가보아도 되겠는가.”
“예, 지금은 가셔도 안전하실 듯하옵니다.”
전장 시찰 한번 힘들구먼. 예전처럼 수천, 수만 대군이 뒤엉키는 전장에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최대 수 백 단위로 뒤엉키는 싸움터 한번 보러 가겠다는데 귀찮게 달라붙는 말들이 많기도 했다.
“폐하께서 보실 만한 광경이 아니옵니다.”
“옛날 무종께서 무열공을 시켜 야인을 토벌하게 하실 때와 같은 양상입니다. 가시면 무척 험하고 지저분한 꼴을 보셔야 하니, 장수들에게 맡기시옵소서.”
전장을 시찰하겠다고 했더니 본국에서부터 따라온 수행원 태반이 반대했다. 그래서 나도 더 강경하게 버텨야 했다. 참고로 무열공(武烈公)은 무종 시기 내 총신으로 군권을 쥐었던 박원종의 시호다.
“그대들이 짐을 걱정하는 바는 알겠으나, 짐은 군사들이 싸우는 양상을 보고 직접 격려할 생각으로 누손에 온 것이다. 그러니까 한 번쯤은 전장에 나가 군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아야 하겠다.”
신하들이 경호라든가 이런저런 골치 아픈 문제 때문에 걱정하는 건 안다. 하지만 여기에 와보지 않았으면야 또 모를까, 기껏 북대동양을 한 바퀴 돌아 누손까지 왔으면서 현장에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것도 문제다. 더구나 군사들을 위해 기획했던 반촌극단 공연까지 무산 된 상황 아닌가. 한껏 기대했다가 실망한 이곳 군사들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내가 직접 나서서 뭔가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옛날 장조께서는 왜적의 흉탄이 귓가를 스치는 곳까지 가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셨다. 그 후손 된 처지로 어찌 전장 주변에 나가는 것을 망설이겠는가? 하물며 지금 짐은 적과 직접 싸우겠다는 게 아니라 전투는 멀리서 보고 끝난 뒤에 군사들을 치하하겠다는 것뿐이다.”
논산 전투였던가. 경상도에 묶여 있던 왜군 본진이 일발 역전을 노리고 충청도로 주력을 집어넣었다가 우리 주력군의 매복에 걸려서 섬멸당한 전투 말이다. 그때 내가 직접 미끼가 되어 적을 우리가 짠 그물로 끌어들였었다. 나한테 맞지는 않았지만, 내가 올라가 있던 단위로도 왜군의 조총탄이 날아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처럼 내가 위험을 무릅썼기에 군사들의 사기도 올랐다. 임금이 자기들과 함께 사선에 섰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번에도 잠시라도 좋으니 가보고 싶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이야기해도 도성에서 나를 따라온 신하들은 위험하다고, 절대 안 된다고들 했다. 하지만 이희영을 비롯한 초토군 장수들은 내 뜻을 반대하지 않았고,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전란이 지나간 싸움터는 역시 여기나 저기나 비슷하구나.”
모로족 마을들은 대개 우거진 정글 사이에 있다. 주변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고 마을을 둘러싸는 울타리와 해자가 있다. 제법 견고해서 각각의 마을은 하나의 요새와 같다. 그래서 이런 마을을 공격할 때는 무종포를 끌고 가는 경우가 잦다. 마을 주변을 경계하는 적을 먼저 제거한 뒤에 퇴로를 막고 항복을 권고하는데, 적이 투항을 거부하면 바로 포탄이 날아가 마을 주변 울타리부터 부순다.
마을 내부를 화포로 공격하려면 박격포 기능을 갖춘 완구 종류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동원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괜히 시간을 끌다 보면 적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으므로, 그전에 울타리만 부수고 병력이 진입하는 식으로 마무리했다.
“이번 싸움에서 거둔 전과는 어떤가.”
“47명을 사살하고 298명을 생포했습니다. 아군의 손실은 전사 4명, 부상 16명입니다.”
아군과 모로족의 전사자 비율은 대체로 1:8〜1:10 선에서 유지되고 있다. 화력은 우리가 훨씬 우세하지만,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은 아니다. 일단 저들에게 익숙한 숲속이나 마을 안에 매복한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게다가 적이 전력이 빈약한 속오군 등의 후방 부대를 노려서 기습하는 사례도 잦다. 그러니 우리 쪽에도 아무래도 제법 많은 희생이 생긴다.
“죽은 척하고 엎어져 있다가 시체인 줄 알고 지나치면 갑자기 일어나 등 뒤를 찌르거나, 일부러 화려한 금은 장신구를 달고 누워있다가 전리품을 주우려고 다가오는 자를 찌르기도 합니다.”
“언제나 전장에서는 방심과 욕심이 가장 큰 적이 아니겠느냐.”
혹시 죽은 척하고 숨어 있던 모로족이 그런 식으로 내게 달려들기라도 하면 재미있겠지. 권총도 칼도 차고 있고, 이제 어른이 됐으므로 완력도 충분하다.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적을 보고 몸이 굳을 만큼 내가 순진한 어린애도 아니고.
하지만 만약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내 주변을 둘러싼 호위병들이 경을 치게 된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편이 낫겠지.
디에고는 아예 나보다 앞서 마을로 들어가서 길바닥에 누운 시신이란 시신은 죄다 칼로 찔러 생존 여부를 확인했을 정도다. 디에고의 성격을 고려해 보자면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게 두려웠다기보다는 진심으로 내 신변을 걱정해서 그랬다는 말이 맞겠지만.
“무척 익숙한 냄새가 나는군…..”
불타고 있는 목조 오두막 옆을 지나가니 코에 익은 냄새가 난다. 고기 굽는 냄새. 하지만 이 ‘고기’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이 말에 수행원 한 사람이 반응했다.
“무슨 익숙한 냄새가 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살 타…. 아니다.”
장조와 성친왕에게는 사람 살 타는 냄새가 무척 익숙하지만, 흥녕제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냄새다. 그래야 한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발언을 임기응변으로 넘겼다.
“혹시 모로족 일가를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렀다거나 포로로 잡아봤자 쓸데없는 어린애 따위를 저 불길 속에 던져 넣는 건 아닐 테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폐하. 폐하의 어명을 받들어, 불필요한살상은 최대한 삼가고 있사옵니다.”
마을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누손주 관군 지휘관, 참령이 용성이 진땀을 흘렸다. 저놈 저거, 보리스의 현손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제 고조부랑 다르게 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보리스는 파이우트족 반란을 토벌할 때도 아녀자들은 죽이지 않았으니까.
‘그런 짓은 튀르크 놈들한테나 합니다.’
그 말을 한 게 보리스였던가, 바실리였던가. 튀르크인이라면 씨알머리도 남기지 않겠다는 증오의 표현이었지만 다른 자들은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설마 그 후예인 이용성이 마구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 믿어보자.
“포로들은 저쪽에 있습니다, 폐하.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역시 아녀자들은 한데 모여 감시를 받으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다만 그들과 떨어진 곳에 결박당한 사내들이 여럿 쓰러져 있는데, 그 주변에 누손주 군사들과 하와병들 사이에 격한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난리는 뭐냐?”
“저건 처형할놈들인데….. 소인이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뛰어갔다 온 이용성의 말이 가관이었다. 그 포로들은 일 전에 우리 군영에 침입해서 군량 무더기에 불을 지르고 보급장교의 수급을 잘라간 놈들이라, 본보기로 사지를 찢어서 처형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와병들이 아깝다며, 자기들한테 달라고 고집을 부린다는 게 아닌가.
“폐하! 지금 그냥 찢어 죽이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벌도 이 자리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저 상어가 내장을 찢어발길 놈들을 저희 섬으로 끌고 가서 평생 노역을 시키면 그 벌은 평생을 갈 테니 그 어찌 더 좋은 벌이 아니겠습니까?”
뒤이어 나타난 하성교가 열변을 토했다. 분명히 이 마을을 제압하는 싸움에서 하와병들이 선두에 서서 용전하긴 했다. 그러니 그 보상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기는 한데…..
“너희 몫으로 분배받은 포로만 챙겨라. 저놈들은 이곳 군사들의 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꼭 처형해야 하니까.”
“하아아, 알겠습니다.”
하성교가 투덜거리며 물러섰다. 곧 주민들이 키우던 물소 십여 마리가 끌려왔다. 처형할 모로족 사내들의 사지에 굵은 밧줄이 매였고 반대편 끝은 물소의 몸에 매였다. 물소를 모는 군사들이 작대기로 물소의 등짝을 후려치자 물소들이 바로 움직였고, 곧바로 모로 사내들이 지르는 비명이 사방을 채웠다.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이 눈을 감으며 남편과 아들과 아버지의 사지가 찢기는 모습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모습이 보였다.
16.
“거열형은 법으로 금지되지 않았습니까. 이미 본국에서 거열형을 시행하지 않은 지 3백여 년이 가까운데 초토사가 함부로 이를 행하다니, 이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옳습니다. 이는 혹형을 폐지하고자 하는 역대 선제들의 깊으신 뜻을 어기는 일이니, 이를 벌하셔야 합니다. 일을 직접 벌인 장졸들을 처벌하시고 초토사에게도 책임을 물으소서.”
이번에 나를 따라온 경연관들은 여정 내내 하릴없이 보냈다. 배를 타는 동안에는 전원이 멀미라고 자빠져서 일어나지 못했고 – 미주로 건너갈 때나, 미주에서 건너올 때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 육지에 있을 때는 내가 바빴으니 말 이다. 미주에서는 매일 나폴레옹이랑 노느라 바빴고, 하와이에서도 하진교랑 있느라 바밨다.
그런데 누손주에 와서는 서로 여유가 좀 생겼다. 육지에 내리면서 경연관들도 생기가 좀 솟았을 뿐더러, 나도 일정이 비는 시간이 조금씩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본래라면 자기들 영역이 아닌, 초토군의 모로족 토벌 양태 같은 것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나섰다. 내가 이번 순행에서 다른 문관들을 거의 데려오지 않았더니 자기들 넷이 조정 전체를 대표해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거라도 느꼈나 보다.
“전장에서는 어느 정도 세간과 다른 법이 통용되기도 하오. 이번에 내가 보고 온 그 모로 도적들은 벌인 짓이 있으니 그 죗값을 다소 잔혹한 방법으로 치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소.”
정규군끼리의 전쟁도 아니고 반군 토벌이다. 20세기에서도 반군 토벌전에서 온갖 잔혹한 방식의 처형이 있었다. 어느 한 나라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걸 생각하면 아직 19세기인 대한에서 저 정도까지 금지하기도 좀 애매하다.
적어도 우리 군사들은 적의 해골을 수집하거나 머릿가죽을 벗겨 모으지는 않는다. 유일한 예외는 대남도 출신 번병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옛 관습에 따라서 자기가 죽인 적의 머리를 모은다. 장조 시절부터 인정한 풍속이라 지금도 그 관습을 인정받고 있다.
“그 이야기는 그만두시오. 순순히 귀순한 모로족을 학살 한 것도 아니고 우리 군량에 불을 지르고 우리 군관의 수급을 자르는 무도한 짓을 한 놈들을 처형했을 뿐이니까.”
순전히 분풀이만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시각으로, 모로족은 개화되지 않은 야만족이다. 그런 놈들을 다그쳐서 말을 듣도록 하려면 다소 잔혹하더라도 이런 과격한 수단이 효과적인 게 사실이다. 경연관들도 그 정도는 알 머리들 아 닌가.
“장조께서도 왜적 수길을 한강에 묶어 말리시고, 역적 이진을 젓갈로 만들어 역도가 어떤 처벌을 받는지 세상에 알리신 바 있소. 이번 일도 그와 같소.”
강경하게 나가자, 경연관들도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 방식으로는 자기들의 존재감을 부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기네 본래 분야인 공부를 들고 나왔다.
“폐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자 신들을 데려오지 않으셨습니까? 이리 여유가 생겼을 때 조금이라도 책을 보셔야지요.”
하지만 나로서는 이런 논리에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공부할 여유가 넘쳐나던 항해 중에는 자기들이 멀미를 핑계로 앓아눕더니, 일정 사이사이에 생기는 달콤한 자투리 시간에 굳이 공부하자고? 이거, 일하는 티만 내려고 일부러 수 쓰는 거 아니야?
“짐은 쉬고 싶소. 그러니 나중에 하시오.”
“폐하, 사대부는 학문에서 손을 놓으셔서는 안 됩니다. 여유가 있으니 어서 책을 드소서.”
이것들이 정말 이 짧은 시간에라도 내게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하는 짓인지, 내가 거부할 걸 알면서 자기들도 할 일을 했다는 티를 내고 싶은 것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좋소, 그러면 우리 경연을 시작합시다. 무슨 책으로 하겠소?”
역시나 경연관들의 생각은 후자였다. 정말 내게 공부를 시킬 생각이었다면 저렇게 진땀을 흘리며 앉아 있을 리가 있나.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칭찬을 퍼부었겠지.
“여…..역시 폐하께서는 영민하시옵니다.”
“이 구절에 그리 깊은 뜻이 있음을 이미 깨닫고 계신다니…..”
이건 누가 봐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쩔쩔매는 모습이다. 나름대로 절치부심해서 그동안 안 다뤘던 책을 들고 온 것 같은데, 아〜무 의미 없었다. 내가 저번 생, 저저번 생, 저저저번 생에 이미 다 몇 번씩 반복학습을 마친 책들이니 까. 그것도 당대 최고 스승들한테.
“더 하실 말씀은 없소? 아무도?”
네 사람 모두 내 질문에 침묵을 지켰다. 나한테서 예상도 못한 반응을 보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관한 계획도 완전히 무산된 모양이다.
“이런 식이면 경연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구려.”
조정 일에 쫓기지 않으니 휴식하는 대신 경연을 열 필요도 없다. 생각을 바꾼다면 자문관 노릇은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일선에서 벌어지는 거열형 문제를 두고 지껄이는 태도를 보니 그것도 글러 먹은 것 같다.
‘역시 자원하는 사람을 데려올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데려 오고 싶은 사람을 지명해서 끌고 왔어야 했나.’
이런 생각을 하며 경연관들을 내보내려는 참인데 동비가 들어왔다. 혹시 학질에 감염되면 곤란하다며, 군사들을 호궤하는 자리에 몇 번 나간 것 말고는 모기장을 친 숙소에서 민지와 함께 꼼짝도 안 하던 이가 웬일인가 했더니 들고 온 소식이 있었다.
“폐하, 술루국왕이 왔다고 합니다!”
가스파르 1세라면 갈로도에서 술루군을 이끌고 전투를 치르고 있지 않던가. 여기까지 온 김에 한번 보고 갈 생각은 있었는데 갈로도까지 또 이동하기 난감해서 망설이던 참이었다. 이심전심이라더니, 나하고 사이에 뭐가 통하긴 통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