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80
4부 364화(1980화)
4.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부모에게 인사를 올리는 게 예의다. 그래서 곧바로 태후전으로 가야 하지만, 그전에 중궁전인 대조전에 먼저 들렀다.
“얘야, 내가 네 아비란다.”
내가 나폴레옹과 헤어지고 지선성에 머무르던 기간인 지난 6월 19일 – 양력 7월 17일 – 에 중전이 낳은 둘째 적(玓)이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번 생에 얻은 자녀의 수는 이제 4남 4녀가 되었다. 딸만 연속으로 낳다가 그 뒤로는 아들만 나오는 것도 신기한 노릇이다.
아기는 이제 생후 6개월, 한껏 귀여울 때다. 그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절로 농이 나왔다.
“용모가 중전을 닮은 듯하구려. 나중에 장안 여인네들 마음깨나 흔들어 놓을 듯하오.”
“설마요. 여인네들을 흘린다면 폐하의 용안을 닮아서겠지요.”
벌써 몇 번째 아기인지….. 이쯤 되면 별 감흥이 없을 법도 한데 그래도 아기를 보면 여전히 예쁘기만 하다. 상희 같으면 ‘네가 직접 안 돌보니까 예쁘지’라고 핀잔을 주지 않을까.
아기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며 돌보는 힘든 일은 보모상궁들이 다 맡아서 하니 그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뭐, 구구절절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내 피를 받은 아기가 귀여운 건 귀여운 거지.
“너희도 동생을 잘 돌보거라. 옛 성현들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형제간만큼 귀하고 가까운 사이가 없느니라.”
“예, 아바마마.”
적이의 친동기간, 중전 소생인 현지와 창이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만 일곱 살인 현지는 퍽 야무지게 대답했지만 이제 네 살인 원자 창이는 어린애티가 팍팍 나는 혀 짧은 목소리라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내년…..부터는 너도 시강원에서 스승들을 모시고 공부를 시작해야 할 거다. 힘이 많이 들 텐데, 걱정이 많이 드는구나. 이 아비가 쌓은 죄가 커서…..”
시강원에 넣을 이들은 최대한 나한테 원한이 없는 이들로 골라야겠지. 경연 때 내가 너무 심하게 깬 양반들은 다 빼야겠다. 나한테 앙심 품은 거 괜히 애한테 풀면 곤란하니까.
내가 여덟 달 만에 만난 자식들과 대화하느라 일어날 생각을 안 하니까 처음에는 옆에서 흐뭇하게 웃던 중전도 조바심이 난 모양이었다. 어서 일어나라고 채근했다.
“폐하. 태후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알겠소. 하지만 태후께서도 이 정도는 기다려 주실 거요.”
태후도 자식을 넷이나 낳은 어머니 아닌가. 이 정도야 이해하겠지. 하지만 대조전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궁인들도 있고 해서 그만 일어섰다. 아이들에게는 태후전에 갔다 와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고 말이다.
“사실 짐은 메스칼레로 백작이 짐이 돌아올 때까지 떠나지 않았을 확률이 5할은 된다고 생각했소.”
나삼이 정식으로 백작 작위를 받은 게 아니라 사칭한 거라는 사실은 알았다. 중전에게 그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나삼을 부를 다른 호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일단은 계속 그 이름을 쓰기로 했다.
“폐하를 속인 게 들통이 났는데도 말이옵니까?”
“들통이 났으니 더더욱 자기 처지를 애절하게 호소해야지.”
백부는 자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아서 후계자로 책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 영광을 계승해야만 한다, 그래서 백부가 장차 파리로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임금께 서 좀 도와달라…..
“…..라고 말할 수도 있잖소. 작위와 임무에 관해 거짓을 말한 건 어쩔 수 없었다고 솔직히 사죄하는 방법도 있고.”
“백작이 그렇게 용서를 빌면 폐하를 속인 죄를 용서하셨겠사옵니까?”
“용서를 안 하면 어쩌겠소. 기군망상을 저지른 죄인으로 처벌할 수도 없는 일 아니오.”
나삼은 내 신하가 아니므로 기군망상의 죄는 당연히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거짓말 때문에 내가 딱히 손해를 본 것도 없다. 객실과 식사에다 기녀까지 제공한 대명관 측에서는 큰 손해를 본 게 맞기는 하지만, 그거야 나삼의 거짓말 여부와 상관없는 문제 아닌가.
“솔직히 털어놓고 지원을 청했으면 용서하고 몇 푼 쥐여 주는 정도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소. 비록 거짓을 말 했다고는 하나, 황제의 조카인 건 사실이잖소. 그것만으로도 약간 온정을 베풀 여지는 있지.”
나삼을 프랑스 본국에서 권좌에 올려 이용해 먹자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내 뜻대로 놈을 움직이려면 어느 정도 꿀을 먹여 두기는 해야 했다. 그걸 태후가 대신해 준 셈이니, 적당히 묵인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11.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주상.”
“아닙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께서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신 덕분에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 신불랑 황제의 선물입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간단히 끝내고 편히 앉아 환담을 주고받았다. 나폴레옹이 챙겨준 선물을 내밀자, 태후의 두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아니, 이런 귀한 의복과 보화, 모피를 주셨단 말입니까?”
“예, 어마마마. 본인은 4년 전에 모후를 잃었다고 하시며 ‘그대는 아직 모친이 계시니 잘 모시고 효도하도록 하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는 아들이 워털루 전투 이후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갔다. 나중에 아들이 다시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함께 지내자는 편지도 받았지만 건너가지 않았다. 계속 로마에 살다가 4년 전인 1836년에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왜 레티치아가 아들을 찾아오지 않고 그냥 로마에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 교황청이 있는 로마가 좋았는지, 새 나라를 세운 아들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어쩌면 단순하게 그냥 바다를 건너는 게 무서웠는지도 모르지.
나폴레옹도 세 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잘 모시라고 조언했다. 계모라고 해도 어머니로 모신 이상은 어머니라나.
이런 군더더기 말은 생략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전했다. 나폴레옹이 준 선물을 사고 없이 전달했으면 된 거 아닌가.
“정말 아름답기는 한데…. 이건 좀 망측하군요.”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된 드레스를 본 태후는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가슴이 파여 쇄골이 드러나고 두 팔을 그대로 드러내는 스타일인 것을 알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식 드레스라는 게 우리 한복보다는 아무래도 살 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많이 약해진 거였다. 홍경래가 귀띔해 준 바에 따르면, 본래 나폴레옹이 태후와 중전에게 선물로 주라고 준비한 드레스는 젖가슴 상단까지 몽땅 드러내는 전형적인 ‘엠파이어 스타일’ 드레스였다. 그걸 자기가 뜯어말려서 겨우 이런 형태로 바꾸게 했다고.
그나마 나폴레옹이 디자인 단계에서 홍경래에게라도 의견을 구했으니 다행이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속적삼에도 안 쓸 얇은 천으로 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만들어서 떠넘겼으면 얼마나 난감했겠는가. 명색이 선물인데 내 마음대로 파기할 수도 없고.
“그래도 귀하게 건넨 선물이니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해하더라고 전해주세요, 주상.”
“예, 어마마마.”
선물이란 대개 이런 결말을 맞게 마련이다. 그래도 드레스 말고 장신구나 모피 외투 같은 다른 선물들은 모두 호평이었다. 태후를 위한 선물은 나폴레옹이 건넨 것들 말고도 잔뜩 있었다. 미주 백성들이 바친 것도 있고, 하와국이나 누손에서 받아온 것도 있었다. 태후는 입이 귀에 걸려서 좋아했다. 하기야 애초에 물욕이 꽤 있는 사람이었으니, 선물 더미를 보고 당연히 좋아하리라.
“이 어미가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마께서는 제 모후가 아니십니까. 마땅히 받으셔야지요. 누가 감히 마마께 선물을 받을 자격을 논한다는 말입니까?”
태후는 아주 흐뭇한 표정이었다. 구름 위로 떠올랐으니, 이제는 조금 떨어질 소식을 전할 차례였다.
“그런데 어마마마. 어마마마께서 메스칼레로 백작을 궁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고 내탕금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귀한 손님이니 큰일을 하는 데 보탬이 되라고 약간 준비해 주었지요. 주상께서 계셨어도 그 정도 대접은 하셨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이 어미가 잘못한 것입니까?”
태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게 분명한 듯하여,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는 기분으로 진상을 알려주었다.
“그게, 그자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행색이 좀 의심스럽기에 황제를 만났을 때 물어보니 봉작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친조카기는 하지만 그 능력이 부족하고 성품이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후계자로 책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나나나!”
태후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자기가 어리석은 탓에 황실에 큰 손해를 끼쳤다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나폴 레옹이 보내준 보석 장신구를 앞으로 밀어내면서 이것들을 팔아서 그 돈을 메워달라고 했다. 아니, 굳이 그 돈 물어내 라고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마마마, 흥분을 가라앉히시옵소서. 미주에 가기 전에는 소자 역시 그자의 언변에 속고 있지 않았사옵니까. 어마마마께서 그자에게 속아 약간의 돈을 내주셨다고 하여 어찌 소자가 어마마마를 탓하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어마마마께 온 선물이니 그대로 넣어두시옵소서.”
그따위 놈한테 어떻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느냐고 태후를 공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나갔으면, 되려 태후도 할 말이 많았으리라.
‘백작은 주상이 대명관에 일러 숙소까지 마련해준 귀한 손님 아니었습니까? 주상이 먼저 그리 환대해 놓고서 왜 이 어미를 비난하십니까!’
그렇게 반격하고 나왔으면 나도 할 말이 없었겠지. 하지만 내가 먼저 ‘나도 실수했다’라고 선수를 치니 태후로서는 나를 탓할 수 없게 됐다. 말로만 호의를 표한 나와 달리 내 수사에 명을 내려 현금을 직접 꺼내 쥐여준 태후가 더 가책이 클 수밖에 없다.
“어마마마께서만 그자에게 속으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오는 길에 들으니 여기저기서 수천 냥을 더 받아 챙겨갔다면서요. 그만큼 맹랑한 자니, 크게 괘념치 마십시오. 어마마마.”
“……고맙습니다, 주상.”
이 건으로 태후는 잔뜩 야코가 죽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나랏일에 뭔가 손을 대려고 나설 엄두를 못 내겠지. 사실, 내가 없는 동안 수렴청정을 진행하면서 권력의 맛을 본 태후가 내가 돌아온 뒤에도 이런저런 간섭을 시도할 위험은 분명히 있었다. 그동안은 예전에 나하고 한 합의 – 동생들 안위만 보장해 주면 거스르지 않겠다 – 도 있어서 얌전히 있었지만, 권력을 실제로 행사해 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달라지니 말이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지 않는가.
그래서 귀국한 이후에 어떻게 해야 서로 지나치게 갈등하지 않으면서 모양새 좋게 태후가 권력욕을 드러내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지 은근히 고민이 됐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이렇게 간단히 해결돼 버렸으니, 나삼에게 내가 도리어 신세를 진 셈이다.
돈도 뭐 2만 냥이면 그리 크게 뜯긴 것도 아니다. 내가 돌아와서 만났어도 그 정도 돈은 줬을 건데 뭘. 사내가 큰일을 하려면 큰돈이 필요하다고 더 주면 더 줬지 덜 주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폐하. 신불랑 황제가 신첩의 앞으로 보낸 선물에도 저 야릇한 양식 장의(長衣)가 포함되어 있사옵니까?”
문안을 마치고 대조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전이 살짝 물었다. 그래서 나도 답했다. 아마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게 있을 거라고. 그러자 중전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신첩이 그 옷을 입기를 바라신다면 입어 보겠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하는 이야기에 내가 깜짝 놀랐다. 아니, 한국에서는 잠옷으로도 안 입을…. 아니지. 다시 생각해 보니까 잠옷으로는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천도 얇겠다. 엠파이어 스타일 드레스를 입은 중전도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
“폐하의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너무도 반갑고 기뻐서 눈물이 나옵니다.”
“신도 마찬가지이옵니다.”
“부디 다시는 도성을 떠나지 마시옵소서!”
오랜만에 편전에서 중신들을 맞이했다. 대부분은 어제 용산에 나와 나를 영접했지만 각자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어제 나루터에 못 나온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들 출석해서 무사히 순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환영했다.
“그대들이 이토록 짐을 반겨주니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것이 없소. 예정보다 더 길게 도성을 비웠으니 이는 짐의 허물이나, 외방을 순회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으니, 앞으로 이를 고려하여 백성들을 살피도록 하겠소.”
중신들은 ‘이제는 안 나가겠다’라는 말을 바라겠지만 그 말을 해줄 생각은 없다. 그랬다간 앞으로 나만 못 나가는 게 아니라 내 후계자들까지도 순행을 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빌미가 될지 모르니까.
“짐이 도성을 비운 동안에 진행된 사안들에 관한 대략적인 보고는 순행 도중에도 받았소. 허나 이제 짐이 귀국하였으니 그 상세한 상황을 살펴야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두 번 반복할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이 대화가 오갔다는 건 내 책상 위에 서류 무더기가 쌓인다는 뜻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씩 풀어 읽으면서 귀로는 보고를 들었다.
“올해 농사는 확실하게 풍년이라니 다행이로구려. 2년 연속 작황이 별로 좋지 않았으니, 재무부는 쌀을 넉넉하게 사들여 나라 곡간을 든든히 채우도록 하시오. 내년은 또 어찌 될지 모르니.”
“예, 폐하.”
재무대신 조승일이 얼른 대답했다. 우리 장인어른이 재무부를 맡았을 때는 내가 일일이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 후임자들은 어째 좀 불안하다. 일을 아예 못 하는 건 아닌데…. 좀 아쉽고 모자란 부분이 약간 있는 정도랄까.
“그런데 폐하, 밑에서 올라온 건의가 하나 있사옵니다.”
“말해보시오, 재무.”
무슨 보고를 하려고. 내무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눈으로 훑으면서 귀만 대충 기울였다. 그랬더니 정말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새로 발행하기로 한 금화에 새길 문구에 관한 재무부 관원들의 제언이옵니다. 금화는 한 닢이 동화 백 닢에 해당 하니, 이를 당백전(當百錢)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어떻겠습니까?”
“싫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이 나갔다. 가뜩이나 내 연호도 하필 흥선(興宣)이라 흥선대원군이 자꾸 떠오르는 참인데, 새 화폐 이름까지 ‘당백전’이라고 붙여? 화폐정책 말아먹을 일 있냐?
〈작가의 말〉
4부 재석이의 연호를 흥녕에서 흥선으로 변경합니다. 이는 도중에 연호를 바꾸는 개원(改元)이 아니라 아예 설정을 변경해서 처음부터 연호가 흥선이었던 것으로 가는 거니 혼란 없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