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81
4부 365화(1981화)
6.
이 세계의 역사는 장조 시절부터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단적인 사례로, 원래 세계에서는 선조가 되어 조선 후기 모든 임금의 조상이 되었을 하성군이 역괴 임해군의 아비라는 죄로 북방으로 유배되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왕통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아, 후손은 남기지 못했어도 제사는 이어지고 있다. 연이가 칭제하고 한 10년쯤 뒤였나, ‘하성군은 아들 탓에 죄를 면할 수 없었으나, 본인은 전란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공이 있으므로 혼을 달래기 위한 제사 정도는 지내게 해주어야 하리라’라면서 나선 까닭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사면과 복권까지 이뤄진 건 아니다. 임해군이 친 사고는 이 한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으므로 그 부친인 하성군의 완전한 사면은 칭제를 이뤄낸 연이조차 불가능했다. 그저 딱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했을 뿐이다. 연이가 고른 하성군의 봉사손은 숙부인 혜빈 강씨 소생 혜산군의 여러 손자, 즉 연이에게 5촌 당질이 되는 애 중 하나였다. 지금도 그 후손이 하성군의 제사를 잇고 있다.
고로 원래 역사에서 선조의 10대손이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친 중 이하응이라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한데, 원래 역사의 흥선군 이하응과는 완전히 다른 피가 흐르는 동명이인이다. 한자도 아니고 한글 이름만 같을 분이다. 그러니 흥선이라는 봉작을 가진 종친도 없다. 내 연호가 ‘흥선’이 된 건 그저 한림원에서 지어서 추천한 탓이었다.
“그동안 우리 대한의 역대 연호를 보면 옛 중국의 연호와 겹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허나 선조께서 칭제하신 뜻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하늘이 있다’라는 데 있었으니, 어찌 계속중국의 연호와 같은 것을 쓰겠습니까?”
그동안 우리 연호가 중국 것과 많이 겹쳤던 건 중국의 숱한 황제들이 좋은 문구를 잔뜩 선점한 탓이 크다. 그리고 중국을 대국으로 여기는 관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까닭으로 중국에서 쓰던 것과 중복되는 연호를 쓰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다.
선황의 광덕(廣德) 연호만 해도 본래 당나라 대종의 연호와 겹쳤다. 그래도 선황 본인은 물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황이 새로 임명한 판한림원사 김학년이 상궤를 벗어난 독창적인 주장을 펼쳤다. 우리가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따로 하늘을 세운 지 얼마인데 언제까지 옛 중국 연호를 계속 써야겠냐며 한림원 학사들을 선동하고 나선 거다.
선황은 김학년의 그런 성향을 알면서도 판한림원사 자리에 앉혔고,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마음대로 연구하라고 풍족하게 후원까지 해줬다. 그렇게 김학년이 마음대로 연구한 결과 중 하나가 이 ‘이제껏 아무도 쓴 적이 없는’ 연호인 흥선이었다. 당연히 나는 이 연호를 쓰기 싫었다. 전부터 흥선대원군 을 고종이나 민비만큼 싫어한 건 아니지만, 흥선대원군이 수많은 잘못을 범한 것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상. 한림원은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학자들이 집결한 기관입니다. 그리고 판한림원사는 선황께서 기용하여 매우 신뢰하시던 사람입니다. 그런 이들이 뜻을 모아 바친 연호를 그저 주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각하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거역할 수 없고, 거 역해서도 안 되는 사람인 조모가 나를 불러 나무랐다. 왜 흥선이라는 연호가 싫은지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조모의 압력에 맞설 수가 없었고, 그렇게 해서 내 칭호는 흥선제가 되었다.
지난 6년 동안 연호를 들을 때마다 입맛이 썼다. 하지만 그래도 차츰 적응하면서 대놓고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당백전이라니, 당백전이라니! 그건 정말로 싫다. 그것만은 듣지 않겠다.
“폐하. 어찌 그리 싫다 하십니까. 새 돈에 당백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왜 부적절 하다 생각되는지, 그 연유라도 말씀해 주시옵소서.”
신하들이야 이유를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내가 당백전이라는 명칭을 각하한 이유에 관해 최대한 평온한 자세로 설명했다.
“새로 만드는 금화의 가치가 정확히 동화의 백 배가 아니기 때문이오.”
대한의 경제는 은화를 기준으로 돌아간다. 공급량 측면 에서 금을 은만큼 충분히 공급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은화를 보조하는 동전이 은 1냥당 동전 100푼 비율로 환전되어 잔돈으로 쓰인다. 작은 은화로 1전짜리도 있다. 10전이 1냥이다.
하지만 은화로 모든 거래를 처리하기도 힘들다. 금은과 같은 실물화폐는 결국 그 가치가 해당 실물의 수량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신용화폐인 지폐는 숫자만 많이 찍으면 고액권을 뽑을 수 있지만 실물화폐로 고액권을 만들려면 결국 더 무거워지거나 커져야 한다.
그러나 커지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은화 천 냥이 필요하다고 해서 37.5kg짜리 은화를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차라리 1냥 은화 천 닢을 자루에 담아 건네고 말지. 아니 , 그것도 백 닢씩 열 자루에 나눠 담는 편이 차라리 나을 테고.
그래서 실제 거래 현장에서는 각 상단이 발행하는 어음이나 재무부에서 금 보관증 격으로 발행한 금표가 수표 노릇을 하면서 고액권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영국의 소브린이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일본의 대판(大判) 등의 금화도 개항장을 중심으로 조금씩 쓰인다.
재무부에서는 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 선황 시절부터 금화 발행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선황이 ‘닳아서 없어지는 금이 아깝다!’라면서 금화 발행을 불허하는 바람에 사업이 좌초된 상태다.
금화를 발행하지 않는다면 태환지폐도 의미가 없다. 지금처럼 재무부 금표를 그냥 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재무부에서는 혼란스러운 화폐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금화 발행을 계속 추진해 왔다. 선황이 불허한 뒤에도 말이다.
내가 보위에 오르고도 재무부에서는 한동안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개항장에서 나도는 외국 화폐로 인한 혼란을 중단시키려면 조정에서 제대로 된 순정(純正) 금화와 태환 지폐를 발행해서 금융 질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장문의 보고서를 내 앞으로 올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태환지폐를 찍을 예정인데 왜 금화를 따로 만드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다. 근본적으로 금화가 일정량 함께 유통되지 않으면 지폐가 신뢰를 얻기 힘들다. 시장에서는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뢰 때문에 태환지폐를 받는 것인데, 돈뭉치를 은행에 들고 가서 금괴를 받으면 어쩔 것인가. 저울을 들고 다니며 무게를 재고 잘라서 값을 치를 건가.
결국 시장에서 통용되는 건 금괴가 아니라 금화다. 재무부 금고에 금덩이가 있고 지폐가 그 금덩이와 같은 가치가 있다는 약속은 시장에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아닌 말로, 금고에 금 따위 없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지폐의 가치를 불신하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밀어닥친다. 물론 옛날 저화 보급 때처럼 국가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수납하면 좀 낫겠지만 민간에서는 당연히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로 지폐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통용되는 금화가 필요한 거다.
금화에 붙일 화폐 단위는 원(圓)으로 잡아놓았다. 지폐도 같은 단위로 발행한다. 기존에 대용지폐로 사용하던 재무부 금표는 나라에 낸 금의 무게로 가치를 표시했으니 전혀 체계가 다른 셈이다. 현재 예정하고 있는 금화 1원에 들어가는 금의 양은 반 냥(18.75g)으로 순도는 90%다. 고액권을 발행하는 게 목적이므로 1원보다 작은 금화는 없다. 대신에 2원, 5원짜리 금화는 만든다. 초고액권이 될 10원짜리도 소량이기는 해도 발행 계획은 있다.
은화와의 교환 비율은 금과 은의 국제 시세에 따라 1:15로 잡고 있으므로, 새 금화 1원은 은화 7냥 50전 어치에 해당한다. 은화 1냥이 동전 100푼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으므로, 새 금화 1원은 동전 750푼이 된다.
“한 푼짜리 동전으로는 무려 750닢, 가장 큰 열 푼짜리 동전으로 해도 75닢이잖소. 수가 안 맞소.”
“폐하. 그건 꼭 정확하게 맞추는 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재무부에서 상신한 ‘백(百)’이라는 글자의 의미가 딱 백 개로 맞아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많다는 뜻으로 한 말임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그….. 사용하는 이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은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 하오.”
당백전, 당백전하고 부르면 분명히 정말로 그게 동전 백 닢어치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들이 생긴다. 그 말인즉슨 금화의 값을 본래 가치보다 ⅓이나 절상시켜서 누군가를 등 쳐먹으려고 드는 사기꾼들이 사방에서 기어 나온다, 그 말이다.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당백전 같은 안 좋은 이름은 피하는 편이 낫다. 은화보다 조금 더 중요한 보물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대한중보(大韓重寶)면 충분하다.
“당백전 같은 부정확한 이름은 절대 붙이지 마시오. 내 년부터 유통할 새 금화는 전면에는 대한중보라 새기고 후면에는 태극을 새겨 우리 대한의 위엄을 떨치게 할 예정이니 그것으로 충분하오.”
“알겠사옵니다…..”
조승일은 내심 아쉬운 듯 말꼬리를 흐리며 물러섰다. 기껏 제안한 이름을 물리쳐서 좀 안 됐지만 그래도 그 이름은 안 된다. 고액권이 정식으로 시장에 풀리면서 줄 영향이 그렇지 않아도 걱정되는 판인데 인플레이션을 조장할 수 있 는 그런 이름은 안 되지. 안 되고말고.
7.
내년부터 시작할 사업이 많기도 하다. 금화도 유통할 예정이고 해군사관학교도 문을 열 예정이다. 해군사관학교가 들어설 예정지는 강화도로, 해군의 최고 핵심 수영인 중부통제영 본영이 교동도에 있는지라 강화도로 후보지를 정했다.
원래 세계 한국에서는 해군작전사령부나 해군사관학교가 모두 진해에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해군이 만든 기지 시설을 인계받아 사용한 탓이었지 진해가 한국에서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에 반해 조선 고종이 근대 해군을 양성하려고 설립한 통제영학당은 강화도에 들어섰다. 비록 근대 해군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일본에 의해 폐교되었지만, 해군사관학교를 세우기 적당한 곳이 강화도라는 판단을 이쪽이나 저쪽이나 공유한다고 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서해는 남해나 동해에 비해 바다가 얕아서 훗날 우리 전선들이 더 커진다면 조금 곤란한 점이 있기는 하겠다만.”
그래도 그건 훗날 이야기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현대 한국 인천항이나 평택항처럼 대규모 항구를 건설해서 큰 배를 댈 수 있게 하든지, 해군의 중심을 동해나 남해로 옮기든지.
하지만 한강 하구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입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교동도에서 강화도로 이어지는 섬들은 앞으로도 해군의 주요 거점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해군 사관학교 같은 주요 시설이 강화도에 들어서는 건 지극히 타당한 일이다.
“건물도 다 지어졌고, 생도 모집도 완료했고…..”
4년 전 조정에서 논의한 바로는 강무관에서 매년 4백 명의 생도를 선발하여 기초교육을 1년 동안 실시한 뒤에 3백 명은 육군, 1백 명은 해군사관학교에 별도로 진학시켜 각 군에 적합한 전문적인 교육을 추가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 계획에 변동이 좀 있었다.
강무관과 통해관은 각각 3백 명, 1백 명을 처음부터 별도로 모집한다. 새 육군사관학교는 따로 설립하지 않고 강무관이 그대로 육군사관학교 역할을 계속한다. 두 학교에서는 모집한 생도들을 통합교육 없이 4년 동안 별도로 교육해서 군관으로 임관시킨다.
영국 해군처럼 소년 시기부터 복무하면서 일단 견습사관으로 몇 년씩 굴러야 하고 그런 건 없다. 필기시험과 면접, 체력 검사를 거쳐 합격하면 먼저 2년 동안은 이론 수업을 받고 나중의 2년 동안은 보조군관으로 바다에 나가 배운 바를 실습한다.
무과가 원래 그랬듯이, 시험을 치는 데 연령이나 신분 제한 같은 건 두지 않았다. 덕분에 1기생인 올해 신입생 중 최고령 생도는 무려 52세라는 무지막지한 보고를 받았다.
“임관하면 거의 환갑 아닌가?”
“젊은 생도들과 같은 조건으로 치른 시험을 통과했으니 잘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일단 두고 보시옵소서.”
내 생각 같아서는 훈련 중에 쓰러져 죽지만 않아도 다행 일 것 같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해군 제조 이한제의 말마따나 어쩌면 노익장을 자랑하는 해군의 명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내년부터 할 일이 많은데 이 빨갱이 놈들은 우리한테 안 줘도 될 고민을 자꾸만 더 얹어주는구나.”
‘빨갱이’라 함은 당연히 태평천국, 홍서당을 가리킨다. 이놈들이 우리한테 골치가 되는 건 후송이 난장판이 되면서 우리 역시 피해가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국에 돌아와서 쌓인 보고서를 읽으니, 대남도에서 접했던 것보다 훨씬 상세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쪽에서 생각한 것보다 후송 쪽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형주도통부는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다. 작년 가을에 형양성이 함락되자 결정타를 맞았다. 태평천국은 형양을 거점으로 삼아 형주도통사의 치소인 장사를 공격했다. 장사는 4개월간 포위공격을 받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도통사 진계옥도 죽었다.
“도통사쯤 되는 작자가 왜 진즉에 도망치지 않고 주저앉아 있다가 죽었는가?”
“기필코 장사를 지켜야 한다는 송태후의 불호령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장사를 버리고 도망치면 도통사의 구족을 멸할 것이고 도통사 본인은 백각형에 처하겠다고 언명한 칙서가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도통사가 칙서를 무시하고 도망칠까 하고 망설이는 사이 성을 포위한 태평군은 ‘너희는 물속에 우뚝 선 바위’라는 노래를 합창하며 장사를 지키는 형주도통부 군사들을 희롱했다고 한다. 물론 굳세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립되어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형주도통사 진계옥은 혹시 올지 모르는 구원군을 기다리며 4개월을 버텼다. 하지만 어느 방면에서도 원군은 오지 않았다. 군량은 떨어져 가고 병사들은 계속 성벽 너머로 탈주하자 결국 그는 견디지 못했다. 구명을 청하면서 투항했 다.
“하지만 홍적(紅賊)은 도통사를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은을 탐해 백성들을 착취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서 도통사를 땅에 눕히고 가슴 위에 큰 널빤지를 얹은 뒤 그 위에 백만 냥의 은을 쌓아 그 무게로 눌러 죽였다고 합니다.”
그거 예전에 어디서 본 처형법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하여간 형주도통사는 봉선 때문에 날린 돈을 벌충하려다가 죽고 말았다. 이제 형주도통부 전역이 사실상 태평천국의 땅이 되었고, 주변 지역들은 난리가 났다.
“그 빨갱이들의 다음 목표는 어디라고 보는가?”
“한양도통부가 되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생각하는 바는 같다. 한양도통부는 장강을 이용해 보급로를 유지하기 쉬운 곳이고 수도 남경으로 직행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한양도통부는 형주도통부보다 훨씬 형편이 낫고, 군대의 기강도 서 있다. 그러니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청나라가 북방에서 협격한다면 큰 타격을 줄 수 있겠지만, 지금 금나라에서 내란이 터진 상황인데 청군이 송을 칠 수도 없을 테고…..”
후송에 타격 좀 주는 것보다는 후금 쪽 상황을 안정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대한도 후금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저 빨갱이 놈들 때문에 그쪽 방면에 주의를 집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후금 상황이 무척 짜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