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1998
4부 382화(1998화)
1,
숙사 입구에는 단단한 자물쇠가 걸려 있다.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감독관의 재촉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고, 밖에서 문이 잠긴다. 그러면 아침이 되어 일터에 갈 시간이 될 때까지 열리지 않는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엄중하게 감시하지는 않았다. 일만 끝나면 감독관들도 별 통제는 가하지 않았고, 같이 술을 마신다거나 노름판을 벌인다거나 고향에서 보내 온 편지를 대신 읽어주거나 답장을 대신 써준다는 핑계로 숙사 사이를 오갈 수도 있었다.
가끔은 감독관들 모르게 아편을 피울 수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국법으로 아편을 금지하고 있어서 걸리면 심하게 채찍질을 당했지만, 그 맛을 차마 잊지 못한 일부 묘노들은 어떻게든 아편을 구해 동료들과 나눠서 피우곤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갑자기 묘노들에 대한 통제가 지금처럼 엄중해졌다. 당연히 분위기가 흉흉해졌지만, 감독관들은 묘노들의 불만을 달래기는커녕 윽박지르기만 했다.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채찍이 날았고, 견디지 못하고 대들면 가차 없이 몽둥이가 내리쳐졌다.
하지만 감독관들은 알지 못했다. 묘노들은 목화밭에서 일하는 낮 동안에 얼마든지 소식을 전달할 수가 있었고, 밤에도 파수꾼들이 알지 못하는 새소리나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 몰래 파놓은 토굴 등을 이용해서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날을 맞췄다.
“지금이다!”
몸집 작은 사내 하나가 마룻장 밑에 판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숙사를 빠져나간 사내가 바깥에서 잠긴 문을 열었다. 열쇠를 쥔 손은 피에 젖어 있었다.
“빨리, 빨리!”
빠져나온 사내들은 급히 농기구 창고로 달려갔다. 장작 패는 도끼와 삽, 괭이, 낫, 도리깨 따위 도구들이 순식간에 바깥으로 나와 분배됐다. 죽은 파수꾼의 총을 든 이도 있었다.
배상제회 접주 주무양은 이들을 향해 빠르게 속삭였다. 감독관들이 혹시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모조리 처리해야 했다.
“모든 숙사의 문을 열 때까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은밀하게 움직여라. 동지들이 전부 밖으로 나오면, 그때 일제히 덮친다.”
“알겠습니다, 접주!”
지시를 받은 사내들이 잽싸게 달려가 아직 잠겨 있는 다른 숙사들의 문을 비틀어 열었다. 뛰쳐나온 사내들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창고로 달려와 자기들도 도구를 들었다. 피가 묻은 도리깨를 든 사내 하나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외쳤다.
“이제 하는 거지요, 접주!”
“그렇네. 우리 등에 채찍을 휘두르던 놈들, 우리 목에 밧줄을 걸고 평생 부려 먹겠다던 그 개 같은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온 걸세. 이게 다 천왕께서 우리를 이끄신 덕분이지.”
접주들은 한인들의 학대와 매질에 시달리는 묘노들에게 배상제회가 안내하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었다. 천왕을 만날 수 없는 바다 건너 이국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천주, 상제의 힘은 세계 어느 곳이든 가림없이 미치므로 어디에서 건 열심히 믿기만 하면 무방하다고 가르쳤다.
풀려날 전망도 없이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한 묘노들은 빠르게 이들의 가르침에 빠져들었다. 그 리고 자기들을 억압하는 못된 한적(韓賊)들을 모조리 쳐 죽이라는 지시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모두 나왔습니다, 접주.”
“고생했네.”
인근에 있는 몇몇 농장에 침투해 있던 접주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관헌에게 붙잡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불안했다. 혹시 실패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컸다. 하지만 한국 관헌들은 이 농장에는 오지 않았다. 잡혀간 접주들이 주무양에 관해서 전혀 토설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주무양은 한국 관헌들의 잔인한 고문에 장렬하게 순교했을 그 동지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상제시여, 순교한 형제들에게 약속대로 천상의 극락을 내리소서. 그리고 이제부터 장렬히 순교할 남은 형제들에게도 극락을 내리소서.’
짧은 기도는 곧 끝났다. 주무양이 횃불을 들었다. 수백의 눈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모두 횃불을 드시오! 감독관들이 있는 숙사를 불태우고, 뛰쳐나오는 놈들을 모두 때려잡으시오! 그리고 이웃 농장에 있는 형제들을 구출하러 갑시다!”
“알겠습니다!”
마침내 함성이 올랐다. ‘묘노’라는 멸칭으로 불리면서 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이 사내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이미 피는 흘렀다. 절대 조용히 마무리되지는 못할 터였다.
2.
“들으라!”
“예에에에에!”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쓴 사내 한 사람이 바윗덩이 위에 올라가서 크게 외쳤다. 그 밑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사내들이 함께 함성을 외쳤다. 다들 옷차림은 남루했으나 그들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리고 손에는 온갖 연장을 들었다. 삽, 곡괭이, 쇠지레, 몽둥이 등등.
이들이 든 연장에는 흙과 석탄이 아니라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개중에는 뇌수와 살점, 뼛조각이 묻은 것들도 있었다. 이는 이 연장들이 석탄을 캐는 대신에 사람의 육신을 쪼개고 영혼을 파내는 데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는 흔적이 었 다.
붉은 두건을 쓴 사내, 덕성도 접주 위소열이 흥분해서 외쳤다. 화약고를 지키던 파수꾼의 머리통을 직접 곡괭이로 찍어버렸을 때 덮어쓴 피가 아직도 그의 얼굴을 적신 채였다. 지금 그가 머리에 쓴 두건도 잘 보면 그냥 붉은 게 아니었다. 피에 젖은 부분은 색깔이 달랐다.
아니, 그 파수꾼의 피에만 젖은 게 아니다.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 양민이라며, 10년이나 일해서 딸린 빚도 다 갚았고 장가도 들었다며, 송나라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차라리 살기에 나은데 역모 따위 가담하고 싶지 않다고 버티던 진가 놈의 머리를 부술 때 튄 피도 묻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천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천명에 따라 싸우다 죽은 용사는 상제께서 다스리시는 천상극락에 올라 12명의 천상 처녀의 시중을 받으며 영원한 복락을 누리리라 하셨다. 그대들이여, 형제들이여! 힘써 싸우라!”
“상제 만세! 천왕 폐하 만세! 야만인들을 멸하라! 우리 한인의 세상을 만들자!”
멸만흥한(蔑蠻興漢)은 배상제회가 내세우는 구호 중 하나다. 중화의 주인인 한인(漢人)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주변의 이적들을 멸하고 한인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구호다.
여기서 만인(蠻人)의 범위는 중원을 에워싸는 모든 족속을 통칭했다. 한국인만이 아니라 일본인, 남만인, 서양인, 화북인까지 전부 만인이었다. 오직 후송에 거주하는, 그리고 상제와 천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자들만이 진정한 한인이었다.
근거? 근거는 간단하다. 상제의 둘째 아들인 홍수전이 한인의 몸으로 이 세상에 왔다. 그 사실만큼 한인들이 선택 받은 족속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어디 또 있겠는가.
“너희가 겪어온 억압과 박해는 오늘로 사라지리니! 너희들이 잃을 것은 채찍과 사슬이요, 얻을 것은 자유와 복락이라! 너희가 겪은 고난은 훗날 얻을 복락을 위한 씨앗이었다. 이제 너희는 모두 극락에 갈 것이다. 자, 형제들이여! 가자! 가서 저 만적들에게 신벌을 내리자!”
“신벌을 내리자!”
탄광에서 산길을 조금만 내려가면 마을이 있다. 해치운 파수꾼들이 가지고 있던 총은 몇 자루 안 되었지만, 마을을 습격하면 적어도 수십 자루의 총과 더불어 탄약도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이런 산자락 마을 주민들은 산짐승들 때문에라도 총을 꽤 가지고 있으니까.
마을에 순검대가 주둔하고 있기는 하지만 야밤에 기습하면 놈들도 당황할 거다. 획득한 화약으로 조잡하나마 척탄도 잔뜩 만들었으니, 일시에 투척하면 순검들도 혼이 나가리라.
여기에서 일하던 묘노들은 태반이 후송 관병 출신이라 무기 다루는 일도 익숙하고, 야습 정도는 손바닥 뒤집기만큼 쉽다. 마을을 점령하고 모두가 총을 든다면 뒤늦게 달려올 관병 따위는 얼마든지 손쉽게 격퇴할 수 있으리라.
“마을에 내려가면….흐흐!”
어디 무기뿐이랴. 재물과 계집도 있으리라. 광산 숙사에 갇혀 비역질밖에 못 하던 신세다. 진짜 여자를 접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다들 숨이 거칠어지고 눈에서 빛이 돌았다.
“잠깐, 접주. 이놈들은 어쩔까요?”
위소열이 흥분한 한패와 함께 철로를 따라 아랫마을로 뛰어가려는 참이었다. 잊고 있었던 포로들이 끌려 나왔다. 광산에 있던 일반 한국인 기술자나 감독관, 파수꾼 중 싸울 엄두를 못 냈거나 바로 항복한 자들 십여 명이었다.
“계속 끌고 다니기는 번거로운데…..”
이런 발언이 나오는 의도는 명확했다. 아까는 날뛰는 놈들부터 제압해야 했으니까 항복한 놈들은 묶어만 놓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놈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생긴 거다. 포로 따위 귀찮다는 생각과 더불어서.
위소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놈들 모두 평소 가엾은 묘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자들, 휘두르라고 시키던 자들 아닌가. 용서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미 피를 본 이상 이들 몇을 살려준다고 해서 한국 관병들이 이들을 용서하지도 않을 터였다. 위소영은 어설픈 자비를 베풀기보다 확실하게 동지들의 사기를 올리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자들은 우리 성도들을 오랜 세월 학대했으므로 모두 신벌을 내림이 마땅하다! 집행에 참여하고 싶은 자들은 앞으로 나오라!”
“사, 살려주게! 나는 자네들에게 그래도 잘해주지 않았나!”
애타는 호소가 터져 나왔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몰려드는 묘노들의 고함과 연장을 내리찍는 소리 속에서 한국인들의 비명이 곧 스러졌다. 피투성이가 된 시신들을 본 위소열이 웃으며 크게 외쳤다.
“자, 이제 정리를 마쳤다. 다들 가자! 마저 신벌을 내리자!”
“만이들에게 신벌을!”
결의를 다지고 내려가려는 참인데 갑자기 아래쪽에서 수십 필은 족히 될 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멈칫하는 순간 십여 발은 족히 될 총성이 울렸다.
“아악! 악!”
“으헉!”
“관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을 탄 한국 관병들이 들이닥쳤다. 마을에 본래 주둔하는 순검대보다 그 수가 몇 배나 되었다. 오늘이 봉기일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비밀로 지켰을 터인데 어찌 새어나갔기에 저들이 저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진가 놈을 때려죽여 잠재적 배반자들에게 경고했을 때 진가처럼 오래 일한 놈 몇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주변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놈들이 산밑으로 내려가 고발한 게 분명했다.
진상을 파악한 위소율이 이를 갈았다. 척탄을 만들고 포로들을 처형한다고 시간을 허비한 게 실수였다.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말고 아랫마을로 내리뛰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당장은 맞서 싸워야 했다. 어둠 속이니 아직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위소율이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당황하지 말라! 모두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날아든 탄환이 위소열의 미간에 명중했다. 이제껏 선두에 서서 동지들을 이끌던 그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당장이라도 산 아래로 쳐내려갈 기색이던 묘노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병들이 그 뒤를 쫓았다.
“제기랄, 고변을 받았으면서도 이 꼴이라니.”
우포청 순검대 정위 사종태가 말고삐를 당기면서 이를 갈았다. 상부에서 묘노들의 동태가 수상하니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명을 받고 출동 준비를 갖췄고, 혹시나 하고 대비하던 참에 광산에서 도망친 묘노 이탈자의 고변까지 받고 바로 출동했는데도 늦고 말았다.
“생존자를 찾아라! 사살한 도적놈들의 사체를 모아 수를 세라! 살아서 도망간 놈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확인해야한다!”
“예, 나리!”
사종태는 초조한 표정으로 수염을 당겼다.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에서 용명을 떨친 장수인 동해위의 후손으로서 이런 실수를 범하다니, 이런 치욕이 따로 없었다.
3.
“아니, 이놈들은 어떻게 이런 멍청한 짓을 할 수가 있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
손에 칼을 든 하진교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태황에게 하사받은 갑옷을 챙겨 입고 신나게 달려왔는데 때려잡을 도적이 하나도 없었다. 기껏 뽑은 칼 인데 피 한 방울 묻히지 못하고 도로 칼집에 꽂게 생겼다.
“반란을 일으킬 거면 뭔가 제대로 준비하고 일으키든지 해야지, 고작 섬 하나조차 제대로 손에 넣지 못할 거면서 이게 무슨 수작인가.”
하와국에서 일하는 묘노 숫자는 본섬에만 대략 2천 명쯤 된다. 대부분은 한인들이 소유한 농장에서 일한다. 하와인들이 소유한 농장에는 없다. 하와인들이 묘노를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쥐만한 것이 뭐 제대로 힘을 쓸 것 같이 생기지를 않아서다. 딱 보면 조그만 게 허약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 조그만 것들이 일을 쳤다. 몇몇 농장에서 일제히 난리를 일으켜서 한인 주인을 죽이고 이웃 농장까지 습격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폭동 소식을 듣고 출동한 하와국 관병과 마주쳤고, 곧바로 상어에게 물린 물개처럼 박살이 났다.
반란에 참여한 묘노들은 절반 가까이가 머리통이 깨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살아남은 놈 일부는 공포에 떨며 자비를 청했다. 요즘 나랏일에 좀 신경을 쓰느라 피로해서 밤새 늘어져 자고 있던 하진교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나 왔을 때는 이미 싸움이 다 끝난 뒤였다.
“모처럼 신나는 일이 좀 생기나 했더니! 이런 오라질 놈들.”
하진교가 투덜거리며 신하들에게 뒤처리 지시를 내렸다. 본섬인 하와도만이 아니라 다른 섬에서도 묘노들이 혹시 난리를 일으켰는지 살피고, 상황을 취합하여 조정에 알리 게 하라는 지시였다. 이런 큰일은 마땅히 한양에 보고해야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