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
1부 002화
– 1 –
“전하, 어서 기침하시옵소서. 시간이 늦었습니다.”
간드러지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이상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도대체 누구야? 난 혼자 사는데, 이렇게 깨워줄 만한 사람이 없는데? 그리고 기침? 기침이 나오면 하는 거지 누가 시켜서 하는 건가? 아니, 근데 전하라고? 누가 날 전하라고 불러? 꿈인가?
꿈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뭉그적거리며 뒹굴었다. 다시 잠들려는데 문득 오늘 낮에 있는 검도부 선배 결혼식 생각이 났다.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가려면 서둘러야 하니, 일찍 일어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제 마신 술 탓이지 머리는 좀 아프지만 금방 낫겠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눈을 뜨니 보이는 풍경이…내 방이 아니었다. 책상에 엎드려서 잔 것 같은데 반듯이 누워 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저 천장은 뭐야? 내 방 천장이 저렇게 밋밋했나? LED 전구는, 내가 붙여 놓은 이런저런 스티커는 다 어디 갔어?
이상함을 느끼고 보니 내가 덮은 이불, 깔고 있는 요도 내 것이 아니었다. 재질은 뭔지 모르지만 매끈하고 가벼운 내 이불 대신에 묵직하고 두꺼운 겨울용 솜이불이 나를 덮고 있었다. 옛날 할아버지께서 덮고 주무시던 그 이불과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이불을 만든 천은 할아버지가 쓰시던 것보다 훨씬 고급이었다. 아마도 실크지 싶었다. 게다가 뭐를 그린 건지는 몰라도 금실로 아로새긴 온갖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침대는 어디로 사라지고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이건 내 방이 아니었다.
황급히 일어서서 보니 몸에 걸친 옷도 내 옷이 아니었다. 분명히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잠들었을 텐데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하얀 한복 바지저고리였다. 이불처럼, 언뜻 보기에도 진짜 고급 실크가 분명해 보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 어서 의관을 갖추소서. 너무 늦기 전에 대왕대비께 아침 문안을 드리셔야 하옵니다.”
“대왕대비? 그게 무슨 소리야!”
급히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왠 사람이 사극에서나 보던 조선시대 관복을 입고 내 옆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흠칫 놀란 나는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몇 발 물러서기도 전에 뭐가 등에 닿는가 싶더니, 병풍이 쓰러졌다.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놀란 발걸음이 멈췄다.
“다, 당신 누구야! 아, 아니, 아저씨 누구세요!”
“전하, 소신을 몰라보시나이까? 소신은 내시부 소속 내관….”
고개 숙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말했지만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분명히 그 입에서 나온 몇 개 단어만으로도 충격이 컸다.
전하? 소신? 내시부? 대왕대비?
이건 21세기에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사극에서나 나올 말이지. 저 사람, 일단 남자인 것 같기는 한데, 저 사람이 입은 옷도 마찬가지다. 사극에나 나올 관복이다. 머리가 당기는 것 같아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니, 어처구니없게도 상투가 틀어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누가 나한테 장난을 치나? 혹시 몰래카메라?
몰래카메라라고 생각하려니 그것도 수상했다. 그런 건 유명 인사들이나 당하는 거 아닌가. 평범한 대학생에 공시족인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몰래카메라 말고는 답이 없었다. 어쩌면 어떤 예능프로 같은 데서 ‘일반인에게 갑자기 바뀐 환경을 제공해 보았습니다’ 하는 프로를 제작했을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렇잖은가? 요즘은 케이블 방송이나 인터넷 채널에서 하는 개인방송이 워낙 많으니까, 이런 미친 기획을 실행에 옮긴 방송이 있을 수도 있다. 언뜻 보기에 카메라는 없는 것 같지만, 그거야 내 눈에 안 보이는 장소에 핀카메라 같은 걸 숨겨두었을 수도 있지 않나.
“저, 저기요, 아저씨.”
일단 상대할 사람은 하나뿐이다. 내 앞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저 남자.
“저기요, 고개 들고 대답 좀 해 봐요?”
목소리는 요상하지만 일단 옷도 그렇고 얼굴도 남자처럼 생겼으니 남자라고 치고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에는 뭐라고 묘사하기 힘든 당황한 표정이 엿보였다.
“마, 말씀을 왜 그리 하시나이까. 전하, 언행을 바로 하시옵소서.”
관복을 입은 남자는 겨우겨우 한 마디를 하더니 곧바로 또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이상한 말 하지 마요. 저기, 자꾸 날 전하라고 부르는데, 아저씨 도대체 누구예요?”
“저, 전하. 소신은 내시부….”
“아니, 전하니 내시부니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봐요. 아저씨 배우죠? 여기 어디 있는 세트장이에요? 도대체 뭘 보고 날 고른 거예요?”
붙들고 이야기하면 사실대로 말해줄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는데, 발끝에 뭔가 딱딱한 물건이 닿았다. 이건 뭐지?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보았다.
이불 밑에 있는 물건은 단단한 돌덩어리. 나는 조심스럽게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육각형 돌덩어리…이건 할아버지가 나한테 주신 연적이잖아! 용 세 마리가 새겨져 있는 문양까지 똑같았다. 여기, 내 방이 맞는 건가?
하지만 지금 내 손에 있는 연적은 할아버지가 주셨던 바로 그 물건이 아니었다. 분명히 각이 져 있었던 여섯 번째 모서리가 둥글어져 있었다.
아니, 여섯 번째 모서리 자체를 구분할 수 없었다. 여섯 모서리 모두가 둥글었다. 각이 져 있었다는 흔적도 없었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물건인가…?
아리송한 기분으로 연적을 내려놓으려는 참에 ‘어젯밤’에 들은 여자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소원을 이루어주마…소원을 이루어주마…소원을 이루어주마…!
“이런 씨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정말인가? 정말인가? 정말 소원을 들어줘서, 날 왕으로 만들어준 건가? 13대조 할아버지에게 저 연적을 전해주었다는 그 천녀가?!
그런데 젠장, 소원을 들어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미녀를 안겨 주거나 로또에 당첨되게 해 주는 정도라면 몰라! 아예 시간을 거슬러서 조선시대로 가서 왕이 되게 해줬다고?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이게 말이 돼?
“나…나가요. 혼자 있어야겠어요.”
“저, 전하? 대왕대비께 아침 문안 인사를….”
“나가라고요!”
일단 내관이라고 자칭하는 그 아저씨부터 방에서 쫓아냈다. 도무지 현실이라고 여길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주변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밥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이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밥을 받아먹나?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이 시간이 흘러갔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방안에 갇혀 있으려니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허기는 참더라도 갈증은 견디기 힘들었다.
점심때쯤 되었을 때 견디다 못해 주위를 둘러보니 방 한 쪽에 주전자와 잔이 놓인 쟁반이 있었다. 자리끼인 모양인데, 맛을 보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음식 달라는 말은 무서워서 못하면서 방에 있는 물은 마신다는 게 뭔가 어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요강도 있었다.
갈증이 가시자 이불을 덮어쓰고 귀를 틀어막은 채 하루 종일 생각했다. 내가 정말 조선시대로 날아와서 왕이 된 거라면, 여기는 아마도 한국, 서울일 것이다. ‘내’ 얼굴에 수염이 거의 없는 걸 보면 나이는 별로 많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면 시기는 언제일까? 조선 초기? 중기? 후기? 그리고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실존하는 진짜 왕의 몸속에 들어온 걸까, 아니면 새로운 인물일까? 어쩌면, 조선과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다른 세계인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생각이 자꾸 끊겼다. 하루 종일 누군가 찾아와서 시끄럽게 굴었기 때문이다. 전하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어쩌구 하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지만 내 대답은 계속 같았다.
“전하, 심기가 불편하시옵니까? 어의를 대령하였습니다. 부왕의 상을 치르신 슬픔에 젖어 계신 것은 당연한 일이오나, 전하의 평안에 만백성의 안위가 달려 있사오니 부디 옥체를 소중히 하소서.”
“어의고 어이고 필요 없어요! 내버려 두세요, 제발! 난 아무것도 몰라요. 모른다고요!”
밖에서는 우왕좌왕하는 발소리, 그리고 걱정스럽게 오가는 말소리가 계속 들렸다.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계속 신경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나를 괴롭혔다.
밥도 굶으면서 이런 공방을 하루 종일 치르고 나자 진이 다 빠졌다. 배가 고파서 눈이 팽팽 돌 지경이 되자 제대로 머리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밖에 누구 있어요?”
“전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급히 문이 열리더니 아까 그 뭐라고 자기 이름을 대던 ‘내관’ 아저씨가 뛰어 들어와 엎드렸다. 뭐라고 할 기운도 없어 그냥 떠오르는 대로 주워섬겼다.
“저기, 내가 왕이에요?”
“그러하옵니다. 대행대왕께서 승하하셨으니 마마께서 이제 이 나라의 주상이시옵니다. 전하, 부디 언행에서 체통을 지켜 주시옵소서.”
대행대왕(大行大王), 아직 묘호가 정해지지 않은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도 갓 즉위한 상태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부왕의 상을 치른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누가 떠들었었지.
“상례를 치르느라 슬픔에 심신이 약해지심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만백성이 전하의 성덕을 입기만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부디 슬픔을 떨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옵소서. 전하께서 흔들리시면 이 나라가 흔들립니다.”
처음에는 내가 당황해서 살필 겨를이 없어 미처 몰랐는데 이 ‘내관’은 수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묘하게 여자 같은 목소리…아무래도 진짜 ‘내시’인 게 분명해 보였다. 나 정말 조선에 온 건가. 그리고 진짜 왕이 된 건가.
좋다. 그럼 한 가지만 더 시험해 보자. 어쩌면 여기는 정말로 잘 만들어진 세트장이고 저 사람은 숙련된 연기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럼, 나 밥 좀 줘요. 얼큰한 라면이 먹고 싶은데.”
가능한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부탁을 했다. 저 사람이 진짜 연기자라면, 천연덕스럽게 라면 같은 건 없다고 하겠지? 그런데 상대방이 보이는 태도가 예상 밖이었다. 단호하게 부정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게 뭔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면이라 하셨습니까? 그게 무엇인지….”
“아, 라면 몰라요? 얼큰하게 끓여서 먹는 거. 그 부드러운 면발이 얼마나 맛있는데.”
“아, 알겠사옵니다. 수라간에 일러 당장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이게 아닌데? 그런 거 없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내가 멍해 있는 사이 ‘내관’은 방 밖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뭘 가지고 나타날지 예상할 수가 없어 불안에 떨고 있는데, 이윽고 사라졌던 내관이 나타났다.
“전하, 수라간에 일러 면을 마련하도록 하였습니다.”
내관에 이어 궁녀 복장을 한 여자 두 사람이 큼직한 상을 들고 들어왔다. 상 위에 놓인 큼직한 사발에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칼국수(!)가 담겨 있었다. 닭고기라도 좀 얹어 주면 좋을 텐데 고명은 채소뿐이고 고기라곤 눈 씻고 봐도 없다. 국상중이라 그런가 보다.
두 여자가 쓰는 말은 궁중용어인 것 같았다. 뭐라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분명히 우리말은 우리말인데 단어가 죄다 낯설어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드니 음식만 눈앞에 보이고, 상을 들고 온 여자들이 물러나는 모습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허겁지겁 삼키는데 맛있긴 맛있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배가 웬만큼 차고 나자 기운이 좀 났다. 국수는 맛은 좋았지만 내가 원한 얼큰한 맛이 전혀 없었다. 고추가 들어간 다른 음식도 없는 걸 보면 ‘지금’은 아마도 고추가 들어오기 전, 16세기 이전인가 보다.
음식을 먹고 나자 아무래도 내가 정말 과거에 왔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몰래카메라 제작진이 16세기 이전 음식상을 그대로 복원할 정도로 성의가 있지는 않을 테니까.
“저기, 내관 아저씨. 나 좀 봐요.”
“말씀을 법도에 맞게 하시오소서, 전하.”
이름 모를 내관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왕이 뭐랄까,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여 불안한 모양이다.
“지금이 언제예요? 그리고 내가 누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