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
1부 020화
– 7 –
“전하, 지금은 한가로이 병기나 만들고 계실 때가 아니옵니다. 올해는 흉년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바, 각지에 부과한 공물도 그 액수를 줄이시고 새로이 명하신 염초를 굽는 부역도 감하셔야 하실 줄 아옵니다.”
젠장,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내가 왕이 되고 지난 2년 동안 흉년이었다고 했지만 사실 엄살이지, 진짜 흉년은 아니었다. 웬만큼은 살 만 해서 동네에 따라서는 풍년도 들었다. 어느 정도 여윳돈은 챙길 수 있었고, 그 돈으로 조총도 만들었다. 올해도 풍년이 들 줄 알고 한참 돈 쓸 계획을 세워 두었는데….
“전하, 지난 7월에 태풍이 두 차례나 닥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의 농사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게다가 이번 달에는 큰 비가 내려 강가에 있는 논이 모두 침수되었습니다. 조신들을 보내어 피해 입은 지역의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하고 부역과 조세를 감면하소서.”
사간원에 속한 정언(정6품) 송흠이 열변을 토했다. 요즘 내가 자기들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여겼는지, 사직서까지 내 놓고 행하는 간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자식, 지난달에 조총 시사 때도 왕이 이런 데 몰두하다니, 말도 안 되는 행동이라고 계속 덤볐었지.
“양도의 농사가 입은 피해가 그토록 큰가?”
“그러하옵니다. 지금 충청도에 성을 쌓으라 명하셨사온데, 이것 역시 중단하시어 민생을 소생시키셔야 하옵니다. 농사가 흉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어찌 부역을 할 힘이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충청도는 당장 외침을 당할 일이 없는 곳이기도 하고. 헌데 저놈은 아직 내게 주장할 거리가 남은 모양이었다.
“또한 각 섬에 있는 목마장에서 지방관들이 말의 수효를 속여 보고하는 일이 빈번하니, 어사를 보내 엄히 확인하소서. 단 엄벌에 처한다 하면 저들이 또 속임수를 써서 말의 수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게 될 테니,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 하셔야 확인이 쉬울 것입니다.”
듣다 보니 생각났다. 이 송흠이라는 자는 지난 6월에 정전에 벼락이 떨어졌을 때 그게 다 내 탓이라는 소리를 했었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국가에 장차 도를 잃어 패망하게 되는 일이 있으려면 하늘에서 먼저 천재와 시변을 내리어 꾸짖고 경고하는 것인데, 그래도 변통할 줄을 모르면 손상과 패망이 따라오게 된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경연에 납시지 않고 간하는 말을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박이 철 아닌데 내리고 별빛이 도수를 잃었으니, 하늘의 꾸짖어 경고함이 역시 현저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도 또한 신 등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손상과 패망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공조에 명을 내려 팔뚝 굵기에 마흔 자 길이 쇠기둥을 만들게 했다. 궁궐 후원에 이 기둥을 세우고, 근처에 못을 판 뒤 쇠사슬 한 가닥을 연결해서 못 안으로 늘어뜨리도록 했다. 사흘 전에 완성한 이 피뢰침에 낙뢰가 떨어지면 이 녀석이 뭐라고 할까?
“그래, 흉년이 들었으니 진행하던 국사를 멈추라, 이 말인가? 다른 할 말은 없는가?”
“군적청을 이제 그만 파하시옵소서. 군적이란 곧 역을 부과하는 장부이기도 합니다. 흉년에 힘들어하는 백성들에게 역을 부과하면 원성이 치솟을 것입니다. 군적청은 선대왕 시절 임시로 설치하였던 관청이고 이제 정리도 거의 끝났으니, 그만 파하셔도 가하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군적청 혁파는 안 될 말이다. 내 목표가 부국강병인데, 정확한 병역대상자 수도 모른 채 어떻게 강병을 만들란 말인가. 군적청은 상설기구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군적을 파악함은 양전(量田)과 마찬가지로 그 정확함을 유지해야 한다. 더구나 토지는 죽거나 새로 태어나지 않으니 20년마다 해도 되지만, 사람은 매년 생사가 바뀌니 어찌 군적을 수시로 고치기를 멈출 수 있겠느냐?”
물론 전산화가 안 되니 실시간 관리는 안 된다. 하지만 가능한 노력은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50먹은 영감은 징병되는데 20먹은 청년은 집에서 노는 꼴이 안 나지.
“그대는 과인이 그대의 충언을 듣지 않아서 사직할 셈인가?”
“아닙니다. 소신, 늙으신 부모를 봉양해야 하기에 벼슬을 내려놓고 돌아가게 해주십사 청하였습니다.”
“또냐?”
일전에 송흠이 같은 이유로 사직을 청했을 때 도승지 권경우가 ‘쓸모 있는 사람이 모두 효도를 핑계 삼아 사직하면 조정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라며 휴가만 주라던 말이 떠올랐다.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하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송흠은 유능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허하노라.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고 돌아오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8 –
성흠 뿐 아니라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올해 농사가 망했다는 보고가 연달아 올라왔다. 젠장, 가뭄이 드는 건 그래도 저수지를 만들면 대비할 수 있는데 태풍은 도대체 어떻게 막지? 그나마 하삼도 중 경상도라도 태풍 피해를 입지 않아 다행이다.
21세기에도 태풍이 몰아치면 방법이 없는데 15세기에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껏해야 태풍이 지나간 뒤에 구휼곡을 나눠주는 이상 뭘 할 수 있을까. 무의식중에 혼잣말이 나왔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 식량공급을 확 늘려 인구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작물들이다. 하지만 셋 다 아메리카에 가야 구할 수 있다. 아마 아직 유럽에 전해지지도 않았을 그 물건들을 어떻게 구해 올 수 있단 말인가.
“전하, 흉년이 든 충청도 일대에서 도둑들이 날뛰고 있다 합니다.”
“먹을 것도 없다며 날뛸 기운은 있단 말이냐. 포도장 정유지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내려가 도둑을 잡게 하라.”
젠장, 말이 좋아 도적이지 결국은 배고픈 백성들 아닌가. 배가 불러야 예의를 안다고, 식량이 부족하니 도적이 생겨났다. 도적이라고 무조건 때려잡으면 내년 농사를 지을 사람이 줄어든다. 이것도 적당한 선에서 진정시켜야 한다.
“충청, 전라도의 각 관청은 보유하고 있는 곡식을 풀어 관내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하라. 단 절대 그냥 나눠주지 말고, 일을 시키고 그 대신 나눠주어라.”
“그렇지 않아도 흉년으로 힘든 백성들입니다. 무슨 일을 시키려 하시옵니까?”
도승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대간들이 반발을 하건 말건 성 쌓으라는 소리 할까봐 긴장 탔나 보다.
“올해는 태풍과 비로 농사를 망쳤다. 허나 내년에는 혹시 한발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흉년이 든 각 고을에서는 관내에 적당한 곳을 골라 저수지를 만들도록 하라. 어차피 올해 수확할 것이 없다면 지금 할 일도 없을 게 아니냐?”
만약에 한창 바쁜 농사철에 부역을 시켰으면 농사를 못 짓는다고 난리가 났을 게다. 기왕 시간이 났으니 땅이 얼어서 파기 힘든 겨울보다는 지금 일을 해 두는 게 낫다. 지금 저수지를 축조하기 시작해야 내년 장마철 전에 완공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전하, 가뜩이나 흉년으로 살기 힘든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킴은 가하지 않나이다.”
“부역이라면 관에서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백성들을 끌어내기만 하는 것 아닌가. 과인이 품은 뜻은 백성들에게 구휼곡을 나눠주되 거저 주지 말고 그 값 대신 일을 하게 하라는 것이다. 백성들도 훨씬 떳떳하고 뿌듯할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냥 쌀을 퍼주지 말고 기왕이면 공공근로라도 하라는 거지. 이로써 한 가지 문제가 지나갔다. 하지만 쌓인 서류는 무한하고 그에 따라 해야 하는 일도 끝이 없었다.
“전하, 이것은 제주목사 정인운이 올린 장계이옵니다.”
그래도 이제 이게 오늘 읽어야 할 마지막 장계다.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펼쳐 드니 말 그대로 웃기지도 않았다.
『작은 배 한 척이 먼 바다에서 오므로 도적들이 탄 배가 아닌지 의심하여 소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정박한 곳을 포위하여 대비하다가 모두 포획했습니다. 배에 실린 물건은 햇벼 열여덟 묶음뿐이고, 승선한 이들은 피부가 검고 말도 문자도 통하지 않아 신원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휴대한 막대기로 우리 군사들을 마구 치는데 포악하기가 비할 데 없었습니다.』
이건 또 뭐냐. 딱 보아하니 어디 동남아에서 흘러온 배로구만. 류큐(오키나와) 배라면 종종 밀려오니까 의사소통이 안 될 리가 없고, 아마 필리핀쯤 되나 보다. 더 멀리서 온 배라면 탄 사람들이 오다가 다 죽었지 살아서 도착할 리가 없으니까.
“어찌하시겠사옵니까?”
으음, 흉년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니 저 표류자들을 매개로 해서 필리핀에서 쌀을 수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하지만 오래 고려할 것도 없이 현실성이 없었다. 일단 의사소통이 되어야 뭔가 교섭을 하지?
게다가 저 표류자들이 지금 필리핀에 있을 수많은 소국들 중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거니와, 설사 표류자 송환 과정에서 협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쌀이 올 수가 없다. 동중국해는 지금 왜구 천지일 텐데, 쌀 실은 배가 조선에 도착할 때까지 그걸 내버려두겠는가.
“일단 도성으로 압송하도록 하라. 필시 남만(南蠻)인일 것이니, 추후 중국으로 가는 사신 편에 송환하도록 하겠다. 중국에는 저들과 말이 통하는 이가 있지 않겠느냐.”
필리핀인이라면 딱히 써먹을 기술도 없을 게다. 그냥 가능한 수단으로 집에나 보내주는 게 낫지. 혹시 저놈들이 가져온 벼가 도정하지 않은 볍씨라면 조선 벼를 개량하는데 쓸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도승지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9 –
편전을 떠나 침전으로 돌아오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매일 하는 업무야 그렇다 치고 올해 들 흉년을 어떻게 수습할지 앞이 깜깜했다. 젠장, 올해 치 구휼곡이야 지난해까지 쌓아둔 거로 충당한다고 치고, 경상도에서 거둔 곡식만으로 내년 대비가 될까?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지난 두 해 그럭저럭 살기 괜찮았다고 내가 너무 큰 꿈을 꿨다. 이 손바닥 만 한 한반도 내에서도 제대로 살림을 꾸리지 못하는 판에 언감생심 만주 정복이냐.
“전하, 오늘은 어느 침소로 드시겠사옵니까?”
판내시부사 김처선이었다. 김처선은 올해 초까지 성종의 능인 선릉을 돌보고 있다가 3년 상이 끝나면서 궁으로 돌아왔다. 마침 그동안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내관 아저씨’가 급사하는 바람에 김처선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김처선은 그 전임자보다 대하기 불편했다. 나는 김처선을 연산군에게 할 말은 다 하던 꼬장꼬장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대간들에게 매일같이 들볶이는 형편에 내관한테까지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관 아저씨를 대하던 태도와 달리 거리를 두었다.
“중전마마와 두 숙의마마께 모두 요즘 뜸하셨사옵니다. 딱히 누구 침소에 들지 정하지 않으셨다면 중전께 가시면 어떠할는지요.”
김처선이 중전과의 동침을 권하는 이유는 알 것 같다. 공주가 하나 있을 뿐 아직 왕자가 하나도 없으니, 기왕이면 중전에게서 원자를 보라는 소리겠지.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진짜 연산군은 올해에 중전과의 사이에서 첫아들을 낳았다. 헌데 나는 중전은 물론 두 후궁과도 아직 아이를 하나도 낳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설마 차원이동의 후유증으로 고자라도 된 건가(…). 왕 자리 물려줄 아들 하나는 갖고 싶은데.
“되었다. 이대로 침전으로 들겠다.”
요즘은 이런저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서인지 사실 밤일도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조총 시사가 성공한 날 기분이 좋아서 중전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가 마지막이니까, 근 두 달 정도 금욕생활을 한 듯하다.
이제 내일이면 9월…어디 보자, 여기 온지 3년째니까 올해가 1497년인가.
해놓은 것도 없는데 시간만 자꾸 간다. 기왕 왕이 되었으니 광개토대왕 같은 정복군주로 역사에 남아보고 싶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돈도 없고, 충분한 군대도 없고, 흉년은 들고.
아아, 모르겠다. 일단 나라꼴이나 가능한 추슬러 보면서 여력을 모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