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12
4부 396화(2012화)
12.(1842년 겨울)
“화이트 소령. 임금 폐하로부터 대위 이상의 계급을 가진 장교 전원을 황궁에서 개최하는 파티에 초대한다는 초대장이 왔네. 자네는 소령인 데다 우리 연대 유일의 한국계 장교기도 하니까 꼭 참석해야 하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이훈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의를 제기해 보았다.
“대령님. 저는 빠졌으면 합니다. 아직 한국군 요새 관리부와 교섭할 사안이 좀 있어서…..”
어른이 되면서 얼굴형 자체가 좀 변했다. 어릴 때는 쓰지 않던 안경도 끼고 얼마 전부터 수염도 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이 모험을 시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파티 초대를 거절하려고 시도한 그에게 버지니아 연대장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임시 대령은 딱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이었다.
“모든 장교는 신사일세. 사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신사의 의무지. 아무 말 말고 파티에 참석하게. 명령일세.”
“…..네. 연대장님.”
애초에 대한 본국으로 온 것 자체가 경악할 일이었다. 송나라, 그것도 태평천국이 장악한 호남으로 가는 원정이니 당연히 홍콩으로 갈 줄 알았다. 기왕 출전할 거라면 영국군과 함께 움직이는 게 가장 상식적인 선택일 테니까.
하지만 반쯤 등 떠밀려 막바지로 지원서를 내고 회의에 참석해 보니 대한군과 함께 싸울 거라는 게 아닌가. 이건 좀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소령 계급에다 연대 참모라는 보직까지 받아버려서 그만두고 나갈 수도 없었다.
비글호에서 잠시 선원으로 일했던 것 말고는 군대 경험도 없는데 무려 소령이 된 경위도 황당했다. 스미스 씨가 나서서 이훈에게는 변호사 자격이 있는 데다 한국 출신이라는 점을 뉴욕주 주지사에게 아주 열성적으로 피력한 덕분이다.
‘변호사 시험 성적도 아주 우수했다더군. 내, 믿고 맡겨 보지.’
대한에 우호적인 성향인 민주공화당 내에서도 입지가 만만찮은 사람인 주지사 윌리엄 H. 수어드는 아주 흔쾌한 태도로 추천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무려 주지사가 서명한 추천서가 붙었으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사실 의용연대는 이미 편성이 거의 끝나 본대는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출발한 지 오래였다. 조금만 늦게 나섰으면 지원할 기회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스미스 씨의 적극적인 로비 덕분에 만사가 번개처럼 진행되면서 후발대 에 편성되어 미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한군과 함께 전투는 해도 본국에 가지는 않을 줄 알았다. 배를 타고 대동양을 건너면 누손에 닿을 테고, 거기서 곧바로 서쪽에 있는 뇌주로 가면 본국으로 갈 일은 없을 게 아닌가.
‘음? 아닐세. 한국 본국에 들러 황제한테 인사를 하고 가야지. 우리는 이름만 의용군이지 사실상 공식적인 원정군이나 다름없어. 당연히 공동으로 작전을 진행할 상대편 군주를 만나 친분을 다져야 하네.’
이훈과 리 대령은 함께 바다를 건너면서 ‘우리 두 사람의 성이 비슷한 걸 보면 우리 윗대 어딘가에서 피가 섞인 게 분명하다’라는 농을 주고받을 만큼 친해졌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훈이 느낀 감정은 날벼락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선단은 하와이를 떠나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배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탈주할 수도 없었다. 설사 탈주한다고 해도 문제다. 그랬다가는 뉴욕에 돌아 갈 수도 없고 아그네스와의 재회는 꿈도 꿀 수 없어진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생각 끝에 이날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대한식이 아니라 미국식으로 다듬었다. 약간이라도 인상을 바꿔야 했다.
본국에 도착해서 도성을 거치지 않고 수원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안도했다. 혹시 북한산성 같은 곳에 머물 게 되기라도 하면 정말 끝장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곧장 수원으로 가는 열차를 탔을 때는 정말이지 몇 번이 나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을 정도다.
수원에는 이훈을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수원성 내를 활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날벼락이 떨어진 거다. 임금이 컬럼비아 의용군단 장교들을 상대로 경희궁에서 직접 여는 연회에 참석하라는.
생각 같아서는 거부하고 싶지만, 상대는 상관이었다. 부당한 명령이라고 해도 거부하기 힘든 판에 부당한 명령도 아니다. 게다가 최초의 유색인종 미국 변호사에 최초의 유색인종 미군 장교였다. 이미 소문은 날대로 다 나 있을 것이고, 임금도 존재를 알고 있을 텐데 나가지 않는다면 도리어 호기심을 자극해서 따로 불러오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위험이 있다.
그래도 정식으로 개최하는 대규모 파티에 출석하고, 임금을 마주 대하는 건 역시나 힘든 일이었다. 머리카락을 내려서 얼굴을 가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점잖은 자리에 출석하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 건 신사의 머리모양이 아니니까. 거지나 도둑도 아닌데 왜 얼굴을 가린단 말인가.
신사답게 머리카락에 포마드를 발라 매끈하게 넘기면 얼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인상을 바꿔보려고 안경과 수염으로 변화를 주었지만, 그런 정도로 주상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대궐에 들어가 주상 앞에 서니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대의 명성은 우리 공사관을 통해 익히 들었다. 타국인 미국에서 상사원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개국 이래 첫 유색인 변호사가 되기까지 하다니.”
심장만 멈추는 게 아니었다. 옛날보다 굵어진 주상의 목소리를 들으니, 머리도 얼어붙는 듯했다. 피할 수 없는 시련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이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행히 혀가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대답했다. 임금은 이훈이 보인 태도를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개성 태생으로 유 씨 성을 쓰는 평민 집안 출신이며 송방의 폐쇄적인 계층 구조에서 벽을 느껴 해외로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참으로 아쉬운 인재로다. 그대가 본국에서 과거를 보아 출세했어야 이 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만 합중국에 넘겨주고 말았구나.”
“아니옵니다, 폐하. 소인은 그저 운이 안 맞았을 뿐입니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나이가 어찌 되는가.”
“스물넷……아니, 여섯입니다.”
“스물여섯이라.”
나이는 일부러 세 살 늘렸다. 영국에서 피츠로이가 처음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줄 때부터 작정하고 바꿨다. 진짜 나이와 증명서상의 나이를 다르게 하는 편이 정체가 들통날 위험을 낮추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임금이 약간 아련한 표정을 짓기는 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한국계 미국인 청년이 12년 전에 자기가 쫓아낸 사촌 아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기야 알았으면 당장 의금부에 처넣었겠지. 당장 죽여야 할 것을 살려줬더니 유배지에서 도망친 대역죄인이니까.
물론 지금 이훈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게다가 버지니아 의용연대의 참모장교로서 공적인 지위도 가지고 있으므로 임금이 이훈을 멋대로 잡아 투옥하거나 처형한다면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상감께서 하려고 하신다면 뭔들 못 하실까.’
대한이 어떤 나라던가. 유럽의 어지간한 군주국들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다. 현 황실이 보위에 오른 게 정확히 450년 전,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재 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유럽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영국은 그동안 왕조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프랑스는 아예 왕실이 한번 망했다 재건되었으나 또 망했다. 현 러시아 황실은 450년 전에는 존재 하지도 않았던 가문이고 말이다. 오스트리아 황실 정도나 가문의 역사로 비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황가의 적통인 상감의 자부심과 능력은 차마 그 정도를 말하는 게 망극할 정도다. 그런 사람이, 이제 겨우 70년도 안 된 나라와의 분쟁 따위에 관심이나 있을까. 워싱턴에서 뭐라고 항의하든 역적을 처벌하는 데 더 열중하지 않을까.
심지어 두 나라 사이에는 누벨 프랑스라는 완충국까지 있어서 직접 충돌할 부담도 없다. 그리고 누벨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상감과 지음(知音)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겨우 이훈 한 사람 때문에 미국 편 을 들지는 않을 거다.
“폐하, 부친께서 폐하께 안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 반갑군. 잘 알겠네.”
상감 앞에서 티를 내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 이훈이 들인 노력은 비글호에 승선하기 위해 해우도에서 탈출할 때보다 더 막중했다. 다행히 한국계 누벨 프랑스인 장교인 자크 대일 홍 중위가 중간에 끼어든 덕분에 간신히 놓여날 수 있었다.
“폐하. 그러면 저는 이만……”
“음, 물러가 보도록. 출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 또 보세 나.”
다행히 상감은 그를 오래 붙잡지 않고 놓아주었다. 지옥의 아가리에서 벗어난 기분이 된 이훈은 한국 조정 고관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 만에 하나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살그머니 구석으로 숨었다. 이 대로 연회가 끝날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13.
“그런데 실패했다고?”
“그래. 나를 찾는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
수원성으로 돌아온 이훈이 자기 방에서 쿠아이와와 마주 앉아 한숨을 쉬었다. 어제 겪은 곤욕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오, 그대가 합중국에서 처음으로 대송인 자격을 딴 대한 출신 이주민이구먼. 나도 예전에 대송인으로 호구한 적이 있어 합중국 법률에 관해 궁금한 게 좀 있는데, 질문 좀 하세.”
“듣자니 본가가 개성이라면서? 개성 어느 집안 출신인가? 내 본가도 개성인데 어떤 연이 있는지 한 번 맞춰 보세.”
“그대는 무학(武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으면서 군관으로 임관했다던데 이는 합중국에 본래 있는 제도인가? 아니면 그대들이 의병이라서 본래 국가의 법도에 따라 편성한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가? 궁금하구먼.”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합중국 최초의 아시아계 대송인으로 군관이 되어 금의환향했다는 특징이 관심을 가지고 모여드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들이 퍼붓는 질문도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답이 서로 모순되지 않게, 허점을 보이지 않게 대답하려니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곤경을 모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경희궁 내에 마련된 객사에서 밤을 지낸 뒤에 아침까지 먹고 다시 강을 건너 열차를 타고 수원성으로 돌아왔다.
“잠이 오던가? 밥이 넘어가? 아, 하도 오랜만에 맛보는 궁중 음식이라 아주 맛있었겠군.”
“잠은 무슨. 방에서는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고, 밥은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어. 고기는 생가죽을 씹는 것 같고…..”
밤새 불안감에 시달렸다. 연회 자리에서는 남들 눈도 있으니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밤중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무방비로 자고 있을 때 금부도사가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이훈은 옷도 벗지 못하고 창가에 몸을 숨긴 채 꼬박 밤을 새웠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래도 자넨 나은 거야. 상감을 바로 대면할 수라도 있었잖나. 하지만 나는 배가 항구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에도 올라갈 수 없었다고.”
쿠아이와는 이훈이 의용군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더니 자기도 대뜸 원서를 냈다. 깜짝 놀란 이훈이 뜯어말리자, 호쾌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비록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한날한시에 죽기로 결의하지 않았나? 그러니 어떻게 자네만 전장에 보내고 나는 유유히 술이나 마시고 있겠는가. 마땅히 함께 가야지.’
‘…..자네, 삼국지를 너무 읽었구먼. 혹시 사실은 의용군에서 나오는 급료가 부두에서 받는 일당보다 많아서 짐짓 아닌 척하면서 나서는 건 아니겠지?’
‘앗, 들킨 건가?’
농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결국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진짜였다. 쿠아이와는 자기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훈을 따라 막바지에 지원서를 냈고, 그 역시 슈어드 주지사 명의의 추천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자네 같은 용사가 나서겠다면 당연히 받아줘야지! 자네도 한국인이라고 했지? 자네 같은 사람을 일반 막노동꾼처럼 졸병으로 취급할 수는 없으니까, 국무장관에게 상사 정도는 시켜 달라고 건의하겠네.’
그래서 쿠아이와는 의용군 상사로 임관할 수 있었다. 비록 의용군이기는 하지만, 이훈과 더불어 그 역시 미국 역사상 첫 유색인종 하사관이 되었다. 이훈과 함께 미주에 들렀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미주인들은 누벨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인 주민들을 자주 보기 때문에 미국 군복을 입은 두 사람을 특별하게 보지 않았다. 쿠아이와도 은근슬쩍 동료 병사들 사이에 묻어 다녔고, 애초에 며칠 머무르지도 않았다.
진짜 큰 문제는 하와이에 물과 식량, 연료를 보충하러 기항했을 때였다. 선단은 하필이면 다른 섬도 아니고 하와도 본도에 기항했다. 쿠아이와를 잘 아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섬인데 말이다. 결국 쿠아이와는 갖은 핑계를 대면서 사흘 동안 선실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머리 위 갑판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카나이나 전하의 목소리를 듣는 내 기분이 어땠겠나. 얼굴을 마주하면 그 순간 들켰겠지. 그분 성품을 생각하면 나를 알아봤다고 바로 칼을 뺄 일이야 없겠지만, 우리 계획은 다 망쳐졌겠지.”
카나이나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다. 왕위를 두고 다툰 싸움은 이미 승패가 난 지 오래인데 쿠아이와를 알아봤다고 해서 칼을 뽑아 들 까닭이 없다. 하지만 그게 쿠아이와를 만났다고 멀리 한양에 있는 주상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안 된다.
물론 카나이나 본인은 입을 다물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측근들이나 하와국에 와 있는 대한 조정의 주재관원들은 어쩐단 말인가. 더구나 공식적으로는 사망자로 처리된 이훈과 달리, 쿠아이와는 명백한 탈옥수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자네는 뉴욕에 남아 있으라고 했는데…..”
“뭐, 결과적으로 안들켰잖은가.”
쿠아이와는 이훈처럼 안경을 쓰거나 수염을 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옷차림과 행동거지 두 가지 측면에서는 확실히 옛날하고 달랐다. 뉴욕 항구 노동자들이 하는 언어 습관 그대로 영어로만 지껄이고 행동을 그에 맞추니 선뜻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인천에서 배를 내렸을 때, 아는 사이인 하와병 한 명과 정말 우연히 마주쳤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푸른 제복을 입고 건들거리는 쿠아이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두 사람은 안도하면서 한숨을 내쉬었었다.
“어제는 어떻게 넘겼는데….큰일이 하나 또 생겼네. 연대장나리가…..”
“연대장나리가 뭐?”
“넉넉하게 휴가를 줄 테니 개성 본가에 다녀오라는 거야. 거기 가서 할 일도 있다고 하지 않았냐면서.”
스미스 & 스크루지 상회에서 이훈에게 내린 지시 중 하나가 개성에서 한국 인삼을 따로 수입하고 싶으니 새 경로를 뚫으라는 거였다. 미국, 유럽에서 최고급 약재로 팔리는 한국산 인삼이지만 상회에는 아직 한국에 직접 교역할 상대가 없었다.
차라리 그 용무 하나뿐이었다면 혼자 살그머니 다녀올 수도 있다. 문제는 버지니아 연대 장교들은 물론이고 루이지애나 연대, 산티아고 연대 장교들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도시인 도성과 개성 두 도시를 구경하고 싶다며 안내를 청하는 데 있었다.
“그러면서 ‘자네 본가를 방문해서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싶다’라는 작자들까지 몇 있으니 지금 벌어진 이 난장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쯧쯧. 그러니 나처럼 계속 북방 시골 출신이라고 말했어야지. 아니지. 그랬으면 대송인이 되기는커녕 상회에도 못 들어갔으려나.”
이훈이 비글호를 탈 때는 연해주 출신 우대개라고 했었다. 하지만 미국에 가서는 고향이 개성이라고 말을 바꿨다. 상회에 들어가려면 개성 출신인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뿐더러, 시골 출신이 라틴어에 프랑스어까지 배웠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물론 본국에 다시 돌아오는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안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안 했던 일이 이렇게 현실이 되어버렸으니, 환장할 노릇인 셈이다.
“어쩌겠나, 잘 해봐야지. 자 다녀오시게. 나는 여기서 병사들이나 굴리고 있을 테니.”
하와군에서 용사로 날리던 쿠아이와다. 용력만 강한 게 아니라 병사들 굴리는 솜씨에서도 웬만한 의용군 장교를 뛰어넘었다. 그래서 군대 경험이 없는 의용군들을 훈련시키며 아주 큰 즐거움을 맛보고 있었다.
“장교들 말도 안 듣는 그 거친 인간들이 자네 말은 참 잘 듣지.”
“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지그시 내려다 볼뿐이지.”
키득거리면서 웃던 쿠아이와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일어섰다. 이제 병사들을 굴리러 갈 시간이라면서 말이다.
“그럼 잘 있게나. 나중에 또 보세.”
“응. 잘 가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헤어졌다. 잠시 쿠아이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훈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자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의용군 두 사람이 슬그머니 속삭였다.
“역시 화이트 소령이랑 블랙 상사는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게 분명해.”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상사 따위가 소령의 방을 저렇게 스스럼없이 드나들 리 없잖아?”
“게다가 이별을 아쉬워하는 저 눈빛 자네도 봤지? 틀림없다고!”
뉴욕에서부터 따라온 그 소문은 이렇게 또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훈이 미처 깨닫지 못한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