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17
4부 401화(2017화)
8.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태후가 경희궁 전체에서 들을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저 말을 지껄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침 그때 조금 더 떨어져 있던 중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혼례식이 끝난 뒤,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내 이야기를 들 은 중전은 간단히 답했다.
“태후께서 지나간 세 번의 혼례가 퍽 아쉬우셨나 봅니다. 하지만 아직 한 번이 남았으니, 화선장공주의 혼례는 좀 성대하게 치러 주도록 하시지요.”
계모가 내게 하는 짓이 눈꼴시니 배다른 시누이의 혼례 따위 거지같이 치러 버리라고 할 줄 안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역으로 이렇게 나올 줄은 또 몰랐다. 마지막 태후 소생 공주의 혼례식이라도 거창하게 치러 주자니. 그런데 그 뒤로 더 이어지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이게 또 방향이 달랐다. 역시 중전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공을 들인 큰 혼례를 준비하려면 돈과 시간이 매우 많이 들어갈 겁니다. 아무렇게나 할 수 없으니 장식 하나에도 공을 들여야 하고, 혼수도 신경 써서 모아야 지요. 거기 들어갈 비용을 마련하려면 내수사에서도 무척 큰 무리를 해야 할 테고요.”
“…..그렇겠지.”
여기까지만 들으면 중전이 그저 이복 시누이를 혼인시키는 데 들이는 돈을 아까워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입이 떡 벌어지게 화려하고 성대한 혼례식은 황실에서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늘이 점지해 준 날이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백성들의 원성도 사지 않아야 하지요. 혹 농사가 흉년이라도 들면 백성들이 황실 을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종전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흉년이건 뭐건 핑계를 있는 대로 잡아서 화선장공주의 혼례를 그냥 미뤄버리라는 뜻이었다. 딸이 노처녀가 되는 꼴을 보면 그제야 자기 태도를 좀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맞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전례도 있었다. 장조 때, 내가 각성하기 전에 태어난 경성군 자녀들만 해도 그때 흉년이 하도 심해서 아들이고 딸이고 죄다 십대 후반이나 되어서 겨우 혼사를 치르지 않았던가. 흉년에 경사를 치를 수 없다고 말이다.
물론 흉년 하나만 핑계로 삼을 수는 없다. 혹시 내년부터 5년 연속 풍년이라도 들면 조금 난감해지니까. 하지만 내가 하려고만 하면 흉년 말고도 혼삿날을 미루는 핑계는 3백 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정도 잔머리는 있다.
‘하늘에 안 좋은 별이 떠서, 전쟁을 치르면서 국혼을 행하기는 부담스러워서, 지금 황실에 환자가 있는데 그런 경사스러운 일을 추진하는 건 좋지 않아서….’
생각해 보면 무종 때는 눈 밖에 난 이복동생들을 그냥 다 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었다. 숙의 홍씨가 하는 짓이 웬만큼 눈에 거슬렸어야지. 물론 홍씨도 나중에 유배형에 처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진성대군은 손대지 않았었다. 이쪽 세상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돼서 낯선 탓에 정붙일 형제지간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할머니인 수대비와 계모인 자순대비를 붙들어 놓을 무기가 하나는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들 얘기하잖는가. 칼은 칼집에서 빼기 전이 가장 무서운 거라고. 마찬가지다. 진성대군 역시 자유롭고 풍족하게 살게 해 주는 그 상황 자체가 내게 무기였다. 그걸 빼앗고 처지를 떨어트릴 수 있다고 살짝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위협하는 효과는 충분했다.
만약 내가 진성대군에게 진짜로 손을 대면 두 대비와도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내게도 좋지 않았다. 내게는 광해군의 전례가 있었다. 그러니 적절한 회피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 뒤로는 그런 식으로 형제들을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 장조는 입양이라 형제가 동복이고 이복이고 아예 없었고, 중종은 손위 형들이 다 죽은 뒤에 막내로 보위에 올랐으니 말이다. 예왕? 그거야 아예 죽이고 즉위한 거지 즉위한 후에 경계한 게 아니잖아.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많은, 무종 때와 비교해도 정말 너무나 많은 이복형제가 우글대는 상황이다. 그나마 숙의 홍씨처럼 막 나가는 미친 인간이 있는 건 아니어서 그다지 그 때처럼 칼바람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지만, 유일하게 내 짜증을 유발하는 게 하필 태후라서 문제다.
미친 듯이 막살았던 무종 시절의 나도 광해군의 전례를 생각해서 두 대비에게는 깍듯하게 대했다. 지금 태후도 그 지위를 생각해서 모자라는 것 없이 대하고 있건만, 이런 식으로 내 속을 긁는 일이 잊을만하면 터지는 거다.
이해는 한다. 본래 그다지 거족(巨族)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집안 출신으로 자기 집안의 세력을 키우고 싶은 욕망이 강한 편인 건 아니까. 하지만 태후전의 자기 측근들만이라고는 해도 궁인들이 듣는 앞에서 들으라는 듯이 그런 말을 한 건 지나친 행동이었다.
“물론 태후께서도 폐하를 가깝게 여기시니 그런 말을 흘리신 거겠지요. 만약에 그분께서 폐하를 꺼리고 무서워하셨으면 언질이라도 하셨겠습니까? 그러니 폐하께서 그 뜻을 받들어 성의를 보이시면 합당한 예가 될 듯합니다.”
“알겠소. 내 누이의 혼인이니 아주 세심하게 준비하리다. 이 대한의 적통 공주가 혼인하는 자리에 조그만 흠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니 말이오.”
아주 좋은 방법이다. 딱히 태후나 이복누이를 해치는 것도 아니고, 시집을 안 보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태후가 원하는 것처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만큼 장대하고 멋진 혼례식을 열기 위해 적당한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뿐이잖는가.
“태후께서 혼례식을 소박하게 치러도 좋으니 서둘러 달라고 직접 청하신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겠지.”
“합당하신 판단입니다.”
나와 중전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이런 면에서는 은근히 잘 맞는 한 쌍인 듯하다.
9.
묘노들을 정식으로 해방하고 호패를 발급하는 문제는 대충 정리가 끝났다. 폭동이 터졌던 게 재작년 음력 9월이었으니, 국내에서의 뒤처리가 끝나는 데 대략 1년 반이 걸린 셈이다.
사실 빨리 끝내려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묘노들이 ‘노예 임대’라는 편법으로 국내에 유입된 건 대략 갑오년((1834) 이후의 8년 정도밖에 안 되었으므로, 전체 묘노 중에서 노비 신분인 자의 수는 생각만큼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비 신분인 묘노 다수가 지난번 폭동 관련자였던 탓에 그 죄상부터 철저히 밝혀야 했고, 배상제회에서 의도적으로 박아 넣은 접주들을 색출해야 했다. 놈들에게 영향을 받아 입교한 신도들도 태도를 바꾸는지를 확인해야 했 다.
물론 법적으로는 양민인, 갑오년 이전에 들어와서 속량을 받은 묘노 중에서도 배상제회에 입교해서 폭동에 가담한 놈들은 잔뜩 있었다. 그런 놈들까지 다 색출해서 처벌하는 작업을 병행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걸린 놈들은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기는 하되 추방형에 처했다. 국내에 두었다가는 언제 또 소란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로 보냈냐고?
“일본국 대군이 거래를 받아들여서 다행이로다.”
“저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니 받아들이지 않았겠습니까.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에 한 일이니, 우리가 굳이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색출한 악질적인 배상제회 신도 숫자는 최종적으로 대략 6천여 명이었다. 물론 이 숫자는 폭동을 일으켰다가 현장에서 사살됐거나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은 놈들, 아주 악질이라고 판단해서 조사 후에 처형된 놈들을 빼고 남은 숫자다.
이놈들을 국내에서 형벌에 처하자니, 딱히 내키는 곳이 없었다. 탄광에 보내자니 거기서 또 곡괭이라도 들고 난리를 치면 곤란하고, 옻나무 농장에 보내려고 해도 낫을 들고 봉기할 놈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다 총살해서 바다에 처넣자니 좀 켕겼다.
일각에서는 후송으로 송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면 후송 조정이 알아서 다 쳐 죽일 테니 우리는 아무 고민도 할 필요가 없다는 부연 설명까지 덧붙여서.
괜찮은 제안이었지만 채택하지 않았던 건 그게 편하기는 해도 딱히 실제적인 이득은 없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본래 숨이 붙어 있는 한 최대한으로 일을 시켜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놈들은 죽일 만큼 죄가 크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살려둔 것이고.
문제는 우리 땅 안에서는 내가 안심하고 이놈들을 부려 먹을 만한 일터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벌이 될 만큼 일이 힘들면서도 도구를 사용해서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없고 감시하는 데 수고를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되는 곳…..을 생각하다가 떠오른 곳이 있었다.
예전 생에서 아주 재미있게 봤던 어떤 만화책에서 본 장소. 악질 죄수들을 노역시키기에 딱 좋은 곳. 바로 아모국에 있는 유황 광산이었다.
“대군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도 난을 일으켰던 묘노들을 모조리 그쪽으로 보냈다고 하옵니다.”
일본에도 상당수 묘노가 있다. 인구 증가에 민감한 일본이지만, 인구가 많다고 해서 힘든 일을 즐겨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묘노들을 주로 구리 광산이나 탄광에 광부로 투입했다. 항만 노동자 중에도 많았고.
그래서 막부에서는 폭동에 가담했던 묘노들을 ‘더 힘든 일터’로 보내 처벌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아모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오래 일하면 광산에서 나오는 아황산가스 때문에 시력을 잃게 되는 유황광산에 처넣었다.
참, 이제는 독립국이 아닌데 아모국을 계속 아모국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하지만 상관없다. 한국이나 중국에서였다면 주(州)나 도(道)라고 지칭 했을 지방 행정구역을 일본에서는 국(國, 쿠니)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지금 아모국은 통째로 막부의 직할령이 되었다. 세금은 본국에 있는 기존 영지에서보다는 적게 걷는다고 한다. 아이누들이 소유한 농장이나 광산을 빼앗지도 않고, 막부의 인가장을 받은 어용상인들이 새롭게 광산이나 어장을 개척, 경영해서 얻은 수익을 막부에 바친다.
이런 사업을 하려면 당연히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그 일손을 묘노에서 얻었다. 특히 사고가 잦고 위험한 탄광이나 유황 광산에는 가고자 하는 이가 적다. 그래서 묘노를 보내 일하게 시키고 있었는데, 이번 폭동 때문에 손실된 묘노가 많았다. 그 공백을 채울 새 인력이 필요했던 거다.
“대가는 얼마나 치르겠다고 하였는가?”
“보내주는 묘노 한 사람당 매년 유황 천 근씩을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기한은 묘노들이 눈이 멀 때까지고 말입니다.”
그 유황 광산에서는 눈이 먼 묘노들이라고 해서 공짜밥을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갱도에 들어가 유황을 캐지는 않지만, 발로 밟아서 수차를 돌린다거나 방아를 찧는 등 온갖 노역을 죽을 때까지 시킨다.
정말로 어떤 노역도 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지면 그때에서야 일을 놓게 해 준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게 할 뿐이지 식량조차 넉넉히 주지 않으므로, 이미 약하고 병든 몸을 이기지 못해 금방 숨을 거두기 십상이다.
우리가 폭동에 가담한 묘노들을 보내기로 한 게 여기였다. 죽어도 싸지만, 당장 죽여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짓지는 않은 광신도들을 처분하기에는 딱 좋은 장소다.
“제안에 동의한다고 전하라. 눈이 멀기 전에 1인당 한 5천 근만 캐서 보내도 우리로서는 충분한 이득이 되는 셈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미 묘노를 가득 실은 배 몇 척이 아모국으로 떠났다. 거리도 얼마 안 되고 하니까 그냥 꽉꽉 채워서 갔다. 뭐, 그래도 대서양 노예선 수준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안 될 놈들을 그렇게 털어내고 국내에 남은 묘노들은 갑오년 이전까지 했던 것처럼 우리 호적에 올려 양민으로 등록했다. 호패도 발급한다. 물론 호적에는 그 출신이 기록되어 계속 행정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호패도 가장 급이 낮은 나무에 새긴 목패다.
사실 대한을 찾아온 서양인들이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물건 중 하나도 호패다. 신분증이 모든 국민에게 보급된 나라 자체가 흔하지 않은데, 그 재료가 종이가 아니라 상아나 나무로 만든 패라는 것도 신기해 보일 테니 말이다.
원래 역사 조선에서도 초기에 실패했던 호패법이 조기에 정착할 수 있었던 건 역시 무종 시절에 벌인 무자비한 전가 사변 덕이 크긴 했다. 호패를 안 가지고 외출하는 사람이 9할이 넘었던 시대에 호패법 위반자는 무조건 전가사변에 처했으니, 나도 참 무리가 많았군.
독한 놈들을 뺀 나머지 묘노들은 호패도 받고, 호적도 새로 만들었으니 비록 대한 사회의 최하층민으로 편입됐을지언정 대한 백성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받는다. 대신 세금도 내고 날짜가 되면 속오군 훈련도 받는다. 만사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10.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지내는 동안 드디어 소식이 왔다. 후송으로 간 우리 토적군 본진이 무사히 남창에 도착해서 포진에 들어갔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도중에 몇 차례 사소한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큰 지장 없이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잘 되었다. 참으로 다행이로다.”
기차를 타고, 아니면 그냥 말을 타고 바로 건너가면 그만인 후금과 달리 후송으로 가는 길은 바다를 지난다. 게다가 요즘은 태풍이 부는 철이기까지 하니 더 불안했다. 혹시, 정말 만에 하나라도 폭풍이 닥쳐 함대가 침몰하고 군사들 이 생으로 수장되면 어쩌나 해서.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배들이 항주에 닿을 때까지 풍랑 한번 만나지 않았다. 항주에 군사들을 내려놓은 우리 배들은 뱃머리를 돌려 주산으로 가서 주산에 진을 치고 대기하던 누손군과 대만군, 하와•술루•조홀•유구 등 여러 번국에서 온 군대들을 항주로 데려왔다.
우리는 이렇게 비교적 편하게 바다를 건넜지만, 일본군은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 선단이 움직여야 하는 거리가 우리보다 몇 배나 먼 까닭이다. 일단 동원해야 하는 배 숫자가 우리보다 많다. 병력은 비슷하지만 항해해야 하는 거리가 먼만큼 공간도 더 넓어야 하는 건 기본이니까.
게다가 오래 항해하는 만큼 병사들이 더 지칠 수밖에 없다. 거리가 머니까 본국에서 물자 보급하기도 힘들다. 우리가 뇌주 대신 주산진을 거점으로 삼기로 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새삼든다.
어쨌든 우리 원정군도 일본군도 큰 탈 없이 후송으로 건너갔다. 홍콩에 모인 유럽 연합군 역시 태세를 갖추고 북진하면서 본격적인 태평천국 포위전의 막이 올랐다.
원래 역사에서는 이 난리가 막을 내릴 때까지 대충 15년 쯤 끌었다. 이쪽 세계에서는 과연 얼마나 진행될지 한번 시작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