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28
4부 412화(2028화)
1.
제의를 걸친 앵베르 주교가 조용히 벽에 걸린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저 십자가를 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군왕 전하,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선대 대칸께서 나를 후계자로 점지하셨음은 주교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게 기름을 부어주셔야겠습니다. 대칸께서 방금 숨을 거두셨으니까요.”
앵베르 주교는 대칸의 둘째 서자가 그 야심만만하고 교활한 성정으로 대칸의 총애를 얻어 후계자로 낙점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가 인정한 적법한 결혼에서 태어나지 않은 서자는 사생아이며, 교회법에 따르면 사생아는 상속자가 될 수 없었다.
대칸이 뒤늦게라도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면 방법이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칸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자꾸 시간을 끌며 망설였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전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주교님. 제가 주교님을 주교님으로 존중하는 동안 일을 처리해 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러지 않으신다면 저는 정교도로 개종하고 모스크바 총대주교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게 회교도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군요.”
러시아 정교회도 사생아의 승계를 인정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굴마훈이 정말로 정교회에 귀의할 테니 세례를 달라고 타진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특사를 보내서 당장에 세례를 줄 게 분명하다. 교세를 넓힐 절호의 기회니까.
금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기독교 국가다. 그 나라의 군주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정교회로 넘어가겠다는 위협은 간단히 넘길 수 없었다. 여기에 두 번째 폭탄이 떨어졌다.
“제가 개종하면 신하들과 백성들도 모두 개종해야겠지요. 거부하는 자들은 화형에 처하고 말입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외국인 성직자들은 국외 추방만 할 거지 죽일 생각까지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여기에 유폐된 대복진의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암시가 덧붙었다. 앵베르 주교는 자기 한 사람의 목숨이라면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카타이 교구 전체의 안위와 무고한 신자들의 목숨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뒤에도 자유를 얻을 수는 없었다. 굴마훈은 주교가 황궁에서 나갈 수 없게 하고, 황궁 안에서도 감시를 붙였다. 가장 적법한 계승자, 두두 편으로 주교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주교의 처지는 망명했던 럭더훈이 청나라 군대와 함께 돌아오면서 더 고달파졌다. 혹시나 주교가 상도에서 탈출해서 럭더훈 진영으로 들어갈지 모른다고 생각한 굴마훈이 감시를 더 강화했기 때문이다. 주교는 미사를 집전할 때나 방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지경이었다.
굴마훈은 전투에 패해서 북방으로 도망칠 때도 주교를 빠트리지 않았다.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두 존재이자 인질 중 하나로서 주교를 꼭 자기 곁에 두었다. 앵베르 주교는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 내전을 끝내려고 애썼다.
“대칸, 이건 금나라의 국력을 약하게 만들 뿐입니다. 제발 회담을 여세요. 그리고 협상을 시도하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중재해 보겠습니다. 제 말이라면 저쪽에서도 무시하지는 못할 겁니다.”
“협상은 없소, 주교. 단 하나뿐인 대칸의 자리를 두고 무슨 협상이란 말이오? 이겨서 대칸 자리에 오르거나, 패해서 죽거나 둘 중 하나요.”
앵베르 주교가 협상을 시도해 보자고 수없이 제안해도 굴마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3년 동안 산과 들을 전전하면서, 점점 상황이 나빠져 가는데도 굴마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방으로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면서 끈덕지게 버텼다.
하지만 3년이 넘어가면서 마침내 끝이 보였다. 정통성을 담보하는 두 번째 인물이자 역시 중요한 인질인 선대 대복진을 ‘미친 늑대’ 얀신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는 그날 구출은커녕 전투에 휘말려 죽을 뻔했다.
굴마훈 세력은 선대 대복진을 빼앗기면서 결정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럭더훈 편으로 넘어간 후금군 외에 청군과 한국군까지 가담했다. 차니군은 이미 격파됐고 두두군은 럭더훈에게 항복했으니 이 많은 적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뒤집으려면 러시아군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하리라. 하지만 굴마훈이 편지로 몇 번이나 도움을 청해도 차르는 아무 회답도 하지 않았다. 굴마훈은 철저히 혼자였다.
앵베르 주교는 진심으로 굴마훈을 가엾게 여겼다. 그래서 어떻게든 상대와 중재를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굴마훈이 계속 거부했다. 그러다 마침내 정말 마지막 순간이 왔다.
“우리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가겠소, 주교. 그대는 두고 갈 테니 알렉산드르 쪽에 가서 내 뜻을 전하시오. 대금국의 대칸으로서 황금 목걸이를 차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이오.”
청나라 황제의 수하로 들어가는 신세가 된 것을 비꼬는 말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가 놀랐던 건 3년 동안 그렇게 끌고 다니던 자신을 선선히 놓아주려고 하는 굴마훈의 태도였다.
“국경을 넘어가면 어차피 모든 처분을 차르께 맡겨야 할 테고, 그대를 데려가더라도 바로 돌려보내게 될 텐데 무엇 하러 데려가겠소. 그동안 고생 많았소. 황야의 겨울은 무척 춥고 견디기 힘드니, 상도까지 무사히 당도하시기를 주님께 빌겠소.”
굴마훈은 주교의 신변을 지키고 시중을 들 인원을 넉넉히 남겨주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를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북쪽으로 떠났다. 주교는 한참을 그 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굴마훈을 추격해 온 얀신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당연히 러시아까지 끌고 갈 줄 알았는데…..”
굴마훈이 이미 러시아로 갔다는 말을 들은 얀신은 주교 앞인 것도 상관하지 않고 분노로 날뛰었다. 그리고 국경 따위는 무시하고 당장 추격하려고 했다. 앵베르 주교는 그러다가는 러시아와 전쟁이 터진다면서 겨우 뜯어말렸다. 그리고 어서 상도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다행히 얀신은 이성을 붙든 마지막 끈까지 놓지는 않았다. 굴마훈의 도주에 대해서 이를 갈면서도 주교와 함께 상도로 귀환했다. 그로 인해 굴마훈의 도주가 알려졌고 내전은 끝을 맺었다. 아주 확실하게.
승리자가 된 럭더훈은 후금 전역에 있는 황족, 귀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했다. 3년에 걸친 내전은 이들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이들은 모두 럭더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뒤에 청나라와 한국의 힘이 있다는 걸 아는 이상 반발은 없었다.
그들의 충성을 받은 럭더훈은 그들의 대표가 되어 북경에 있는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결과로 오늘, 성 세바스티아누스 축일에 대칸으로서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
“3년 전에 이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을…..”
선대 대칸의 잘못이 크다. 수많은 피가 흐르고 나라를 휘청이게 만든 이후에야 후계자가 정해졌다. 앵베르 주교로서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주교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 나가도록 하지.”
보좌 신부가 들어와서 대관식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앵베르 주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럭더훈의 이마에 기름을 바르고 왕관을 얹어주러 갈 시간이었다.
대관식이 모두 끝나면 국사범의 처형식도 있을 것이다. 새 대칸은 자기편과 직접 싸우지 않고 투항한 삼패륵 두두는 용서했으므로, 처형될 사람은 사패륵 차니뿐이다. 주교가 그를 위해서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2.
“대칸의 즉위식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폐하.”
“알겠다. 만 리 밖의 소식을 이토록 빨리 접할 수 있으니 정말 좋구나.”
옛날 같았으면….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파발이 온다고 해도 소식이 전해지는 데 한 달은 걸렸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바로 소식이 온다. 전신 덕분이다.
아아, 전신이 생긴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현대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체감하기로는 정말 현대에서 인터넷을 쓰던 그 기분 같다. 아무래도 수백 년 만에 쓰는 정말로 획기적인 통신 기술 발전이니까.
다만 전신이 놓였다고 해서 봉수대가 바로 없어지지는 않았다. 아직은 봉수대가 비상시를 대비한 예비 통신 수단으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봉수대 유지비도 만만찮으니 슬슬 문을 닫아야겠지. 봉수군들이야 다른 쪽으로 재배치하면 되는 거고.
다만 봉수대가 있던 산들이 원래 세계에서도 죄다 군대가 통신기지나 레이더기지 등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 부지를 민간에 불하한다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가동은 중단하더라도 부지는 계속 국유지로 놓아둬야지.
“즉위식을 두고 금나라 조야에서 반발은 혹시 없는가?”
“공사관에서 알려온 바에 따르면, 황족들 사이에는 반발이 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루스로 도주한 다라극근군왕을 편들었던 전력이 있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새 대칸의 뒤에는 청군과 우리 군이 있지 않습니까.”
후금 내란에 개입했던 청군 15만, 그리고 우리 군대 1만. 이 대군이 륵극덕혼을 지원하고 있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후금 귀족들이 불만이 있더라도 대놓고 드러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륵극덕혼은 분명 서자인데 어찌 앵베르 주교가 륵극덕혼을 대칸 자리에 올리는 즉위식을 집전하고 있는가? 그리고 승자인 륵극덕혼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데 후금 귀족이나 황족들이 불만을 품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실은 륵극덕혼은 선대 대칸인 박락의 지위를 승계하여 대칸 자리에 오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륵극덕혼은 청나라 황제 덕명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로서, 그 대가로 책봉을 받아 속국인 금국의 칸으로 즉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박락의 지위를 계승하는 게 아니므로 륵극덕혼이 서자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면 그의 즉위가 갖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가 모두 해소된다. 사태를 이렇게 꼬아놓은 결정적인 존재, 선대 대복진 애신각라씨의 반대도 신경 쓸 필요 없어진다. 애신각라씨가 양자를 들이든 말든 덕명이 륵극덕혼을 대칸으로 ‘책봉’하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가도 있다. 이제 후금에서는 청나라 연호를 쓴다. 박락까지만 해도 후금에서는 독자적으로 연호를 제정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고이마혼도 연호를 새로 만들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인상을 보이려고 그가 일부러 안 했던 거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정말로 못 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치러야 할 대가는 연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후금 대칸의 지위는 청나라 친왕과 같은 선으로 규정되며, 대칸이라는 칭호는 후금 내에서만 쓸 수 있고 청나라 황제 앞에서는 그저 칸이라고 칭해야 한다. 공식적인 대칸의 지위는 황제가 갖는다. 일종의 외왕내제다.
여기에 차후 계승권도 확실하지 않다. 륵극덕혼이 덕명의 책봉을 받아 대칸이 되었다는 건 륵극덕혼의 아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대칸 자리를 물려받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청나라 황제의 눈에 든 아무나 대칸이 될 수 있다. 후금 황족이 아닌 청나라 황족이 추후 대칸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 그때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다. 반대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또 전쟁이 벌어지리라.
심지어 후금에는 이제 독자적인 외교권도 없다. 지금 후금 공사가 상주하는 나라야 우리 대한밖에는 없어서 큰 타격을 받지야 않겠지 만 국가의 격이 떨어지는 건 분명하다. 참고로 지금 한성에 있는 후금 공사는 철수하지는 않고 부공사(副公使)로 계속 주재하기로 되었다.
외교권까지 뺏겼는데 군권인들 무사할 리 없으리라. 청나라는 내란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후금 내부 상황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후금이 보유한 팔기를 전부 해산하라고 지시했다. 사실상 정규 군사력을 마비시킨 셈이다.
“하지만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그런 조치가 필요하긴 합니다.”
육군대신 이세직이 지적했다. 건주 양국의 군제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정비가 크게 필요하기는 한 탓이다.
그놈의 팔기군도 뭉뚱그려서 팔기라고는 하지만 그 부대 수가 엄청나게 많다. 청나라는 만주•몽고•왜인•한인으로 구성된 팔기가 별도로 있어서 총 32개 기를 가지고 있고, 후금은 그 넷 중 한인 팔기만 없다. 그래서 총 24개 기를 가지고 있다.
이를 그대로 통합하면 무려 56개 기를 보유하게 된다. 그래서 청나라 황제 덕명은 후금군 24기를 몽땅 해체하고 이들을 니루 단위로 분산해서 청나라 팔기 중 한군팔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기의 예비 병력으로 편성했다. 후금군을 완벽한 청군의 예비대로 재편한 거다.
따지고 보면 상비군인 청나라 팔기와는 달리 후금 팔기는 평소 생업에 존재하다가 전쟁이 터지면 소집되는 군대였다. 그러니 이런 예비대 역할이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유서 깊은 팔기 부대가 해체됐으므로 반발이 있을 만도 하지만, 내전 때문에 각 팔기의 전력도 심하게 저하된 데다 나라는 전쟁으로 심히 피폐해 있다. 그러니 반발하려야 할 힘도 없다. 그래서 팔기 해체를 거부하는 반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나마 덕명은 후금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인정해 주었다. 후금 군을 청군에 흡수하지만, 각 니루 단위에서 십자가가 들어간 예전 군기를 사용하는 건 용인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조건만 지킨다면 종교 따위는 상관없다고 했다. 우리 대한에서처럼 말이다.
“지금쯤 금국 삼패륵은 세상의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전부 제 몫 인것 같은 심경으로 새 대칸을 배종(I暗從)하고 있겠지.”
“그럴 것이옵니다. 아마 소태라도 씹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요.”
박락이 괜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법도를 지켰으면 무난히 대칸이 되었을 사람이 삼패륵 두도다. 그랬으면 대칸의 지위는 여전히 황제와 동등했을 테고 나하고도 물론 같은 격으로 대접받았을 거다. 하지만 이 내란으로 인해 그 아래, 심왕부보다 낮은 위치에 놓이게 됐다.
“폐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심양회맹은 해소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아니오. 세 나라 중 하나가 빠졌을 분, 두 나라 간의 동맹은 유지된다고 봐야지.”
솔직히, 우리와 청이 후금을 분할하는 것부터가 심양회맹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금을 그냥 놓아두면 수시로 이렇게 내전을 벌이니 어찌 놓아두겠는가. 어떻게든지 제대로 안정시켜야지. 그러려면 지금으로서는 이게 가장 나은 수인 것 같고.
“다녀왔사옵니다, 폐하.”
“오, 고생하셨소. 청나라 조정과의 합의는 잘 되었소?”
“예, 그렇습니다.”
좌참정대신 김정희가 특별히 북경에 가서 이 문제를 마무리하고 왔다. 이번 내전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뭘 받아낼지 하는 문제 말이다. 이제 그 결과를 보고받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