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5
1부 2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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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성 서쪽 성벽 위에 올라와 있던 오우치 군 병사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처음 보는 형상의 깃발을 내건 대규모 군대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성을 함락시킬 기세이던 쇼니 군을 완전히 몰아붙이고 있었다.
가라쓰 방면에서 나타난 우군 ? 적인 쇼니 군과 싸우니 우군이라고 부를 밖에 ? 은 2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어쩐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우익에도 분명 류조지 가문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류조지는 분명 적인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좀 나중의 일이지만 성벽 위에서는 정체불명의 우군을 염왕군(炎王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단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가몬이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문양이라 어느 가문 군대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고, 그 싸움 방식이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불꽃을 내뿜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류조지 군을 예하에 거느린 염왕군은 카가미야마를 돌아 나타나서는 질서정연하게 가세가와 쪽으로 진군했다. 성벽에서 1리쯤 떨어진 가세가와에 걸린 유일한 다리는 먼저 달려온 기병이 확보했다. 공성 중이던 쇼니 측 류조지 군은 그동안 법석만 떨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다리를 점령한 염왕군은 선봉을 먼저 건너게 했다. 이들이 강 건너에서 류조지 군의 반격을 대비하는 사이 염왕군 본대는 강을 건너는 다리 네 개를 더 세웠다. 다리가 완성되자 염왕군 본대가 가세가와를 건너왔다. 그냥 뛰어들지 않고 굳이 다리를 세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가세가와를 건널 때까지 종대 대형으로 행군하던 염왕군은 강을 건너서는 거대한 횡열진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좀 이상했다. 소가 끄는 수레 같은 것들이 대열 선두에 20여 량 가량 섞여 있었다.
성벽 아래에서 난리를 치던 류조지 군은 염왕군이 가세가와 도하를 마치고 횡대 대열로 전개를 마칠 때쯤에야 겨우 전투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본진에 있는 부상병 2천여 명을 지키고 성내에 있는 오우치 군이 치고 나오는 상황을 대비하려는지, 1천 정도를 뒤에 남긴 상태였다.
준비를 완료한 류조지 군도 다가오는 적에 맞서서 대열을 갖추어 전진했다. 본대를 버리고 먼저 히젠으로 도망칠 수도 없는 이상, 가능한 성에서 떨어져서 싸움으로서 자유롭게 움직일 공간을 확보할 의도인 듯했다.
태도는 용감하지만 저만한 병력 차이가 있다면 제대로 싸움을 벌여 이길 방법은 없다. 소수 병력으로 적장이 있는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하여 그 목을 베는 방법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다. 적장 류조지 이에카네도 그럴 생각인 게 분명해 보였다.
물론 그 계획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염왕군은 자기 편 류조지 군을 빼고도 무려 4배가 넘고, 자기 품으로 뛰어든 류조지 군을 그대로 양 날개로 둘러싸 섬멸해버릴 수 있다. 게다가 좌우 양익 끝에는 각각 5백기에 달하는 기병까지 대기하고 있다.
“동쪽에서는 쇼니 군 본대가 후퇴, 다가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동쪽 성벽에서 전언이 왔다. 하지만 서쪽 성벽에 있는 오우치 병사들로서는 나가야스 군을 쫓아서 공성전을 중단하고 떠났던 쇼니 군 주력부대가 왜 갑자기 돌아오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는 지금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활극 쪽이 훨씬 흥미진진했다.
사가 성 서쪽 평지에서 대열을 짠 채 서로 접근하던 양군 사이의 간극이 10정(약 1km)까지 줄어들었다. 좀 더 전진하면 이제 양군이 상대방 대열을 향해 화살을 쏘고, 창을 든 보병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눌 차례다.
헌데 염왕군은 이제 막 양군이 충돌하게 될 이 시점에 진군을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대열 중앙에 위치한 중군만 멈췄다. 좌우 양익은 조금 더 앞으로 나가서 적을 둘러싸는 모양으로 움직였다. 예상대로 적을 포위할 의도인 듯했다. 이쪽은 힘을 아끼며 적을 기다리고 말이다.
여기까지는 성벽 위에 선 오우치 병사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염왕군이 갖춘 무장이었다. 가까워지면서 눈에 들어왔지만, 이제까지 저런 이상한 형태로 무장을 갖춘 부대를 본 적이 없었다.
일단 궁병이 너무 많았다. 궁병이 ⅓이나 되고, 분명히 주력이 되어야 할 창병은 ⅓밖에 안 되었다. 그 창마저 류조지 군이 쓰는 창과 비교하면 길이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저런 짧은 창을 들고서는 류조지 군에게 간단히 돌파당할 게 확실하다.
수적으로 열세인 류조지 군은 분명 사격전 따위 포기하고 곧바로 돌격할 게 분명하다. 그걸 막으려고 궁병 수천이 활을 쏜다고 해도 고작 두세 발, 그 정도로는 류조지 군을 제압할 수 없다. 기껏해야 ?도 쓰러트리지 못할 거다.
게다가 저 넓게 퍼진 진형을 보면 창병 대열도 얇다. 짧은 창에다 얇은 대형, 이거야 마치 적에게 돌파해 달라고 들이미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류조지 군도 그 점을 파악하고 적의 중심을 노려 적장을 쓰러트리려고 결심한 듯했다.
더구나 염왕군에서 나머지 ⅓은 창도, 활도 아닌 나무 손잡이가 붙은 쇠막대기 같은 물건을 들고 있었다. 물론 쇠몽둥이가 무기로 쓸 수 없는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창을 들고 정면으로 맞붙는 결전에 칼 정도 길이밖에 안 되는 쇠몽둥이를 들고 나오다니?
몽둥이를 무기로 가지고 있는 것도 특이한데, 쓰는 모습은 더 이상했다. 창병 뒤에 붙어서 대기하는 것도 아니고 창병 대열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쇠몽둥이를 땅바닥에 곧게 세우더니, 그 속에 뭔가 집어넣고 막대기로 쑤시는 듯했다. 몽둥이가 아니고 대롱인 모양이었다.
대롱을 든 병사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대롱을 들어 손잡이 부분을 얼굴에 대더니 류조지 군 쪽을 겨누었다. 성벽 위에 늘어선 오우치 병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염왕군의 알 수 없는 행동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물자를 싣고 있는 줄만 알았던 수레들이 앞으로 나와서 대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수레를 풀어놓은 소들은 대열 뒤로 돌아갔고, 병사 여러 명이 달라붙어 수레를 밀어 자리를 잡았다.
다시 보니 그 ‘수레’들 중에 절반은 수레가 아니었다. 바퀴 두 개를 연결한 축 위에 시커먼 철통들이 올라앉아 있었다. 그 통 앞에 모인 병사들도 대롱을 든 병사들과 비슷한 짓을 했다. 옆에 둔 다른 수레에서 내린 물건들을 막대기로 통 안에 쑤셔 넣었다.
이제 염왕군과 류조지 군 사이 거리는 5정(약 500m)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염왕군은 싸울 준비는커녕 쇠통이나 겨누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커다란 쇠통 옆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염왕군 병사를 보면서 성벽 위에 있는 오우치 병사들이 멋대로 지껄였다.
“저놈들, 혹시 저주라도 걸려고 하는 게 아닐까? 가몬에다 금시조를 그린 걸 보면, 어딘가 절에서 나온 승병들일지도 몰….”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진 건 어느 병사가 막 자기 생각을 털어놓던 그 때였다. 펑 하는 소리, 천둥소리와도 어딘가 다르고 생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런 폭음이 일시에 수천 번이나 울렸다. 순간 하늘을 쳐다본 병사들도 있었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세, 세상에!”
서쪽 평야를 바라보던 병사들이 일시에 입을 딱 벌렸다. 염왕군 대열 앞에 희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구름처럼 피어오른 연기 때문에, 분명히 대열을 이루고 있던 병사들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놈들 불을 뿜었어! 불을 뿜었다고!”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 대다수가 비명을 질렀다. 염왕군 병사들이 얼굴에 갖다 대고 있던 쇠로 된 대롱, 그 끝에서 연기와 함께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을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 불길이 향한 곳은….
“류조지 놈들이 죽어 있다!”
아직 진군하고 있던 류조지 군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멈춰 있었다. 적어도 수백 명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제자리에 멍하니 멈춰 서 있었다. 쓰러진 동료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조차 그들을 흔들지 못했다.
“뭐지? 뭐야!”
오우치 병사들의 눈은 염왕군 대열 앞에 있어 연기구름에 가려지지 않은 쇠통들을 향했다. 쇠통들은 멈춰선 류조지 군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고, 그 옆에 횃불을 들고 서 있던 병사들이 통 위쪽에 횃불을 가져다 댔다. 다음 순간 아까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요괴다! 요괴야!”
오우치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다. 십여 개에 달하는 쇠통들이 불을 뿜자 구름과 같은 연기 속에서 뭔가 시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검은 구름을 그대로 맞은 류조지 군 대열은 삽시간에 시체더미가 되었다. 갑옷과 투구 조각이 하늘로 튀어 오르고 피보라가 사방을 적셨다.
“용이다! 저건 화룡(火龍)이야!”
“놈들은 불꽃을 뿜는 마왕이다! 염왕이 나타났다!”
성벽 위에 있는 오우치 병사들이 공포에 떨었다. 어쩌면 저 군대는 지옥에서 올라온 명왕이 거느린 군대일지도 모른다. 도와주러 온 우군이 아니라 쇼니고 오우치고 다 불태워 죽인 다음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악귀들인지도 모른다. 저 떼죽음이, 불꽃과 연기가 바로 그 증거다!
“연기가 걷힌다!”
첫 번째로 피어올랐던 연기가 바람에 날려 천천히 흩어졌다. 혹시 사라지지 않았을까 했던 쇠대롱을 든 병사들은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까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또다시 류조지 군을 향해 대롱을 겨냥한 상태로 말이다.
“또 불을 뿜는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성벽 위를 뒤덮었다. 수천 개나 되는 대롱들이 일제히 불을 뿜자 또 수백 명이나 되는 류조지 군 병사들이 피를 뿜으며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콩 볶듯이 울리는 그 소리가 병사들의 귀를 때렸다.
“류조지 놈들이 도망친다!”
세 번째로 불벼락을 뒤집어쓰자 류조지 군 대열은 그대로 와해되었다. 두 번째 타격까지는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던 병사들이, 세 번째로 쏟아진 불벼락을 맞고 마침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다.
무사고 아시가루고 행동에는 차이가 없었다. 모두가 창이고 뭐고 버릴 수 있는 물건은 다 팽개치며 필사적으로 뒤쪽으로 도망쳤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4천 군사가 보무당당하게 진격하던 자리에 이제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류조지 군 절반은 죽거나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의식이 남아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가 남아 있는 자들은 있는 힘을 다 해서 땅바닥을 긁었다. 불을 뿜는 악귀들, 사람을 잡아먹는 그 불꽃에서 도망치려는 그 공포가 성벽 위에서도 확연히 보였다.
“화룡이 또 불을 내쏜다!”
공포 섞인 비명이 성벽 위에서 울렸다. 십여 개나 되는 철통, 아니 악귀들이 재차 불꽃과 연기를 뿜은 것이다. 또 시커먼 구름이 뿜어지면서 번개같이 류조지 군을 휩쓸었다. 비명과 시체가 또 생겨났지만 류조지 군 대열이 완전히 흐트러진 덕에 아까보다는 그 수가 적었다.
이로써 오우치 군 병사들은 저 악마들을 확실히 염왕군(炎王軍)으로 부르게 되었다. 불꽃을 뿜어대는 마왕의 군대라는 뜻으로.
“어, 어쩌지? 저놈들이 이쪽으로 오잖아!”
넋이 나간 채 류조지군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쳐다보던 오우치 군 병사들은 누군가 동료가 지르는 비명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염왕군이 다시 앞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양익 끝단에 있던 기병들이 먼저 땅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뒤이어 보병이 움직였다. 박자를 맞춰 울리는 북소리가 저들의 발을 앞으로 나가게 했다. 대롱을 든 병사들은 뒤로 가고 이번에는 창병들이 앞에 섰다. 병사들이 대오를 맞춰 움직이는 옆에서는 소들이 다시 앞으로 나와 쇠통 형상을 한 요괴들을 몸에 묶었다.
염왕군은 얼마 움직이지도 않고 방금 전까지 류조지군이 진을 치고 있던 자리에 다가왔다. 시체와 부상자가 널린, 피바다가 되어 있는 곳이었다. 적이 가까워지자 쓰러져 있던 부상자들 중 몇이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서 도망치려고 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염왕군은 그렇게 일어난 병사들을 살려두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와 몸을 꿰뚫었다. 손에 든 작은 대롱이 불을 뿜었다. 도망치려던 병사들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거나 비명을 지르며 신령님을, 부처님을, 어머니를 찾았다.
마침내 염왕군 창병들이 류조지 군 부상자들이 쓰러져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그자들은 짧은 창을 거꾸로 들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숨이 붙은 채로 꿈틀거리고 있는 류조지 군 병사들을 서슴없이 내리찍었다. 포로로 잡지도, 수급을 거두느라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죽어가는 류조지 군 병사들이 지르는 단말마적인 비명과 염왕군 병사들의 끔찍한 웃음소리, 함성이 성벽 위까지 들려왔다. 점점 사가 성을 향해서 다가오는 죽음의 물결을 보고 공포에 질린 오우치 군 병사들은 숨도 쉬지 못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온다, 저 악마들이 온다!
“저 류조지 깃발을 든 놈들은 뭐지? 저 염왕군 오른편에 있는 놈들은?”
누군가 내뱉은 소리에 시선이 쏠렸다. 그렇다. 분명 류조지 깃발을 든 군대 한 무리가 저 악마들과 함께 있었다. 가까이 올수록 점점 확실해졌지만 확실히 류조지 군이었다. 다만 갖춘 무장은 쇼니 편에 있는 자들보다 빈약했다.
염왕군에 있는 류조지 병사들은 그 불꽃과 연기를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쇼니 편 류조지 군은 염왕군 정면에서 접근하다가 궤멸을 당했기에 그들 앞에는 피바다가 없었다. 이들은 다소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묵묵히 염왕군 오른편에서 진군하고 있었다.
“놈들은, 놈들은 악귀들에게 혼을 판 거야! 더 많은 생명을 넘기기로! 그래서 자기들 앞에서 맞닥뜨린 자들을 모두 제물로 바치는 거라고!”
병사 한 명이 고함을 지르자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악귀들이 사가 성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성 안에 머물러 있으면 무사할 수 있을까? 놈들이 성문 따위는 부수고 안으로 들어올까? 혹시 성벽을 돌아 동쪽으로 지나쳐 가지는 않을까?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 저 악귀들을 피할 수 있을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쇼니 군 따위는 이제 고민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수비병 거의 전부가 천둥과 같은 굉음소리를 듣고 서쪽 성벽으로 몰려와 있었다. 다가오는 쇼니 군 본대를 감시하려고 동쪽 성벽에 남아 있던 몇몇 병사들은 그 뒤를 따라오는 대규모 원군을 보고 기뻐서 환호했다. 하지만 서쪽 성벽에서는 공포와 혼란이 난무하고 있었다.
“성문을 나가 도망치자! 저놈들은 천천히 걸어오고 있어. 도망칠 수 있을 거야!”
“멍청아! 저기 기병 안 보여? 따라잡힐 거야!”
“따돌려도 소용없어. 남쪽은 바다, 북쪽은 산, 동쪽은 쇼니 군 본대야! 다 막혔다고!”
“성에 남아 있어야 살 수 있어! 섣불리 나갈 생각 하지 마!”
저들은 귀신이다. 귀신이 내뿜는 불과 바람은 사람을 갈가리 찢어 죽이지만 돌을 쌓아 만든 견고한 성벽에는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높은 성벽 위에 있는 이들에게는 저 불길이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벽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쏘면 혹시 맞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병이!”
쇼니 군 패잔병 여럿이 사가 성을 남북으로 돌아 도망쳤다. 반대편에서 스케모토의 본진에 합류할 생각이겠지만 염왕군에 있는 악귀들은 그걸 눈감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그 뒤를 쫓으며 화살을 날려댔다. 쓰러진 자들이 말발굽에 짓밟혔다.
“야, 야! 저놈들 좀 봐!”
병사들이 성 옆을 질주하는 염왕군 기병들과 평원 저쪽에서 다가오는 염왕군 보병의 물결을 보면서 공포에 떨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갑자기 성벽 아래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몇몇 병사가 그 손길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문을 열어줘! 제발!”
“부탁이야, 살려줘! 성에 들여 줘!”
도저히 생각도 하지 못한 광경이 서문 밑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피투성이가 되고 겁에 질리고 무기를 버린 사람들이 문에 매달려서 절규하고 있었다.
서문 앞에 매달려 있는 자들은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쇼니 군 병사들이었다. 방금 불벼락을 뒤집어쓰고 도망쳐 온 자들뿐만이 아니라 후위부대로 진영에 남아있던 자들, 그동안 공성전에서 부상을 입고 누워 있던 자들까지 성문에 매달려 호소하고 있었다.
“저놈들은 오니야, 귀신이라구! 요괴야! 제발 살려 줘!”
“성에 넣어 줘, 제발!”
보통 때라면 어떤 병사도 스스로 적에게 항복하려고 들지 않는다. 살려주겠다는 보장 없이 항복해 봐야 머리가 잘려 수급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서문 밖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쇼니 군 병사들이 매달려 있었다. 무기도 팽개친 채 눈이 뒤집혀서 말이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보여주는 증거로 이만한 것도 없었다. 하얗게 질린 병사들이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았다. 수문장을 맡은 무사가, 그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여, 열어 줍시다! 저들도 사람입니다!”
“열면 안 됩니다! 악귀들이 따라 들어올지도 몰라요!”
“아직은 괜찮아요! 성 안에 잠깐 넣어주고, 악귀들이 성을 공격하면 같이 싸우게 합시다!”
찬반을 외치는 격렬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어느 쪽이든 공포에 질려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한참 고민하던 수문장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열어라! 들여 줘라!”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가 성에서는 아직까지 상관이 내리는 명령이 통할 정도는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곧 성문이 삐걱거리며 열렸고 절규하던 쇼니 군 병사들이 그 틈으로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다음 순간 아까의 콩 볶는 듯 이어지는 폭음이 또 울렸다. 어느새 대롱을 손에 든 염왕군 보병들이 쇼니 군 진영을 넘어 서문 앞 5정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성문 앞에 몰려 있던 쇼니 군 병사들이 또다시 날아든 불줄기에 맞아 줄줄이 널브러졌다. 오우치 군 병사들은 성문을 닫을 엄두도 못 내고 엎드려서 떨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폭음은 이제 울리지 않았다. 염왕군이 전진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