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56
4부 440화(2056화)
16
컬럼비아 의용군단에서는 대략 1년쯤 종군한 뒤부터 돌아가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연대의 전투력을 유지해야 하는 지휘부로서는 꽤 곤란한 문제였다.
나가는 자리는 메워야 한다. 하지만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늘 정확하게 수가 맞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의용군이라는 성격상, 아직 교대할 인원이 새로 오지 않았어도 약속한 복무를 마치고 귀국하겠다는 이들을 막지는 못했다.
‘상병, 두어 달만 더 복무해 줄 수 없겠나? 우리 연대는 아직 임무가 끝나지 않았어. 맞서 싸워야 할 빨갱이들이 아직 잔뜩 남았단 말 일세.’
‘중위님. 저는 2년 동안 복무하겠다고 서약하고 지원했습니다. 이미 그 기간은 다 채우고 남았지요. 이제는 그만 보스턴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많은 의용군 병사가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주님을 위해 세상 반대편까지 달려와서 힘껏 싸웠다고, 이제 집에 가고 싶다고. 이국(異國)을 여행하는 것도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이미 많이 싸웠다. 수많은 이단자를 토벌하고 놈들의 집과 마을을 불태웠다. 저들이라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기에 이쪽에서도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2년을 그렇게 보냈으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자격은 충분하지 않은가.
급료 같은 건 문제가 아니다. 덥고 습한 시니카 땅을 벗어나 쾌적한 고향의 공기를 다시 마시고 싶은 거다. 그리고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다. 다들 homesick, 향수병에 걸렸다.
귀국을 원하는데 당장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 탈영해 버리는 성급한 병사들도 있다. 연대 지휘부로서는 그 병사가 재주껏 미국으로 가는 배를 구해서 탔는지, 아니면 시니카에 계속 머무르면서 여기 사는 서양인들 사이를 떠돌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사랑을 나눌 때 알아듣지도 못하는 비명을 지르는 암돼지가 아니라 제대로 말이 통하는 ‘여성’을 안고 싶으니 돌아가겠다는 녀석도 있더군.”
리 대령이 인상을 쓰며 손가락에 힘을 주어 코 위를 주물렀다. 돌아가고 싶다는 병사들의 귀국 지원서가 산처럼 쌓이는 게 현실이다 보니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표현 참 천박하군요. 하지만 다른 병사들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비슷합니다. 물론 계속 남겠다는 녀석들도 있기는 있습니다만…..”
조지아나 앨라배마 같은 남부 출신들은 이런 덥고 습한 기후가 익숙하다. 시니카의 덥고 습한 기후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이들은 대부분 뉴잉글랜드 같은 북부 출신들이다. 문제는 의용연대 병력 중에서 적어도 ⅔는 북부 출신이라는 데 있었다.
“이대로 두면 조만간 우리 연대는 원래 숫자의 ⅓로 줄어들 상황이오. 컬럼비아 의용군단 전체 숫자의 절반, 문자 그대로 주력을 자랑하던 우리 연대가 고작 그 규모로 줄다니.”
버지니아 연대 병력은 이미 2천5백 명 선으로 줄었다. 귀향자 외에도 시신이 되어 이국의 땅에 묻혔거나 미국으로 돌아간 전사자와 병사자, 일부 탈영병 때문이다. 빠져나가는 만큼 보충이 안 되니 인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정규군이라면 보충이 안 되면 기존 인원에게 교대 없이 계속 복무하라고 명령하면 된다. 그래서 본래 정규군인 루이지애나 연대는 간혹 제때 인원이 보충되지 않는데도 원래 규모인 2천 명 선을 대체로 별 탈 없이 유지하고 있다.
산티아고 연대도 똑같이 하고 있지만, 문제는 이쪽은 인원이 보충될 희망이 아예 없다는 거다. 봉급도 안 오는데 보충병이 올 리 있는가. 귀국할 희망도 없으니, 탈영이 속출한다.
현재 산티아고 연대는 인원이 6백 명가량에 불과하다. 비율로 따지면 버지니아 연대보다 훨씬 심각한 손실을 내고 있다.
“우리도 병사들을 강제로 잡아두지 못하는 이상 조만간 그렇게 될 겁니다. 사실 시니카가 우리 고향도 아니고….언젠가 돌아가기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연대장님, 우리 연대의 귀국 일정은 언제로 잡혀 있습니까?”
의용병 대부분이 2년 예정으로 지원한 데서 알 수 있듯, 버지니아 연대의 본래 출정 예정 기간은 2년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출발해서 시니카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8개월이 넘게 걸려버리는 바람에 시니카에서 실제로 싸우는 기간만 2년으로 다시 조정했다.
이미 이 단계에서 연대원들 사이에 불만이 꽤 있었다. 하지만 기껏 세상 반대편까지 총을 들고 싸우러 온 만큼 어느 정도는 참고 억누르는 게 있었는데, 여기서 보내는 시간도 2년이 넘어버리니 이제 불만들이 터지기 시작한 거다.
“슬슬 원하는 자들은 전면 철수를 준비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루이지애나 연대야 누벨 프랑스 정부의 명령에 따라 철수를 결정하면 그만이라지만,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몇몇 장교가 일어서서 리 대령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반대 의견에 직면했다. 목사 출신인 선임 중대장 셰퍼드슨 소령이 철수 반대 진영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저는 아직 더 싸울 생각입니다. 비록 우리가 대통령과 의회의 명령을 받아서 출동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연대기와 함께 성조기를 받들고 있으며 우리 미합중국 시민들의 응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눈에 띄는 성과도 없이 돌아간단 말입니까?”
셰퍼드슨 소령의 주장은 간단했다. 감히 미국을 공격한 빨갱이들의 두목을 붙잡아서 목에 교수형 밧줄을 걸거나, 아니면 무릎을 꿇고 거액의 배상금을 바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면서 이 불신자들의 대륙에 신앙을 전파하는 건 기본이다.
“지금도 본국에서 보충병 1개 중대가 건너와 있지 않습니까. 이건 본국에서 아직도 우리 의용군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는 방증입니다. 여러분은 그 점을 곰곰이 생각해 주십시오.”
양측은 포기하지 않고 서로 자기 의견을 내세웠다.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17.
“그래서 어떻게 됐나?”
쿠아이와의 호기심 어린 질문을 받은 이훈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군수참모 겸 법무참모로 몸이 4개라고 해도 모자랄 만큼 바쁜 사람이건만, 저런 회의에는 또 참석해야 했다.
“어떻게 되기는. 당연히 결론이 안 났지.”
순전히 전투가 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면 철수하자는 결론이 나지 않은 데는 의용군을 후원하는 후원회가 주로 선교회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선교회들이 이번 원정을 후원하는 건 시니카에 주님의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생각해서다. 그 사람들이 선뜻 철수에 찬성할 리 있는가.
의용군 장교 중 절반은 목사나 설교자 출신이다. 이들은 여유가 있을 때마다 주둔지 인근 지역 주민들을 모아놓고 구호품을 나눠주거나 환자를 치료해 주면서 선교 사업을 진행한다. 때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북미주나 대한 본국에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교도에 이단자라고 죄다 쏴 죽일 때는 언제고 그러는지들 원.”
“그야 송나라 관원들이 저 마을 놈들은 역적이오, 하고 지목하느냐 안 하느냐 차이지.”
안내하는 요주도통부 관원들이 아무리 부패했어도 나타나는 마을마다 불태우지는 않았다. 싸우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곳에서는 이런 우호관계가 성립되곤 한다.
애초에 이단자와 이교도를 전부 죽이고 불태워서는 선교가 성립하지 않는다. 일단 개종을 시키려는 시도는 해보아야 하는 법이다. 고개를 젓던 이훈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때?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나?”
고생은 할 만큼 했다. 전투에서 죽을 뻔하기도 하고, 위생에 그렇게 주의했어도 토사곽란 서너 번은 겪었다. 학질에 걸려 며칠을 정신 못 차리고 앓기도 했다. 아무리 모기장을 쳐도 한 번도 물리지 않고 지낼 수는 없었다. 그만하면 계급장 값은 충분히 했다.
쿠아이와 역시 비슷한 고생을 했다. 하지만 이훈의 질문을 받은 쿠아이와는 아주 유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항구에서 짐이나 나르는 것보다야 전사로 사는 편이 훨씬 나은 게 당연하지. 회의에서 자네가 들었다는 말과 별개로, 병사나 하사관 중에도 계속 여기 있겠다는 놈들이 많아.”
쿠아이와로서야 지금 하는 일이 부두에서 하역 일꾼 노릇 하기보다는 나을 수밖에 없다. 하와국의 왕자로 태어난 몸인데, 노역과 전쟁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부두 노동자는 온갖 잡놈들에게 부려지는 삯꾼으로 메이지 않은 노비나 다름없는 신세다. 하지만 비록 장교는 아니더라도, 군대에 있으면 백인 병사들에게 턱짓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혹시 싸우다 죽을 위험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놈들이 연대장 나리가 말한 연대 전체 중 남겠다는 ⅓에 들어가는 인원들이겠지.”
“그건 그럴지도. 그런데 자네는? 자네는 뉴욕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나?”
“나야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
단순 통역은 이제 안 해도 된다. 후송에서 쓰는 방언을 구사하는 통역들을 여럿 고용했고 선교 사업 진행을 위해서 선교사들도 말을 익히고 있으니 말이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으면 선교도 어렵다.
하지만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재주라면 필담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이훈 이상 할 사람이 없다. 게다가 후송에서 통용되는 법률적인 지식 – 후송의 법률도 대명률이 기본이라 대한과 그 근본이 큰 차이가 없다 – 까지 갖추었으니, 더더욱 대체하기 어렵다.
“내 자리 대신할 사람 하나만 구해주게. 그러면 나도 당장 아그네스 양 곁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한양에 부탁하게나. 폐하께 편지 한 통만 드리면 당장 적임자를……”
“그 입 닥치시고.”
다른 장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지라 대화하기 편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노닥거리는 동안 신참 장교 두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와서 경례를 붙였다.
“안녕하십니까, 화이트 소령님. 율리시즈 그랜트 중위입니다.”
“존 시빙턴 소위입니다.”
그랜트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이고 시빙턴은 순수 의용군이었다. 경례하는 자세에서 차이가 아주 눈에 띄게 났다.
이들은 둘 다 오하이오 출신으로, 오하이오에서 모집한 의용병을 인솔해서 함께 왔다. 각 중대에 보충병으로 흩어질 의용병들이 받아야 하는 보급품을 받으러 온 거다.
“블랙 상사. 좀도와주게.”
쿠아이와가 밖으로 나가 병사들을 불렀다. 창고를 열고 물자를 나눠주려면 일손이 필요한 건 당연하니 말이다. 그 귀찮은 일을 이들 두 사람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두 사람 모두 실전은 처음이겠지. 아무래도 현장에서 도움을 받을 부분이 좀 많겠소.”
“감사합니다, 소령님.”
두 사람 모두 이훈보다 좀 어렸다. 이훈이 기묘년….아니 1819년 생인데 시빙턴은 1821년, 그랜트는 1822년생이라고 했다. 한번 넘겨본 두 사람의 인사 서류 내용을 떠올리며 이훈이 대화를 이어갔다. 이제 고급장교로 행동하는 데도 제법 능숙해졌다.
“두 사람 다 오하이오 출신이로군. 시빙턴 소위는 목사라고 했소?”
“예, 그렇습니다. 아시아 선교가 제 꿈이었습니다.”
오하이오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길인 노던 트레일 – 미국에서 북미주를 왕래하는 교역로를 가리킨다 – 을 통해 오가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동양 선교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동방에서 지내려면 한국어가 필수라고 해서 한국어도 익혔다고 했고.
“저, 합준국 목사임니다. 간리 아니고 사제임니다. 조은 말씀 드리러 왔습니다.”
“그 정도면 꽤 능숙하구먼.”
시빙턴이 뽐내느라 선보인 한국어 솜씨는 제법 상당한 수준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자기가 준비한 선교지인 한국이 아니라 후송으로 왔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랜트 중위, 귀관도 자원했구려. 요즘 본국에서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커서 장교들이 기대가 크다던데, 왜 이 먼 곳에 의용군으로 지원해서 왔소?”
이게 정규군 출신 장교들이 그만 귀국하고 싶어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올해 새로 취임한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민주당 팽창론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 팽창론자들은 그 욕망을 남쪽에 있는 쿠바에 투사하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남아메리카에서처럼 스페인 식민 세력을 축출하여 진정한 아메리카 해방을 이뤄내야 한다는 게 명분이다. 하지만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실제 목적은 미국의 영토 확장에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정부 일각에서는 굳이 전쟁을 치를 필요 없이 쿠바를 그냥 스페인으로부터 사들이자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귀관 같은 정규 군인들은 생각이 좀 다를 것 같은데. 어설픈 의용군이 아니라 정규군으로 서나라의 전장에서 공적을 세울 기회 아니오.”
후송에 의용군으로 출정한 장교 중에도 이 경험을 장래 출세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꽤 있다. 정식 전쟁이 아니므로 정부에서 정식 계급이나 훈장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언젠가 정치에 나서면 자랑스러운 경력으로 내세울 정도는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의용군이 아니라 정식으로 나라의 명을 받아 관군으로 출전하는 게 어떤 면에서든 더 나은 건 불문가지다. 그렇다면 굳이 먼 후송에 오기보다 본국에서 쿠바 출정을 준비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화이트 소령님 말씀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장교들도 많습니다. 제 사관학교 동기인 덴트, 롱스트리트 같은 장교들도 곧 스페인과 전쟁이 일어날 거라면서 가지 말라고 말리더군요.”
그랜트는 차분하게 말했다. 군대에 대한 염증이 묻어나는 태도였다.
“저는 군 생활이 싫습니다. 출세도 별로 관심 없습니다. 4년 동안의 의무복무만 마친다면 바로 전역해서 학교 교사가 될 생각입니다. 그래서 시니카로 오는 의용군 복무도 군 복무와 같이 기한을 인정해 준다기에 선뜻 지원했습니다.”
스페인군보다는 태평천국의 빨갱이 패거리들 쪽이 훨씬 상대하기 쉬울 것 같았다고 했다. 시니카가 오하이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덥고 습하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건 쿠바에서도 똑같을 게 아닌가.
“심지어 위도는 쿠바가 여기보다 더 낮습니다.”
그랜트는 아주 담담하게 자기가 의용군으로 지원한 이유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옆에 있는 시빙턴은 영 다른 태도였다.
“저는 중위님과는 다릅니다. 오는 배 안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큰 대륙에 거주하는 야만인들에게 기필코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말 겁니다. 다소 강압적인 수단까지 사용할 수밖에 없더라도 말입니다.”
이미 그보다 앞서 온 의용군들이 그 ‘강압적인 수단’을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를 잘 아는 이훈으로서는 한숨이 나올 태도였다. 그래서 다시 차분하게 설명했다. 현지인들에게 지나친 가혹행위를 가하면 이곳 민심이 엉망진창이 될 뿐아니라 다른문제점도 있다고.
“한국 정부가 그 모습을 보고 개신교에 안 좋은 인상을 받으면 한국 본국에서의 선교에 큰 지장이 생길 수 있소. 그러니 교회의 인상을 나쁘게 할 수 있는 지나친 행동을 삼가기를 권하는 바요.”
요즘 총과 불 대신 약과 음식을 사용하는 선교를 더 선호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그거다. 한양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게서 ‘한국 신문에 실린 버지니아 연대의 안 좋은 기사 탓에 미국 선교회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상이 나빠지고 있다’라는 급전이 여러 통 날아온 뒤였다.
“아….그렇습니까? 그건 또 생각하지 못했군요.”
시빙턴이 우울한 낯빛으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또 고개를 들었다.
“한국군은 비행선이라는 ‘움직이는 열기구’를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위에서 성경책과 십자가를 살포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한국군에서는 한 번도 그 용도로 쓰도록 비행선을 빌려준 적이 없소. 포기하시오.”
시빙턴이 고개를 숙이고 투덜거렸다. 그동안 그랜트는 아까 자세 그대로 묵묵히 서 있을 분이었다. 그때 쿠아이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급품 준비 마쳤습니다, 소령님.”
“수고했군. 나갑시다, 그랜트 중위, 시빙턴소위. 귀관들이 데려온 오하이오 청년들에게 이 시니카 땅에서 지내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나눠줘야지 않겠소.”
필수품인 고무장화, 고무를 씌운 방수 망토, 침구, 모기장, 추가분 피복, 비상용 통조림과 깡통따개 따위가 지급됐다. 깡통따개라면 식료품점에 비치된 큼지막한 기계장치밖에 모르던 신병들은 한 손에 들어가는 조그만 도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잃어버리지 마라. 잃어버리면 새로 받을 때까지 보위 나이프1)로 깡통을 열어야 하니까.”
이훈은 병사들에게 주의를 주며 물품 지급을 감독했다. 언제 철수하게 될지 몰라도 있는 동안에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볼 일이다.
1) 보위 나이프(Bowie knife) :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야외용으로 쓰던 대형 나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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