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66
4부 450화(2066화)
18.
“총재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수에즈 운하 회사 총재, 페르디낭 마리 레셉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로 돌아왔다. 사업이 시작된 때로부터 따지면 이미 10년이고 자기가 이 자리에 앉은 지도 벌써 3년이다. 하지만 아직 사업은 끝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예? 제가 총재를 맡으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자네는 이 사업을 처음 기안했고 이제까지 이뤄진 성과 중 사실상 전부가 자네 덕분에 이루어진 것들이지. 그렇다면 총재 자리에 누가 앉아야 하는지,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닌가?”
1842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 중 하나가 수에즈 운하 회사 총재 앙굴렘 공작이었다. 물론 왕의 숙부일 뿐, 권력이나 무력이 없는 공작이 혁명군을 맞이해서 뭔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는 건 자명했다.
하지만 아직 자기를 총애하던 루이 19세가 튈르리 궁전을 지키고 있는데도 먼저 도망간 건 의리 있는 행동이라고 하긴 힘들었다. 물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조카인 국왕도 결국 그 뒤를 따랐지만 말이다.
총재가 도망갔다고 해서 수에즈 운하 회사의 업무가 마비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앙굴렘 공작은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는 그날까지, 수에즈 운하 회사의 이름을 걸고 공작이 한 일은 파티를 열거나 뒷돈을 챙기는 것밖에 없었다.
모든 실무는 총괄이사인 레셉스의 몫이었다. 7년 동안 회사를 운영하느라 죽을힘을 다한 레셉스는 혁명이 일어나고 공작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젠장, 이제 또 어떤 놈이 총재 자리에 앉아 회사를 뜯어먹으려나.
50여 년 전 혁명 때도 그랬다.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 이런 국가사 업은 권력에 끈을 대는 데 성공한 놈이 간단히 임자가 되어 주워 먹곤 했다. 과연 어떤 놈이 총재랍시고 나타날지, 과연 계속 회사에 남아 있을 수는 있을지 우려하며 한숨이나 쉴 따름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를레앙 공작이 레셉스를 자기 거처인 팔레 루아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수에즈 운하 회사 총재 임명장을 건넸다.
“운하 사업은 자네가 아니면 이어갈 수 없어. 그러니 자네가 이제부터 총재 자리에 앉게. 그리고 자네 뜻에 따라서 사업을 진행하게. 이제는 누구도 앙굴렘 공작이 했던 것처럼 자네 일에 훼방을 놓지 못할 테니까.”
“공작 각하….”
뜻밖이었다. 당연히 자기 사람, 오를레앙파에 가득한 여러 정치꾼 중 한 사람을 데려다가 앉힐 거라고 예상했다. 앙굴렘 공작이 회삿돈으로 누리는 사치를 보면서 부러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공작이 국왕의 숙부라서 도저히 그 자리를 넘보지 못했을 뿐이지.
“건투를 비네.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위해, 부디 최선을 다해주게.”
“감사합니다! 각하를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눈물이 났다. 드디어 자신을, 이 사업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니까.
책상 앞에 앉은 레셉스가 신음을 토했다.
“제기랄, 믿음만 주면 뭐 하나. 돈을 줘야지.”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겠다던 약속은 다 헛수작이었다. 아니, 대통령 본인은 운하 사업에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했다. 계속 순위가 밀려서 그렇지. 그래도 운하 회사의 2대 주주인 이집트 총독과 비교하면 루이 필리프는 천사였다.
“총독 각하,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 수에즈 회사에서는 도저히 각하의 요구를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카이로로 달려간 레셉스는 메흐메드 알리 앞에 엎드려 빌다시피 했다. 금융시장에서 모은 투자금의 40%를 자기한테 먼저 달라는 조건이 너무 가혹해서 도저히 투자자를 모을 수가 없다고, 그러니 제발 요구를 낮춰 달라고.
이 운하는 정말로 될 사업이었다. 증기선 발명 이후로 갈수록 규모가 늘어만 가는 유럽과 아시아 간의 교역량을 생각하면 수천 km나 여정을 줄여 주는 이 운하는 개통되기만 하면 미어터질 정도로 배들이 몰려들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 개통이 안 되고 있다.
“각하. 운하가 개통만 되면 전 유럽의 교역상들이 달려와 각하 앞에 금화를 쌓을 겁니다. 제발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루이 필리프는 적어도 레셉스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돈을 안 대주는 이유도 여러 곳에서 터지는 전쟁과 국내 정치 탓이었지 일부러 훼방을 놓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레셉스의 자본 유치 사업도 최대한 도와주려고 했다. 운하 개통이 그에게도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메흐메드 알리는 자기가 죽은 뒤에 완공된 운하가 가져다줄 번영보다 지금 당장,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눈앞에 돈이 쌓이기를 더 원했다. 70세를 한참 넘긴 나이가 판단력을 흐트러뜨린 것 같았다.
하지만 레셉스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면서 빌자 겨우 그 고집이 꺾였다. 마지못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 메흐메드 알리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이렇게 통보했다.
“무슈 레셉스, 내가 졌소. 당신이 이토록 간청하니 내가 먼저 투자금을 내 주기는 하겠소. 하지만 이건 당신이 내게 진 빚이야. 그건 알아두시오.”
“가,감사합니다, 총독 각하!”
애초에 자기 지분은 운하를 건설할 부지와 노동자들의 인력으로 내기로 되어있으니 따로 현금은 한 푼도 못 내겠다던 메흐메드 알리가 마음을 바꾸었다. 레셉스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감사 기도를 올렸지만, 덧붙은 조건은 레셉스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트리기에 충분했다.
「이집트 행정부는 수에즈 운하 회사의 일반 지출 중 공사에 꼭 필요한 비용을 대납하되, 이를 회사에 대한 융자로 처리한다. 융자에 대한 이자는 월 1%의 복리로 처리하며 상환은 운하가 완공된 시점부터로 한다.J
월 1%라니. 이건 고리대금 수준이다. 이집트 총독은 자기 지분이 들어간 회사를 상대로 고리대금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 미친 이자를 갚으려면 대체 운하 통과료를 얼마로 매겨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너무 비싸면 배들이 안 올 텐데 말이다.
그나마 이집트 총독이 약간이나마 돈을 대고, 인부들도 예정대로 제공하면서 운하 공사는 다시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이집트 총독이 돈을 떼어먹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금융시장에 퍼지면서 다른 경로를 통한 자금 조달도 조금씩이나마 이루어졌다.
현재 수에즈 운하의 공사 진척도는 대략 60% 정도다. 속도를 최대한으로 올린다면 대략 1848년 중반쯤에는 완공할 수 있을 듯했다. 루이 필리프가 목숨을 걸고 있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는 시기다.
여기까지 오는 데 공사비를 비롯한 잡다한 비용 총 5억 프랑이 들어갔다. 레셉스가 처음 공사를 기획하면서 추산했던 비용이 ‘겨우’ 2억 프랑이었던 데 비하면 정말 엄청난 액수다.
“….거기서 순수하게 운하 공사에 들어간 돈은 3억 프랑이 될까 말 까인데.”
앙굴렘 공작이 낭비한 돈과 횡령한 돈, 각국에서의 로비에 들어간 돈, 프랑스 정부 대신 이집트에 제공한 각종 지원에 들어간 돈까지, 회사 금고에서 새 나간 엄청난 돈을 생각하면 머리가 돌 것 같았다. 그 돈이 순전히 공사비로 쓰였으면 운하가 벌써 완공됐을 텐데.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두고 후회를 곱씹은들 역사가 바뀌지는 않는다. 레셉스는 폐부 깊숙이 크게 숨을 들이쉰 다음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서 이 일거리들을 처리하고 또 나가봐야 했다. 로스차일드와의 약속이 있었다.
19.
루이 19세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고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루이 19세의 정책 중 새로 들어선 정부에서 아주 유용하게 생각하는 것도 많았다. 운하만 좋게 평가한 게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의무교육이었다.
의무교육. 모든 남녀 아동은 만 8세부터 12세까지 꼭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루이 19세의 칙령은 공화주의자들에게도 아주 매력적인 조치였다. 물론 국왕의 의도는 왕정에 충성하는 신민을 육성하는 데 있었겠지만, 몇 년 되지도 않아서 칼이 이쪽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자들은 루이 필리프를 압박해서 교육부 장관 자리를 얻어냈다. 그리고 왕당파를 지지하는 교사들을 모조리 내쫓고 교과서도 교체했다. 당연히 왕당파를 지지하는 성직자가 다수인 교회에서 관장하는 종교교육 역시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우리 공화국에 필요한 건 시민이지 신의 종이 아니오!”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크리스트교도요!”
“아니,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공화국의 시민이지 하느님의 신민이 아닙니다. 우리 국가와 헌법에 충성을 서약한다면 신앙이 없다고 해도 충성스러운 공화국의 시민입니다!”
“닥쳐! 우리 신앙을 모독하지 말란 말이다!”
무시무시한 충돌이 벌어졌다. 샹젤리제에서 충돌한 양측 시위대가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태가 벌어져 출동한 경찰이 발포하기도 했다.
당황한 루이 필리프는 교육부의 종교교육 폐지 방침을 철회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의회를 장악한 공화파는 물러서지 않았다. 장래의 공화주의자를 양성할 아주 효과적인 수단을 손에 넣었는데 포기할 리가 없었다.
“사소한 문제 때문에 혼란이 너무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프랑스가 지금 해결해야 할 건 뒤로 미뤄도 될 그런 문제가 아닌데 말이지요.”
“아니, 종교는 인민을 마취 상태에 빠트리는 아편일 뿐이오. 당연히 없어져야 할존재지.”
1843년 10월부터 파리에 머무르고 있는 27세의 독일인, 카를 마르크스는 손님을 맞아서 현재 프랑스 정국에 관한 자기 견해를 펼쳤다. 손님인 프랑스 기자는 파리에서 지내는 외국 망명객들에 관한 연작 기사를 쓰고 있다면서 취재를 청했다.
인터뷰는 마르크스가 왜 조국인 독일을 떠나서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신상에 대한 문답을 마무리하자 두 사람은 프랑스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여러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기자 선생, 종교교육을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당신은 혹시 왕정주의자요?”
“여기서 제 의견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씨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의견을 가지셨는지가 중요하지요.”
이 인터뷰가 보도되면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가 지금 발행하는 잡지〈전진!〉은 그다지 판매고가 좋지 않은데, 이 인터뷰로 제대로 홍보가 되면 구독자가 증가할 수 있다. 기자는 그 점을 마르크스에게 강조했다.
“선생께서는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종교에 관해 어떤 인식을 품고 있습니까?”
“종교란 근본적으로 인간이 위안을 얻기 위해 만든 개념에 불과하오. 마땅히 폐기하거나 방치하는 게 당연하오.”
사실 종교에 대한 이런 태도는 프랑스에서도 별로 낯설지 않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 당시 산악파 중에서도 과격파인 에베르파가 강경한 무신론을 내세운 전례가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이게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한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혁명가 상당수가 기존의 신을 대신할 ‘최고의 존재’라는 이성신을 숭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틀었다. 그리고 모든 교회를 폐쇄하는 대신 ‘이성의 교당’으로 바꾸었고, 이는 나중에 나폴레옹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씨는 종교에 대해서 가장 바람직한 태도를 보이는 나라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아는 나라 중에서 고르라고 하면 한국이 그나마 가장 낫소.”
마르크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평소 그가 가지고 있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유럽처럼 그 사회를 아우르는 지배적인 종교가 없소. 민간에는 일부 가톨릭 신자가 있으며 그보다 많은 불교도도 있지만, 이들은 정책 결정권이 없고 임금과 귀족들은 어떤 신도 믿지 않는 합리적인 이성을 유지하고 있소.”
동양에 관해 연구한 일부 학자들은 한국인들이 ‘공자(Gong-ja)’라는 옛 중국인이 창시한 종교를 숭배한다고 주장했다. ‘유교’라는 종교는 일종의 원시적인 조상 숭배와 비슷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인데, 마르크스는 그에 관해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의 근본 목적은 해당 사회에 존속하는 계급구조와 그 하층에 위치하는 이들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소외를 정당화하는 데 있소. 가난한 이들에게 참고 인내하라고, 죽은 뒤에는 천국에서 그 보상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치는 기독교가 그 좋은 사례요.”
신부와 목사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들이 부자가 된 이유는 저들이 신을 성실하게 믿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저들보다 못한 처지에 불만을 품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신의 숫자가 다를 뿐, 그런 태도는 인도의 힌두교와 다를 게 없다. 인도인들도 지금 생에 성실하게 살면 그 보상으로 다음 생에는 지금 보다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서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유교는 그런 보상 체계가 없소. 아예 사후세계도, 환생도 존재하지 않소. 불교나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개인이 그런 주관을 가지는 사례는 흔하긴 하지만, 사상적인 체계로 성실한 삶에 대한 신의 섭리에 따른 보상 같은 게 없다는 말이오.”
유럽과 한국의 교류가 250년이 넘는다. 그동안 유럽에서 출간된 한국에 관해 다룬 책만 읽어도 이 정도 주관은 확실히 정립할 수 있었다.
“유교에서 주장하는 건 현세를 통치하는 군주와 체제에 대한 충성이오. 다만 이는 종교가 제시하는 기준과는 다르오. 이 구조를 신앙과 연결하지 않기 때문이오.”
유교에는 신조차 없다. 한국 임금이 주관하는 제례가 있어 여러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기술을 보기는 했지만, 마르크스는 그 ‘신’들을 섬기는 의식이 진짜 ‘종교행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 ‘제례’는 철저하게 한국 황실 내에서 일종의 의례로 취급되며, ‘신’을 모시는 신전이나 사제도 없소. 한국의 일반 민중은 그런 신이 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소. 그런 걸 가리켜 구성원을 통제하기 위한 종교라고 취급할 수는 없소. 지금 내 견해로는 그렇소.”
조상에 대한 숭배라고 알려진 제사 의식 역시 마찬가지. 유럽인들이 저택 벽에다 조상의 초상화를 걸어놓듯이, 그들은 이름을 적은 종이를 걸어둘 분이다. 그 앞에서 자기들 예법에 따라 예를 표한다 고 해서 그게 왜 신에 대한 숭배 행위로 취급되어야 하겠는가.
“더 중요한 건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그 사상이 얼마 나 공헌하는가에 있소. 한국에서는 하층민이라고 하더라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고, 유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회적 지위를 올 리는 데 성공한 사람을 아주 높이 평가하오.”
군주에게 봉건적으로 충성하라고 요구하는 면에서, 유교 역시 시 대에 뒤떨어진 중세적인 사상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기독교에 비하 면 그나마 훨씬 나은 거다. 적어도 신의 이름으로 잘못된 사회구조 를 정당화하지는 않으니까.
“임금에게 충성하라는 중세적인 요구는 현실 권력에 순응해야만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는 거지 신을 위해서가 아니오. 그 게 없다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존립할 수 없으니 당연 한 일이지. 반란을 부추기는 사상을 어느 권력자가 방관하겠소.”
그 외에도 유교가 좋은 점은 위에 있는 이가 아래에 있는 이를 위해 베푸는 것을 온당한 자세로 여긴다는 데 있다. 자기 이윤을 줄여 가면서 노동자들에게 살 만한 집과 먹을만한 음식을 제공하는 한국 자본가들이 그 예다. 그야말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 아닌가.
“그런 방식의 자선은 우리 유럽인들도 제공하지 않습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비에 의존하는 체계지 않소.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끔찍한 처지에 몰려 있음은 기자 선생도 알 거요.”
기자라는 사람이 그런 현실을 모를 리 없다. 마르크스는 각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열거했다. 그리고 그런 참극을 피하려는 한국의 노력을 언급했다.
“한국에서는 군주의 명령으로 그런 조치가 법제화되어 있소. 사상적인 밑바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오. 그런데 기자 선생, 지금 유럽의 어느 국가에서 그 잘난 ‘주님의 사랑’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배려하고 있소? 다들 착취에 혈안이 되어있지 않소?”
당연히 기자는 마르크스의 비아냥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발언을 이어갔다.
“새로 쓰는 책에 넣을 생각이지만, 나는 유교를 ‘동방사회주의(Socialisme oriental)’로 규정할 생각이오. ‘한국사회주의’로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유교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닌 동아시아 전체에 퍼진 사상임을 알게 되니 그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소.”
마르크스는 상황이 허락한다면 언젠가 한국에 직접 찾아가 그곳 현실을 둘러보고 싶다는 희망도 피력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지극히 반동적인 나라를 언급했다.
“이런 시대적인 추세를 거스르고 반동적으로 행동하는 교황령이야말로 어서 없어져야 할 나라요. 종교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리다니, 기자 선생은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시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