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71
4부 455화(2071화)
28.
딸은 아무리 잘 키워 봐야 남의 집으로 시집가서 그 집의 사람이 된다. 누벨 프랑스 제국 집정관, 마타모로스 공작 외젠 보아르네는 쓸쓸한 마음으로 유럽에서 온 편지들을 읽었다. 직접 얼굴을 본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자식들의 근황을 알리는 아내의 편지였다.
장녀, 조제핀은 스웨덴 왕비가 되었다. 16세가 되던 해에 1807년생 동갑내기인 스웨덴의 왕세자 구스타브와 결혼하여 왕세자비가 되었고, 1839년에 선왕인 구스타브 3세가 세상을 뜨면서 왕세자가 구스타브 4세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자식이 무려 4남 1녀나 된다.
둘째인 외제니는 독일의 호헨촐레른-헤힝겐 공국의 공작인 콘스탄틴과 결혼했다. 자식은 아직 없으며, 최근 결핵에 걸려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셋째인 아델리는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의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그 생활도 별로 길지 않았다. 남편인 황제 페드루 1세가 결혼한 지 5년 만에 제위에서 물러나고, 다시 4년 만에 병으로 죽어버렸다. 지금은 외동딸과 함께 10년째 과부로 살고 있는 신세다.
넷째인 테오돌린은 4년 전에 뷔르템베르크 국왕 빌헬름 1세의 사촌 빌헬름 프리드리히와 결혼하여 뷔르템베르크 백작부인이 되었다. 자녀는 딸만 둘이다.
언뜻 보면 조제핀이 가장 신분도 높고 자식도 많아서 풍족하게 잘 사는 것 같지만…..다른 문제가 있다. 구스타브 4세는 결혼 초부터 바람기가 심했다. 그래서 사생아도 여럿이다. 그 일로 늘 속을 끓이며 산다.
그런 면에서 보면 넷째 테오돌린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셈이다. 아직 젊으니까, 아들쯤은 나중에라도 낳으면 된다. 시아버지가 귀천상혼을 한 탓에 뷔르템베르크 왕국 왕위 계승권은 없지만, 그거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딸들이 힘들게 사는 거야 당연히 마음 아픈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내 피가 섞인 후손은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나폴레옹 황제에게 딸이라도 있었으면 외손자를 통해서 누벨 프랑스 제국이 후계자를 얻었으리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내겐 아들이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선뜻 버리고 왔을 만큼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지위, 장인인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가 수여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는 외젠이 신대륙으로 떠나면서 장남 오귀스트에게 넘어갔다. 그때 오귀스트의 나이는 겨우 7세였다.
외젠은 벽에 걸린 맏아들의 초상화를 보면서 옛날의 죄책감을 떠올렸다. 어린 오귀스트는 아버지가 자기 곁을 떠나려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을 싫어한 외조부의 영향도 있어서, 그가 ‘자기를 버린’ 아버지에게 느낀 감정은 원망과 분노뿐이었다.
그나마 차남인 막시밀리앵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전체 남매 중 막내였던 막시밀리앵은 갓난아기 때 헤어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 자체가 하나도 없어서 아버지를 아예 의식도 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을 때조차도.
그렇게 떠난 뒤로, 10여 년에 걸쳐 외젠은 자식들과 직접 연락하지 않았다. 단 하나뿐인 적자를 비명에 잃은 나폴레옹 앞에서 차마 자식들과 연락하며 행복해하는 기색을 드러낼 수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의 외가는 나폴레옹을 배신한 바이에른 왕가가 아닌가.
루이와 제롬, 나폴레옹의 두 동생은 틈만 나면 나폴레옹 앞에서 자식들 이야기를 했다. 형에게 자기 자식 중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해 달라고 조르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하지만 그 꼴을 보면서도 외젠은 입을 꼭 닫았다.
나폴레옹도 외젠의 그런 배려를 이해하고 고마워했다. 그래서 외젠에게 자식들 이야기를 건네지 않았다. 오귀스트가 벨기에 국왕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과거에 스페인령 네덜란드라고 불리던 벨기에는 오스트리아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면서 네덜란드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2백여 년이나 따로 떨어져 살다 보니 북부인 네덜란드와의 이질감이 너무 심했다. 인구는 벨기에가 많은데 주도권은 네덜란드가 쥔 것도 문제였다.
결국 10여 년에 걸친 갈등 끝에 내전이 터졌다. 벨기에를 네덜란드에 합병시켰던 열강은 회의를 열어 벨기에를 네덜란드로부터 다시 떼어내 독립국이자 중립국으로 삼기로 했다.
여기도 나름 극적인 배경이 있었다. 강대국들은 하나같이 네덜란드의 세력을 줄이고 싶어 했다. 프랑스를 견제할 셈으로 벨기에를 네덜란드에 붙여놨더니 이번에는 네덜란드가 너무 강해졌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강한 네덜란드는 영국에게는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였고 유럽 본토에 있는 강대국들로서는 국경을 맞댄 위협이었다. 그러니 벨기에 독립을 후원한 거다.
심지어 반동군주였던 프랑스의 루이 19세조차 네덜란드의 ‘반란 진압’을 지원하지 않았다. 자기도 혁명 소동을 진압하느라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본래 프랑스 세력이 강한 벨기에를 자기 영향권에 넣어서 프랑스의 영역을 넓힐 심산이었기 때문이다.
딱 하나, ‘강한 네덜란드’를 환영하는 나라는 알렉산드르 2세의 러시아뿐이었다. 서유럽에 있는 열강을 견제해 줄 선수로 강한 네덜란드가 아주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트르 이래 네덜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감정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러시아는 이때 폴란드에서 또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그 수습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래서 서유럽 열강들은 냉큼 네덜란드에서 벨기에를 독립시켰다. 새로 생기는 국가 형태는 당연히 왕국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부산물인 공화국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다만 벨기에는 본래 다른 나라의 속령으로만 존재했던지라 정통성 있는 왕가가 없었다.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왕을 데려와야 했는데, 그 후보를 두고 각축전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는 앙굴렘 공작의 아들 루이 앙트완을 후보로 냈다. 아주 강력한 후보였지만 그 자리는 뜻밖에도 외젠의 아들, 로이히텐베 르크 공작 오귀스트에 게 돌아갔다.
일단 벨기에인들이 오귀스트를 원했다. 벨기에 임시의회가 오귀스트를 왕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프랑스가 벨기에를 먹는 꼴은 절대로 못 본다고 결심한 영국이 작정하고 개입해서 오귀스트를 왕으로 밀었다.
“축하하오, 공작! 그대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니!”
“가, 감사합니다. 폐하.”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프랑스를 비롯한 특정 강대국이 벨기에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야 독일에서 적당한 대공국이나 공국의 공자 한 사람을 데려다가 앉히면 된다. 하지만 그게 외젠의 아들이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루이 19세도 이 사실을 통보받고 펄쩍 뛰었다고 했다. 보나파르트의 손길이 닿는 국왕을 벨기에에 세워서 어쩔 셈이냐고, 그놈이 유럽으로 돌아올 때 사용할 발판을 스스로 만들어 바칠 셈이냐면서 말이다. 그리고 영국 측은 그 항의에 이렇게 답했다.
「대서양에는 우리 해군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나폴레옹이 무슨 짓을 해도 유럽을 침공할 수 없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영국 측은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오귀스트의 즉위를 지지한 건 아니었다.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의 국왕 즉위는 벨기에의 중립을 지키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봅니다. 나폴레옹 황제께서도, 부친이신 마타모로스 공작께서도 그 점에서는 동의하시리라 생각하며, 윌리엄 4세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축하를 건넵니다.」
외무장관 명의로 날아온 이 서한이 영국의 진의를 나타냈다. 영국인들은 벨기에의 뒷배로 누벨 프랑스를 세움으로써 다른 강대국들이 섣불리 벨기에를 건드릴 수 없게 만들고자 했던 거다.
물론 영국 측이 루이 19세에게 확언했듯, 누벨 프랑스가 유럽에 군대를 보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CEA를 손에 틀어쥔 나폴레옹의 힘을 생각하면, 사실상 CEA 전체가 벨기에 왕국의 뒤를 봐주는 셈이다. 엄청난 정치적 배경이 된다.
“우리 누벨 프랑스 제국이 존속하는 한, 그리고 CEA가 힘을 발휘하는 한 우리는 벨기에 왕국의 힘이 되어줄 거요. 그러니 이 이야기를 어서 브뤼셀로 보내시오. 꼭 공작이 직접 쓴 편지로 말이오.”
“감사….합니다, 폐하.”
나폴레옹은 자기를 배반한 바이에른 왕가를 증오했다. 하지만 외젠에게 이 소식이 얼마나 큰 경사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젠에게 강권했다. 이제 연락 좀 하라고.
결국 외젠은 이제까지처럼 아내 아우구스테를 통하는 대신 직접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답장도 오지 않았지만, 벨기에의 태후가 된 아내 아우구스테의 설득이 통한 덕분인지 마침내 오귀스트도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편지가 오가면서 겨우 외젠의 진심을 알게 된 오귀스트는 아버지에게 이해한다는 답을 보냈다. 자기도 아버지처럼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이미 아버지를 가진 나폴레옹 황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오귀스트가 벨기에 국왕이 되자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는 막냇동생 막시밀리앵에게 갔다. 막시밀리앵은 마치 한국의 김유신처럼 페드루 1세의 딸로 자기 의붓조카가 되는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는데, 겨우 두 달 만에 원인 미상의 질환으로 급사했다.
다행히 오귀스트가 벨기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결혼했고, 자식도 넉넉하게 낳은 덕분으로 공작위는 현재 오귀스트의 차남 레오폴드가 가지고 있다. 외젠으로서는 자기 후대는 염려할 필요 없는 셈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누벨 프랑스의 제위를 이을 수는 없으니.”
그 아이들의 외가는 나폴레옹의 원수였던 바이에른 왕가다. 게다가 이미 벨기에 국왕으로 즉위하지 않았는가. 명목상으로만 제국일 뿐 실질적으로 반쯤은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 이 나라에서, 나폴레옹의 피도 섞이지 않은 타국 왕족을 황제로 받아들일 리 없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의 피가 섞인 적절한 후계자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폴레옹의 피가 섞인 이는 세 조카분인데, 생전에 나폴레옹은 그중 하나도 후계자로 택하지 않았다.
혈통으로만 본다면야 외젠 자신의 생질(甥姪)이기까지 한 아칸소 대공 루이의 아들 샤를 루이가 1순위다. 미주리 대공 제롬은 외젠과 마찬가지로 배반자인 뷔르템베르크 왕국 출신 아내를 두어 아들들도 모두 그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생전에는 뷔르템베르크 혈통이 섞인 자식들은 아예 누벨 프랑스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 외젠이 집정관 자리에 오른 뒤에 입국금지를 해제해 주었지만, 제롬의 두 아들들은 올해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누벨 프랑스를 찾았다.
미국인 어머니를 둔 사생아 장남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제롬의 첫 결혼을 극렬히 반대해 이혼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니 그 사생아라고 인정할 리 없었다. 아예 조카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말이다.
“정작 그 청년은 얼굴만 보면 아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폐하와 닮았지만…..”
지금도 두 대공은 어떻게든 자기 아들을 차기 황제로 만들어 볼 생각으로 바쁘게 사방을 누비는 중이다. 집정관의 임기는 분명 종신제지만, 외젠도 이미 64세로 적잖은 나이인 데다 황태자 책봉은 집정관의 임기와 무관하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누벨 프랑스 헌법은 황태자의 책봉을 상원이 승인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황태자가 궐위 상태일 때 상원에서 나서서 황태자를 선출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두 대공이 전국에 흩어진 상원의원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바쁘다.
외젠보다 연상이라 건강이 좋지 않은 아칸소 대공도 누벨 프랑스 각지를 방문해 황태자를 뽑을 권한이 있는 상원의원들을 만나고 있다. 자기 아들 샤를 루이를 차기 황태자로 선출해 달라는 선거운동인데, 보고 있으면 안쓰러울 뿐이다.
“정말 황태자로 뽑히게 하고 싶으면, 일단 불러들여 놓고 일을 진행해야지…”
아칸소 대공의 아들, 샤를 루이는 자기 사촌들과 같이 황제 생전에 입국 금지령이 내렸던 것도 아니다. 누벨 프랑스에 눌러앉으려면 할 수 있었는데 자기가 멋대로 뛰어나갔다. 어디 그뿐인가, 프랑스 본국에 가서 국왕과 오를레앙 공작의 수하가 되었다. 그게 무슨 미친…..
지금은 프랑스 동인도회사 이사직을 맡아 안남에서 장사에 열중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다. 정말 누벨 프랑스의 황제 자리를 원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거다. 아마 샤를 루이는 황제의 자리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저 본국에서 출세할 생각이리라.
지금 국내에서는 노예 해방 문제를 놓고 논란이 치열하다. 여기 뛰어들어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낸다면 자기 입지를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될 텐데, 그것도 안 하고 있다. 제롬의 두 아들은 자기 부친의 영지 여론에 기대 노예 해방 반대파 편을 드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29.
누벨 프랑스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다. 수백 년 동안 발전한 농업 기반이 있었기에 나폴레옹이 이 땅을 미국에 팔지 않고 계속 쥐고 있었고, 다시 이 땅을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제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농업을 경영하려면 충분한 노동력이 언제나 필요하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그 노동력은 주로 흑인 노예였다. 백인들은 수가 적었고, 힘든 일을 하려는 이들도 없었다.
나폴레옹이 건너왔을 때도 노예제는 강고하게 유지되었다. 나폴레옹 본인도 노예 제도를 필요에 따라 인정했을 뿐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고, 나폴레옹과 함께 온 유럽 지식인들은 노골적으로 혐오했다. 하지만 없애기에는 반발이 너무 심했다.
누벨 프랑스의 중심이 되는 루이지애나, 아칸소, 미주리 등의 남부 지역에는 먼저 이주해 대농장을 경영하는 프랑스인 대지주들이 많다. 이들은 무시할 수 없는 위세와 함께 하원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반대는 쉽게 물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우회전법을 썼다. 일단 노예제 자체에 관해서는 헌법에서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각 주가 존폐를 자율로 결정 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막연하게 적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노예제를 흔들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 상인들을 통해 시니카에서 수입한 쿨리들, 그리고 유럽에서 새로 이주한 신참 이주민들을 계약노동자로 쓰도록 권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농장주들, 광산주들은 흑인 노예가 아닌 다른 노동력에 익숙해졌다. 일만 시키면 끝나는 게 아니라 생활까지 돌봐줘야 하는 노예보다 계약한 품삯만 주면 되는 노동자 쪽이 훨씬 편하게 다룰 수 있는 상대라는 사실도 알았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까 노예제를 계속 유지해야겠다는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노예제를 공인하려는 이들로 가득하던 이곳 하원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노예제는 분명히 우리가 계속 지켜온 관습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관습이라고 해도 시대가 지나면 뒤처지고 의미를 잃게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 누벨 프랑스 제국이 야만적인 노예제를 이제 폐지할 때가 되었다고 힘차게 외치는 바입니다!”
젊은 하원의원 한 사람의 열변이 수도 누벨 아작시오에 흐르는 새로운 공기를 대변했다. 의사당에 있는 의원들은 앞다투어 자기 의견을 외치기 시작했다. 노예제 유지에 관한 찬반 여부를 두고 오늘도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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