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9
1부 209화
– 34 –
요시오키 진영에서도 밤새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조선군과 같은 잔치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진지하게 오가는 보고와 토의가 이어질 뿐이었다.
“조선군이 가진 철포는 확실히 막강하나, 그 한계도 명확합니다. 공연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조선군 진영에 있다가 방금 본진으로 복귀한 스에 오키후사가 그동안 조선군과 함께 지내며 파악한 정보를 보고했다. 요시오키를 비롯한 장수들은 그 내용을 귀담아 들었다.
“위력도 생각보다 약했습니다. 지난 분키 원년에 나가야스 공이 보고했듯 한 발에 천지가 뒤집힌다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주군께서도 짐작하셨겠지만, 육군은 수군과 달리 작고 가벼운 포를 운용하므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설명을 납득한 장수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오키후사가 보고를 계속했다.
“이번에 가져온 저들의 큰 철포, 저들은 야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 안에 넣는 탄환은 두 가지입니다. 가까이 있는 적을 상대로는 작은 새알만한 쇠구슬을 한 줌씩 넣습니다. 작은 알을 흩뿌리니 사거리가 짧습니다. 멀리 있는 적에게는 주먹만 한 쇠구슬을 한 발 쏩니다.”
“그 정도 탄환으로는 성을 부순다거나 하기 힘들겠군.”
요시오키가 차분하게 답하자 오키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군. 조선 수군에서는 큰 화포에 굵직한 나무에 쇠두겁을 씌운 화살과 사람 머리통만한 돌덩어리를 넣어서 쏜다지만 육군에는 그런 포가 없습니다.”
오키후사에게 박원종은 아주 좋은 정보원이었다. 물론 화기나 화약을 제조하는 방법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용법이나 위력에 대해서는 한껏 신나게 떠들어댔다.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의도야 불을 보듯 빤했다. 일본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이 무기와 그 힘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줌으로써 이쪽을 위압하려는 의도가 아니면 뭐겠는가?
하지만 그런 경고도 오키후사에게는 훌륭한 정보였다. 장래 적이 될 수 있는 세력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아는 편이 당연히 낫다.
“다만 위력이 약한 철포라도 그 사거리는 활보다 훨씬 깁니다. 우리 활은 1정(약 100m)에 조금 못 미칩니다만, 조선 철포는 야포가 9정, 손에 드는 작은 철포가 5정 정도 거리에 있는 사람을 쏴 죽일 수 있습니다.”
병사들이 쓰는 보통 일본식 활은 2정 정도까지 화살을 날릴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멀면 잘 안 맞으므로 그 절반 이하 거리에서 주로 쏜다. 수성전이라면 모를까, 야전에서는 조선군과 사격전을 시도할 기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셈이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소. 낮에 보니 저들은 소로 하여금 포를 끌게 하던데, 그런 용도로는 말이 더 낫지 않소? 우리보다 큰 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조선인들이 야포를 끄는데 말이 아니라 소를 쓰는 이유는 무엇이었소?”
옆에서 질문이 하나 나왔다. 오키후사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대답해 주었다.
“나도 그 점이 궁금하여 물었소. 그랬더니 조선군 부장이 답하기를, 포를 견인할 말을 싣고 오던 배가 쓰시마에서 난파하였기에 이키에서 구한 소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더이다.”
“파선이라!”
오우치 군 장수들 사이에 잠깐 웃음이 퍼졌다. 군대에서 말은 매우 중요하다. 그 귀한 말을 실은 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난파시키다니, 조선인들은 역시 바다에는 미숙했다.
조선인들의 실패담 덕에 회의 분위기가 잠시 부드러워졌다. 오키후사도 아까보다 좀 여유가 생긴 태도로 보고를 계속했다.
“화포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물에 약하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조선군 장수들은 행여 비가 와서 화포와 화약이 젖을까봐 얼마나 우려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가세가와를 건널 때까지 장전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강을 건너다가 화약이 젖을까봐 그랬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만약 강물에 빠트리기라도 하면 젖은 화약을 죄다 긁어내고 안에 있는 물기를 말끔히 닦아내야만 다시 포를 쏠 수 있습니다.”
불을 쓰는 무기인 만큼 물에 약하리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키후사는 요시오키가 예측한 바를 확인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만약 어떤 이유로건 화약이 젖어버리거나, 또는 모두 소모한 뒤에 보급을 못 받거나 하면 저 막강한 화기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됩니다. 손에 드는 철포 끝에 창날을 끼워 단창처럼 쓸 수 있기는 하나, 그래봐야 우리 창에 비하면 훨씬 짧습니다.”
듣고 있던 장수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최근에 그 사례가 있다. 지난 분키 원년, 동래부 왜관에 머무는 왜인들과 조선군이 충돌했을 때 오우치 쪽에서 보낸 자들도 그 소동에 휘말려들었다. 그때도 활과 화포가 없는 조선군은 왜인들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었다.
“오키후사, 그대가 군사를 지휘해서 조선군과 싸우게 된다면 어찌하겠는가?”
요시오키에게 질문을 받은 오키후사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만약 제가 조선군과 싸운다면 가능한 평지에서의 회전은 피하겠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숲과 골짜기의 좁은 길로 적을 끌어들이며, 그게 불가능하다면 탄환을 피할 수 있는 견고한 담을 쌓고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 터지는 쇠공, 진천뢰라 부른다 하였던가? 그 무기에 대한 방호는 어찌 하겠는가?”
“야전에서는 막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진채 안에서 버티는 상황이라면 구멍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숨는 방법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격이 길어진다면 성을 내주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이기는 길입니다.”
듣고 있던 장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키후사는 태연했다. 요시오키가 물었다.
“저들에게 지킬 장소를 주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저들도 손에 넣은 성과 도시에 식량을 보급해야 하지요. 적지에서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가 정면 대결을 피하고 험지에서 적 치중을 주로 타격하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무사들은 적과 정면에서 싸워 얻는 승리를 최고 명예로 여긴다. 하지만 당당하지 못한 승리 쪽이 패배보다 나음은 비교할 필요도 없다. 신하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달은 요시오키가 가볍게 나무랐다.
“노부시 같은 행동이라 해서 불만을 갖지는 마라.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지기보다는 이겨야 할 것 아니냐? 게다가 아직 조선과 싸울 상황도 아니니,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노부시(野武士)는 속해 있는 주군이 없는 무사들을 가리킨다. 말이 좋아서 무사지, 실상은 무장한 농민이다. 하는 행동도 전장에서 패한 편 패잔병들을 약탈하고 다른 마을을 약탈하는 등, 사실상 산적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조선 수군이 화약과 철포를 쓴다고 알고 있지 않았느냐?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가 없다. 철포란 그 소리와 불꽃, 연기 세 가지가 주는 공포심이 실로 크다. 이것만 극복한다면 훨씬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이번에 오우치 군 병사들은 쇼니 군이 불벼락을 뒤집어쓰고 녹아나는 꼴을 똑똑히 보았다. 쇼니 군은 자기들이 뭐에 맞아 죽는지도 몰랐으니 대열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그 모습을 모두 본 오우치 군은 훗날 조선군과 충돌한다면 초장부터 무너져버릴 공산이 높게 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병사들이 그 포성과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훈련시켜야 할 터였다. 그 불꽃은 악귀가 내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쓰는 무기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게 제대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화약을 얻어 철포를 갖출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조선도 명나라도 절대 화기를 우리에게 넘기지 않으니 어려운 일이다. 일단은 가능한 조선과 충돌하지 않도록 하면서 추후 더 나은 대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때까지는 오키후사가 말했듯 대처할 수밖에 없겠다.”
“예, 주군.”
장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조선군이 가진 화포가 쇼니 군을 녹여내는 모습을 직접 본 게 바로 오늘 낮이다. 당장 저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 리 없었다. 그 옆에서 오키후사가 담담히 한 가지 이야기를 또 꺼냈다.
“그 외에 조선군에게 한 가지 무서운 강점이 또 있습니다.”
“뭔가?”
시선이 집중되었다. 철포 말고 조선군에 또 어떤 비밀병기가 있단 말인가?
“저들은 조선인 병사 외에 북방 먼 땅, 옛 원구들이 살던 땅에 사는 야인이라 하는 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모두 말을 귀신같이 다루며 성품이 잔혹하기 그지없는 자들입니다. 분에이, 코안의 역 때 원구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그런데?”
“조선군은 그런 자들을 5천기나 데려와서는 모조리 히젠 방면으로 보냈습니다. 스케모토가 쓰시마를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 히젠에 있는 모든 마을을 약탈하라고 말입니다.”
오키후사는 이키 섬에서 여진 기병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똑똑히 보았다. 조선군 총대장이 엄하게 금지했는데도 이키 섬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여자를 겁탈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이 가라쓰에 내린 뒤, 이제부터 얼마든지 날뛰어도 좋다는 말에 환호하는 광경도 보았다.
“그자들에 대해서는 조선인들도 치를 떱니다. 그래서 참다못한 조선국왕이 작년에 그 못된 인종들을 정복했고, 항복한 야인들을 쉽게 처분할 셈으로 규슈에 보냈다고 합니다. 말을 타고 방비가 없는 지역을 휩쓰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정말 막기 힘들 겁니다.”
무장들이 기가 찬 듯 숨을 들이켰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조선군이라면 어떻게든 맞싸우거나 피할 수라도 있다. 하지만 순전히 약탈을 일삼으며 후방을 휩쓰는 야만인 기병대라면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다.
“그자들을 막을 방법도 생각해 보았는가?”
요시오키의 질문을 받은 오키후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도적들을 따라잡으려면 우리도 기병을 동원해야 합니다만, 어느 영주도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을과 도시의 주민들을 한데 모아 지키는 방법이 있으나, 그렇게 하면 조선군이 화포로 공격할 좋은 표적을 제공해 줄 뿐이겠지요.”
모두 동의했다. 규슈 일대는 험한 산이 없고 대체로 완만한 지형이라, 기병이 돌아다니는데 방해가 될 만한 장애가 별로 없다. 차라리 정면으로 싸운다면 창병과 궁병을 조합하여 상대할 수 있겠지만, 약탈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져 돌아다니는 자들을 다 막아내기는 힘들다.
“그러니 조선과 싸우게 된다면 규슈 전체가 하나로 뭉쳐서 병력을 모아 맞서는 방법 외에는 대책이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문제입니다만.”
규슈 뿐 아니다. 일본 전체가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며 서로 싸우고 있다. 과연 조선이라는 외부 세력의 침략에 맞서서 단결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다들 조선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적대세력을 제거하는데 써먹을 궁리부터 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요시오키가 스케모토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군을 활용했듯이 말이다.
요시오키가 한숨을 쉬었다.
“그만큼 탐욕스러운 자들이라면 우리가 매수해서 편을 바꾸게 만들어버리는 방법도 있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그리 크게 고민할 건 없다.”
머리만 싸쥐고 있으면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다. 다른 장수들도 주군의 뜻을 이해했다.
“쇼니는 적당히 눌러 두고, 어서 상락을 서둘러야겠다. 일본 전체를, 적어도 서국 일대라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어야 만약의 경우 조선이 침공해 오더라도 맞설 수 있으니까.”
서국(西國)은 일본 서부 전체를 뜻한다. 수도 교토가 있는 간사이 일대와 시코쿠, 규슈까지 아우르는 명칭이다. 상락에 성공해서 쇼군을 교체할 수만 있다면, 그 권위를 등에 업고 서국 통일에 나설 수 있다. 지금 요시오키가 가진 세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역시 여기 있는 조선군은 가능한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야겠습니다. 저들이 히젠으로 진격해서 성이라도 몇 개 함락시킨다면 어떤 보상을 주어야 할지 모르니, 적절히 전공을 세운 지금 만족하고 돌아가게 만들어야 할 듯합니다. 주군께서 처음 세우신 계획대로 말입니다.”
잠시 두런거리던 중신들이 입을 모아 진언했다. 요시오키도 수긍하는 뜻을 비쳤다.
“내 생각도 그렇다. 일단은 손상된 사가 성을 복구한다는 구실로 여기 머무르면서 저들을 돌려보낼 상황을 조성해 보도록 해야겠다.”
– 35 –
쇼니 군을 쳐부수고 엿새 째 되는 날, 유순정과 요시오키는 처음으로 회견했다. 유순정은 박원종을, 요시오키는 오키후사를 동반하고 양측 진영 가운데 들판에서 만났다.
장막 안에서 마주앉은 요시오키는 일단 조선군이 사가 성을 구출해 준 데 대해 유순정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또한 전투에서 손에 넣은 모든 물자와 포로는 조선군이 임의로 처분해도 좋다는 지난번 약속을 확인해주었다.
“전리품은 그 손에 넣은 자가 뜻대로 처분함이 당연하오. 모두 조선으로 실어가고 싶으면 그리 하셔도 괜찮소. 혹시 배가 필요하다면 빌려드리리다.”
“감사하오.”
듣던 중 고마운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포로들 때문에 군량 소비가 급증해서 곤란해졌고, 어서 조선으로 실어보내기 위해 배를 준비하도록 지시한 참이었다. 가급적 많은 포로를 잡아 돌아오라는 건 임금이 내린 어명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귀군에서는 추후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시오?”
“사가 성을 구원했으니 류조지에게 맡겨 지키게 하고, 본령(本領)으로 복귀하려 하오.”
뜻밖에 요시오키는 딱 잘라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박원종의 표정이 굳었다.
“소이전을 계속 토벌하여 재침할 가능성을 차단할 계획은 없으시오?”
“쇼니 스케모토는 이번 패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지금은 남동쪽의 야나가와로 도망쳤소. 그쪽에서 자기 영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다 하니, 쇼니 토벌이 급한 상황은 아니오.”
야나가와 영주 가마치 하루히사(蒲池治久)는 오토모 씨의 신하로, 굳이 따지면 오우치보다 쇼니 편에 가깝다. 하지만 주군인 치카하루로부터 별다른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스케모토를 적극적으로 도울 만큼 쇼니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우리가 쇼니와 별로 사이가 좋지는 않소. 하지만 쇼군께서도 사이좋게 지내라고 명하시니 이제 충돌은 가급적 자제하려 하오. 침략을 격퇴하였으니 이제 충분하오.”
지난 엿새 동안 요시오키는 자기 영지인 야마구치에 머무르고 있는 전 쇼군 요시타네에게 사자를 보내서 스케모토와 화해하라는 서찰을 받아왔다. 이로써 지금 시점에서 적당히 전쟁을 끝낼 명분을 만들었다.
“물론 그대들이야 쇼군께서 내리는 명을 받들 필요가 없소. 그대들이 충분히 분이 풀릴 때까지 스케모토와 더 싸우고자 한다면 그 역시 그대들의 뜻대로 하시오.”
요시오키는 조선군이 히젠을 침공하는 건 자유지만 자신은 돕지 않겠다는 의도를 명확하게 비추었다. 분명 요시오키 측의 요청에 따라 사가 성을 구원했지만, 애초에 정식으로 동맹을 맺고 협력했던 건 아니니 조선군으로서도 딱히 따지고 들 수는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유순정은 겉으로 당황해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유지하던 평온한 표정 그대로 이렇게 답했을 뿐이다.
“앞으로 우리 군사를 움직일 방향은 정세를 좀 더 살펴서 결정할 따름이오. 우리도 전하께 받은 명이 있으니 임의로 물러날 수는 없소이다.”
진영으로 돌아온 유순정은 휘하 장수들을 불렀다. 오우치 측이 히젠 침공에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들은 장수들은 당황했다. 저들이 조선이 규슈에서 세력을 확대할까봐 경계심을 품었음을 빤히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대내전을 쳐서 비전주 진격에 협력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성희안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자칫하면 겨우 2만 군사로 이국에서 적중에 그대로 고립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 돌아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상황이 안 좋아지고 보니, 가장 강경하게 소이전을 더 치자고 주장하던 박원종도 강경론을 내세우지 못했다. 그만 철수하자는 목소리가 대세를 잡는가 싶은 참에, 새롭게 도착한 소식 하나가 막사 내 분위기를 또 뒤바꾸었다.
“도원수 대감! 야인별군이 곧 도착한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막사 밖을 지키던 표하군 소속 비장 한 사람이 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나타날지 알 수 없어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야인별군이 당도했다는 소식에 장수들이 깜짝 놀랐다.
“언제쯤 도착한다 하던가?”
“선발로 온 사자가 전하기를, 오늘 저녁에는 당도하리라 하옵니다.”
기쁜 소식이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늦었다. 선봉과 본대 사이에 한 나절이 넘게 거리가 벌어지다니?
약간 이상했지만 전력을 강화하는 소식임에는 틀림없었다. 박원종의 얼굴에는 반짝 화색이 돌았고, 유순정은 잠깐이지만 걱정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