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97
4부 481화(2097화)
27,
홍천귀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양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들은 이미 태평천국 토벌전의 종결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토적연군 중 일본군은 이미 빠졌고 다른 나라에서 보낸 군대들도 작년 여름부터 대부분 진군을 멈추고 있었으니, 사실상 다 끝나기는 했다.
다만 본격적인 협상을 어떻게 진행할지는 아직 확정하지 않은 상태다. 일단은 같이 싸운 입장인데 어떻게 우리만 싹 빠지겠나. 후송과 태평천국 사이에도 어떻게든 포화가 멈추도록 노력하긴 해야지.
하지만 그러려면 후송 조정도 협상 참여에 동의하고 임석할 대표를 정해야 한다. 그런데 후송 측은 도적과의 협상은 안 된다고 날뛰기만 한다. 한성에 있는 송문호는 물론이거니와 남경에 있는 후송 조정이나 송태후도 같은 반응이라고 한다.
「….예부상서가 신을 앞에 두고 이르기를, ‘한은 늘 옳은 것을 추구하며 도를 중히 여기는 나라였는데 어찌 도적과 협상하려 하시오?’라고 하며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상서의 독단이 아니라 태후의 뜻으로 저를 불러 계속 싸울 것을 종용하는 기색이 완연했습니다….”।
후송 수뇌부가 똥줄이 탈 만도 하지. 우리 군을 비롯한 토적연군이 빠지면 그동안 아껴둔 정예병을 전방으로 보내든지 강화를 맺고 전쟁을 끝내든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느 쪽이든 하기 싫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어째…꼭…베트남 전쟁…같은 생각이 드는…데?’
덥고 습한 밀림에 논으로 가득한 나라에서 치르는 전쟁이라는 부분만 비슷한 게 아니다. 그거야 이미 이 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떠올린 공통점은 전쟁이 진행된 양상과 끝나는 형태다.
분명히 후송 땅에서 치르는 전쟁인데 어느새 떡고물을 챙기려고 들어온 외국군이 주력이 되고 있다. 물론 후송군도 잘 싸우는 부대는 잘 싸우고 있기는 한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심지어 가장 잘 싸우는 후송군 부대는 후송 정규군이 아닌 용병대다.
그나마 베트남과 다른 점이라면, 후송 조정이 보유한 진짜 정예부대는 대부분 수도 남경 일대에 온존하고 있다는 점 정도겠다. 앞서 언급했듯이 반란 진압을 외국군에 맡긴 대신에 조정이 확실하게 장악한 자기 정예부대는 아껴둔 거니까.
여기에다 원래 세계에서의 베트남 전쟁과 흡사하다고 내가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부분은 마무리다. 20년 동안 남베트남을 도와 싸운 미국이 전쟁에서 진절머리가 난다며 그만두고 빠져나갈 때, 그래도 전쟁은 끝내 준다고 파리 평화 협정을 맺어주기는 했었다.
다만 그 협정은 체결 직후에 쓰레기가 되었다. 북베트남은 종전한 지 2년 만에 전면전을 재개했고, 단 4개월 만에 남베트남은 붕괴했다. 베트남은 북베트남 주도하에 통일되었다.
그때 사건과 겹쳐 보여서 지금 상황이 참 애매하긴 하지만, 후송이 남베트남처 럼 급격히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두 나라가 처한 여건이 전혀 다르니까.
일단 후송에는 남베트남에는 없었던 강력한 정치적 구심점이 있다. 그…재주가 좀 못하긴 하지만…황제도 있고 태후도 있다. 남베트남에는 권위를 제대로 갖춘 정치 지도자가 없었다.
군사력도 후송이 남베트남보다 낫다. 후송군이 참 형편없다고 우리가 비웃긴 하지만, 내 기억 속 남베트남군과 비교하면 선녀다, 선녀.
경제면에서도 후송 조정은 태평천국을 압도하며, 보유한 군사력을 지탱할 능력도 있다. 보유한 장비를 굴릴 능력도 없었던 남베트남보다 낫다.
외교 면에서도 그렇다.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태평천국은 도와주는 세력이 아무도 없다. 거래는 하는 모양이지만 거래와 지원은 전혀 다른 거 아닌가.
그러니 일단 강화협상이 시작되고, 태평천국과 후송 조정이 모두 참여하는 평화 회담이 열린다면 후송에게 불리하기만 한 건 아니다. 적어도 태평천국 측에서 곧바로 협정을 깨고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을 거다.
물론 후송에게 가벼운 타격은 아니다. 서부 지역 영토를 ⅓ 가까이 상실하면서 인구도 1/5 가까이 잃게 되니까. 하지만 끝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것보다는 일단 좀 쉬는 편이 좋지 않겠냐 말이다. 자신 있으면 재정비해서 다시 쳐도 되는 거고.
중국사에서 보면 그런 식으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합친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은 남경에서 절대 안 된다고 바락바락 애를 쓰지만, 결국 자기들도 포기하게 되어있다.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중앙정부들은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홍서당이 차지한 땅만 빼면 나머지는 되려 조정의 장악력이 더 강해졌사옵니다.”
“경들의 말이 맞소.”
독립적으로 놀던 4개 도통부 중 형주도통부는 소멸하고 한양도통부는 해체됐다. 태평군 저지의 일선에 서 있던 한양도통부는 강용군이 일으킨 반란 탓으로 전선에 구멍이 뚫리면서 주력군을 몽땅 잃었고, 곧바로 수뇌부가 교체됐다. 지금 한양도통부는 조정이 장악했다.
복건의 정주도통부는 싸움에는 별로 나서지 않았지만 중로군에 들어가는 보급 절반가량을 부담하느라 허리가 휘었다. 즉, 우리 군사들이 먹은 밥은 거의 정주도통부에서 댔다.
양광총독부는 더하다. 남로군의 보급을 전적으로 혼자 책임졌을 뿐더러 태평군과의 전투도 치열하게 치렀다. 더 고생했으면 했지, 편히 놀고 지내지는 않았다는 거다.
문제는 그 희생을 치러 가면서 태평천국을 토벌했으면 조정의 권위가 확 올랐을 텐데….그 중요한 일을 못 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복건과 광동에서 반발이 크게 일어날 수도 있다.
“광주 현지에서 도는 소문 중에는, 조정을 그만 받들고 헌왕을 새
로이 황제로 옹립하자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있을 법한 일이로구나.”
아직 태후를 경계하는 조심원과 반란 하나 혼자 진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 실속을 챙기고 싶어하는 지방 세력의 결합, 가능한 이야기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남경은 말 그대로 불난 호떡집이 되겠지.
그나마 양자가 공존할 수 있도록 관계를 조정한다면, 양광 지역이 번국이 되고 조심원이 번왕으로 즉위하는 정도가 가능하지 않을까. 양광 측에서 대놓고 반기를 들면 후송 조정이 진압하러 나서지 않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기껏 태평천국과 후송 사이에 강화조약을 맺게 해놓고 후송에서 2차 내란이 터지는 꼴을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거기도 개입해야 하나…아이고, 두야.
28,
한 달에 걸친 스페인 측과의 협상은 무난하게 타결됐다. 캐롤라인 제도가 인구나 산업도 없으면서 괌이나 팔라우에 비하면 별로 중요한 위치도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서 매입 가격은 멕시코 달러 기준으로 8만 달러, 우리 돈으로는 대략 5만 5천 냥으로 마무리됐다.
스페인 측에서는 기왕이면 10만 달러를 채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리 외무부 관리들의 분투 덕분에 내가 예상한 액수와 큰 차이가 없는 선에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우리 스페인이 아시아에 남긴 흔적이 이렇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카를로스 1세 폐하께서 처음 동양으로 탐험대를 보내신 이래 계속된 역사가 이렇게….”
협상이 타결되었음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특사가 이렇게 소회를 털어놓았다.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기세인데, 잠시 얼굴이나 좀 비칠까 해서 나갔던 나는 차마 나서서 위로할 수 없었다. 그야 지난번 생과 저저번 생에서 내가 한 일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가만히 있어도 외무대신 박경완이 나서서 스페인이 아시아에 남긴 유산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며 위로했다. 누손에는 여전히 스페인령 필리핀이던 시절의 많은 흔적이 남아있으며, 술루국은 스페인 그 자체가 아니냐고 말이다.
“서반아가 동양에 남긴 바가 적지 않으니, 그 발자국이 잊힐 일은 없을 거요. 우리 대한도 서반아에서 받아들인 것들이 많소.”
우리가 받아들인 스페인의 영향이라면…역시 군대 쪽이 많지. 장조 시절 도감군을 조련한 교관들이 스페인군 출신들이 었으니까.
지금도 그 흔적이 꽤 남았다. 제식 동작이나 군대 용어 같은데 스페인어에서 온 외래어가 아직도 일부 쓰이는 게 그 일례다.
소시지는 순대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여전히 스페인어로 ‘초리소’라고 한다. 힘센 종마를 ‘마초(馬超)’라고 부르는가 하면 해군에서는 선장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카피탄’이라는 속어가 있다. 이것도 스페인어로 선장(캡틴)을 뜻한다.
기술적인 영향도 아직 있다. 군기시에서는 장조 시기에 건너온 톨레도 도검장의 후예들이 지금도 조상에게 배운 방법 그대로 쇠를 두드려 검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총이 싸움터의 주력이 된 지 오래긴 하지만, 좋은 검을 만드는 이들의 자부심은 여전하다.
기호품인 빵, 과자류 같은 것들도 여전히 스페인식이 주류다. 다른 가게도 아니고 유행의 최첨단인 반촌다점이 스페인식 디저트를 팔아서 수백 년 기반을 다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스페인식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다.
의복도 그렇다. 도성에서 서양식 드레스를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한 서양인들이 롤리타가 데려온 스페인인 하녀들이었다. 나중에 프랑스인들이 들어와서 프랑스식 드레스를 선보이긴 했지만, 스페인식 드레스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프랑스식 드레스가 인기를 못 얻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피부 노출이 너무 많았다. 어깨는 물론이고 가슴 윗부분까지 드러나니 점잖은 사대부 가문에서 손도 댈 리 없다.
분명히 서양식 드레스는 양반가의 일상복이 아니라 받았다는 데 의의를 두는 선물용이긴 했다. 하지만 기생들도 길에서는 안 입을 물건이어서야 누가 그걸 받고 기뻐하겠는가. 살을 다 덮고 얼굴이랑 손만 내놓는 16세기 스페인식 드레스가 평이 더 좋을 수밖에.
어쨌든 우리 사회에 스페인 문화가 끼친 영향이 의외로 큰 건 사실이다. 그러니 자기들도 손 안 대고 남겨뒀던 섬 몇 개 처분한다고 아시아에서 스페인의 존재가 잊힐 일은 없다. 저 양반도 그거 다 알면서 괜히 엄살 피운 것 같군.
29,
스페인 특사가 영토 거래 계약서 한 부와 대금이 든 봉투 – 요즘 세상에서는 무거운 은화 상자를 대신하는 수표와 어음이라는 물건을 애용한다 – 를 받아서 떠나자, 마치 교대하듯이 주산진에서 배가 들어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님이 타고 있었다.
“그래. 이 어린아이가 적괴의 장자인 천귀복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홍천귀복. 신축년(1841) 생, 올해로 만 다섯 살.
아이는 새파랗게 질려 있으면서도 똑바로 서 있기는 했다. 아니, 새파랗게 질린 채 벌벌 떨고 있으니 이걸 똑바로 서 있다고 해줘야 하나 싶다. 내 앞까지 넘어지거나 무릎을 꿇지 않고 도착했다는 점을 칭찬해 주기로 할까.
아이가 마침내 내 앞에 섰다. 그러자 호송한 군관들이 아이의 무릎을 꿇렸다. 일어나라고 할까 하는 생각도 좀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단은 그대로 두었다. 편전 안을 가득 채운 신하들의 눈도 고려해야 했으니까.
“네가 홍적의 수괴, 홍수전의 장자 천귀복이냐.”
“…예. 그렇습니다.”
홍천귀복이 한국어를 알아들을 리 없으니 당연히 심문은 통변을 두고 이루어졌다. 이게 참 어색한 게, 마치 영화에서 어린이 캐릭터의 목소리를 어른이 어른 말투로 더빙한 것처럼 들린다. 와 이거 정말 거슬리네.
“너는 어찌 네 아비와 함께 상덕으로 가지 않고 장사에 있었는가? 그리고 싸울 수도 없는 어린아이면서 전선으로 가까이 나왔다가 우리 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는가?”
“저는…저는 잘…모릅니다다만 부친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세자인 제가 전방에 있으면서 군사들을 위문하고 그 사기를 북돋우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꼭 빼먹지 말고 수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아군 진영을 돌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군’이란 태평군을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하는 사람이다 보니 다들 무척이나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네 아비가 너를 장사에 남겨두고 갔다고? 군사들을 잘 달래라면서?”
“…예.”
그것 외에는 신통한 정보가 없었다. 아무리 세자라고 해도 고작 여섯 살, 아는 것도 별로 없을 거야 분명하다. 말이 제대로 안 통하니까 좀 더 상세하게 질문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정치나 군사 대신 일신에 관한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우리 군사들이 붙잡았을 때 크게 무서웠는가?”
“무서웠…습니다. 폐하.”
내가 입을 열 때마다 홍천귀복이 움찔거리는 모습이 좀 가엾었다. 자기 옆에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정서불안 상태가 새로 왔나 싶기도 했다. 이 아이에게는 좋은 위탁가정이 필요해 보였다.
“도적을 잡으면 처형하는 게 본래 법도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아직 어리기도 하니 처벌 대신 일단 오늘부터 순친왕의 집에서 머물 것을 명한다. 순친왕에게는 저 아이 비슷한 또래 아들이 있으니 함께 어울려 지내기도 편할 것이다.”
“성으니이 마앙극하옵니다.”
순친왕 운이는 현재 1남 1녀를 두었다. 요즘은 자식들까지 데리고 일가족이 낚시 여행을 즐기곤 한다. 거기 자리 하나 더 만들어서 집어넣는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그렇게 홍천귀복을 운이가 떠맡게 한 데 대해 조정에서도 별 반발은 없었다. 아비의 죄를 연좌하려고 해도 이제 고작 여섯 살이 되는 아이에게 뭘 시킬 수도 없고, 도적의 아들이라 해도 정성껏 예의와 학문을 가르치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평소 관념들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사람은 확실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게 누구냐고? 당연히 송문호다.
“폐하, 역적을 끌어와 천하에 알리고 조정 신하들 앞에 선보이셨으니, 포로를 붙잡은 값은 충분히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저희에게 넘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송문호는 내가 홍천귀복을 후송 측에 넘겨주지 않고 한양으로 부른 이유를 두고 추리하다 엉뚱한 답에 도착했던 모양이다. 붙잡은 홍천귀복을 내가 본국 백성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여기로 데려왔다고 말이다.
“폐하께서 그 역적을 잡으셨음을 이제 한성 백성 모두가 압니다. 그러니 인제 그만 저희 손에 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역괴를 붙잡는데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홍수전 그놈은 아들을 내걸고 위협한다고 해서 오라를 받을 놈이 절대로 아니오. 공연한 이야기 말고 그만 물러가시오.”
송문호는 홍천귀복 문제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사실상 토적 연군의 철군을 막을 수 없게 된 상황이라 더더욱 미련을 품은 듯도 했다. 하지만 내가 딱 잘라 거절하니 그 문제를 두고 더 매달리지는 못했다.
“그러면…본국에서 온 훈령에 따라 새로 청을 드리고자 하옵니다. 그게….”
송문호는 서두만 겨우 시작하더니 뒷이야기를 차마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기다리다 역정이 난 내가 재촉하자 겨우 본론이 나왔다. 그런데 그게 또 깜짝 놀랄 내용이었다.
“저희…황제께서 보내시는 제안이옵니다. 황제께서 임금 폐하께…국혼을.. 청하셨사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