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106
4부 490화(2106화)
1.
현재까지 아일랜드를 떠난 난민의 숫자를 확실하게 파악한 건 아니다. 일단 거리에 따른 정보 전달의 지연 문제가 있으므로 실시간 집계가 안된다.
다만 런던, 워싱턴, 누벨 아작시오 세 곳에 있는 우리 공사관들이 올리는 표문에 기재된 정보를 종합해 보면 누벨 프랑스로 넘어간 인원이 미국으로 간 인원의 대략 두 배쯤은 되는 모양이다.
“그 숫자만 십만 단위라고 하니, 이미 아사한 기민의 숫자까지 합산하면 잉글국으로서는 실로 미증유의 엄청난 손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사태입니다.”
외무대신 권승경이 침통한 표정으로 설명을 마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다.
“아니, 잉글국은 서양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런 나라에서 수십만이 굶주려 죽고, 수십만은 또 살길을 찾아 나라 밖으로 떠나게 놔둔다는 말입니까?”
“신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잉글국은 상선과 군선을 통틀어 천하에서 배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었습니까? 어찌 그 많은 배를 가지고 곡식을 날라 백성들을 먹이려 하지 않는 겁니까? 잉글국 조정은 대체 무얼 하는 겁니까?”
“아무리 유주 전역에서 담저가 병들어 식량을 구하기 어렵다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다른 신하들도 다들 혀를 내둘렀다. 세계 최강의 강대국 중 하나라고 알고 있는 영국이, 기근 하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수십만이 굶어 죽고 다른 수십만은 나라 밖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까닭이다.
영국 본국이 아일랜드를 본토와 구분해서 속령 취급한다는 정도는 우리 조정에서도 알고 있다. 마치 우리가 대남도를 여전히 본국과 구분되는 속주로 간주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 조정은 대남도에 기근이 들면 최선을 다해 구호한다. 물론 평소 조정에서는 본국의 작황에 가장 큰 관심을 둔다. 하지만 가뭄이라든가 홍수, 태풍 등의 요인으로 인해 대남도에도 흉년은 든다. 그러면 조정에서는 곡식을 풀어 구휼에 나선다.
한인만 구휼하고 원주민이라고 도와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두 똑같은 임금의 백성인데 누구는 돕고 누구는 안 돕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일선 행정 차원에서 실행이 좀 매끄럽지 않은 사례가 있기는 하겠으나, 원칙적으로는 모든 백성이 관의 구휼 대상이다.
우리 사대부들이 아무리 세계를 보는 시각이 예전보다 더 넓어졌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유학자다. 무지렁이 백성들이 평안히 살도록 보살피는 게 임금과 조정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계층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방임주의를 내세워서 아일랜드인들이 굶주리도록 방치하는 영국 정부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포기한 천하의 불한당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 자유방임주의라는 사상 자체가 납득이 안 가는 건 물론이다.
“잉글국이 홍서당과의 싸움을 빨리 끝내려는 이유를 알 것 같사옵니다. 전비 지출을 줄여 본국에서의 구휼에 투입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좌참정대신 김정희가 조심스럽게 희망적인 예측을 했다. 딱히 동의는 되지 않았지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소. 확신할 수는 없지만.”
태평천국 토벌에 들어간 전비에 본국 정부 예산은 한 푼도 안 들어갔을 텐데 과연 영향이 있을까. 아니, 동인도회사 예산으로 본국에 보낼 식량을 살 작정이라면 그렇게 틀린 예상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찌 아란도 주민들이 가까운 합중국보다 신불랑으로 더 간 것이오?”
대충 짐작은 하는 바지만 더 확실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래서 질문했더니 권승경이 얼른 답했다.
“잉글국, 미주합중국, 신불랑국 세 나라에 나가 있는 공사관에서 올린 표문 내용을 모아서 정리하니 그 사연은 이러합니다.”
고향을 떠나기로 한 아일랜드인들이 가장 간단히 떠날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잉글랜드다. 하지만 잉글랜드라고 해도 갑자기 수십만 단위의 이주민을 받아들일 여유는 없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아예 나라 밖으로 떠나게 되었다.
영국 정부에서는 이들을 캐나다나 뉴홀랜드로 보내고 싶어 했다. 제법 일찍부터 개척에 나섰음에도 양쪽 지역 다 여전히 인구가 부족하고, 특히 뉴홀랜드 인구는 이제 겨우 50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기회에 추가 이주민을 보내고 싶을 만도 하다.
다만 뉴홀랜드에 이주해서 영국 정부가 주는 토지를 받으려면 20년 동안 그 토지 대금을 상환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20년 동안 영국 정부의 노예 신세가 된다는 말이다.
토지 대금만 갚으면 되는 것도 아니다. 땅을 개척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데 들어가는 초기 투자금이 전부 빚이다. 종자와 가축을 구하는 비용도 다 빌려야 한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극복한다고 해도 물리적인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아무리 영국이라도 아일랜드에서 뉴홀랜드까지 그 많은 사람을 태워다 줄 만큼 많은 배는 없다.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게 문제다.
그래도 그쪽으로 간 아일랜드인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대서양만 횡단하면 건너갈 수 있는 북아메리카를 이주지로 택했다.
북아메리카로 간다고 하면 선택지는 셋이다. 캐나다, 미국, 누벨 프랑스다. 캐나다는 아직 캐나다라는 하나의 정치 단위로 묶이지는 않았으며 여러 주에 별도의 식민지가 존재하지만, 편의상 캐나다라고 부르겠다.
캐나다는 세 나라 중 가장 가깝고 영국 정부가 뱃삯의 9할을 지원해 줬다. 그래서 상당한 수가 캐나다로 갔다. 캐나다에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계 인구가 상당한 숫자인 것도 이들을 불러들인 동기 중 하나다.
미국으로 간 이들도 생각보다는 꽤 된다. 일단 대서양을 오가는 선박 항로 중에 미국으로 가는 노선이 가장 많다는 기본적인 조건에다, 그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는 이민자가 조금씩 있었던 탓으로 그 인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가장 먼 나라인 누벨 프랑스. 캐나다로 가는 것보다 두 배나 먼 거리를 항해해야 하는데도 북아메리카에 있는 세 나라 중 누벨 프랑스로 이주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이유는 누벨 프랑스 측에서 이 사태를 맞아 빠르게 행동한 덕분이었다.
누벨 프랑스에는 그전부터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이 꽤 있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에 머물던 시절부터 아일랜드인들을 자기 휘하에 두고 폴란드인들만큼이 나 중용했던 까닭이다.
나폴레옹이 아일랜드인 부하들을 두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을 아일랜드에 들여보내서 반란을 일으켜 영국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은 십여 차례나 아일랜드인 선동가들에게 무기를 제공해서 아일랜드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감시가 워낙 엄중했던 탓으로 대부분 해상에서 가로막혔고, 침투에 성공한 이들도 봉기를 성공시 키는 데는 모두 실패했다.
영국 정부는 당연히 나폴레옹 편에 선 아일랜드인들을 반역자로 간주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이 아일랜드인들도 대거 대서양을 건너 누벨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과거 고향에서였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지위에 올라 풍요를 누렸다.
만약 이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으면 대부분은 여전히 고향에서처럼 하층민으로 살았으리라. 미국에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은 대부분 공장 노동자나 광부, 항만 인부, 행상인, 벌목공이나 건설 노동자 등 미국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면서 ‘하얀 흑인’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선주 인구가 많지 않았던 누벨 프랑스에서는 아일랜드인들도 상류층으로 올라갈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군인이나 실업가 등으로 맹활약한 아일랜드인 다수가 나폴레옹에게 귀족 작위를 받았는데 이는 고향에서는 정말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렇게 출세한 아일랜드계 누벨 프랑스인들이 고향에서 벌어진 대기근과 영국 정부가 이 사태를 가볍게 보고 부실하게 대응하면서 벌어진 참극에 관해서 접했다. 이들은 격분했고, 당장 배를 마련하고는 식량을 가득 실어서 아일랜드로 보냈다.
당연히 식량만 보낸 게 아니다. 아일랜드계나 프랑스계 성직자들도 구호 사업에 나선다는 명분으로 함께 타고 갔다. 그리고 항구로 모여든 난민들에게 식량을 주면서 기왕이면 누벨 프랑스로 이주하라고 선전했다.
「누벨 프랑스에서는 아일랜드인이라고 차별받지 않아요. 영국인들은 거의 없어요.」
「누벨 프랑스에서는 출신에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대우받는답니다.」
「누벨 프랑스는 캐나다보다 따뜻하고 농사짓기도 좋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신부들이 와서 이렇게까지 권유하니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인들이 줄줄이 넘어가는 것도 당연하다. 굶주린 동포들을 위한 식량을 싣고 온 배가 누벨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에는 이 민선으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시초는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진 이민 유도 운동이었다. 그런데 일할 인구가 부족해서 늘 고민이던 누벨 프랑스 정부가 이를 알고서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정부 예산으로 뱃삯을 제공해 주고, 건너오는 이들에게 직업을 알선하는 식으로 말이다.
덕분에 수많은 아일랜드인이 캐나다보다 두 배나 먼 거 리를 감수하고 누벨 프랑스행 배를 탔다고 한다. 누벨 프랑스 선적 선박들만 동원해서는 도저히 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서 미국 배도 다수 용선했고 말이다.
누벨 프랑스 정부에서 무슨 돈으로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아일랜드인들을 불러들이느냐고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 누벨 프랑스 정부는 그럴 여유가 있다. 대륙횡단철도와 석유 사업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에다 자체적인 농공업 생산력도 계속 늘고 있어서다.
물론 아직 4백만 명이 채 안 되는 누벨 프랑스 인구를 생각하면, 갑자기 몇십만이나 되는 아일랜드인 인구가 새로 유입됐을 때 받는 충격이 크기는 할 거다. 당장 식량만 해도 바로 여분을 쭉쭉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땅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신불랑 공사로부터 식량 판매 요청이 들어와 있사옵니다. 평소 교역하던 양보다 더 많은 양곡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기관차와 화차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허락하도록 하시오.”
미주에서 생산한 여분의 곡물을 팔아 달라는 요청은 이해할 만하다. 늘어난 인구에 맞춰 경작지를 확대하고 곡식을 심어 수확할 때까지 먹을 식량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기관차와 화차는…식량을 수송하는 외에도 새로 도착하는 이주민들을 누벨 프랑스 각지로 보내 려면 필요하겠지 . 몇십만이나 되는 사람을 제국 각지에 새로 정착시켜야 하는데, 평소 보유한 열차만으로 원활한 수송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기관차와 화차는 미주에서 보유한 예비차량을 일단 판매하고, 대체할 물량을 본국에서 신속하게 보내도록 하시오. 미주에서는 아직 기관차를 만들지는 못하니.”
“예,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미주의 공업능력은 예전보다 많이 올라갔다. 하지만 기관차 같은 건 정비는 할 수 있어도 아직 신품을 제작하는 건 좀 어렵다. 옛날부터 공업 능력 같은 건 의도적으로 본국이 계속 주도권을 쥐도록 한 탓이 크다.
“헌데, 신불랑에서 식량을 충당하기 힘들 만큼 많은 아란인이 신불랑으로 건너온다면 그 일부를 우리 미주로 보내라고 해도 되지 않겠소?”
“안 될 것도 없지요.”
아일랜드인들이 누벨 프랑스를 거쳐 미주로 온다고 하면 시킬 일이야 많다. 어느 땅이든 사람이 없어서 문제지 시킬 일이 없을까 봐 걱정하겠는가.
아일랜드 게일어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한국어를 새로 배우려면 좀 힘들겠지만, 그건 어느 땅에 가서 살건 마찬가지 아닌가. 누벨 프랑스에 정착하려면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는데, 그 수고를 들이느니 한국어 배우는 게 더 쉽지 않을까.
8,
이번 태평전쟁에서 우리가 얻은 소득 하나는 정말 오랜만에 수행해 본 정규전 경험이다. 그동안 주된 전장이었던 누손주 같은 경우, 사실상 거기서 수행한 모든 전투가 정글 속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이었다.
하지만 이번 태평전쟁에서는 게릴라전 외에도 온갖 양상의 정규전이 다 펼쳐졌다. 양군이 정석적인 대형을 구축하고 펼치는 회전도 있었고, 공성전과 수성전에 항공전 등등 일반적인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전투 양상이 다 벌어졌다.
이게 좋았던 건 몇 년에 걸쳐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장교단을 확보하면서 이를 활용해 그동안 진행하던 군제개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도 참 여러 해 걸렸다.
이제 상비군인 정규군은 상설사단과 여단으로 개편했다. 각 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영군은 지역방어사령부로 개편되었고 그 예하 병력은 향토방위를 맡는 프로이센식 란트베어 체계로 바뀌었다.
이를 통해 각 지역사령부 단위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고, 각 상설사단과 여단은 평소에 일체화된 훈련을 시행함으로써 일체감을 올렸다. 예전처럼 서로 다른 군영에 속한 부대를 임시로 혼합편성할 필요가 없도록 체제를 재구성한 거다.
이 과정에 몰트케를 비롯한 프로이센 고문관들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몰트케가 귀국 명령을 받았다며 인사하러 왔을 때는 참으로 아쉬웠다.
“그대가 대한인으로 눌러앉았으면 참으로 좋겠소만.”
“저도 저희 국왕 폐하의 신하입니다. 부디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알겠소. 그대는 장차 귀국에서 큰일을 할 사람이니, 붙들지 않고 보내주리다.”
몰트케가 처음 한성에 도착한 게 무술년(1838) 가을이었으니 올해가 10년째였다. 정말 꽉 채워서 9년을 머무른 셈인데, 그동안 우리 대한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던 걸 생각하니 정말 아쉽다. 하지만 앞으로의 역사를 생각하면 선선히 보내줄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폐하와 함께 지낸 한성에서의 생활은 잊지 못할 겁니다. 저 때문에 세상을 돌아 찾아온 아내와 결혼도 했고, 딸도 얻었으니까요.”
몰트케 부부는 아이가 잘 들어서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들은 ‘한국에는 지붕 위에 둥지를 트는 황새가 없어서 그렇다’라며 우스개로 넘겼지만, 내가 보기에 안쓰러웠다. 그래서 혹시 효과가 있지 않으려나 하고 내의원에 명해 순비탕을 지어줬는데, 그게 효과를 발휘했다.
“잘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폐하.”
“저도 감사드립니다. 폐하 덕분에 처음으로 중책을 맡아 힘껏 일했습니다.”
비스마르크도 귀임 명령을 받았다. 몰트케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한국과의 외교에서 세운 공적이 크다고 해서 특별히 표창까지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대들이 그리울 것 같소. 조심히 가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멀어져가는 기차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몰트케와 비스마르크, 저 두 사람은 확실하게 친한파가 된 것 같기는 하다. 몇 년에 걸쳐 노력한 보람이 있다.
앞으로 독일제국 정부와 군부를 좌지우지하게 될 저 두 사람이다. 저들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 편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