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18
1부 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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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하긴 해야 하겠지.”
술에 취해 울적한 기분에 젖는 건 그날 하루로 족하다. 죽는 건 30년은 지난 뒤 일이다. 지금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으니 그것부터 먼저 해결해 놓고 보자.
“일기도 주민들, 그리고 귀환한 대마도 주민들은 모두 별다른 불평 없이 살고 있느냐?”
“예, 그러합니다.”
두 섬 중에서는 대마도가 훨씬 사정이 좋지 않다. 대마도는 쇼니 군이 침공했을 때 일단 한 번 쑥대밭이 되었고, 우리 동정군이 쇼니 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불바다가 되었다.
이미 내 땅이 된 지역을 일부러 초토화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쇼니 군은 의도적으로 그 섬에 정규군이 아니라 노부시들을 뿌려놓았다. 게릴라전이라면 도가 튼 놈들을 상대하다 보니 섬 전체를 들쑤시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일기도에서는 송포(마쓰우라) 씨 밑에서 군사로 동원되어 나섰다가 죽은 이들 일부 외에는 피해도 별로 없었기에 민심도 평온합니다만, 대마도에서는 주민 수가 작년 이맘때보다 절반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줄었기에 매우 민심이 흉흉합니다.”
이키에서는 여진족들이 일부 약탈, 폭행 등을 벌인 외에는 이번 전쟁으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도리어 주둔하고 있는 우리 군사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돈푼깨나 만진 주민도 여럿 있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다.
지금 이키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경상도 군사 1천 명이 주둔하고 있다. 이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고 급료를 지급하느라 거의 경군 3천은 족히 유지할 만한 비용이 소모되고 있다. 장차 이키에서도 세금을 걷게 되면 수고가 좀 줄겠지만, 만만찮은 부담이다.
지금은 정식 진포를 설치하진 않았지만 장차는 이키에도 진포를 설치해야 할 거다. 그래도 당장은 일본인 지배자를 통한 간접지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게 내 판단, 그리고 의정부에서의 일치된 결정이다. 완전한 외국인 이키를 당장 직접 지배하는 건 우리에게도 부담이 크니까.
“일기도 도주는 일전에 논한 대로 종우마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딱히 뛰어난 재주가 있지는 않으나, 일기도 주민들을 위무하는 데는 솜씨가 있는 듯하다. 바로 명을 내려 그 임지를 지금 있는 대마도에서 일기도로 옮기도록 하라.”
소 씨는 본래 이키와는 연관이 없다. 이키는 꽤 전부터 마쓰우라 씨 영지였고, 내가 물리친 수비대도 마쓰우라 쪽에서 온 군대였다. 하지만 내가 뺏어 놓고는 마쓰우라 쪽 사람을 도주로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살아남은 소 씨 일가뿐이다.
종우마는 지금 임시 대마도주 노릇을 맡고 있다. 아마 이 명령을 받으면 영전으로 받아들여 적극 환영하리라고 생각한다. 일기도는 전체 면적은 대마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지만, 거의 전체가 농사가 가능한 평지다. 게다가 인구도 쑥대밭이 된 대마도에 비하면 훨씬 많다.
“현명하신 선택이시옵니다. 종우마는 나이가 지긋하고 이미 대마도 안에서 백성을 다스린 경험이 있어 일기도에서도 잘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어차피 지금 소 씨 집안에 남은 사람은 없다. 도주 후보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도 이들 세 명뿐이다. 이중에 종성순이나 종성가는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젊다. 아니, 젊다기보다 경험이 부족하다.
이들 두 사람은 한참 행정을 익히고 후계자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에 전쟁에 져서 조선에 끌려왔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일개 무관으로서 내 경호원 노릇만 주로 하느라 딱히 통치경험이라고 할 만한 걸 쌓지 못했다.
차라리 대를 이어 섬을 통치해 온 소 씨에 대한 충성심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대마도라면 혹시 모르겠다. 완전히 객지라고 할 수 있는 이키 섬 통치는 이들에게 맡길 수 없다. 아무리 조선군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 점에서 종우마가 차라리 낫다.
“전하, 종우마가 일기도로 옮기면 대마도를 담당하는 이가 없어지게 됩니다. 대마도는 그럼 누구에게 맡기시겠사옵니까.”
종우마에게 이키 섬을 맡긴다면 당연히 대마도에는 후임자가 필요하다. 이참에 아예 도주를 폐지하고 직할지로 편입해버릴까? 잠시 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신하들이 하나씩 의견을 내놓았다.
“이참에 대마도를 경상도에 속한 현으로 아예 편입하소서. 그리고 줄어든 왜인 대신 경상도 백성 일부를 이주시켜 확실한 우리 땅으로 유지하심이 어떻겠나이까.”
“신은 생각이 다르옵니다. 예로부터 그 척박한 섬을 차지하지 않은 데는 다 합당한 연유가 있습니다. 농토도 없고, 교통도 불편한 섬에 어찌 우리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겠습니까? 약간 돌보아주기만 하면 왜인들도 그 수가 다시 늘어날 것이니, 그대로 왜인들끼리 살게 하소서.”
전자는 박원종, 후자는 유순정이 주로 내세운 주장이었다. 함께 동정군을 이끌었던 도원수, 부원수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다니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이 문제에서는 유순정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일단 대마도의 법적 지위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박원종이 깜박 잊은 모양인데, 우리는 일본 쪽과 약속을 했다. 대마도와 이키, 두 섬은 당분간 예전 대마도처럼 조선과 일본 양쪽에 속하는 존재로 둔다고 말이다.
대마도를 법적으로도 완전히 조선 영토로 넘기려면 교토에 있는 일본 천황 ? 정말 이렇게 불러주기 싫구만 ? 과 쇼군이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신이 내려준 땅이라고 하는 일본 영토를 외국에 양도하고서도 천황이 무사할 수 있을까?
지금 천황이 누군지 나도 헷갈린다만, 그 자는 대마도를 지키기 위해 손도 까딱할 필요가 없다.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조선 영토로 대마도를 승인하면 그 순간 누군가에 의해서 쫓겨난다. 그리고 후임자는 전임자의 승인을 철회할 게 뻔하다.
오우치가 데리고 있는 전 쇼군도 이런 조치를 승인할 수 없다. 승인하면 그 순간 나머지 전 일본이 현 쇼군 편에 붙는다. 물론 동쪽에 있는 자들은 대마도 탈환을 위해 병사 하나 보내지 않겠지만, 그 승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반 오우치 연합전선을 결성할 수는 있었다.
물론 내 기우일 수는 있다. 하지만 오우치 역시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마도 및 이키 두 섬에 대해서 ‘이전과 같은 위치를 유지한다고 믿고 있다’는 국서 같은 걸 보내올 리가 있나.
지금 상황에서 대마도를 완전히 조선 영토로 편입한다는 선언 같은 걸 하면 오우치가 입장 전환을 하게 만들어 우리 적으로 돌아서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당장 오우치가 군사를 일으켜 대마도로 쳐들어 오지야 않겠지만, 추후 대응이 골치 아픈 수준이 될 게 뻔하다.
“내 생각에도 아직은 대마도를 완전히 우리 영토로 편입하기는 무리일 듯하다. 병조판서가 말했듯이 일단은 우리 백성을 이주시키지 않고, 수군 진포 하나만 두어 군사를 두기로 하자.”
이키 섬처럼 성도 하나 쌓고, 주둔군은 1천 명 정도 두면 되겠지. 그 정도만 해도 유사시에 버티면서 본국에서 오는 원군을 기다리기에는 충분하다. 더 많이 두면 방위력이야 강하겠지만 유지비가 너무 든다. 굳이 섬 전체를 철통같이 지킬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그럼 도주는 종성순과 종성가 두 사람 중에서 누구로 하시겠습니까.”
박원종이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 의견이 물리쳐지니 기분이 상했나 보다.
“그대들이 평소 그들 두 왜인에 대해서 보고 느낀 바를 말해 보라.”
내가 직접 관찰한 모습, 그리고 금위사에서 올라온 동태보고, 이번 원정에서 받은 유순정의 장계 등을 통해서 웬만큼 마음은 정했다. 하지만 내 결정이 정확한지, 다른 이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신하들은 잠시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 말 않고 기다리자 하나씩 입을 열어 자기 의견을 밝혔다.
“두 왜인 중 종성순은 선대 도주의 장자입니다. 엄연히 종법(宗法)이 있는 이상, 그 자리는 장자인 종성순으로 하여금 잇게 함이 가할 것이옵니다.”
“종성순은 그 성품이 냉정하고 사람을 대하기 어려워합니다. 대마도가 작은 섬이라고 해도 군주는 군주, 그 백성을 위무하고 보살펴야 하는데 어찌 그런 성품으로 도주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겠습니까.”
“종성가는 이곳 도성에서도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하며, 넉넉한 성품으로 상하를 막론하고 친숙하게 잘 지냈습니다. 추후 조정에서 대마도에 명을 내릴 때도 잘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종성순은 고집을 부리며 멋대로 굴 공산이 큽니다.”
“동정군이 나서기에 앞서 대마도 군사들에게 척후를 맡겼을 때, 종성가의 수하들은 동포를 구출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허나 종성순의 수하들은 무공을 세우는 데만 몰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주인의 영향이 없겠습니까. 종성순은 백성을 아끼지 않습니다.”
“구주 원정에서도 달랐습니다. 종성가는 가능한 인명을 해하지 않고 협상이 이루어지도록 중간에서 노력한 반면, 종성순은 야인들이 무자비한 살상과 약탈을 벌이는데도 전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동족인 대마도인들이 희생되는데도 그랬습니다.”
어이, 잠깐. 그건 좀 변명의 여지가 있잖아. 종성순이 앞에 나서서 여진족들에게 약탈행위를 중단하라고 했으면 그 자리에서 자기가 먼저 화살을 맞고 어디 팽개쳐졌을 가능성이 더 높을 텐데. 하지만 뭐 나도 종성순을 딱히 좋아하진 않으니 나서서 변호하지는 않도록 하자.
“평성군이 대내전과 마지막 협상을 할 때도 종성가가 나서서 통변을 맡았으니 그 공이 무척 큽니다. 종성순은 그때 자기 군막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거야 박원종이 종성가를 불러서 데리고 갔으니 그랬던 거지. 따라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종성순이 무슨 재주로 협상에서 공을 세운단 말인가.
어쨌든 조정에서 오가는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대세는 종성가 지지였다. 종법적인 질서를 우선적으로 따져 무조건 종성순을 옹위해야 한다는 이들은 없었다. 사실 그런 주장을 할 만한 이들은 지난 10년 동안 조정에서 거의 다 떨려나갔다. 죽든지, 귀양을 가든지, 해임되든지.
그 뒤로 내가 등용한 고관들은 명분보다 실리를 따지는 이들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명분을 내세워 내게 반대하고 나서지 않는 이들이었다. 만약에 종성가가 무능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만 사려고 애를 썼다면 이만큼 광범위한 지지는 얻지 못했으리라.
종성가를 지지하는 발언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그중에 마지막이자 결정타가 되었던 발언은 이거였다.
“자고로 효는 자손을 얻어 가문을 번창시킴이 그 근본입니다. 종성가는 지금 아들을 셋이나 두었으나 종성순은 장자이면서도 혼자된 몸으로 있으며 혼인할 기색조차 없습니다.”
뭐더라, 이름이 생각 안 나는 대간 한 사람이 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종성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정호찬의 사위라는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성희안이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면서 그 뒤를 이어 형조참판으로 승진한 정호찬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기 사위와 관련된 일을 자기가 거론함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정호찬이 이 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이미 어제 들어온 금위사 보고를 통해 충분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금위사 탐보꾼들이 수집해온 바에 따라서 판단하자면, 종성순은 대마도주 자리에 미련을 갖지 않은 듯하옵니다.”
“어이 그러한가?”
장소는 형조 관아에 있는 정호찬의 집무실이었다. 정호찬을 궁궐로 불러 독대를 하자면 그 과정에서 지켜야 할 절차가 복잡하고 입시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잠시 말을 타러 나간다고 출궁했다가 곧바로 형조로 들어갔다. 형조는 뒤집어졌지만 뭐, 상관없다.
내 질문을 받은 정호찬은 차분하게 문서 다발 하나를 꺼냈다.
“종성순은 대마도 정세를 탐색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수하들을 부려서 공을 세우려 노력했습니다. 헌데 구주 정벌군에 합류하고 나서는 공을 세우려는 노력조차 그만두었습니다. 도성에 돌아오고 나서는 아예 두문불출, 근무 외에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거야 그전에도 그러지 않았는가.”
“한 가지 차이라면 제 아비인 종재성을 모신 암자에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찾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이 수일 전에 수하들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미륵을 모시는 작은 암자로, 늙은 중 하나가 있을 뿐 사미승도 노비도 전혀 없었습니다.”
“미륵을 모시는 암자?!”
곧바로 거부감이 일었다. 어찌 잊겠는가, 미륵을 자칭하던 배목인 일당이 암살자를 보내서 나를 죽이려 했던 일을. 8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나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지금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럼 그 중놈은 대역무도한 배가놈 패거리를 따르던 잔당이 아닌가!”
“딱히 확신할 수는 없사옵니다. 팔도에서 미륵을 모시는 절이나 암자는 한둘이 아니옵고, 거기 머무르는 모든 불자나 신도들이 역도와 한패라고 간주할 수는 없사옵니다. 일단 살펴본 바로는 본당에 세워둔 미륵상은 배가놈이 모시던 것과 형상이 달랐습니다.”
안심이 되지 않았다. 신앙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미륵상 모양 정도야 얼마든지 바꿔서 감출 수 있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도 막부가 천주교 신앙을 금지하자 신자들이 성모상을 관음보살 형상으로 바꾸어 불상인 척 모시지 않았는가.
“종성순이 그 중놈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알아냈는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암자가 워낙 작아서 드나드는 신도도 별로 없고, 딸려 있는 노비 하나가 없다 보니 끄나풀로 포섭할 자도 없습니다. 다만 집에 돌아온 종성순이 아비를 위한 염불 이외에 별다른 행동이 없는 걸 보면 그 암자 역시 평범한 암자일 공산이 있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 암자가 궤멸당한 배목인 패거리 잔당이 모이는 아지트라면, 아직도 복수를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올해 초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소문, 나와 휘숙옹주 사이에 근친 관계가 있다는 소문도 여기가 발원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놈들이 정말 종성순을 감화시켜 자기들과 한패로 만들었다면, 당장 나부터 암살하게 하지 않았을까? 종성순은 내금위다. 나를 직접 경호하는 무관이고, 이제 수문장까지 승진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종성순인 대략 1년 전부터 그 암자에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 올해 초에 출정하느라 두 달 정도 쉬었다고 하지만, 돌아와서는 여전히 매달 불공을 드리러 그 암자에 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근무 태도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럼 의심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미륵이라면 몸서리가 쳐진다! 금위사에서 거느린 자들 중 적당한 자들을 보내서 그 암자는 태워버리고 중놈은 쳐 죽여라.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그냥 넘어갈까 했는데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그놈들은 감히 날 진짜로 죽이려 한 유일한 패거리였다. 그동안은 나도 바빠서 굳이 찾아서 뿌리를 뽑으려고 하지는 않았다만, 기왕지사 눈에 들어온 이상 씨를 말려버릴 테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얼른 대답하지 않고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던 정호찬이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티 안 나게 도적으로 위장해서 일을 해치우라는 정도는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겠지.
종성순이 미륵신앙에 기울어졌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방에 미륵불을 모신 것도 아니니까. 그저 미륵을 모시는 암자에 부친의 위패를 모시고 가끔 찾아갈 뿐이다. 그보다는 성품과 능력 면에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생각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몰라도 예조판서 김감이 이름 모를 대간에게 동조했다.
“종성순이 도주 자리에 오른들 그 뒤는 질자인 종성가의 아들이 이을 터이니, 기왕 그리될 거라면 일찌감치 종성가에게 도주 자리를 잇게 하소서. 종성순은 이대로 도성에 두되, 추후에 종성가가 만약 우리 뜻을 거스를 경우 대신 내세울 용도로 써도 될 것이옵니다.”
볼모 겸 유사시 내세울 대타로 쓰자는 소리로군. 아무리 능력이나 성품 면에서 문제가 있고 미륵당과 어울렸을 공산이 있다 해도 장자는 장자다. 그러니 명분 면에서 종성순이 한 단계 우위에 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명분 이외에 모든 면에서 밀린다는 거지.
의견은 충분히 들었다. 결정을 내릴 때다.
“종재성을 계승할 신임 대마도주는 종성가로 하겠다. 종성순은 그대로 내금위에서 봉직하게 하라. 단 종성가의 처자는 당분간 도성에 머무르게 함이 옳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족쇄를 채워 놔야지. 설마 싶지만, 그리 쉽게 처자식을 버리기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