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4
1부 0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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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은 이 글에서 의제의 비통한 죽음을 묘사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세조께서 왕위에 오르신 그 과정을 비난하고 있소. 신하 되어 조정에 출사한 자로서, 이 어찌 대역무도한 일이 아니겠소!”
유자광은 지금 대전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도승지가 낭독하는 조의제문을 들은 대소 신료들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유자광의 해설을 듣고만 있었다.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문종대왕께서 돌아가신 후 어린 노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황보인, 김종서 등 역당들은 사욕을 채울 기회를 잡았소. 이들이 안평대군과 결탁하여 국권을 농단하고 왕실을 능멸함이 극에 달하여 세조께서 계유정난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키셨소.”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다. 현대에서는 간혹 이 ‘정난’을 ‘정난(政亂)’으로 생각해서 ‘계유년에 일어난 쿠데타’라는 의미인줄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실은 ‘정난(靖亂)’이다. ‘계유년에 난을 진압하다’라는 의미이다.
쿠데타는 자기가 일으켜 놓고 누굴 진압했다는 거냐고 생각하겠지만, 세조는 ‘김종서 일당이 허수아비 임금을 앞세워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국난(國難)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나서서 난리를 진정시켰으므로 ‘정난(靖亂)’이다.
“세조께서는 어리고 유약한 노산군이 더 이상 옥좌를 지킬 수 없음을 아셨고, 이에 어쩔 수 없이 보위를 넘겨받으셨소. 그리고 노산군을 상왕으로 올려 극진히 받드셨소.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근원이 노산군이었음에도 말이오. 그랬더니 그 배려가 어찌 돌아왔소?”
“의제라 하면, 옛적 초나라에서 패왕 항우에게 살해당한 그 의제인가?”
“그렇습니다! 항우는 신하된 몸으로서 군주를 살해하였으니 진실로 무도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유자광은 신이 나서 준비한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항우는 그 용력은 천하에 비할 자가 없었습니다. 만군의 포위라도 뚫었으며 쓰러트리지 못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허나 덕이 없었고, 군주를 살해할 정도로 무도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한 고조에게 패하고 천하를 잃은 것입니다.”
한나라 고조(高祖)는 한의 첫 번째 황제 유방을 가리킨다. 유방이 항우에게 도전하면서 내세운 가장 큰 명분이 ‘항우는 임금을 살해한 자’라는 구호였다.
“그러니까, 그대는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실어 세조께서 항우와 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했다는 것인가?”
“그러합니다. 일단 성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이 의제에 관한 글을 실을 필요부터가 없습니다. 게다가 김일손은 사초 내 다른 부분에서 세조께서 노산군을 살해하였다 적었습니다. 노산군을 의제에 빗대어 세조께서 항우와 같다고 능멸한 게 아니겠습니까?”
“헌데 이 글에서 의제가 곧 노산군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읽어 보니 김종직은 자신이 의제가 원통해하는 꿈을 꾸고 그 꿈 이야기를 글로 적었다 했는데, 그저 꿈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나는 조의제문이 무슨 의미로 작성된 글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 대해 알고 있음을 스스로 말할 수는 없다. 유자광이 먼저 발설하게 만들어야 한다.
왜 먼저 말하면 안 되냐고? 알면서 그러나. 사화를 주도하고, 선비들을 죽게 만든 악역을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떠넘기기 위해서다.
내가 나서서 조의제문을 해석하고 김종직, 김일손 등을 처벌하라고 날뛴다면 무오사화는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도한 사건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유자광에게 그 역할을 맡긴다면, 나는 유자광의 모함 내지는 꼬드김에 넘어간 사람이 되고 원성은 유자광에게 집중된다.
별로 유자광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유자광은 남이를 모함한 이래로 주변에서 받은 원성이 워낙 커서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제 와서 착하게 살려고 한들 누구도 좋은 사람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사냥개 노릇 한 번 더 시킨다고 뭐 달라질 게 있겠는가.
“이 조의제문에서, 김종직은 의제가 입은 복장을 7장복이라 하였소. 허나 이는 예법에 맞지 않소! 의제는 천자였던 몸, 격식을 갖춰서 옷을 입는다면 12장복을 입어야 하오. 김종직이 굳이 의제가 7장복을 입었다고 기술한 이유가 무엇이겠소?”
동아시아 전통 예법에서 군주가 의식행사 때 입는 예복을 면복(冕服)이라고 한다. 면복에서 가장 겉에 입는 옷을 장복(章服)이라고 하는데, 이 장복은 겉에 붙은 장문(章紋)의 수에 따라 급이 나뉜다. 황제는 12장복, 황태자와 왕은 9장복, 왕세자는 7장복, 왕세손은 5장복이다.
“의제가 남방으로 쫓겨나는 길이었기에 옷을 간소하게 입은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은 설마 안 계시리라 믿소. 예를 공부했다면 그런 생각은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오!”
12장복, 9장복, 7장복은 옷을 더 입고 덜 입는 게 아니라 장문 숫자에 따라 옷의 ‘격’이 달라지는 거다. 즉, 의제는 7장복 같은 옷은 아예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게 분명하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김종직이 7장복이라 적었다면 분명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7장복은 왕세자, 즉 왕이 되지 못한 자가 입는 옷이오! 이것이 왕 자리를 내놓고 물러난 노산군을 가리키는 내용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소?”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김종직을 변호하고자 나서는 이조차 없었다.
“이는 노산군을 의제로 비유함으로써, 세조께서 노산군에게 양위를 받으신 게 아니라 노산군을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았다고, 즉 세조께서 항우와 같은 폭군이자 역도라고 주장하신 거나 마찬가지요! 세조께 고개를 조아리며 벼슬을 살았던 김종직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이쯤 하면 됐다. 유자광이 잘 말해 주고 있긴 하지만 원맨쇼가 너무 길어지면 충격도 약해지고 설득력도 떨어진다. 적당한 시점에 새로운 장면을 연출할 필요가 있다.
“실로 놀라운 일이로다. 과인은 그동안 김일손이 충신이라 여겼다. 스승인 김종직과 더불어 열과 성을 다해 왕실을 섬겼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헌데 오늘에 와서 드러난 이들 사제의 역심은 실로 놀랍다. 이 어찌 면종복배(面從腹背), 구밀복검(口蜜腹劍)이 아니라 하겠느냐!”
내 호통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유자광을 제외하고, 어느 신하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금부에서는 김일손을 엄히 문초하여 이 이른바 ‘조의제문’이라는 글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참람한 행위에 대해서도 모두 그 근원을 밝히라! 연루된 자를 모두 밝힌 이후에, 어찌 벌할지 결정하겠다!”
그동안 나는 진짜 연산군과 아주 다르게 굴었다. 진짜 연산군은 신하들이 뭐라고 하건 집권 초기부터 사냥을 대규모로 즐기고, 전국에서 미녀들을 모아들이고, 중국과 일본에서 사치품을 사들였다. 하지만 나는 이 중에서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왕으로서 보인 모습은 유교적인 성군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범군 수준은 유지했다고 본다. 신하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가능한 참았다. 가끔 화는 내도 그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던 내가 ‘분노’를 폭발시켰으니, 신하들이 느끼는 놀라움은 더 크리라.
여기 연루되어 벌을 받을 이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주범’인 김종직, 김일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차후 내가 국정을 이끌어나가는데 있어서 장애요인이 될 만한 이들을 조정 내에서 내보내고플 뿐이다.
자, 어느 선까지 ‘숙청’을 진행해 볼까?
– 7 –
“신은 그저 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사초에 썼을 뿐이옵니다. 신은 세조대왕을 모시지 않았기에 그 그릇된 행동을 꺼려하지 않고 모두 썼으며, 노산군의 일 등 다른 것들은 다른 이에게 들었기에 들은 그대로를 썼습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김일손의 주장은 꺾이지 않았다. 초지일관, 하도 순순히 불어서 심문관들이 그리 강한 고문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는 진술이 바뀌었다.
“허나 궁금(宮禁)의 일은 허반이 아니라 신이 병조좌랑이던 시절 정랑인 강겸에게 들었습니다. 허반이 아니라 모두 강겸에게 들은 것입니다.”
김일손이 실토하는 데 따라서 각각의 사건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알려준 이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왔다. 연달아 끌려오는 혐의자들로 의금부 감방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전하! 일찍이 규정하였기로 임금은 사초를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사초 내용을 보고 김일손을 비롯한 이들을 잡아들이심은 심히 잘못된 처사이십니다. 당장 추국을 멈추소서.”
국문 중에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올라온 상소였다.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상소문을 집어던지며 명령했다.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말하기를, 임금이 실록을 봄은 부당하다 하였다. 평소라면 이 말이 가하겠으나 지금은 큰일이 터졌으니 평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가하다 하니 필시 이는 저들이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소를 올린 자들을 모조리 의금부로 보내 국문하라!”
“전하! 홍문관과 예문관은 실록을 작성하는 곳이고, 저들은 사관을 겸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사초를 보시지 말아야 한다 저들이 간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국문하다니, 전혀 온당치 않습니다.”
내 지시를 접한 사간원, 사헌부의 대간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결심은 굳어진 상태였다.
“아니다! 이번은 그대들이 분명히 틀렸다. 이번 일을 그대로 용납하면, 장차 기군망상(欺君罔上)하는 자들이 사초에 어떤 내용을 쓸지 모른다. 의금부는 어명을 따르라!”
사간원이고 사헌부고 홍문관이고 예문관이고 주축은 죄다 사림들이다. 분명 바른말을 해야 하는 부서니까 세상 때가 덜 묻고 꼿꼿한 작자들을 넣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동안 이놈들은 도가 지나쳤다. 혼 좀 나 보라지.
“신은 김일손과 별다른 대화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만난 적은 있으나 딱히 김일손이 신의 앞에서 역심을 품은 노래를 짓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김일손은 신보다 연배가 아래인지라 딱히 어울린 적이 없습니다.”
“신은 일전에 도성 밖에 나갔다 오는데 동대문에 ‘중 학조가 영응대군 부인과 사통했다’는 방이 붙어 있기에, 일손에게 들려주었을 뿐입니다.”
“신이 실록청에 있을 때, 일손의 사초를 보고 ‘기록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많이 기록했다’고 하니 이목이 ‘네가 기록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록하지 않은 이유를 쓰겠다’고 했습니다.”
김일손과의 연루를 부인하는 자 절반, 나머지는 죄다 소문, 소문이었다. 민간에 도는 근거 없는 소문. 이런 소문을 출처로 사초를 쓰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지금까지 연루된 자들의 집을 뒤져 모든 문서를 찾으라! 앞으로 체포할 자들은 처음부터 집을 수색해서 문서를 찾도록 하라!”
썩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사초 사건에 연루된 이들을 싹 뒤져내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치다. 지금 사림은 건전한 학파가 아니라 독선적인 정파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성리학 자체를 소멸시킬 수는 없다. 성리학이 고려 말에 한반도에 들어온 지 근 200여 년이 지났고, 조선의 사상계를 완전히 점령한지 오래다. 선비, 양반이라는 자들은 사실상 모두가 성리학자다. 관학파, 훈구파도 학문적 근원은 성리학이다.
이들을 다 쓸어낼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쓸어낸다고 해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나 혼자 중인이나 천민 출신 하급 관료들만 거느리고 이 나라를 통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목표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림파를 거세시키는 일이다. 내게는 문장이나 짓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는 선비가 아니라 제대로 훈련받은 관료가 필요하다. 기본적인 유학 교육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실무 뺑뺑이를 돌면서 현장을 익힌 관료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러자면 학맥으로 끌어주고 올려주며 종국에 가서는 붕당을 형성하는 사림은 절대 집권해서는 안 된다. 입바른 소리만 할 줄 알지 실무는 쥐뿔도 모르는 ‘철학자’들을 고위 관직에 올려서 뭘 하란 말인가? 여진족 때려잡는 데 이기일원론 같은 거 들이대서 뭐하게?
이이고 이황이고 나타나건 말건 관심 없다. 자기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못하게 할 수는 없으니, 자기들끼리 이가 어쩌니 기가 어쩌니 키배나 하면서 놀고 있으라고 해라. 중앙정부만 실용주의자, 현실주의자들로 구성해서 꽉 틀어쥐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다만 의금부에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엄히 문초하라’고 명령하려니 갑자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2년 전 터졌던 유인홍 첩의 적녀 살인사건 때 관련자에게 곤장을 때리기도 꺼려하던 내가 지금의 내가 맞나 싶다. 어느새 이 시대에 물들어가고 있는 걸까?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때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때는 무고한 증인에게서 증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억지 고문이었지만, 지금은 엄연히 죄를 지은 또는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에게 자백을 받기 위함이다. 너무 가책을 느끼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