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5
1부 025화
– 8 –
“전하, 김일손에게 소문을 전한 자들 중 다수가 자백하기를, 동대문이나 종루 등지에 붙은 방이나 벽서를 통해 자신이 들은 소문을 접했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벽서?”
아, 기억났다. 동대문에 붙은 방에서 영응대군 부인이 중 누구랑 사통했다고 적은 이야기를 보고 김일손에게 전했다는 놈이 있었지. 누군지 지금 기억은 안 나네.
“언문 벽서를 통해 허튼 소문을 퍼뜨리는 일이 자주 있어서 이번 일이 터지기 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금부와 포도청에서 사람을 풀어 벽서를 붙이는 자들을 추포하고 있긴 하온데, 워낙 몰래몰래 붙이고 도망가곤 하는지라 성과가 신통치 않사옵니다.”
벽서(壁書), 현대식 표현으로 하면 대자보다.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 사회니, 개인이 자기 의견을 사회적으로 널리 알리려면 이런 수단을 쓸 수밖에 없으리라. 조선시대 내내 이런 벽서들이 진실을 알리기도 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도 했음은 알고 있다.
연산군 시기는 이런 벽서가 가장 많이 나붙은 시기 중 하나였다. 과도한 세금 징수 및 폭정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벌이는 폭정을 벽서를 통해 비판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이에 분격한 연산군이 언문 사용을 금지했었다는 기록을 읽은 기억이 났다.
언문…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한글을 부르는 호칭을 언문에서 국문으로 바꾸려 했었지.
나름대로 어려울 것 없다고 생각했던 그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뜻밖에도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 훈구고 사림이고 이 문제에서는 모두 같은 편이었다.
“언문이 세종대왕께서 남긴 업적이심은 사실입니다. 허나 전하, 세종대왕께서는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문자’를 익히지 못한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셨기에 이를 창제하셨습니다. 절대 진서를 대체할 새로운 나랏글로 만드신 게 아닙니다.”
진서(眞書)는 한자를 의미한다. 조선의 지식층이라면 모두가 한자를 상용(常用)하고 있으니, 굳이 한글로 글을 쓸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는 ‘언문’의 격을 높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격을 높이기는커녕 그 지위를 그대로 ‘어리석은 자들’이 쓰는 글로 낮게 두는 편이 유리했다.
이름조차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판국이니 맞춤법 통일안 같은 것도 만들 수 없었다. 내가 설사 국어국문학과 전공으로 국문법을 구두점 하나까지 다 꿰고 있다고 해도 만들 수가 없었다. 공개하는 순간 그깟 필요 없는 것을 왜 만드느냐는 소리만 듣게 될 게다.
기껏 노력해서 만들었다고 치자. 문제는 만들어봐야 전파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통일된 교과 내용을 전 국민에게 전파하려면 학교를 만들고 보통교육을 실시해야 하는데, 이놈의 나라엔 그럴 역량이 없으니까 말이다.
학교를 세운다는 건 그저 건물만 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체계적인 교육 커리큘럼이 필요하고, 표준화된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춰 양성된 교사가 필요하다. 지금 조선에는 그럴 비용도 없고, 그게 가능한 사회적 구조도 갖춰지지 않았다.
설사 학교가 만들어진다 한들…뭘 가르치며, 배운 것을 어디다 써먹는가? 근대 보통교육이 시작된 근본 배경은 공장노동자를 대량으로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는 의미가 없는 역할이다. 농사는 부모에게, 선대로부터 배우는 거니까.
국민 통합을 이루는 의식화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기대하기 힘들다. 과거는 한문으로 보니 출세를 위한 교육기관도 못 된다. 수학이나 과학, 예체능을 가르칠 능력도 없다. 그저 한글을 가르치는 한글교습소 역할밖에 못 한다면, 학교를 만드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젠장, 나 혼자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같은 걸 만들어 봐야 방구석 설정놀음밖에 안 되지.”
“예? 전하, 뭐라 하셨습니까?”
답을 기다리던 도승지 신수근이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내 혼잣말이 들렸던 모양이다.
“아니, 별 거 아니다. 그보다 도승지는 장 선전관을 불러라. 잠시 나가야겠다.”
“전하! 혹시…설마, 이런 판국에 또 미행을 하려 하십니까?”
신수근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신수근은 내가 전에 미복잠행을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측근들 중 하나였다.
“이번 사건에 대해 백성들이 품은 생각을 알아보러 가야 하겠다. 조정 여론이 아니라 시중에 퍼진 백성들의 여론을 알고 싶다.”
백성들은 과연 이 사건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역사책에서 본 무오사화는 철저히 왕과 신하들 간의 이야기, 지배계급 간의 충돌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처벌을 받았음에도, 백성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여겼는지는 내가 본 어느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았다.
“금방 들어올 테니 걱정 말라.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라도 되는가? 하면 함께 미행을 나가면 어떻겠는가?”
“아, 아닙니다. 신은 전하께서 환궁하실 때까지 승정원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신수근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마, 같이 나갔다가는 무의식중에 나를 ‘전하’라고 불러서 산통을 깨 놓을까봐 스스로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사실 나도 안 데리고 가는 게 홀가분하고 더 좋다. 솔직히 장 선전관도 두고 나가고 싶다.
– 9 –
“백성들은 여전히 활기차구나. 궁중에서 피보라가 몰아칠 판이건 말건.”
해가 저물어 가건만, 상점이 늘어선 종로 거리에는 아직도 북적였다. 사람들은 물건 가격을 확인하고 흥정에 몰두하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사초나 실록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사는 데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저 나라님이 나라를 잘 다스려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장 선전관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하긴 그렇겠다 싶었다. 조선 백성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다. 그러니 조정 내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흥밋거리 이상으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겠는가.
“오늘은 일단 동대문으로 가자.”
놈들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영응대군 부인이 중과 사통했다는 벽서가 동대문에 붙어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은 또 다른 벽서가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지시를 받은 장 선전관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궁 바깥이니만큼 호칭은 조절했다.
“예, 나리.”
“오늘은 아무 것도 없군.”
실망스럽게도 동대문과 그 주변 성벽은 깨끗하게 텅 비어 있었다. 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일일이 감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성문이나 성벽 근처에서 보따리를 만지면서 꾸물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육모방방이와 창을 들이대어 밀어냈다.
“포도청에서 벽서를 엄히 단속하라는 명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마침 장 선전관이 얼굴을 아는 포도청 군관이 하나 있었다. 내가 아쉬워하는 기색을 본 장 선전관이 내게 양해를 구하고 그 군관에게 가서 사정을 듣고 돌아왔다.
“이곳 군관들은 궁궐 안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평소 대충 뜯고 내버려뒀던 벽서들 때문에 사달이 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벽서를 아예 붙이지 못하게 하라고 평소와 달리 군사들을 닦달하는 모양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던 나로서는 아무래도 안타까운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이 이 사초 사건에 관심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내 처분이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아쉬운 대로 지나가는 이들에게라도 한번 물어봐야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물어볼 만한 이가 눈에 띄지 않았다. 장사에 바쁜 상인들이 낯선 서생의 질문에 잘 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장을 보러 나온 백성들이 내 질문에 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장 선전관 말대로라면 애초에 관심이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어이, 모주 한 잔 주시게.”
“선비님도 그런 술을 자시오?”
“어쩌다 마셔보니 맛이 괜찮더구먼. 값도 싸고.”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적당히 낡은 옷을 입고 나온 덕에 뒷길에 있는 술청에 들어가도 그리 티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차마 북적거리는 카운터(?) 자리에 끼어들 엄두는 나지 않아서, 마침 비어 있는 평상에 자리를 잡고 주인을 불렀다.
“약주도 있습니다만? 약주를 드시지요?”
“그냥 모주로 주게. 오늘은 모주가 당겨. 안주는 자네가 적당히 주고. 참, 저화 받지?”
잠시 후 약주를 걸러내고 난 찌꺼기술 두 사발과 소금에 절인 무 한 접시가 소반에 담겨 나왔다. 저화 두 되를 술값으로 내자 장 선전관이 우거지상을 지었다.
“나리, 어찌 이 값에 이런 술을 드십니까. 궁…아니, 댁으로 돌아가시면 좋은 술을 얼마든지 거저 드실 수 있는데….”
“이것도 괜찮네. 그리고 집에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 술은 절대 거저가 아닐세. 백성들이 바친 피와 땀이지.”
궁궐에서 내가 먹는 술과 고기, 그게 다 공납으로 바쳐진 물품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공납 폐지 방침을 철회해야 하지 않을까 갈등했다. 과연 공납을 없애도 내가 먹고 싶을 때 그런 좋은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모주 잔을 입에 대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막걸리보다 텁텁한 모주지만, 일단 마셔보니 먹을 만은 했다. 한 모금 들이켠 다음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걸 상대를 찾아보았다. 마침 중년 사내 한 사람이 옆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행색을 보니 보통 백성인 듯,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날이 덥구려. 한 잔 하시겠소?”
슬쩍 말을 건네자 상대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양반으로 보이긴 하는지, 말은 조심해서 하는 티가 났다.
“선비께서는 누구…신데 내게 술을 산다 하시는 겝니까?”
“별 거 아니오. 여기 내 일행과 함께 마시려고 두 잔을 받았는데 이 사람이 마시고 싶지 않다 하는구려. 주인이 술값을 물러줄 리는 없고, 혼자 다 마시기에는 많아서 말이오.”
“허허, 횡재를 했군요.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상대는 사발을 들어 죽 들이켰다. 그리고 상쾌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커~이 맛에 여기 들르지!”
“이 집에 자주 들르시오?”
“장사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늘 여기서 한 잔 하고 갑니다.”
사내가 무슨 장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슬쩍 내가 알고 싶은 바를 떠 보았다.
“요즘 도성에서는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났다던데, 혹시 알고 계시오?”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별 관심은 없지만.”
“왜 일어난 옥사라 하오? 난 양주에 사는데, 도성에서 옥사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무슨 영문인가 싶어서 들어왔소. 그런데 물어볼 사람이 있어야지.”
말해놓고 보니 핑계가 너무 어설펐다. 그리 멀지도 않은 양주에 살면서 도성에 이런 소문을 물어볼 지인이 한 사람 없단 말인가? 다행히도 상대는 모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런 어색한 변명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다만 의금부에 나졸로 있는 제 동생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조정에 있는 어떤 양반이 임금님께 아주 불경스러운 글을 썼다가 걸렸답디다. 그래서 그 양반은 의금부에서 치도곤을 당하고 있고, 그 글을 쓰라고 시킨 사람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더군요.”
“도성 사람들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고 있겠지요. 지금 상감마마가 보위에 오르신 지도 벌써 4년짼데, 젊지만 그동안 원성 한 번 사신 적이 없어요. 군기시 근처 사람들은 좀 시끄러워하지만. 그토록 자애로우신 상감께서 그 양반들을 잡아넣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일어섰다.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웠소. 이거, 집에 들어가면서 애들 엿이라도 사다주시구려.”
소매 춤에 넣어 온 한 되짜리 저화를 꺼내 사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깜짝 놀란 사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장 선전관에게 손짓을 했다.
“돌아가세. 갈 길이 머네그려.”
“예, 나리.”
운종가를 걸어 경복궁을 향하며 생각했다. 그래, 역시 백성들은 지금 벌어지는 사태에 큰 관심이 없다. 내가 연루된 사림들을 어떻게 처벌하건 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한편으로는 나를 자애로운 임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연히 안 죽여도 되는 사람들을 줄줄이 죽여서 그 기대를 깨트려서는 안 되겠지.
그래. 너무 잔혹하게 피를 보지는 말도록 하자.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