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50
2부 028화
– 6 –
“그대가 석호랑의 증손자인가.”
“그러합니다. 석탈왜라 합니다.”
관복을 입은 청년이 내 앞에 정중히 엎드려서 고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역원 풍경은 76년 전이나 지금이나 딱히 바뀐 게 없었다.
“조선에 온 지 10년이 되었다고?”
“예, 부친의 손을 잡고 따라왔사옵니다. 그것이 저희 가문의 전통이옵니다.”
그래서 4대째 와 있단 말이렷다. 참, 그게 벌써 76년, 아니 77년 전 일이구나.
“네가 온 아이누 땅은 이 조선에서 볼 때는 동북쪽이라, 옛 역사에서 역시 동북쪽에서 왔다 기록한 이를 따서 석씨 성을 내리려 한다. 이름은 네 본명이 이리를 뜻하니 지킬 호(護)자에 이리 랑(狼)자를 붙여 ‘석호랑’이라 하면 좋겠다. 네 본명과도 흡사하니 부르기 좋을 듯하다.”
다시 눈을 뜬 뒤에 들으니, 석호랑은 사역원에서 아이누 말을 가르치고 훈련원에서 무예와 병법을 익힌 다음 에조치로 돌아갔다고 했다. 이후 자기 부족을 규합해서 군사를 일으킨 뒤에 왜인들을 공격했는데, 서너 차례는 이겼지만 그 뒤에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고 했다.
다만 죽기 전에 고향에서 혼인을 해서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 아들도 부친의 뜻에 따라서 조선에 와서 교육을 받았다. 그 뒤 에조치로 돌아가서는 부친과 달리 당장 일본인들과 싸우는 길보다는 일단 고향 근처 아이누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시도했다고 했다.
물론 그 길도 쉽지는 않았다. 원래 흩어져 살던 각 부족은 딱히 서로 뭉쳐야겠다는 의식이 없었고,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방해공작에 나섰다. 결국 오랜 헛수고 끝에 석호랑의 아들도 일본인들에게 걸려 암살당했다.
그 아들, 즉 석탈왜의 부친은 선대의 잇따른 실패를 보고 당장 일본인들과 충돌하기보다는 아직 일본인들이 손을 뻗지 않은 북쪽 지방 주민들과 연대하기를 택했다. 지금도 에조치 북방 아이누 마을들을 돌면서 단결을 호소하는 중이라고 했다.
“신의 가친도 어릴 적 교역선을 타고 조선에 왔습니다. 신에게도 어린 시절 견문을 넓혀야 한다 해서 도성으로 보냈습니다.”
10년을 익혔으니 조선말이 이렇게 유창하겠지. 듣자하니 석탈왜도 소속은 일단 사역원이되, 수시로 훈련원에 출석해서 무예나 군학을 익히고 있다고 했다.
“그대는 장차 에조치에 있는 그대의 동족들을 어찌 이끌고자 하는가?”
“왜인들이 침탈할 수 없는 아이누의 나라로 만들려 하옵니다. 그 나라는 남을 치지도 않고 남에게 정복당하지도 않는,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이옵니다.”
꿈도 크시군. 지금 일본이 굳이 홋카이도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해도, 훗날 러시아가 오면 아이누 독립 따위는 시궁창에 처박힐 텐데.
내가 과연 그때 또 살아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러시아인들의 침략 따위는 일단 제해 놓고 생략하자. 아이누가 홋카이도에서 맞서 준다면 일본에 맞설 우리 동맹이 되면서 북태평양으로 나가는 관문이 되어줄 수도 있으니까.
더구나 석탈왜가 서슴없이 자기를 ‘신(臣)’이라고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자가 에조치를 다스리는 왕이 되겠다고 나설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아이누 단결을 이끌어낸 유력자 정도로만 자리를 잡아도 내게는 엄청난 이득이다.
“그날이 조속히 오기를 기다리겠다. 부디 심신을 닦아 매진하기를 바라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7 –
아이누를 쓸 만한 동맹으로 만들려면 일단 무기를 쥐어주어야 한다, 단결이 이뤄지지 않아 대군을 편성하고 싸우기는 힘들다고 치고, 자기들 방식대로 사냥꾼처럼 싸울 수 있도록 돕는 정도로 만족하려도 무기는 제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무기건 뭐건 보내려면 상당한 돈이 든다. 문제는 아이누 지원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한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에조치 무역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동안 에조치에 보내는 배가 너무 적었다. 겨우 3년에 한 척이라니, 너무 적지 않으냐? 올해는 여섯 척을 보내도록 하라.”
“전하, 비용이 많이 든다 하여 줄이신 것을 갑자기 늘리시면 준비가 어렵습니다.”
“배야 늘 있는 것이고, 선인(船人)들도 충분히 있지 않으냐? 작년 수확이 괜찮았으니 배에 실을 곡식도 넉넉할 터, 아무 말 말고 보내도록 하라. 지금 야인들이 난을 일으킨 와중이라 하나, 이 정도는 별개로 처리할 수 있다.”
그동안 기록을 보고 경성군이 에조치에 보내는 배를 3년에 1척으로 줄여버린 것을 알았다. 분명히 내가 이 길을 개척할 때 매년 5,6척을 보냈는데? 그래서 일단 연산군 시절만큼 보내라 명을 내린 뒤 왜 줄였는지 알아보니 대략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일본인들과의 충돌이었다. 내가 보냈던 첫 번째 교역에서 이미 전조가 있었지만, 황이 때는 백 단위 인원이 서로 충돌하는, 사실상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우리 선단은 완전히 패해서 배 세 척을 그대로 잃은 데다 인원은 2백 명 가까이 잃었다.
“이때 패한 이유가 뭐였는가?”
“왜인들이 해안가 숲속에 숨어 있다가 불화살을 날렸습니다.”
기습에는 용빼는 재주가 없다. 아이누 마을로 들어가는 수로를 따라 포구로 들어가던 도중 난데없이 불화살 세례를 받았다니, 우리 인원들이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대처했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겠지.
그 다음해에 갚아주기는 했다. 유담년이 직접 지휘한 보복선단이 작정하고 선창에 교역상품 대신 무기와 화약만 만재하고 건너갔다. 이 선단은 에조치 해안을 따라 움직이면서 일본인이 눈에 띄는 대로 공격했다. 배는 가라앉히고 교역소는 불태웠으며 사람은 죽이거나 붙잡았다.
노획품도 제법 있었고, 포로로 잡은 왜인 3백여 명은 연해주로 끌고 와서 관노비로 부렸다. 하지만 비용 문제 때문에 매년 이 정도로 중무장한 선단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나마 우위를 갖고 있던 개인화력도 강선조총이 봉인되고 일본에 조총이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사라졌다.
지금은 에조치에서의 군사력은 일본 쪽이 우세했다. 우리는 일단 연해주가 본진이 아니고, 함경도에서부터 먼 길을 움직여야 한다. 구두쇠 경성군이 여기 돈을 퍼부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본진이랄 수 있는 도호쿠까지 좁은 쓰가루 해협이 있을 뿐이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일본인들이 당연한 홈 어드밴티지를 누리는 걸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험한 바닷길이었다.
“그동안 돌아오지 못한 배가 세 척에 한 척 꼴이라고?”
“에조치로 가는 바다가 워낙 험하여 오가는 길에 파선하거나 사라지는 배가 허다했습니다.”
동해 북부를 지나 에조치로 가는 바닷길이 의외로 험했다. 선단이 흩어져 실종되거나 배가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사례가 잦았다. 겨울에도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에 다녔다는 옛날 발해 사신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어찌 보면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번에 다녀온 선단은 손해가 3백 석 가량 됩니다.”
“무슨 손실이 그리 크냐?”
“싣고 온 물품은 나쁘지 않은 값에 처분했으나, 파선한 배 두 척 값에다가 돌아오지 못한 선인들 가족에게 구제미를 후하게 지급하다 보니 손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올해 내가 반대를 무릅쓰고 내보낸 선단에서 배 한 척이 실종되고 한 척은 난파했다. 타고 있던 선원들은 절반 이상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나마 짧은 경로를 택해서 연해주까지 육지를 따라가고 거기서 직선으로 바다를 건넜는데도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한 번만 나면 손해가 막대하니, 굳이 통상을 확대할 유인이 없다. 미귀환자 가족에게 주는 보상금을 줄여서 이윤을 확보하자니 그렇지 않아도 다들 꺼려하는 항해에 나설 사람이 더 줄어든다. ‘무종께서’ 정하신 보상금 액수를 감히 줄일 수도 없다.
노다지라도 건질 것 같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다. 에조치에서 내놓는 주요 상품인 어포, 모피 따위는 모두 연해주와 부여주에서 얼마든지 ‘안전하게’ 구할 수 있다. 에조치에서만 나는 특산품은 오직 해달 모피 하나뿐인데, 그거 하나 얻자고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는 거다.
이 ‘남는 게 없는’ 상황 때문에 내 후계자들 중 누구도 에조치 통상을 크게 늘리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일본과의 충돌은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솔직히 내가 에조치 진출을 추진한 데도 정치적 이유가 컸다. 해달 모피가 욕심이 좀 나긴 했지만, 그보다는 향후에 일본을 북쪽에서 견제해줄 동맹세력을 얻고 싶었으니까. 이 목적은 아직 완수되진 않았지만, 일단 어느 정도 진전은 보고 있다.
문제는 아이누를 키워서 장차 일본에 맞설 동맹으로 삼겠다는 내 구상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박원종하고만 의논했었는데, 아무 기록도 없는 걸 보면 이 자식이 자기 주머니 채우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정책이니까 그냥 묻어버린 모양이다. 망할 놈 같으니!
그래도 황이 때까지는 척수가 줄기는 했어도 어떻게든 매년 한 번은 배가 갔다. 그게 환이 때는 한 해 거르는 게 일상이 되더니, 경성군은 아예 3년에 한 번, 한 척만 보내라고 명령을 내려 교류를 줄여버렸다. 그 구두쇠 본성에 아예 없애버리라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전하, 북방의 척박한 섬에 사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심은 신들도 알겠사옵니다. 허나, 풍랑 한 번에 목숨이 오가는 선인들도 생각해 주시옵소서.”
“알겠다. 그만 물러들 가라.”
지금 에조치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는 분명 적다. 장차 이민을 보내 개척한다거나 광산자원을 개발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다 한참 뒤에나 가능한 일들이다. 지금 당장은 부여주, 연해주 개발만 해도 우리한테는 벅차다.
“역시 동부전선…에는 여진기병이나 드랍해야 하나.”
주변을 모두 물린 뒤 지도를 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에조치를 왕복하는 선단에서 사용하는 지도다. 내가 옛날에 대충 그려줬던 지도가, 실측을 거쳐 업그레이드된 조선시대 양식이다.
“가다가 좀 죽는다고 쳐도…육지에 도착만 하면….”
수군은 사실상 이제부터 ‘재건’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부여주에 대대적인 사민을 하자면 옮긴 이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식량과 가축, 종자 등등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자면 막대한 돈이 들 텐데, 과연 몇 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아이누 연합군을 제대로 조직할 수 있을까.
도호쿠 지방 다이묘들이 한국에서는 별로 인지도가 없다. 하지만 그들도 몇 만 단위 병력은 동원할 수 있다. 에조치 방어는 모를까, 혼슈 본토로 진격한다고 하면 지금 아이누들 수준을 가지고는 절대 불가능하다.
지금 상황에서 동부전선을 연다면…역시 선단을 에조치로 보내고, 연안을 따라 쓰가루 해협 앞까지 전진하게 한 다음 바로 바다를 건너 병력을 내려놓게 하는 게 좋겠다. 여진 기병 수천 기 정도는 투입할 수 있겠지.
우리 힘을 더 보이고 싶다면 여진군은 에조치 서해안에 그냥 내려놓고, 수송선단은 연안을 따라 항해시키되 여진 기병들은 육지로 이동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아이누 안내인을 붙여서 쓰가루 해협 앞에서 합류하도록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멀미도 해소하고 덤으로 에조치 내에 있는 일본인들 거점을 모조리 박살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아이누들이 더더욱 우리 힘에 감탄하여 함께하겠다고 몰려들겠지.
여진 기병들을 드랍할 때 생기는 한 가지 문제점은…일단 풀어놓고 나면 연락도 안 되고, 귀환시킬 방법도 없다는 거다. 규슈는 그나마 안내인을 확실하게 붙여줬지만 도호쿠는 그것도 어렵다. 동고로 이후 사역원에서 그쪽 사투리도 가르친 덕분에 통역은 붙여 줄 수 있지만.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도호쿠에 드랍할 여진 기병들은 사실상 자살특공대나 마찬가지다. 그 사정도 모르고 신나서 달려갈 그놈들한테는 미안하다만, 어쩔 수 없겠다. 전쟁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녀석들은 꼭 데려와 줄 테니, 부디 살아서 버티기 바란다.
“그만한 대가를 치를 만한 작전이거든.”
이미 말했듯, 일본 동부지방 다이묘들은 수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임진왜란에는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동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가 참전하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도 이 이동거리 문제였다고 알고 있다. 물론 이거 말고도 이유가 여럿 있었지만, 갓 전봉된 새 영지 에도가 너무 먼 데다 미개척지여서 개간할 필요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다.
이에야스를 비롯한 동일본 영주들이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한 건 아니다. 이들이 거느린 군대는 일본 내에서 중요 시설을 경비하고 이동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우리 야인 별기들이 혼슈 동북부를 휩쓸고 다닌다면, 과연 그 임무가 수행이 될까?
그것만 해도 연해주에서 에조치로 가는 항로와 그 길에 숙련된 선원집단을 유지할 가치는 된다고 생각한다. 위험을 겪어야 하는 선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에조치 도항은 계속해야겠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 바다에서 경험을 쌓으면 보다 북쪽으로 가는 항해도 쉽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임진왜란 끝내고 나면,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우리 영역을 넓힐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