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55
2부 033화
– 1 –
“정말 화려한 성이군.”
말 위에서 올려다본 아즈치 성(安土城)은 높은 석축 위에 희게 칠한 벽과 검은 기와, 광택 있는 금칠을 한 누각과 붉은 기둥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게. 우리 조선에서 쌓은 성과는 전혀 다르네. 왜국에 와서 본 다른 성들과도 다르고.”
말을 탄 이순신은 유성룡이 탄 가마 옆에 서서 눈앞에 높이 솟은 직전신장의 거성(居城)을 바라보았다. 산 위에 우뚝 솟은 성은 성 주인이 가진 화려한 취향과 거만한 성품을 보여주는 듯했다. 정사 김조영은 역시 가마를 타고 저만치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중이다.
“어떻습니까. 우리 노부나가님의 성이. 조선 성과는 다르지요?”
화려하게 차리고 일행을 안내하던 젊은 무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쪽은 이렇게 크고 화려한 성을 세울 재력이 있다고 과시하는 듯했다. 유성룡이 짐짓 점잖게 맞받아쳤다.
“고니시 공. 말씀대로 우리 조선에서는 저런 성이 없소. 우리는 저렇게 높은 성을 쌓기보다 크고 넓은 성을 쌓아서 가능한 많은 백성들을 지키려고 하니까.”
유성룡과 이순신 두 사람 모두 일본인들이 어떤 생각으로 성을 짓는가 하는 정도는 알았다. 일본에서는 성이 요새 역할을 하는 수도 있지만 그저 영주의 저택으로 기능하는 경우도 많다. 인근 지역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성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임시조치일 뿐이다.
“그야, 일본에서는 농민들은 공격 대상이 아니니까요. 전투란 양측 군대와 군대가 격돌하는 승부일 뿐, 농민들은 일부러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이상 해를 입지 않습니다.”
“본관이 듣던 바와는 다르군요. 왜국에서도 승리한 군대가 패한 편에 속한 성읍과 촌락을 덮쳐 재물을 약탈하는 일은 상례라고 들었는데요.”
“그야…승자의 권리지요. 패했어도 레이센, 사례금만 내면 약탈을 피할 수 있습니다.”
유성룡의 날카로운 반격에 고니시가 쩔쩔맸다. 사실 공연한 소리를 했다가 뒷덜미만 잡히고 말았다. 일본에서도 전장 주변에 사는 농민들은 어디로든 피난하는 게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적이 벌이는 약탈을 피하기 위해서다.
영주 입장에서도 백성들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영민들이 적에게 잡혀가면 노동력이 줄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고, 자기가 가난해진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가능한 주민들을 성에 들인다. 주민들은 가까이에 성이 없으면 절이나 신사로 피하기도 하고 산에 숨기도 한다.
고니시가 언급한 레이센은 사례금이라기보다는 상대 영주 밑에 들어갈 테니 약탈을 면하게 해달라는 보호비 성격이 크다. 다만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쉽게 선택하기는 힘들었다.
“하나 물읍시다. 고니시 공은 오다 공에게 직접 속한 신하이시오?”
일행끼리는 직전신장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고니시가 정중하게 질문에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본래 하시바 님 밑에 속한 사람입니다만, 이번에 특별히 뽑혀서 귀공들을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하시바라, 들은 것 같은 이름인데…혹시 작년에 반도에게서 오다 공을 구한 그 장수요?”
고니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역심을 품은 아케치 미츠히데를 쳐부수고 주군 오다공을 구출하신 주역이지요. 뽐내 말하기는 조금 겸연쩍지만 본인도 그 일에는 공이 좀 있습니다.”
고니시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씩 웃었다. 자기가 세운 공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유성룡과 이순신은 그가 반란 진압에서 전공 깨나 세웠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노부나가 님께서는 그 일 이후 하시바 님을 크게 신임하고 계십니다. 하시바 님이 신하의 본분을 어기지 않고 충성을 다하시니 그만한 대가를 받아 총신이 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대가 말하는 것을 들으니 꼭 우리 선비들이 말하는 것 같소.”
“저도 동래에서 학문을 배웠으니까요.”
고니시가 천천히 말을 몰며 답했다.
“저는 본래 상인 가문 출신입니다. 조선과 교역을 하는 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서 잠시 동래에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한 6년 정도 있었는데, 그동안 조선 스승께 학문을 배웠지요.”
과거 대마도를 빼앗은 뒤, 조선에서는 동래에 있던 왜관도 대마도로 철수하게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직접 바다를 건너다가 해난사고가 여러 번 일어나자 도로 일인들이 동래까지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상태다. 다만 대마도에서 검색을 받은 뒤에야 갈 수 있다.
동래에서는 밤에만 왜관으로 돌아온다면 낮에는 왜관 밖도 비교적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하려고만 하면 고니시가 했다는 것처럼 조선인 스승을 두고 학문을 배울 수도 있다. 가르쳐줄 스승을 만나기가 어려울 뿐이다.
“용케 스승을 구하셨구려. 외인(外人)인데 말이오.”
“그분이 이인(異人)이셨지요. 무릉도 출신이라 하시던데, 출신이 어떻건 가리지 않고 제자로 받아 가르치셨습니다. 저 말고도 일본인 제자가 몇 있었습니다.”
무릉도는 무종 때 선비들을 유배한 이래 독특한 풍토를 가진 섬이 되어 있다. 강원 감사가 관리는 하지만, 일단 수령이 주재하지 않는다. 세금도 없고 부역도 없다. 단지 도적으로부터 섬을 방어하는 일을 주민들 스스로 수행하며, 매년 물개가죽 백 장을 공물로 바칠 뿐이다.
섬에 사는 이들은 무종 때 유배된 이들의 후예로, 면세나 면역은 이들만 누릴 수 있었다. 혜택을 노리고 섬에 이주하려 하는 자들이 잡히면 부여주로 전가사변을 당했다. 공부를 하러 입도하는 자들은 관찰사에게 허가를 받고 들어갈 수 있으나 숫자가 제한되었다.
자연히 무릉도에서 바깥 세상에 나오는 자도 거의 없다. 그런데 그 흔치 않은 이 중 하나가 동래에 있어 이 고니시란 자를 가르쳤다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신하란 어떤 상황에서건 주군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가장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 누구건 신과 부모와 주군에게는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반기를 들다니,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일이지요.”
유성룡이 듣기로 왜인들은 오랜 내란이 극에 달하면서 부하가 주군을 치는 패륜적인 행동을 숱하게 저지르고 있다고 했다. 그 한 가운데 있는 인물이 마치 조선 선비 같은 이야기를 하자 어색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문을 열어라!”
대화를 나누는 사이 거대한 성문 앞에 도착했다. 신호가 울리자 성문이 천천히 좌우로 열려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며 고니시가 두 사람을 향해 설명했다.
“아까 전갈을 받으니, 노부나가 님께서는 잠시 성 밖에 매사냥을 즐기러 나가셨다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막 도착하여 피로하실 터이니, 오늘 하루는 쉬고 계심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소. 정사께는 내가 말씀드리리다.”
잠시 성에 들어갔다가 나온 고니시가 사신 일행을 성 아랫마을에 위치한 객사로 안내했다. 객사는 2백 명이 넘는 일행이 모두 충분히 머무를 만큼 큰 절이었다. 절이지만 승려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대신 하인들이 줄을 지어 서서 사신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성룡이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본 고니시가 얼른 선수를 쳤다.
“이곳이 절이라 귀하께 불쾌할 수도 있겠으나, 이만큼 많은 인원을 한 번에 수용할 장소를 찾기 힘들었던 탓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괜찮소이다. 딱히 불쾌할 것도 없소.”
정말이다. 왜인들이 준비한 숙소 따위, 차릴 시간도 없었을 텐데 애초에 제대로 되어 있을 까닭이 없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다.
“쉬고 계십시오.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공이 보여준 성의에 감사하오.”
– 2 –
숙소인 절에는 방이 넉넉하게 있었다. 신분에 따라 적절한 방을 나눠주고도 빈 방이 여럿 남을 정도였다.
“우리가 굳이 같은 방을 쓸 건 없겠네만.”
“같이 쓰면 뭐 또 어떤가.”
정사 김조영이 배정받은 것과 같은 널찍한 방을 혼자 쓰라고 안내받은 유성룡은 이순신과 함께 방을 쓰겠다고 했다. 둘이 같은 방을 쓰겠다고 하자 잠시 당황하던 일본 측 안내인은 곧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웃으면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저자가 갑자기 왜 저리 웃는 걸까?”
“낸들 어찌 알겠는가. 헌데 손님을 불러놓고 사냥을 나가다니, 신장은 예의를 모르는군.”
유성룡이 혀를 찼다. 이들 일행은 구주에서 닷새나 걸려서 배를 타고 경도에 왔다. 사절단 본대를 실은 배를 띄우기 전에 노부나가에게 소식을 알리는 전령선부터 먼저 떠났고, 중도에 사카이에 도착했을 때도 연락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유를 과시하면서 우리를 초조하게 할 셈인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우리는 신장을 억눌러 회유해 보고자 찾아온 처지가 아닌가.”
이순신이 조용히 답했다. 두 사람은 규슈에서 있었던 류조지와의 회견을 떠올렸다.
“여러분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오다 노부나가는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규슈 북부를 지배하는 패자 류조지 다카노부는 조선에서 온 사신 일행에게 차를 대접했다. 그러면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 자기가 아는 바를 설명했다.
“오다 가는 본래 교토 동쪽, 오와리 지방 일부를 지배하는 소영주였습니다. 허나 노부나가 개인의 힘으로 주변 세력을 모두 무찌르고 지금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자기가 오다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들도 모두 패했고, 여럿이 힘을 합쳐도 패했습니다.”
“노부나가가 그만큼 용장이라 그리 승리하였소?”
“노부나가 개인은 일당백의 용사가 아닙니다. 전투에서 패한 적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한 전장에서 이기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노부나가가 이기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사절단 일행은 노부나가가 첫 대승리를 거둔 오케하자마 전투 이래로 쌓아올린 수많은 성과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어쩌다 후퇴할 때는 있어도 최종적으로는 늘 원하는 바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다카노부는 노부나가가 규슈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혼슈에 있는 노부나가가 그다지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귀국 국왕전하께서는 그 자가 일본 전역을 제패하고 조선까지 침략하려 한다고 걱정하시는 모양인데, 설마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일본 천하도 충분히 넓습니다. 더구나 저기 동쪽에는 우에스기, 호죠 등 유력 영주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설마 규슈에 손을 뻗겠습니까.”
다카노부에게 있어서 당면과제는 규슈에서 대립하고 있는 오토모, 시마즈 두 가문과 맺어진 악연이었다. 김조영은 임금이 내린 지시에 따라 다카노부에게 이들 두 가문과 힘을 합쳐 쇼군 요시아키를 받들어 오다에게 대응하라고 제안했으나,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이미 화친을 맺은 오토모 씨와 연맹하는 건 혹시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마즈 놈들은 안 됩니다. 지금도 시마즈는 규슈를 통일하겠다며 공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그들이 이제까지 차지한 땅을 내놓고 남쪽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어떤 말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확실히 알겠더군. 용조사는 절대 도진(島津, 시마즈)과 동맹하지 않을 걸세.”
“내가 듣기에도 그러했네.”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조사는 훗날을 보는 눈이 부족한 듯하네. 서애 자네가 전한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신장 그자는 분명 구주까지 손에 넣으려 할 걸게. 그래야 대국으로 건너갈 수 있으니까.”
이순신은 유성룡이 들려준 밀지 내용을 듣고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었다. 아무리 지난 백년간 벌인 내란 때문에 정예병이 남아돈다지만, 과연 저들이 대국까지 침략하려고 시도할까? 설사 시도한다 한들, 사마귀가 수레 앞에 서서 앞발을 휘두르는 격이 아닐까?
하지만 일본에 직접 건너와서 보니 임금의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의 한 지방인 규슈 땅 일부분만 차지하고 있는 류조지나 오토모 씨만 해도, 만 단위 병력을 가지고 수천 정이나 되는 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다가 거느린 병력은 얼마나 많겠는가.
땅 넓이만 해도 그렇다. 직접 지나온 규슈 북부만 해도 경상도만큼 넓었다. 오다를 만나러 규슈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본 혼슈 해안도 엄청나게 길었다. 목적지인 사카이 항에는 수많은 장삿배가 드나들고, 아까 본 오다의 성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넓은 땅, 풍부한 재물, 정예한 대군. 지금 노부나가는 충분히 다른 나라를 욕심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려고만 한다면 규슈까지 모두 정복한 뒤에 규슈를 발판으로 명나라를 치려고 시도할 수 있으리라 보였다. 임금이 걱정하듯, ‘조선을 거쳐서’ 말이다.
“가능하면 구주에서 막아 세워야 하는데…하지만 용조사는 설마 신장이 여길 건너오겠냐고 여기고 있으니 문제지. 여해, 자네 생각은 어떤가? 역시 용조사를 설득해서 도진씨와 동맹을 맺게 해야 할까?”
“일단 그동안 수십 년을 맺어온 정리가 있으니 가능하면 용조사를 설득해 보아야겠지. 허나 저들이 우리가 하는 말을 끝내 듣지 않으면 용조사씨 대신 도진씨와 새로이 동맹하는 방안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시마즈는 이제까지 조선과 별다른 은원(恩怨)이 없다. 이해관계만 일치한다면 동맹을 맺고서 오다에게 대항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는, 그리 될 경우 용조사씨를 저들에게 던져줘야 한다는 걸세. 그러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우의를 버려야 하니 그것도 참 못할 노릇이지.”
두 사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거한이 천천히 다가왔다. 두 사람의 짐을 실은 말을 끌고 있던 임꺽정이었다. 그 뒤에는 총을 멘 서림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나리, 짐을 모두 들여놓았습니다.”
“수고했다.”
고개를 끄덕여 치하한 두 사람이 방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방 안에서 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