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57
2부 0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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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견실 안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사방 벽에는 창과 칼, 총과 갑옷이 걸려 있고 접견 현장에 배석한 노부나가 측 신하들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풍채를 자랑했다. 일본식 예복을 정갈히 갖춰 입었다고는 하나, 둘러앉은 이들 모두가 문관이 아니라 무장들인 게 분명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안내역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근사근한 태도로 나왔지만 주화사 일행으로서는 다소간 불안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과연 아무 일이 없으리라고 믿을 수 있을까?
“설마 사절을 받아들여놓고 무슨 일을 벌이겠습니까? 중도에 만난 용조사(류조지)씨도, 대우(오토모)씨도 신장이 신의를 지킨다는 점은 확언하였습니다.”
부사 유성룡이 차분하게 달랬다. 하지만 정사 김조영은 이미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허나, 왜인들은 이미 사신을 벤 전례가 있지 않은가? 대국에서 국왕으로 책봉한 원의소는 그래도 믿을 수 있겠지만, 성정이 난폭한 신장을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김조영은 본래 노부나가가 중재 제안을 거절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노부나가는 국왕 요시아키가 가진 권위를 이미 인정하지 않는다. 힘으로는 아예 압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중재 제안 따위를 받아들이는 게 무슨 이익이 된단 말인가?
정말로 노부나가를 만나러 경도까지 가야 할 줄 알았다면 머나먼 경도까지 가야 하는 이번 임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칠십이 다 된 노구로 먼 길을 움직이기는 정말 힘들었다. 더구나 여정의 대부분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과거 원나라 세조가 왜국에 복속하라는 사신을 보냈을 때, 무도한 왜인들은 사신을 베어 세조를 따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했네. 혹시라도 신장이 그때처럼 우리를 베어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표하려들지는 않겠나?”
“허나 대감, 신장이 그런 속임수를 쓸 자라면, 이미 왜국 전체에 악명이 드높았을 겁니다. 또한 그런 짓을 한다면 오직 전하의 분노를 부추길 뿐, 신장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노부나가가 중재를 거부할 생각이라면 조선 사신단의 방문을 거절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자기 영토로 불러들여서까지 처형하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전혀 없다.
“과거 왜인들이 원나라 사신을 처형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그때 저들은 이미 한 번 침공을 당해 독이 올라 있었습니다. 저들도 원나라 사신이 오자마자 대뜸 처형하지는 않았습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몇 년에 걸쳐 사신을 보내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섬에 틀어박혀 살면서 대륙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던 일본인들은 무시로 일관했다. 결국 고려군과 합세한 몽골군의 대규모 1차 침공이 이어졌다. 사신 처형은 그 뒤의 일이었다.
“대감께서는 그만 두려움을 거두시옵소서. 정 어려우시다면 부사와 소관이 신장을 대하는 일을 전담하겠나이다. 대감께서는 첫 회견만 나가시고, 그 다음부터는 칭병하여 누워 계시면 어떻겠습니까? 저들이 염치가 있다면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대감께 어찌 손을 대겠나이까?”
서장관 이순신이 설득에 동참했다. 이에 힘을 얻은 유성룡이 김조영을 차분하게 설득했다.
“서장관이 하는 말이 옳습니다. 그래도 만약 저들이 생각보다 무도하여 흉사를 벌인다면, 분명 일부는 돌려보내어 자신의 위광을 과시하고자 할 것입니다. 저희가 횡액을 당하더라도, 대감께서 무사히 귀환하시면 전하께 고하여 원한을 갚게 하시면 됩니다.”
결국 김조영은 배를 타고 사카이로 출발하는데 동의했다. 물론 노부나가와 정식 회견을 한 뒤에는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겠다는 조건이었지만, 평생 책만 읽은 양순한 선비였던 그로서는 이만한 결심도 정말 큰 노력이 필요했다. 유성룡과 이순신도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헌데 지금 노부나가 앞에 선 김조영은 당당하기만 했다. 속으로 생각하는 바야 어떻든,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정도 연륜은 그도 갖추고 있었다.
“바다 건너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환영한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간 뒤, 조선 측이 화해를 권하는 국서를 전달했다. 아무 말 없이 국서 읽기를 마친 노부나가가 환영하는 말을 건넸다. 일본 측에서 나선 공식적인 통역은 고니시고, 물론 조선 측에서도 별도로 역관을 두었다.
“규슈에서 이미 요시아키를 만났다고 들었다. 그자는 귀국의 제안에 대해 어찌 답했는가?”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에게 경칭을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신인 김조영에게도 하대를 했다. 고니시는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 표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통역했다. 다만 상대를 존대하지 않는 건 김조영도 마찬가지였다.
“귀국 국왕은 그대와의 사이에 쌓인 원한이 깊음을 인정하셨소. 허나 당시 본인의 처지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시며, 화해를 바란다 말하셨소.”
조선의 시각에서 볼 때 일본국왕은 분명 요시아키다. 지금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의 혈족도 아니면서 권력을 잡았으니 그저 권신에 불과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위도 그 관위를 내린 요시아키를 축출한 시점에서 휴지가 된 셈이다. 따라서 존대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에서 관위를 내리는 존재는 이른바 ‘천황’이라는 자가 있는 조정이다. 하지만 지금 조선에서는 막부의 쇼군이 진짜 국왕이고, 천황은 제사장 정도로 간주하고 있다. 쇼군이 이러저러한 관직을 내리라고 명하면 조정에서 받아 수행한다고 여기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유성룡은 출발하기 전에 임금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에서 쇼군과 천황이 갖는 진짜 의미, 그리고 양자가 갖는 서로 다른 역할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이순신에게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 화해를 위해서 요시아키는 어떤 조건을 수행하겠다고 했나?”
노부나가가 무표정한 태도로 물었다. 질문을 받은 김조영이 답했다.
“그대가 교토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본거로 복귀하게만 해준다면, 정식으로 국왕의 지위를 그대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겠다고 하였소. 또한 애초 제거하려던 그대 대신에 본의 아니게 아들인 신충(信忠, 노부타다) 공을 죽게 한 데 대해서도 유감을 표하였소.”
유성룡이 보기에 김조영은 지금 평생 발휘해 본 적이 없는 용기를 내어 노부나가와 맞서고 있었다. 아마 긴장을 풀면 당장이라도 자빠져 혼절해도 무리가 아닐 터였다.
“그것뿐인가?”
“그러하오. 그 외에 별다른 조건은 없었소.”
노부나가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콧방귀를 뀌었다. 접견실을 메운 다른 무장들도 주군의 기색을 살핀 뒤 폭소를 터트렸다. 조선 사신들이 잠시 당황할 정도였다.
“가소롭군. 만약에 요시아키가 차라리 군대를 일으켜 정면으로 내게 덤볐다면 그 조건으로 만족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자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내 부하를 감언이설로 유혹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지. 그래서 나는 후계자인 맏아들을 잃었다.”
노부나가는 거침없이 요시아키를 비난했다.
“애초에 교토에서 추방된 원인도 다른 다이묘들을 사주하여 나를 공격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똑같은 방법으로 전 규슈가 오토모 씨를 포위공격하게 해 놓고 지금은 오토모 씨의 영지에 몸을 숨기고 있다니, 오토모 소린도 참으로 속이 좋구먼.”
과거 노부나가를 포위해서 제압하려다 실패하고 노부나가 군이 교토로 밀고 들어오던 그때, 요시아키는 모리 가문이 지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모리 군은 오지 않았고, 요시아키는 결국 노부나가가 도착하기 전에 교토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모리 테루모토에게 보호를 받게 된 요시아키는 노부나가 편에 선 오토모가 후방을 위협했기 때문에 모리가 움직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응징’하기 위해 또다시 외교 공작을 펼쳐서 노부나가 때처럼 오토모 씨도 고립상태에 빠트렸다.
그 공작의 결과 오토모 소린은 ‘6개국의 흉도(六ヶ?之凶徒)’로 낙인찍혀 주변에 있는 모든 규슈 영주들에게 포위공격을 당했다. 간신히 멸망을 피했을 정도로 심한 곤욕을 치렀으면서도 요시아키를 받아줬으니, 확실히 그 마음씀씀이가 넓기는 한 셈이다.
“그런 비열한 수단으로 내 등을 찌른 주제에, 입을 싹 씻고 화해를 청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차라리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어떤 조치든 감수하겠다고 사나이답게 항복한다면, 나도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련만.”
“하지만 그대는 국왕의 신하가 아니오? 신하로써 어찌 주군에게 항복을 요구한단 말이오?”
“요시아키는 나를 배반한 시점에서 이미 주군이 아니다.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섬긴다.”
노부나가와 김조영 사이에 오간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조급하게 매달리는 자, 여유 있게 뿌리치는 자. 누가 보더라도 어느 편이 우세하게 논의를 이끌어가는지는 명백했다. 오다 측 신하들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든 행여 입을 놀릴 생각은 마라. 조선 사신단은 나 혼자 상대한다.”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오지 않았던 외국 사신이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조선 사신들을 직접 만나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은 부하들 중에도 많았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 열망에 딱 잘라 빗장을 질렀다.
“내일 회담은 조선 사신단이 가지고 온 진의를 파악하는 자리다. 나 혼자 대화하며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겠으니, 너희는 아무도 입을 열지 마라.”
“예, 주군.”
조선인들에게 직접 말을 걸고 대답을 듣는 경험은 누구나 해보고 싶다. 하지만 주군이 직접 내린 명령에는 그에 우선하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둘러앉은 무장들은 노부나가가 조선인들을 몰아치는 모습만 보면서도 충분한 쾌감을 얻었다.
“듣자니 우습군. 귀국 국왕은 그대가 건네는 말 한 마디로 내가 요시아키와 화해하리라고 생각했는가?”
“도리를 따지면 마땅히 그래야 할 거요.”
“그건 그대의 말솜씨에 대한 과대평가인데.”
한 번 더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부나가는 부하들처럼 노골적으로 웃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살짝 일그러뜨려 비웃는 듯한 얼굴을 연출해 보였을 뿐이었다.
“하나 더 묻겠다. 내가 그대가 가지고 온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로서는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거절하면 어찌할 생각이었는가?”
“그대가 거절하면 그뿐, 이대로 바다를 건너 돌아갈 뿐이오.”
단호하게 거절하면 더 이상 중재를 시도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잠시 표정을 굳힌 노부나가가 다시 질문했다.
“그대 다음으로는 요시아키를 응원하는 군대가 온다는 의미인가?”
제3세력이 중재를 제안할 때, 거부당할 경우 무력으로 개입하겠다고 위협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대개는 중재가 실패한다면 자신의 위신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조선군이 바다를 건너올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골치가 아플 터였다. 조선군이 약탈부대로 운용하는 북방인 기병들이 수천 기 단위로 규슈와 주고쿠를 휩쓴다면? 과거 쇼니 씨를 박살냈던 화포들이 동원된다면?
물론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대처할 방안은 이미 생각해 놓았다. 성패 여부까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조선군이 이쪽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인 건 아니니까 말이다. 적절한 대처만 이루어진다면 충분히 상대할 만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싸워볼만 하다는 자신의 판단과는 별개로, 천하통일이 ? 일본에서 천하라고 하면 곧 일본 66주를 의미한다 – 완료될 때까지는 조선군이 아예 건너오지 않는 편이 가장 좋다. 그 뒤에야 뭐 일본 전체의 힘을 동원해서 보다 쉽게 싸울 수 있겠지.
하지만 김조영은 이 질문에 대해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께서는 본관에게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소. 본관은 오직 중재를 하라는 명을 받았을 따름이오.”
이쪽을 방심하게 만들려는 거짓말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늙은 조선인의 얼굴에서 거짓을 찾기는 힘들었다. 정말로 출병 여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흠, 그럼 정말 말로만 나를 설복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어떤 조건도 없이.”
김조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부나가도 말없이 주화사 일행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역시나 조선인들 편에서도 정사 혼자만 앞에 나서서 말할 뿐, 부사와 서장관이라 하는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필시 둘 중 하나이리라. 히데요시가 예측한 대로 부사와 서장관이 진짜 임무를 띠고 있어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맡을 허울뿐인 역할은 정사에게 모두 미루었던가, 아니면 그저 선임자에게 주도권을 내주었거나.
확인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확인할 시간도 충분히 있다.
“그대가 가지고 온 중재 제안은 거절한다. 하지만 당장 돌아갈 필요는 없다. 기왕 아즈치에 찾아왔으니, 한동안 머물다가 돌아가도록 하라.”
“그런….”
김조영이 뭐라고 항의하려는 순간 부사 유성룡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성의는 고맙게 받겠소이다. 우리 전하께서도 귀측과 가능하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십니다.”
확실히 부사에게서는 정사와 다른 낌새가 풍겼다. 눈치를 깨달은 노부나가가 살짝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입술만 약간 일그러뜨렸던 아까와 달리, 확실히 미소라고 할 만한 표정이었다.
“별실로 모셔라. 점심은 간단히 대접하고, 푹 쉬시게 해라. 저녁에 연회를 크게 베풀 테니.”
“부사! 그리 무례한 대우를 받고도 어찌 그리 선뜻 응하는 게요?”
“저들과 지금 전쟁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성룡은 차분하게 김조영을 달랬다.
“대감, 전하께서는 대감께 저들을 화해시키라 하셨습니다. 당장 돌아가 버리면 어찌 저들을 화해시키겠습니까? 그리고 신장은 무례하다기보다 정중하되 우리 진의를 경계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김조영은 당장 귀국하고 싶은 욕심에 더 화를 내는 척하는지도 모르겠다. 유성룡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