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58
2부 0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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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는 실로 성대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노부나가가 벌인 잔치는 일본식 연회를 전에 체험해본 적이 없는 조선 사신들이 어안이 벙벙해지게 만들었다.
번갈아 들어오는 작은 상부터도 익숙하지 않았다. 조선에서라면 이런 자리에선 장식용으로 차리는 커다란 음식상이 하나 놓이고, 실제로 먹는 작은 음식상이 각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여기서는 큰 상이 없고, 여러 가지 음식이 놓인 작은 상도 한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나왔다.
“이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군.”
“그러게 말일세.”
한 상 한 상 음식이 나올 때마다 유성룡 옆자리에 앉은 고니시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구운 생선이나 소금에 절인 채소 정도는 조선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았지만, 얇게 발라낸 날생선이나 두루미 고기로 끓인 국 따위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이 고기 이름이 뭐라 하였소?”
“그것이….”
게다가 고니시가 아무리 조선말에 능숙하다고 해도 일본에서 먹는 여러 생선들을 조선말로 뭐라고 부르는지, 그것까지 다 알 수는 없었다. 결국 유성룡과 이순신은 음식 이름 익히기를 포기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맛을 체험해 보기로 했다.
“정사 대감께서는 영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는 모양이군.”
김조영은 얼굴이 파래진 채 연달아 바뀌는 음식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식은 물론 술도 손을 대지 않았다. 고니시가 무척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선인들은 술을 즐긴다 하여 노부나가 님께서 특별히 좋은 술을 여러 가지 준비하셨는데 정사께서 드시지 않으시니 유감입니다.”
“화려하고 복잡한 잔치에 놀라 넋이 나가신 모양이오. 고니시 공도 조선에서 학문을 배웠다 했으니, 우리 조선 선비들이 어떤 생활을 이상적으로 여기는지 잘 알 게 아니오?”
유성룡이 알기로 김조영은 늘 베옷을 입고, 잡곡밥에 소찬으로만 식사를 하고, 제사지낼 때 마시는 제주 외에는 한 방울도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이 화려한 잔치가 더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알기는 하지요. 단, 손님을 대접하고자 하는 호의에 답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만.”
고니시가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하긴, 객으로서 주인이 베푸는 대접에 적절히 답하는 것도 예의이긴 하다. 그 대접이 노골적으로 자신의 부유함을 과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신장이 매우 큰 부를 누림은 사실인 듯하네.”
유성룡이 이순신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고 귀엣말을 건넸다. 옆에 바짝 붙어 떠나지 않던 고니시가 잠시 자기 주군이라는 키 작고 못생긴 무장 쪽으로 불려간 참이었다. 아마 그자가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자인 모양이다.
“내 보기에도 그러하네. 금박이 들어간 그릇과 상, 젓가락에다가 이 수많은 신기한 요리를 보게. 게다가 악공에 무희까지. 신장이 입은 옷도 아까와 다르고 말이야.”
처음 회견할 때 노부나가가 입은 옷은 일본식 예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보는 요상한 형태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풍성한 소매에, 묘하게 주름이 잡힌 천을 목깃에 두르고 있었다.
“저건 남만인들의 옷입니다.”
어느새 돌아온 고니시가 웃으며 설명했다.
“남만인이라, 조선에서도 약간은 들었소만 어떤 자들이요? 서쪽에서 온다 하던데?”
남만인, 그중에서도 선교사를 데리고 오라는 건 임금이 내린 어명이기도 하다. 이키에서는 류조지에게 부탁하라 하고 류조지에서는 오토모에게 부탁하라 하고 오토모에서는 시간이 없어 제대로 찾아보지도 못하고 왔지만 말이다.
어쩌면 고니시를 통해 선교사를 얻어 임금의 명을 완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유성룡이 일부러 잘 모르는 척 질문하자 고니시가 그런 줄도 모르고 가능한 성의껏 대답했다.
“남만인들은 서쪽이 아니라 남쪽 바다에서 옵니다. 유럽이라 하는 자기들 나라에서 왔다고 하는데, 명나라 너머 머나먼 서쪽 어딘가에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서 여기에 오려면 5만 리나 되는 바닷길을 움직여야 한다고 합니다.”
조선이 남만인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일본에서는 그들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라 주장했다. 조선이 남만인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할 심산으로 꾸민 거짓이었지만 속임수는 오래 가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이키 섬을 통해 남만인들이 일본과 무관한 외국인임이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에서 우려한 바처럼 조선이 남만인들과 통상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남만인들이 일본에 총과 화약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임금이 남만선들은 일체 조선에 들어올 수 없다는 입국 금지령을 내려버린 덕분이다.
덕분에 일본은 갖가지 남만 물품을 조선에 전매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만약에 조선이 남만인들과 직접 교역을 시작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큰 손해가 되겠지만, 아직까지 그럴 기미는 없었다.
“마침 남만 과자가 나왔군요. 자! 맛들 보시지요.”
어느새 상이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백설기 같은 것이 큼지막한 접시 위에 놓여서 나왔다. 단 색깔은 백설기와 달리 노란색에, 갈색 껍질이 붙어 있었다.
“이건 떡이오?”
“예, 일종의…밀가루로 만든 떡입니다. ‘카스텔라’라고 하는 남만 과자인데, 맛이 좋습니다. 한번 드셔보시지요.”
유성룡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이순신이 먼저 입에 한 조각 넣어보았다. 다음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척이나 달고 부드럽군. 어찌 이런 맛이 나는 거요?”
“이 떡은 밀가루에 우유와 설탕과 계란을 넣어서 만듭니다. 맛이 마음에 드신다면 주방에 일러 더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고니시는 시종에게 손짓해서 카스텔라를 더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유리병 마개를 뽑았다.
“이 떡에는 이 술이 어울립니다. 남만에서 온 포도주입니다. 한번 같이 드셔 보시지요.”
“음, 나도 한 잔 주시오.”
그새 자기도 카스텔라 접시를 다 비운 유성룡이 술잔을 내밀었다. 다만 포도주를 맛본 뒤에 지은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이런 시금털털한 걸 술이라고 마신단 말이오? 남만인들은 입맛도 참 고약하구려.”
“그렇습니까? 역시 귀공들께는 독한 술이 더 낫겠군요. 포도주는 내려놓으시고 이 브랜디를 드시지요. 이건 남만인들이 마시는 소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살짝 돌린 유성룡의 눈에 역시 브랜디를 홀짝이며 카스텔라를 먹는 김조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른 음식은 몰라도 이건 그에게도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어, 술 안 마신다더니?!
음식과 술은 그 뒤로도 끊임없이 나왔다. 악공들의 연주와 무희들의 춤도 밤새 이어졌다.
– 6 –
언덕 위로 날아오른 매가 화살처럼 땅 위로 내리꽂혔다. 뭔가 푸드득거리며 뒹구나 싶더니 빽빽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급히 달려간 매몰이꾼이 매가 꽉 잡고 있는 사냥감을 발에서 빼냈다. 큼직한 수꿩이었다.
“매 날리는 솜씨가 훌륭하십니다.”
이순신이 점잖게 찬사를 보냈다. 김조영이라면 모를까, 유성룡이나 자신까지 노부나가에게 하대를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노부나가는 당연히 이쪽을 보고 하대를 했다.
“그대는 매사냥을 할 줄 아느냐?”
“직접 하지는 않고, 야인들이 하는 사냥을 본 바만 있습니다.”
조선에서도 매사냥은 인기가 많다. 하지만 민폐가 심해 딱히 권장되지는 않는다. 이순신은 북방 변경에서 근무할 때 여진족 사냥꾼들이 매를 날리는 모습을 몇 차례 본 게 전부였다.
매몰이꾼이 매를 데리고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순신이 노부나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지난밤 베풀어주신 환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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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는 자정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김조영은 피로한 몸에 남만 소주를 과음한 끝에 완전히 뻗어 고주망태가 되어버렸고, 유성룡과 이순신도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쓰러져 잠들 만큼 깊이 취했다. 그런데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성에서 사자가 달려왔다.
“노부나가 님께서 지금 매사냥을 가려 하십니다. 혹시 사신들께서도 나가실 수 있습니까?”
김조영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어 있고, 설사 깨어 있다고 해도 사냥 따위를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상태인 유성룡과 이순신, 그리고 호위를 위해 데려온 내금위 무사 네 사람에 통사 한 명만이 숙소를 나섰다.
일곱 사람이 숙사를 나서자 이미 사냥 채비를 마친 노부나가가 말을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행하는 인원은 통역인 고니시, 그리고 사냥을 도울 시종 10여 명뿐이었다. 모두 활과 칼로 무장하고 있었고, 개중에는 조총을 가진 자도 세 명 있었다.
시종들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곱슬곱슬한 머리털에 코가 넓적하고, 입술이 두터웠다. 새까만 피부는 마치 잘 닦은 흑단나무처럼 윤이 났다. 키는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크고, 어깨넓이는 다른 시종들 두 명을 합친 만큼 넓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오귀자(烏鬼子)를 보고 말을 잇지 못하는 조선인들을 보자 노부나가가 크게 웃었다.
“이 자는 ‘야스케’라 한다. 본래 남만에서 온 선교사의 노예였으나, 내가 양도받아서 무사로 만들었다. 대면한 소감이 어떠한가?”
“참으로…신기합니다.”
유성룡이 짧게 대답했다. 이렇게 번쩍거리는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역시 세상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검은 피부가 신기한가? 그럼 오늘 저녁에는 피부가 하얀 사람도 만나게 해주어야겠군.”
“하얀 피부라 하셨습니까?”
하얀 피부, 그것은 남만인을 뜻한다. 규슈에서 완수하지 못한 임무를 이곳 교토에서 완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성룡이 은근히 기대감에 불타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부나가가 말머리를 돌리며 가볍게 답했다.
“이곳 교토에도 남만사가 있어서 선교사가 주재하고 있음을 아느냐? 오늘 사냥이 충분히 즐겁다면 내 만나게 해주지. 핫핫핫.”
남만사(南蠻寺)는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 또는 포교당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사원이라고 하면 곧 불교였고, 아예 불교사원을 교회로 개조한 경우도 많아서 남만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마운 말씀이군요. 즐거운 사냥이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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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환대에 이어 오늘은 진기한 매사냥 구경을 했습니다. 참으로 견문은 넓히고 봐야 하는듯합니다.”
이순신에 이어 유성룡도 조심스럽게 노부나가를 칭찬했다. 두 사람이 맡은 임무는 노부나가 진영의 내실을 탐지하고 규슈 진공을 가능한 늦추는 일, 필요하다면 잠시 고개를 숙이고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 독한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몸으로, 고작 그런 아첨을 하려고 굳이 날 따라 나온 건 아닐 텐데. 다른 할 말이 있지 않나?”
노부나가의 시종들은 어느새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전후좌우로 멀어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조선 측 수행원들도 그에 맞춰 조금씩 떨어졌다. 이제 가운데 언덕 위에는 유성룡, 이순신, 통사, 노부나가, 고니시까지 다섯 사람만 남아 있었다.
“그대들을 처음 봤을 때부터 진짜 사절은 정사가 아니라 그대들 두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듣는 이 없는 이 자리에서 너희가 나를 찾아온 진짜 목적을 말해 보아라. 분명 요시아키와 나 사이에 화해를 주선한다는 따위 쓸데없는 사유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일본을 통일할 정도라면 범상한 인재는 아니었다. 유성룡은 잠시 망설였지만 자신들이 노부나가를 찾아 일본에 온 진짜 목적을 밝히기로 했다. 예상보다 좀 빠르긴 하지만, 어차피 한번은 나눠야 할 대화였다. 더구나 상대가 이토록 호젓한 장소까지 마련해주지 않았는가.
“우리 전하께서는 귀공이 왜국을 통일하리라 예상하고 계십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전하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그 뒤에 일어날 일입니다. 귀공이 통일을 완수한 뒤 넘쳐나는 군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침범하지 않을까, 그 점을 심히 걱정하고 계십니다.”
“귀국 임금이 내가 조선을 공격할까 우려하고 있단 말이지.”
노부나가가 웃었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잔뜩 긴장하면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내가 천하를 통일하면 일본 내에서는 더 이상 전쟁이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양성한 수십만에 달하는 병사들과 생산해 놓은 병기는 그대로 있겠지. 그렇다면 그 물건들이 고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하느냐?”
“없애야 하지만,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군사들은 집에 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대를 손에 쥐고 있는 영주들은 스스로 자기 힘을 줄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를 없애자면, 군주가 더 강한 힘으로 짓밟아 뭉개거나 밖으로 내보내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임금이 유성룡에게 강조한 대목이 바로 이거였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는 나도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 못했다. 그대들과 논의를 하면서 해답을 찾아갈 수도 있겠지.”
뜻밖의 답이었다. 유성룡과 이순신이 놀라는 사이 노부나가가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흠, 즐거운 사냥이 되자면 아직 여흥이 부족하다. 야스케! 이리 올라오너라.”
흑인이 조용히 언덕 위로 올라오자 노부나가가 유성룡을 향해 제안했다.
“어떠냐. 그쪽 무사도 힘깨나 쓰는 듯한데 씨름이나 한 판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