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6
1부 026화
– 10 –
도승지 신수근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임사홍의 아들 희재가 김일손, 이목의 무리와 한패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이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극돈을 소인이라 일컬으며 전하께서 고언(苦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연루자 색출이 끝난 줄 알았는데 계속 튀어나오는구나. 그런데? 어?
“이 임희재도 김종직의 제자였는가?!”
“그러합니다.”
이런 젠장, 어떻게 이렇게 줄줄이 나오나? 이거, 김종직 제자들은 불문곡직하고 다 잡아들여야 하는 건가?
“전하, 연루자를 국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허나 종직의 제자라 하여 모두 잡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개중에는 무고한 자들도 있을 터, 분명히 소요가 일어날 것입니다.”
노사신이 피를 토하는 듯이 절실하게 말리던 생각이 났다. 그래, 피 덜 보게 하자고 결심했잖아.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으면, 김종직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잡아들이는 건 역시 안 하는 게 좋겠어.
그나저나 임사홍 아들이 김종직 제자였을 줄이야? 생각도 못 했다. 아버지가 훈구파에 속했으니 당연히 그쪽 세력에 속할 줄 알았는데…이건 우리 세계로 따지자면 TK 아버지를 둔 강남3구 출신 운동권 같은 건가.
내가 연산군으로 각성했을 때, 임사홍은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연산군의 충신이자 채홍사로서의 임사홍만 알던 나로서는 쇼크를 먹고도 남을 일이었다. 당연히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중국어 교사라니.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이것도 다 대간들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성종 때 황사 때문에 흙비가 내린 일이 한번 있었는데, 대간들이 ‘하늘이 노했으니 임금도 술을 금하고 행동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도승지였던 임사홍은 흙비는 그저 자연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다 대간들을 가리켜 ‘나라를 망하게 할 소인배들’이라고 지칭하면서 성종에게 ‘대간들이 하라는 대로 다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니, 여간 간이 큰 행동이 아니다. 대간들이 임사홍이라면 이를 가는 것도 무리가 아닌 셈이다.
그 뒤로 대간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임사홍은 집요한 공격을 당했다. 결국 성종은 임사홍을 사직시킬 수밖에 없었고, 한참 뒤에야 간신히 조정에 돌아왔다. 그 뒤에도 대간들이 집요하게 견제하는 바람에 승문원에서 중국어나 가르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임사홍 같은 인재가 고작 한어 교습이나 하고 있음은 낭비가 아니냐?”
“임사홍은 소인배로서 간교함이 한이 없고 흉험함이 견줄 데가 없습니다. 심지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히기까지 하였으니 마땅히 죽음으로 죄를 치러야 할 것을, 그 아들이 공주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선왕께서 용서하셨습니다. 어찌 이런 자를 품계를 높여주려 하십니까?”
대간들이 뭐라 하건, 내가 보기에 임사홍은 충분히 쓸 만한 인재였다. 유능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연현상을 자연현상이라 하는 합리성과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대간들이 여전히 그를 죽어라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아직도 승문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그 아비 임사홍이 대간들 때문에 벼슬에 나서지 못하는 화를 입었는데, 아들이 그 패거리와 어울리다니 이것도 묘한 노릇이다.”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어쩔 수 없다. 차등을 둘 수 없으니 희재를 잡아 국문하라. 아비인 임사홍은 국문치 말라. 연루되었다는 증거 없이는 불가하다.”
“알겠사옵니다.”
눈앞에는 서류더미가 쌓여 있었다. 이게 다 국문을 받은 신하들에 대한 공초 문서다. 적당히 마무리하고 처벌 조치를 발표하려고 하면 고구마 캐듯 연루자, 또는 동조자들이 추가로 걸려나왔다. 그러면 또 심문이 시작되고 쌓인 서류가 늘어났다.
이 사건을 처리하며 새삼 실감한 건 사림들이 죄다 학맥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까놓고 말하면 이 사건의 본질은 왕실에 대한 뒷담화인데, 당신이라면 뒷담화를 누구와 까겠는가? 대화가 통하는 친구끼리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이제는 끝이 보인다. 그동안 잡혀 온 놈들의 ‘죄상’도 거의 파악되었다. 이제 결정할 순간이다.
“조당(朝堂)에서는 죄인들에게 어떤 벌을 내리면 좋을지 의논하여 올리라! 임희재에게 줄 벌까지 정한 뒤에 올리면 재가하겠다.”
왜 내가 골머리를 앓아 가면서 그 많은 죄인들의 형량까지 결정해야하나? 신하들에게 맡겨 두자. 그러면 적당히 자기들끼리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귀양을 보내자고 결정해서 올리겠지. 그럼 그 제안을 보고 적당히 가감하면 된다. 자, 이제 이거 말고 다른 일도 좀 하자.
– 11 –
“전하,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처벌은 이리 하심이 가할 줄 아옵니다.”
파평 부원군 윤필상이 떨리는 손으로 상주문을 올렸다. 도승지 신수근이 이를 받아 내게 전했다.
“흐음.”
마침내 올라왔구나. ‘사초 게이트’가 처음 드러난 지 보름 만이다. 사건 초기에는 사초의 신성불가침성을 강조하며 나를 막는 이들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아니었다. 워낙 죄상이 명백하고 사건이 중대하다 보니 아무도 혐의자들을 옹호하지 못했다. 대간들도 눈치를 살폈다.
쓱 훑어보니 제안하는 처벌 수위가 예상보다는 좀 더 높았다. 중신들이 논의해서 정하라고 했더니 아무래도 형량을 정하면서 충성경쟁이 벌어진 모양이다. 게다가 사림들이 평소에 워낙 훈구 대신들을 물고 뜯었다 보니, 이들이 보복감정을 개입시킨 바도 있어 보였다.
“워낙 사건이 중대한지라, 엄중한 형벌로 일벌백계를 하여야 하리라고 보았습니다.”
진중한 목소리였다. 윤필상은 이번에 사실상 ‘사초 게이트 특별 조사위원회’ 위원장 격으로 활동했다. 사건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연륜도 있고 경력과 권위가 모두 높은 사람이 필요했다.
유자광은 이 인선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유자광에게 이 역할을 맡길 수는 없었다. 유자광은 평소 인망이 워낙 없기 때문에, 사건 수사에 개입시켜봐야 사적 감정으로 일을 벌인다는 비난만 받을 공산이 크다. 사건을 폭로하고, 범인을 고발하는 검사관 역할이면 충분하다.
이러쿵저러쿵 하는 골치 아픈 수식어들은 다 빼 버리고 중요한 본문만 요약하면 윤필상이 올린 처벌 기안은 이랬다.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 대역죄로 능지처사.
?이목, 허반, 강겸 ? 난언절해(亂言切害)죄로 참형 후 재산 몰수.
?표연말, 정여창, 홍한, 무풍부정 이총 ? 난언을 한 죄로 곤장 1백 대에 3천리 밖에서 봉수군 충원.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 난언을 듣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 1백 대에 3천리 밖에서 봉수군 충원.
?이종준, 최부, 이원, 강백진,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이계맹, 강혼 ? 붕당을 지은 죄로 곤장 80대에 원지로 추방.
?윤효손, 김전 – 파직.
?성중엄 – 곤장 80대에 원지로 추방.
?이의무 ? 곤장 60대에 도역 1년.
“이외에, 유순정은 아직 국문하지 못하였으며 한훈은 도망쳤는데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알겠노라.”
권오복은 김일손이 사초에 조의제문을 넣을 때 함께 상의했으며, 그 자신이 쓴 사초도 김일손의 것과 비슷했다. 권경유도 사초에서 조의제문을 언급하면서 ‘충의가 격렬하여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린다’고 적었다. 이 두 사람은 김일손과 같은 급으로 처벌할 수밖에 없다.
이목은 사초를 정리하는 동료들에게 김일손의 사초를 실록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허반과 강겸은 귀인 권씨의 일로 김일손이 세조를 모욕하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역시 이 세 사람도 극형을 피할 수 없다.
사형 6명, 곤장에 신분 강하 ? 봉수군으로 만든다는 말은 사실상 천민으로 만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니까 ? 8명, 곤장에 추방형 14명. 이 정도면 될까. 그 무서운 가 이 정도면 충분한 걸까. 음? 그런데 이 자들은?
“여봐라. 여기 표연말과 홍한도 중히 처벌하자 하였느냐?”
“그러합니다. 표연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종직의 행장을 지었고, 사초에 쓰기를 ‘소릉을 헌 것은 문종을 많이 저버린 행동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홍한은 사초에 ‘세조께서 화가위국(化家爲國,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다)을 위해 음(陰)으로 무사를 모았다’고 적었습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윤필상이 ‘표연말이 김종직의 행장을 지었으니 국문하게 해달라’고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허락한 생각이 났다. 홍한도 그렇게 묻어서 넘어갔고. 헌데 이 두 사람은 좀 봐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연말과 홍한은 무령군이 조의제문 내용을 읊는 내용을 듣고 김종직은 ‘마땅히 참해야 할 죄를 지었다’ 하였다. 군사부일체라 하였으니 스승에 대한 처벌을 요구함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종직을 벌해야 한다 하였으니, 그 충심을 보아 과인은 이들의 벌을 감할까 한다.”
“허나 이들 역시 사초에 무도한 말들을 적었으니 그 죄가 큽니다. 종직을 벌하자 함은 목숨을 구하려는 구차한 언사였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스스로가 적은 사초 내용에 대해 뭐라고 변명하였느냐? 공초를 보기는 하였으나 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표연말은 꼭 헐지 않아도 되는 소릉을 헐었기에 그리 적었다 하였고, 홍한은 세조께서 한명회를 통해 무사들을 모아 일을 도모하셨는데 그때는 드러내놓고 일을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음으로 모았다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변명은 아니다. 문제는 이걸 인정하면 다른 자들이 무고하다고 주장하는 소리도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거지. 김일손조차도 변명은 했다. 그게 전적으로 제 주관에 따른 내용이라 그렇지.
“알겠다. 도승지! 이 상주문을 받아 읽으라. 조정 대신들이 모두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예, 전하.”
허리를 숙이고 다가온 신수근이 상주문을 펼쳐 들고 큰 목소리로 읽었다. 다 읽기까지 대전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대들은 이 제안에 동의하는가? 이 정도면 충분히 처벌이 되겠는가?”
신하들은 서로 눈치를 보는 듯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넉넉하므로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한 5분 정도 모두가 침묵하는가 싶더니 뜻밖에 유자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이 보기에 강겸과 허반을 같은 죄로 벌하기는 옳지 않아 보이옵니다. 강겸은 일손에게 ‘권씨의 조행(操行, 품행)이 높다 들었다’고 말한 바, 왕실을 기망할 의도로 일손에게 말했다고 보기 난감합니다. 마땅히 벌을 감해 주소서.”
이게 웬일이여? ‘이자들의 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간당들 일체를 뿌리 뽑아 버려야 조정도 깨끗해지고 뒤탈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던 유자광이 사림을 변호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곧바로 노사신도 유자광을 따랐다.
“김종직은 시문으로 군주를 기롱하였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허나 일손 등은 그저종직의 글을 찬양하였을 뿐이니 종직과 같은 죄로 처벌함은 부당하옵니다. 그러니 난언절해의 죄로 벌하고, 가산을 적몰함이 어떻겠습니까?”
노사신은 조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계속 사태를 축소시키려고 노력했다. 연루자를 하나라도 줄이려고 했고 처벌 수위도 가능한 낮추려고 했다. 자칫하면 임금의 분노를 사서 그 스스로가 일당으로 몰려 처벌받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물론 나는 노사신을 김일손과 한패로 몰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도 이번 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바로 그치들이 지난 수년간 노사신을 얼마나 몰아댔는지 생각하면, 그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노사신은 실로 대인배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전하, 신종호와 이육은 이미 사망하였기에 일단 명단에서 뺐사오나, 이들 역시 사초를 적는 데 있어서 일손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도 죄를 주어 다스림이 마땅하다고 보이옵니다.”
하지만 모두가 노사신처럼 사태를 축소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윤필상은 아주 작심한 듯 사망한 사관들까지 거론하며 처벌을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처벌 범위를 더 넓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죽은 자들을 뭘 어쩌라고.
“신종호와 이육은 고신(告身, 직첩)을 박탈하는 정도면 가하겠고, 강겸은 무령군의 말대로 확실히 벌을 감하여 주어야겠다. 좌찬성 이극돈은 이 일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점에서 죄가 있으니, 어찌 조치해야 할지 선성 부원군과 논의하라. 나머지는 법에 따라 처결하면 되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 잊을 뻔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앉았다.
“김일손 등을 처형할 때는 백관이 나가서 보도록 하라! 왕실을 능멸하는 역도가 어떤 최후를 맞는지 똑똑히 눈과 귀에 새길지어다!”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