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63
2부 0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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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이라니, 그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이제까지 왜국과 혼사가 있었던 적이 없거늘!”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졌다. 결혼? 결혼이라고? 유사 이래 우리나라 왕실에서 국제결혼을 한 적이 있긴 있었던가?
가장 가까운 사례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있다. 하지만 이거야 일제의 강요에 따른 강제결혼이었으니 일단 논외. 그 외에는 조선시대에는 분명 단 한 건도 없었다. 명나라 영락제가 양녕대군에게 공주를 주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은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아마 조선에서 국제결혼을 하지 않은 데는 고려 때 있었던 트라우마 탓이 크지 싶다. 고려 원종이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한 뒤, 대대로 원나라 부마가 되어 원나라가 움직이는 꼭두각시 노릇을 한 ‘충(忠)’자 돌림 왕들의 역사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중국 공주와 결혼하면 꼭두각시가 되고, 중국에 공주를 보내면 공녀가 되어서 굴욕이 되고, 반대편에 있는 일본은 국가로서의 격 자체를 낮게 보고 있는데다가 걔들도 조선 왕실과 혼인 따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게 있었으면 포로로 잡은 임해군한테도 여자를 붙였겠지.
그렇다고 딱히 고려 이전에 국제결혼을 한 적도 없었지 싶다. 내가 지금 딱 하나 기억나는 사례라고 하면 고구려 유리왕에게 중국인 왕비가 있었다는 거? 호동왕자가 낙랑공주랑 연애만 했었고…일본에 건너간 백제 왕족들은 아마 분명히 일본 귀족들과 혼인했겠지만.
굳이 비슷한 사례를 찾자면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몇 번쯤 혼인이 이루어진 사례가 있기는 있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는 조선과 일본처럼 아예 이민족인 건 아니었으니까 명백히 경우가 다르다.
아무튼 노부나가가 했다는 혼인 제안은 정말 하늘이 뒤집어질 소식이었다. 이게 조정에서 정식으로 논의되면 정말 벌집을 백 개는 쑤신 듯한 소동이 일어날 게다. 그러자면 일단 혹시 나불거릴지 모르는 입을 확실히 막아두어야지!
“사관! 오늘 일은 절대 입을 놀려서는 아니 된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가 단 한 마디라도 조정이나 시중에 새어나간다면, 네놈이 입을 가벼이 놀린 탓이라고 보고 당장에 저자거리에 끌어내어 거열형에 처하리라!”
“전하, 고정하시오소서.”
지난 1년 동안, 이렇게 폭발한 적이 가끔 있다. 낯빛이 새파래진 사관은 미처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내가 경고삼아 한 마디 더 하려는데 유성룡이 막아섰다.
“사관에게도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자긍심이 있사옵니다. 부디 믿으소서. 절대 입을 가벼이 놀려 전하께 누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알겠다, 믿어보겠다.”
내가 짐짓 화가 가라앉은 척 하며 몸을 뒤로 기대자 사관이 손을 떨면서 다시 붓을 잡았다. 유성룡도 보고를 계속했다.
“세 번째 사냥이자 다섯 번째 회견이었습니다. 마침 날아가는 새를 보고 신장이 활을 들어 쏘았으나 맞지 아니하였고, 이에 순신이 살을 날리자 새가 맞아 떨어졌습니다. 신장이 이를 보고 탄복하여 그대는 실로 명궁수라고 칭찬한 후에….”
오호, 서림은 조총으로 이기고, 임꺽정은 씨름으로 비기고, 이순신은 활로 이겼단 말이지? 그럼 조일 무예대결은 2승 1무…아니, 잠깐.
“말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을 묻겠다. 내금위 무사 임꺽정과 오귀자가 벌인 술대결은 귀추가 어찌 되었느냐?”
“두 거한이 마주앉아 술을 동이 째로 가져다 놓고 대작을 하니 마치 고래가 물을 마시는 듯 하여 끝이 없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오귀자가 뒤로 쓰러져 승패가 났는가 하였는데, 살펴보니 임꺽정은 앉은 채로 코를 골고 있었습니다.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아쉽긴 하지만 무승부도 괜찮다. 적어도 무승부라도 하나쯤 있어야 노부나가가 자존심을 덜 상하겠지. 3전 전패라고 하면 솔직히 기분 좀 나쁠 거 아냐.
“알겠다.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
“예, 전하. 순신의 솜씨를 보고 난 후 신장이 이리 말하였습니다.”
“귀국과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가까운 이웃임에 분명하다. 어느 한 나라가 불안하다면 다른 한편도 평안을 누릴 수 없다.”
“그렇습니다.”
일본이 안정되어 있어야 조선도 평화롭다. 일본에서 정권이 흔들리고 내분이 벌어질 때마다 왜구가 설쳤다. 고려는 왜구 때문에 자칫하면 나라가 망할 뻔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원나라가 고려를 정복하자 고려군은 몽골 원정군의 일익이 되어 바다 건너로 가는 길안내를 맡았다. 그 결과 규슈가 전쟁터가 되고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했다.
“내 생각에, 두 나라 사이가 평안하자면 교류를 통해 유대관계를 늘려야 한다. 그리고 보다 강한 유대관계를 만들자면 피를 섞는 이상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피, 피를 섞는다 하셨습니까?”
유성룡과 이순신, 두 사람 모두 상상도 못한 언급에 기겁했다. 이제까지 노부나가가 던진 여러 발언들은 이미 다 예상했거나, 예상하지 못했더라도 듣고 보면 주장할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피를 섞다니, 그 말은 곧 혼인을 맺자는 이야기가 아닌가! 설마 말 그대로 몸속에 흐르는 피를 뽑아 그릇에서 섞자는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러하다. 그것도 일반 백성이 아니라 가능한 귀한 이의 피를 섞을 필요가 있다. 지배자가 나서서 피를 섞으면 더 좋겠지.”
조선에서 지배자라고 하면 임금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범위를 넓힌다고 해도 그 아들, 형제, 조카들이다. 일본에서는 한 사람이 아니지만, 지금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생각하면 노부나가가 그 지도자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을지는 빤할 것이다.
“내, 귀국으로 하여금 가능한 체면을 세울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노부나가가 팔목에 매를 얹었다. 그리고 저만치 보이는 꿩을 향해 매를 날려 보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조선에 대해서 좀 아는 내 부하들이 말하기를, ‘조선 왕자를 일본으로 보내라, 내 사위로 삼겠다’고 하면 귀국에서는 난리가 날 거라더군. 조선인들에게 왕의 아들을 내놓으라고 하면, 분명 전쟁이 날 거라고.”
“맞는 말씀입니다.”
유성룡의 잔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뜬금없이 왕자를 일본에 보내라 함은 볼모로 삼겠다는 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소리를 그대로 도성에 전한다면 돌아가는 즉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정 대신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지고 돌아온 자신을 벌하라고 청할 건 불을 보듯 분명하다. 노부나가를 설득해서 규슈 침공을 늦춰 보라고 한 임금부터도 그런 요구에는 노발대발할 게 확실하다.
“공주를 이쪽으로 보내라고 해도 마찬가지겠지. 어느 쪽으로 요구해도 그대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힘들 겁니다.”
돌아가서 치를 곤욕도 곤욕이지만, 절대 안 된다고 했다가는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룡 일행은 오늘도 불과 일곱이지만 노부나가가 거느린 부하는 30여 명이나 되었다. 자칫 충돌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전멸이다.
의기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필요하지도 않은 일에 목숨을 거는 건 만용이다. 유성룡은 겨우 이따위 문제를 가지고 일본 땅에서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국혼은 공께서 생각하시듯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난한 논의를 거쳐야 합니다.”
“한나라 고조는 흉노에게 공주를 보냈고, 당나라 태종도 토번에게 문성공주를 보냈다. 귀국 국왕이 한고조나 당태종보다 대단한 인물이라서 혼사를 맺을 수 없다니, 실로 성군이겠군.”
비꼬는 의도가 역력했다. 유성룡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중차대한 일이라 쉽게 결정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노부나가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느새 언덕 밑에서는 방금 날려보낸 매가 꿩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매몰이꾼이 허겁지겁 달려가 매에게서 꿩을 낚아채는 모습이 보였다.
“괜히 변명할 필요 없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크게 선심을 쓰기로 했으니까. 여자는 내 쪽에서 보내도록 하지.”
“예에에?”
“신장이, 자기 딸을 우리에게 보내겠다고 했다고?”
듣고 있던 나도 놀랐다. 말이 좋아서 국혼이지, 지금 조선과 일본 사이를 생각하자면 이건 사실상 볼모를 보내는 일이다. 보내는 쪽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그런데 그걸 보내겠다고? 그것도 자기가 자청해서? 노부나가가 제정신인가?
“아닙니다. 보내고는 싶지만 자기 딸들은 8살짜리까지 모두 이미 시집을 보내 버려서 보낼 딸이 없다며, 남편을 잃고 자기 성에 와서 지내고 있는 여동생의 딸 중에 열다섯 살인 맏이를 보내려 하니 적당한 배필을 찾아 이어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지난번 씨름장에서 눈여겨보지 않았나? 그대가 매우 유심히 보던, 딸 셋을 거느린 여인이 내 여동생 오이치다. 남편이 죽어서 이곳 아즈치에 와 살고 있다.”
유성룡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워낙 예상을 벗어난 일이 연달아 이어졌기 때문이다.
“내 동생이라 대놓고 자랑하기는 좀 쑥스럽다만, 실로 보기 드문 미색이 아닌가? 일본에서 하는 혼사라면 오이치 그 아이를 시집보내도 좋을 정도지. 하지만 귀국에서는 처녀가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는다 하니 실로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쯧쯧, 미개한 것들.”
형편만 닿으면 혼인 상대로 과부보다 처녀를 선호함은 당연한 일인데 왜 미개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므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솔직히 오이치만은 못하지만, 조카들도 어미를 닮아 얼굴 하나는 어디 내놓더라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첫째가 가장 어미를 많이 닮았지. 상대를 정하는 일은 조선 국왕에게 맡기도록 하겠으나, 원한다면 자기 후비(後妃)로 삼아도 상관없다.”
세상에, 진심이란 말인가? 노부나가가 나랑 혼사를 맺을 생각이라고? 만약에 내가 전국시대 덕후에 노부나가 팬이었다면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을 일이다. 하지만 나는 둘 다 아니라서, 기쁘기보다는 당혹감이 앞선다.
아니, 결혼동맹을 제안하는 의도가 도대체 뭐지? 자기가 일본을 지배하기는 해도 조선까지 손을 대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건가? 아니면 자기가 이에야스랑 결혼동맹을 맺고 일본을 함께 제패한 것처럼 나도 자기랑 동맹을 맺고 중국이라도 정복하자는 건가.
“국혼을 하는 더 명확한 이유나, 국혼을 맺은 뒤에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는 혹 있었느냐?”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되면 원의소를 받아주겠다는 이야기는 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노부나가의 조카딸과 혼사를 맺었다고 해서 조선이 침략당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거다. 노부나가는 자기 매제, 즉 지금 아즈치에 있는 오이치의 남편 아자이 나가마사를 쳐서 멸망시켰다. 자기 사위인 이에야스의 장남도 할복시킨 바 있다.
물론 나가마사가 먼저 노부나가를 배반했다거나, 이에야스의 본처가 원수인 이마가와 집안 출신이라서 고부갈등이 심각했다거나 하는 이유는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노부나가가 보기에 합당한 이유만 있으면 혼인동맹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넣는다는 말이 된다.
비록 오이치가 노부나가가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이라고 하지만, 그 여동생의 남편조차 죽인 마당에 조카사위 정도는…잠깐, 결혼할 상대가 누구라고?!
“부사! 그대, 방금 신장이 몇째 조카딸을 시집보내려 한다 하였느냐?”
“첫째이옵니다.”
오이치의 첫째 딸! 그거 요도기미 아닌가! 그 개X년을 조선에 시집을 보내겠다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도요토미를 말아먹은 일등공신이 바로 요도기미인데, 그걸 나한테 보내? 노부나가 이 X같은 XXX가 핵폭탄을 나한테 떠넘기려고? 혹시 내가 빡쳐서 그년의 목을 치면 그 핑계로 조선을 칠 생각인가?
벌떡 일어서서 잠시 혼자 씩씩대며 방안을 걸었다. 유성룡과 이순신이 어찌 할 바 모르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냥 무시하고 혼자서 화를 삭였다. 한참 걷고 나니 좀 진정이 됐다.
그래, 노부나가는 아마 지 조카가 그런 X년인 줄은 모를 거다. 폭탄을 떠넘긴다는 생각도 있을 리가 없고, 사랑하는 조카를 죽여서 침공 명분으로 삼는다는 것도 이상하다. 나도 괜히 흥분하지 말고 조금 더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일단 확실한 한 가지. 노부나가는 우리가 자기 조카를 받아들이면 요시아키를 교토로 다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요시아키를 지원해서 규수에서 자신에게 맞서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의미다.
혼사를 받아들이는 시점에서 이미 이는 확실해진다. 요시아키 진영에 속한 누구와도 결혼을 하지 않던 우리가, 노부나가의 조카딸을 맞아들인다면 어느 편을 일본의 지배자로 인정하는지 오래 따져볼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럼 받아들인다…고 하기는 걸리는 게 너무 많다. 일본인에 대한 국내적인 거부감이 너무 크고, 이미 언급했듯 결혼했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신부가 될 당사자인 요도기미가 너무 비호감이라 도저히 맞아들이고 싶지 않다.
국혼이 아니라 100% 볼모로 데려오는 거라면 한번 생각해 보겠지만, 내 며느리라면 절대로 거절이다. 어디 왕족 찌끄러기라도 하나 찾아서 붙여주면 모를까. 음, 이쪽에서도 개망나니로 유명한 임해군 마누라로 붙여 줄까? 임해군이 13살이니 마침 나이도 맞는데?
“골치가 아픈 일이로구나. 이는 일단 비밀로 하겠다. 장차 신장이 정식 국서를 보내 제안해 오거든 그때 가서 묘당에서 정식으로 논의함이 좋겠다.”
“그리하심이 좋겠나이다.”
유성룡이 고개를 숙였다. 이순신 역시 마찬가지 의견인 모양이다.
그 뒤에 몇 가지 소소한 보고사항을 들으면서 이번 주화사 일행이 일본에 다녀오면서 올린 보고를 끝냈다. 모두 물러가게 한 뒤 붉은 저녁노을을 보고 있으려니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나름 편안하게 보냈던 연산군 시절과 달리 지금은 정말 격동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10년 뒤 이 땅을 휩쓸 전화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다고 눈코 뜰 새 없이 이것저것 하고 있긴 한데, 그 효과는 어떨지 걱정이다.
지금 바다 건너 노부나가는 뭘 하고 있을까? 그놈도 이번 조선 주화사 건에 대한 정리를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