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71
2부 049화
– 15 –
“조선의 궁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아아, 이 말을 한번 해 보고 싶었어! 젠장! 정말로!
세스페데스의 인사에 대한 답사는 예전에 즐기던 게임에서 나오는 대사로 했다. 그 게임을 플레이한 경험이 딱히 국가경영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장면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신하들은 평소 쓰지 않던 어투에 좀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인사말로 치고 넘어가자면 딱히 어색할 것도 없어서인지 별 말은 없었다. 나도 멋쩍어서 바로 평소 말투로 돌아갔다.
“그대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동래부사에게 보고는 받았다. 허나 이곳 조정 신하들 앞에서 다시 한 번 그대 입으로 밝혀 주기 바란다.”
“예, 폐하. 저는 예수회 승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라고 하며, 에스파냐 태생입니다. 6년 전에 일본에 와서 선교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귀국에서도 복음을 전하고픈 마음에 이렇게 바다를 건너 찾아왔습니다.”
처음 인사를 받고 나서는 통역을 두고 대화를 했다. 세스페데스가 구사하는 조선말이, 이미 보았듯이 제법 능숙하긴 해도 아직은 좀 무리가 있었던 탓이다. 일본어에 능한 세스페데스가 일본어로 대답하면 우리 쪽 역관이 다시 조선말로 풀어놓는 식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세스페데스 자신이 조선말을 아예 못 하는 건 아니다 보니, 자신의 의사가 잘못 전달됐다 싶으면 개입해서 내용을 고치곤 했다. 다만 세스페데스 쪽도 나를 폐하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역관을 시켜서 설명해줘야 했다. 이런 기본적인 건 또 안 배워 오다니.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세스페데스가 고개를 숙여 사죄하자 대충 수습이 됐다. 자, 이제 자유토론이 시작될 참이다. 모든 신하들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지위고하는 상관없으니, 남만승(南蠻僧)에게 묻고 싶은 게 있거든 뭐든지 물으라고 말이다.
“어떤 질문이든 좋다. 남만교 교리에 대해서든, 남만승의 신상에 대해서든, 남만국의 풍토에 대해서든 좋으니 뭐든 물어보고 궁금한 바를 해소하도록 해라. 그래야만 저들이 귀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우리 앞에 비칠 것이니라.”
세스페데스에게도 미리 언질은 주게 했다. 조정에 나가면 분명히 수많은 중신들에게 공박을 받게 될 거라고. 남만교에 대해 받게 될 수많은 질문들을 미리 생각해서 답변을 준비하라고 말이다. 이미 일본에서 여러 해를 보냈을 테니, 크게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대의 나라인 서반아는 어디에 있는가?”
영의정 박순이 비교적 점잖게 첫 포문을 열었다. 질문을 받은 세스페데스가 자기 뒤에 있는 상자들 ? 세스페데스를 뒤따르던 내관들이 들고 왔다 ? 중 하나를 열더니 그 안에서 공처럼 생긴 둥근 물건을 꺼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형상으로 나타낸 물건입니다. 제가 온 서반아는 여기 있고, 본래대로라면 이곳 조선이 여기에 들어가야 하나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국에 편지를 낼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지도 제작자를 엄히 꾸짖어 꼭 그려 넣게 하겠습니다.”
지구본이다. 저 물건도 참 오랜만에 보는구나. 내가 관심을 보이자 세스페데스가 두 손으로 받든 지구본을 내게 바쳤다.
“전하께 바칠 선물로 가져온 것입니다. 부디 받아주소서.”
앞으로 나간 내관이 지구본을 들고 와서 내 앞에 받쳐 올렸다. 받아서 찬찬히 들여다봤더니 정말 전형적인, 부정확하고 장식적인 16세기 스타일 지도다. 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어떠냐. 근대과학의 산물이 처음으로 내 손에 들어왔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예로부터 내려오기를,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그 형상이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 하였다. 그대는 무슨 근거로 땅이 이리 둥글다고 주장하는가?”
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세스페데스는 차분하게 답했다.
“조선에서도 월식이 관측되겠지요. 이때 달을 가리는 지구의 그림자는 둥급니다. 북쪽으로 갈수록 정오 때 태양의 높이가 낮아집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배는 돛대부터 보입니다. 이 세 가지 증거만으로도 이 땅이 둥글게 생겼음은 알 수가 있지요.”
말문이 막힌 좌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중 실제로 태양의 높이를 재거나, 가까이 오는 배가 어디부터 보이는지 관찰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3년 전 월식 때 달을 본 사람들은 있었지만, 달 위에 비친 그림자가 무슨 모양이었는지 따위는 기억하지 못했다.
“미심쩍으시거든 이 나라 남쪽 끝과 북쪽 끝에 사람을 보내서 같은 날 정오에 해가 얼마나 높이 있는지 재게 하십시오. 땅이 평평하다면 해의 높이가 같을 것이나, 둥글게 되어 있다면 당연히 각도에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만, 해볼 필요 없다.”
적당히 끼어들었다. 이런 걸로 너무 오래 끌 필요는 없으니까.
“저 남만승의 말대로, 같은 계절이어도 제주도와 부여주에서 본 해는 높이가 각기 다르다. 이는 일찍이 각 지방에서 올린 보고에도 있었으니, 세심히 살폈으면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그런 보고 따위 진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게 뭐냐. 성리학 공부만 해온 샌님들 콧대 좀 꺾으려고 하는 소리지. 자, 이제 1대 0.
“고갯길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사람도 다리부터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느냐. 남만승이 말한 배가 사라지는 이치도 그와 같다. 만약 이 땅이 진실로 평평하다면, 배는 돛대부터 보이는 게 아니라 전체 형상이 조그마하다가 점점 크게 보여야 하리라.”
그냥 지구가 둥글다니 이해를 못하다가 고갯길로 비유하니 다들 좀 납득이 쉬운 모양이다. 그래도 쉽게 인정하기는 싫은지 잠시 침묵하더니 이조판서 이형종이 나섰다.
“그대들 남만교는 불교와 무엇이 다르오? 대국에 와서 선교하는 남만승들은 불승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다닌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불교와 같은 집안이 아니오?”
“아닙니다. 중국에 있는 우리 교우들은 단지 중국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이미 중국에 있는 종교집단인 불승들의 복장을 택했을 뿐, 불교와 공통되는 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애초에 성격이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세스페데스는 천주교가 불교의 아류로 인식되지 않게 하려고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불교는 석가모니라고 하는 한 인간을 섬깁니다. 인간으로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 분명히 훌륭한 업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 절대자인 천주님뿐입니다.”
“그대의 말인즉, 천주를 따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인가?”
“물론 늘 불행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천주를 영접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행복은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주를 알고 그 가르침을 따라가면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을 벗어난, 실로 높은 경지에 해당하는 진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가 저렇게 단순했던가? 예전에 훈련소에서 군종신부한테 들었던 그 짧은 강론도 저것보다는 길고 복잡했던 것 같은데. 아마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가능한 간략하게 줄인 버전이겠지.
“그대들의 신은 어떤 존재인가? 천주는 본래 이름이 아닐 텐데, 뭐라고 부르는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는 단 한 분뿐이므로 굳이 이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독생자가 만인의 죄악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내려와 홀로 죄갚음을 마친 뒤 돌아가셨기에 이를 그리스도라 부르는데, 이는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그래, 엄밀히 말하면 크리스트교, 그리스도교지. 원래 역사에서는 일본에서 천주교라는 명칭을 썼는지 안 썼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조선과 교류가 실제보다 좀 더 많다 보니 유학 개념이 역사보다 일찍 전해져서 천주교라는 명칭이 조기에 나타나 정착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신이 단 하나뿐인 신이라면, 불가나 도가에서 말하는 수많은 신들은 다 뭐란 말인가?”
“그것들은 신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와 같은, 몇몇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은 그 뒤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신격화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신령이니 귀신이니 하는 허깨비들은 거론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거나 사람을 속이는 악령입니다.”
유일신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스페데스가 하는 말이 맞다. 문제는 그 유일신의 기준이지. 나 역시 현대에서부터 그 점에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내가 선뜻 종교에 귀의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내 신앙이 옳다고 단언할 수 있는 기준은 과연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대가 믿는 천주는 어찌하여 신임을 확신할 수 있는가? 그대가 불가나 도가에 대해 주장하듯, 나 역시 그대가 믿는 천주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할 뿐이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은가?”
이형종 역시 나와 같은 의문을 느낀 모양이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형종과 대면하고서도 전혀 당황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세스페데스도 경탄할 만했지만 말이다.
“각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기꺼이 천주께서 왜 절대자이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존재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이야기를 단지 10분 만에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저택으로 찾아뵐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하는 제안에 이형종은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콱 다물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듯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나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길고도 길게 늘어지는 교리 설명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거 원래 세례 전에 몇 달씩 하는 거 아닌가!
“그 문제는 나중에 또 논하도록 하라. 일단 오늘은 남만승이 찾아온 첫날인데, 단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하루 종일 떠들어서야 너무 재미가 없지 않으냐. 여차하면 남만승이 제안했듯, 이판이 사저로 남만승을 불러 이야기를 나눠도 좋다. 윤허하겠다.”
세스페데스야 당연히 쌍수를 들고서 환영하겠지. 고관의 집에 찾아가서 직접 교리를 전파할 기회가 아닌가. 절대 놓칠 리가 없다. 이형종 쪽이 문제로군.
“그대는 지금 천주를 제외한 모든 신은 신이 아니라 꾸며낸 존재거나 악령이라고 하였지.”
예조판서 김민도가 나섰다. 음, 저 영감도 꽤나 까다로운 사람인데 무슨 소리를 하려나.
“그렇다면 우리가 제사를 통해 모시는 조상의 혼령은 무엇인가? 우리는 죽은 조상의 혼을 모시고 그 앞에서 절을 하는데, 이건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속이는 가짜 악귀 앞에서 절을 하며 숭배하는 것인가?”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세스페데스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좌중이 예의주시했다.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리는 그 표정들이 자기한테도 보이는지, 세스페데스가 엷은 웃음을 지었다.
“천주교에서도 죽은 조상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아시아에서 제사를 지내듯이 고인이 죽은 날에 가족들이 모여 그 날을 잊지 않기 위한 미사를 드리고 다함께 기도도 드립니다. 조상을 위해 상을 차리고 그 앞에서 절함은 조상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신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야, 그러고 보니 내 기억이 사실이라면 지금 세스페데스가 하는 이야기들은 마테오 리치, 그 양반이 17세기 초반에 가서야 확립한 원칙들일 텐데? 아직 20년쯤 남았는데 세스페데스가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하지? 원조가 세스페데스인가? 아니면 조선에 오려고 답변을 준비했나?
– 16 –
천주교 교리와 서양인들이 보는 세상에 대한 질문은 점심때까지 이어졌다. 올해 초에 죽은 이이가 살아있었으면 이 자리를 무척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사람 명줄이 거기까지였던 것을.
세스페데스는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넘겼다. 짧게 답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서는 곧바로 대답하고, 좀 오래 걸리겠다 싶은 질문을 받으면 이형종에게 했듯이 ‘나중에 댁을 방문해서 알려드리고 싶다’고 답했다.
사실 하려고만 했으면 내가 먼저 기상천외한 질문을 던져서 세스페데스의 기부터 꺾어 놓고 시작할 수 있었다. 교리, 과학, 역사 등 어느 분야건 세스페데스가 알고 있는 한도를 넘어서서 내 지식을 과시할 수 있는 질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평생 성리학만 공부했던 신하들이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을 만나 쩔쩔매는 광경을 보는 것도 나름 유쾌한 구경이었다. 물론 따지자면 나부터도 그런 이방인이지만, 저들은 내가 그런 존재인 줄 모르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번 부닥쳐보라고 내버려뒀다.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대담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궁궐에서 내준 점심을 먹고 속개되었다. 머리를 식힌 덕인지 이번에는 좀 실제적인 질문이 나왔다. 공조판서 최현식이 한 질문인 것을 보면 직책에 따라 질문의 성격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이런 질문에도 세스페데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 외에는 문학, 철학, 수학, 건축에 약간 조예가 있습니다. 혹시 제가 여러분들께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역법이나 대포 제작 같은 좀 더 유용한 재주는 없는가? 대국에 와 있는 남만승들 중에는 그런 쓸모 있는 재주를 익힌 자들도 많다던데.”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런 기술까지는 익히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필요로 하시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데려올 수는 있습니다.”
으음, 하긴 예수회 수사들이 아무리 다재다능하다고 해도 모두가 만능일 수는 없겠지. 각자 특기가 있고 한계도 있을 거다. 하긴 뭐 나도 세스페데스가 직접 우리한테 뭘 가르쳐주기를 바란 건 아니니까. 유럽과 우리 사이에 첫 연결통로라는 데 의미가 있지.
자, 그럼 이제 좀 골치 아픈 주제로 넘어가 볼까.
“병판.”
“예, 전하.”
내가 부르자 이제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병조판서 박홍선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세스페데스에게 날이 선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남만교를 퍼뜨림으로서 이 땅을 남만왕, 그중에서도 특히 그대 나라인 서반아 왕이 다스리는 영토로 편입하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