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72
2부 050화
예수회가 특정 국가나 군주를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안다. 예수회는 오직 신의 대리인인 로마 교황 단 한 사람에게 충성하며, 가톨릭 교세를 전 세계로 퍼뜨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선교사 개인의 출신국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심지어 남미에서는 스페인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을 조직해서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이 가진 땅을 빼앗으려는 스페인 식민주의자들과 무력으로 맞서 싸우기까지 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역사가 있다 보니 해방신학도 예수회와 관련이 깊다지 아마.
내가 이런 사실까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병조판서를 내세워서 질문을 던진 건 나 외에 다른 신하들에게 확실한 판단 근거를 주기 위해서다. 내 지시에 무작정 따르게 시키기보다는, 질문과 답변을 통해 저들 스스로가 확신을 얻는 편이 훨씬 오래가고 든든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오직 주님의 영토가 넓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세스페데스는 내가 예상한 대로 답했다. 과연 신하들이 믿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저희는 세속에서의 군주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움직일 뿐입니다.”
여기서 세스페데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미처 나도 예상하지 못한 드립을 쳤다.
“조선도 과거 중국으로부터 유학과 도교,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중국이 조선을 지배하게 되지는 않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확실히 중국이 종교를 내세워 한반도를 침략한 적은 없다. 중국 내에서야 종교 문제 때문에 분쟁이 생긴 사례가 허다하게 있지만 말이다. 다만 그거야 도교건 불교건 간에 결국은 중국을 지배하는 주류 사상이 되지 못했던 탓이 크긴 하지. 유교는 솔직히 종교가 아니고.
“국왕과 황제들이 서로 싸우는 이유는 결국 돈과 권력 때문입니다. 유럽이건 아시아건 그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돈도 권력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직 다른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할 뿐입니다.”
“돈을 탐하지 않는다 하나, 그대들은 왜국에서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는 유성룡이 나섰다. 자신이 직접 일본에서 보고들은 내용에다 더해서 나와 사전에 미리 논의해서 정한 질문이다.
“본관이 살피기로, 천주교 사제들은 여전히 왜국에 총과 화약을 팔고 있었다. 이는 왜국을 무장시켜 조선을 치게 할 셈은 아닌가? 또한 그 대가로 금은은 물론이고 인신(人身)을 받아서 노예로 거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백성도 노예로 내다팔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는가?”
대전 안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물론 조선에서도 노비를 거래한다. 하지만 그 거래는 어디까지나 조선 내에서 이루어지며, 외국에 팔지는 않는다. 자국민을 해외에 팔다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하! 저…!”
분노에 찬 고함이 하나 터졌지만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무슨 내용일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손을 들어 바로 멈추게 했다. 일단, 지금은 세스페데스에게 답변할 기회를 주어야 했으니까.
“사실은 사실이므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일본에서 일부 상거래를 하고 있고, 총과 화약을 팔고 노예를 매입한 것도 사실입니다.”
세스페데스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낌새를 짐작컨대, 유성룡이 바로 얼마 전에 일본을 다녀간 조선 사신임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 의도가 자신을 몰아내는 게 아니라 지원하려는 의도임도 알았을 것이다.
“여러분께서도 제가 하늘을 날아 아시아까지 선교하러 오지 않았다는 점은 짐작하시겠지요. 저희는 치부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교를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며, 후원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희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마련해야 하지요.”
“그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무기와 화약, 인신을 거래하는가?”
“일본에서 가장 원하는 상품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참 내전을 벌이고 있는 일본에서는 저희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들 중 총과 화약을 가장 원합니다. 하지만 무기를 충분히 구입할 만큼 금과 은을 가지지 못한 영주들은 사람으로 그 값을 치릅니다.”
특히 규슈 쪽이 그렇지. 규슈에는 금광도, 은광도 없으니까.
“멀쩡한 사람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게 그대들이 자랑하는 천주의 역할인가?”
“그들은 일본에서도 영주의 노예였고 그들을 판 장본인도 영주입니다. 타의로 일본을 떠나 이국으로 갔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일본을 떠남이 꼭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새로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으니 속세를 초월한 행복을 얻은 것입니다.”
나름 준비한 답이겠지만 종교에 의미를 두지 않는 성리학자들한테는 혹세무민의 증거로밖에 안 보이겠군. 뭐라고 포장을 하건, 멀쩡한 사람한테 천국 가게 해주겠다고 꼬드겨서 노비들을 꼬여낸다는 소리가 되니까. 영주가 팔았다지만 그 영주를 신자로 만든 건 선교사들 아닌가.
“만약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이 조선에 머무르게 된다면 내게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이 나라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겠다고 천주의 이름으로 서약할 수 있겠느냐?”
뭔가 분위기가 격해지려는 참에 내가 끼어들었다. 욕을 할 셈이었는지 입을 벌리던 신하들 몇이 벌리려던 입을 당장에 다물었다.
“서약합니다. 그것은 전하께서 가지신 당연한 권리입니다.”
세스페데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서약했다. 하긴, 예수회라는 조직이 애초에 상업단체도 아닌 이상 노예 거래 따위에 집착할 이유가 없으리라. 실제로도 일본 외에 다른 곳에서는 그 사업에 손을 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제게 하실 질문은 더 없으십니까?”
대전을 채운 신하들은 조심스레 눈짓을 주고받았다. 사실 웬만한 질문은 오전에 다 나왔다. 가장 민감할 질문도 이제 막 해치웠다. 내가 남만인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은 눈치가 빤할 터, 이 상황에서 더 물고 늘어지기는 곤란할 터였다.
오늘 오간 이야기만으로도 신하들이 뭔가 느끼기는 충분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 조선과 서양 사이의 본격적인 첫 공식 만남은 여기서 끝내보기로 할까. 내가 그만 다들 물러가라고 하려는 참에 세스페데스가 끼어들었다.
“전하, 황송하오나 제가 가져온 선물을 정부관리 모두가 보는 가운데 바치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구본 이외에도 다른 물건들이 좀 더 있습니다.”
“음, 좋다. 열어보라.”
‘남만인’이 말 그대로 야만인들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줄 기회겠지. 내 허락을 받자 고개를 숙여 답례한 세스페데스는 자기 뒤쪽에 쌓여 있는 상자들을 직접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대전 안을 채우고 있던 눈길이 일시에 그리 쏠렸다.
“전하께선 금은보화보다는 새롭고 놀라운 지식을 추구함을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든 천문도와 세계지도, 설정한 시간이 되면 스스로 울리는 시계, 위치를 재는 사분의, 유럽에서 출간한 지리서와 의학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오오, 그중 시계가 무척 고맙구나. 시간을 정확히 잴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이게 몇 년 만에 보는 제대로 된 시계냐. 하루에 몇 분 정도는 오차가 날지도 모르겠다만, 시계 꼴을 갖춘 물건을 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이것도 반갑다.
내가 시계를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자 신하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무리도 아니다. 조선에서는 그동안 이런 시계가 없이도 잘 살았으니까. 나도 연산군 때 이미 익숙해져서 딱히 티를 내지 않았고. 하지만 막상 시계를 눈앞에 두고 보니 기분이 정말 달라졌다.
서양식으로 제본된 책도 반가웠다. 내 앞에 쌓인 책들을 보자 손을 내밀어 펼치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장애물이 있었다.
“그대에게 묻노라. 이 책들은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겠지?”
“그, 그렇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세스페데스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빛이 스쳤다. 시계 정도야 소문을 들었을 거라고 여겼겠지만, 책을 쓴 말이 남만어나 서반아어냐고 묻지 않고 바로 라틴어라고 지칭한 부분에서 놀란 모양이다. 먹혔구나?
“나머지 진상품은 무엇이냐?”
분위기는 계속 이어야지. 내 질문을 받은 세스페데스도 곧 평정을 회복했다.
“이쪽은 가벼운 물건들이옵니다. 여기에 특별히 단맛이 나는 포도주와 잘 숙성된 화주(火酒)가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보통 포도주는 즐기지 않으신다고 해서 따로 준비했습니다. 이 잔에 따라 드시면 어떨까 합니다. 금이나 은은 아니지만, 나름 좋은 물건입니다.”
화주는 브랜디 같은 독한 증류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긴 그러고 보니 브랜디는 영어로군. 세스페데스가 가져온 건 혹시 코냑일까?
이번에 상자에서 나온 물건은 유리잔이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번쩍이면서 발하는 휘황한 광채가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이를 본 내 신하들 입에서도 경탄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차분히 물어보았다.
“실로 아름답구나. 베네치아에서 만든 제품이냐? 아니면 보헤미아에서 가공한 유리인가?”
세스페데스의 눈이 또 한 번 흔들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태연했다.
“베네치아 제품입니다. 가능한 고급품으로 드리고자 해서 준비했습니다.”
역시 베네치안 글라스인가. 고급 유리제품이라고 하면 역시 유럽에서는 베네치아 산 유리가 최고다. 지금부터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걸 만들 수 없겠지. 수백 년에 걸친 노하우 없이는 엄두를 낼 수가 없으니까.
중국에서 만드는 유리제품도 수준이 높지만, 실생활에도 쓸 수 있는 이런 병이나 식기 같은 것보다는 말 그대로 공예품이나 장식품이 대부분이었다. 관심 분야가 아예 다르다고나 할까.
“훌륭하구나. 고맙게 받겠다. 거기 마지막 상자는 무엇인가?”
다른 상자는 다 열고 내용물을 꺼냈다. 그런데 A4지 박스 정도 크기 상자 하나가 개봉되지 않고 놓여 있었다. 세스페데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밀가루로 만든 떡입니다. 마음에 들어 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엥? 밀가루떡?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려는 순간 세스페데스에게 상자를 받아온 내관이 뚜껑을 열었다. 순간 달콤한 향기가 그대로 내 코를 자극했다. 이게 뭐야, 카스텔라?!
“지난번, 일본에 오셨던 사신 일행이 모두 이 카스텔라를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아직 맛을 보지 못하셨을 것이기에, 한 상자 마련해왔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전하의 궁전 요리인들에게 만드는 법을 전수하고 싶습니다만.”
…체류허가 승인. 이거, ‘소프트 외교’ 1차전은 일단 우리가 확실히 졌다고 해야겠는 걸.
– 17 –
첫 만남이다. 서쪽 하늘이 뉘엿뉘엿할 때까지 이야기가 오고갔으면 충분하다. 다음 기회를 위해 자리를 파했지만 판서 이상은 모두 남겨 향원정에 오르게 했다. 세조 때 만든 향원지에 인종 때 세운 정자다.
“그대들 모두 남만승과 좀 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눔도 좋을 듯하다. 나 역시 그러하다.”
4월, 밤공기는 아직 약간 선선하지만 그게 춥지 않을 만큼은 다들 챙겨 입었다. 각자 앞에 식사가 놓인 상이 놓였고, 내관들이 분주하게 그 사이를 오가면서 방금 전 세스페데스가 바친 포도주와 화주를 잔에 따랐다. 솔직히 아깝지만, 욕심을 부리면 보스 노릇을 못 하는 법이다.
신하들은 서양 술이 마음에 드는지 연달아 홀짝거리며 잔을 비웠다. 나도 두 가지 술 모두 한잔씩 마셔보았다. 카스테라도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돌면서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깜짝 놀란 영의정 박순이 내게 물었다.
“전하…?”
“아? 커, 커험. 생각보다 이 술이 독하구먼.”
깜짝 놀라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젠장, 현대에서 마시던 술을 마시고 카스텔라 먹으니 현대가 생각나네. 상희라도 있었으면 이럴 때 같이 추억담을 나눌 텐데, 도대체 어디 있을까. 현대로 돌아갔을까?
가끔은 중전에게 다 고백해버리고 싶은 충동도 든다. 중전은 분명히 내가 ‘진짜’ 경성군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연산군 때 신씨는 내가 무슨 이상한 언행을 해도 일언반구 따지고 들지 않았었는데, 지금 중전은 가끔이긴 해도 곤란한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만약 고백한다고 하면…그야말로 중전에게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행동이 될 테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잊어버렸나, 괜히 딴청을 피우나, 장난인가? 하고 넘어갈 텐데, 괜히 고백하면 말 그대로 미친놈이 되어버린다.
어쩔 수 없지. 정 속이 터질 때면 무릉에 가서 죽은 신씨한테나 고민을 털어놓는 수밖에.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환대에 실로 감사드립니다.”
궐내에서 잔치가 파하면 내가 특별하게 더 놀라고 지시하지 않는 한 다른 이들도 일어선다. 신하들은 그 자리에서 내관들에게 안내를 받아 궁을 나가는 게 연산군 때부터 내가 정착시켜놓은 관습이다. 그래야 궁인들이 뒷정리하기 편하지.
오늘은 예외를 두는 날이었다. 다른 신하들은 부어라, 마셔라 하도록 놓아두고 세스페데스 하나만 따로 데리고 향원정으로 가는 다리를 걸었다. 물론 일본어 역관은 달고 갔다. 그래야 좀 원활한 소통이 될 테니까.
“별 것 아니로다. 그대는 손님이 아닌가. 손님을 대접함은 마땅한 도리다.”
둘이서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자리가 여기 정도 아닐까. 적당히 트여 있어서 주변에서 덜 걱정하고, 그러면서 엿들을 수 있는 사람도 최소화되고.
“그대들이 오기를 무척이나 기다렸도다. 조선에는 그대들이 해줄 일이 참으로 많다.”
독한 코냑 때문인지 취기가 돌았다. 흥이 오른 김에 대충 두 컵은 마신 것 같다.
“주님께서 지금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셨기에 길을 열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답군. 피식 웃으면서 다리 난간에 살짝 몸을 기댔다. 저쪽에 서있던 내관이 기겁을 하며 달려오려 했지만 손을 저어 올 필요 없다는 뜻을 전했다.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다…내 그대가 아픔을 느낄 이야기를 하나 하겠네. 그대들은 루터, 칼뱅의 무리들에게 위기를 느껴 유럽 밖으로 나왔지. 어떤가. 바다를 건너와서 찾아낸 새로운 양떼들이 그대들을 잘 따르리라 생각하는가?”
역관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내 말을 전했다. 루터와 칼뱅이라는 예상도 못한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오자 세스페데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즐거워졌다.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대들의 아르마다를…아니, 이건 아직 입 밖에 꺼내도 되는 이야기가 아니로군. 게다가 그대는 펠리페 2세의 신하도 아니니까 말이지.”
“그…그렇습니다. 저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세스페데스가 더듬거렸다. 확실히 당황한 태도가 엿보였다.
“아까 주연 자리에서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을 통해서 유럽에 대해 배웠다고 하셨습니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책에서 루터와 칼뱅에 대해 읽으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세스페데스가 당황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종교개혁을 이끈 저 두 사람은 이들에게 적이다. 가능한 ‘깨끗한’ 이들을 오염시키지 않았어야 할 루터와 칼뱅이 이미 동양에 알려져 있다니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리라.
“잊어버렸다. 내, 읽은 책이 하도 여러 권이라 그중 어느 책에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을 보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런 책은 어차피 존재하지 않으니까 뭐라고 둘러대도 상관없겠지만, 술기운 탓인지 이름을 지어내기도 귀찮았다. 아, 그러고 보니 세스페데스가 저렇게 당황한 표정을 지은 이유가 그거 하나가 아니겠네?
“뭐냐. 그대는 내가 마르틴 루터와 쟝 칼뱅의 이름을 중국식이나 일본식으로 발음하지 않고 원래 말하는 법 그대로 말함이 놀라워서 그러는 것이냐?”
“그, 그러하옵니다.”
뭐라고 설명해줄까. 잘난 척 좀 할까?
“우리 조선 국문은 중국 문자나 일본 문자보다 다양한 음을 적을 수 있어서 다른 나라 말을 표기하기에 좀 더 유리하다. 내가 유럽인 인명을 잘 말할 수 있는 건 그 탓이다.”
“그렇…습니까?”
세스페데스의 의구심은 내 대답으로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은 듯했다. 하긴 아무리 표기법이 우수해도 내 발음이 너무 자연스러웠겠지. 아아, 그동안 굳은 혀 푸느라 혼자 이불 덮어쓰고 얼마나 연습을 했던가.
“장차 우리 조선이 그대들과 더 깊게 통교를 나누게 된다면 말이지만…그때가 오면 로마에 있는 교황 뿐 아니라 그대의 모국,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는 물론 그 형제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랑스 국왕, 잉글랜드 여왕에게도 서한을 보내 우정을 나누고 싶다. 가능하겠는가?”
“무, 물론 가능합니다.”
세스페데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왠지 내 기분은 더 좋아졌다.
“잉글랜드 여왕은 그 부왕이 새 교회를 세워 스스로 그 수장에 오른 뒤로 그대들과 사이가 좋지 않지. 그러고 보니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 중 어느 쪽이 권좌에 앉을지 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고, 게르만은 불안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고…이거, 유럽에선 편한 나라가 없군.”
지금은 1584년. 유럽은 종교개혁의 후폭풍으로 한참 떠들썩할 거다. 나야 본래 미래인이니 그 사정을 알지만, 세스페데스 자신도 아마 그 사정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걸.
“그대가 꿈꾸는 건 과거에 있었던 사도 베드로 때처럼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되는 미래겠지. 그러면 우르바누스 2세가 그랬듯이, 이슬람을 향한 십자군을 조직할 수 있으니까. 포르투갈이 그 꿈을 비교적 오래 간직했지?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성전을 벌이려는 나라는 없습니다. 슬프게도.”
세스페데스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아제 대화 분위기는 완전히 내 주도하에 있고, 역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기계적인 통역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단일교회는 끝났어. 세 싸움이 있을 뿐…아, 기 꺾는 이야기만 했으니 그대가 조금은 기분이 좋아질 이야기를 해 볼까.”
세스페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때는 동방에도 큰 교회가 있었지. 수백 년 전, 왕들 중에도 신자가 있었고 큰 도시에는 교회가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렸네. 하지만 이슬람의 발호로 유럽으로 가는 길이 끊기고 잇달아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무너지고 신자들은 흩어졌다네.”
거짓말이 아니다. 당나라 때 실크로드를 통해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가 중국에 전해졌다. 한때 융성했던 이들은 국가의 탄압과 전쟁으로 모두 쇠해 사라졌다. 유목민들 중 일부가 계속 믿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다 사라지고 없을 거다.
“그 역사를 일부나마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나밖에 없지. 역사책을 뒤지면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장 입 밖에 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믿든 말든, 그건 그대가 택할 몫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세스페데스가 잠시 멍해 있었다. 왠지 웃음이 나서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조선말을 빨리 익히도록 하라. 그 왜인에게 배운 어설픈 조선말 말고, 진짜 조선말을 익히면 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예, 전하.”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어제 밤을 새다시피 한데다, 독한 술이 들어간 후유증인 모양이다. 그만 자고 싶어졌다. 세스페데스에게 그만 동평관으로 돌아가라고 한 뒤 침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정말 푹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