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73
2부 051화
– 1 –
“전하께서 요즘 남만승을 너무 가까이 하시는 것 같소.”
“누가 그걸 모르겠소.”
임금은 요즘 수시로 남만승을 궁에 불러들였다. 도무지 사람같이 안 생긴 귀신이 대엿새에 한 번 정도는 꼬박꼬박 궁에 들어오니, 신하들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거슬렸다.
“저 허여멀건 한 피부에 노란 머리, 저게 어디 사람의 형상이요? 역귀(疫鬼)의 형상이지! 저 큰 코는 또 어떻소? 도무지 흉하기 이를 데가 없소!”
지나가는 세스페데스를 향해 날아드는 수군거림은 끝이 없었다. 물론 세스페데스는 자신을 향한 비방과 악담을 태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악의를 품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에 대응하면 사태가 더 나빠질 뿐이니, 모두 시원스레 무시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사역원에서 우리말을 배우긴 한다던데, 제대로 안 배우나 보지? 우리가 이렇게 크게 하는 말도 못 알아듣잖소? 흥!”
비웃던 관원이 궁궐 문을 향해 멀어져가는 세스페데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옆에 서있던 동패가 맞장구를 쳤다.
“그 이야기는 들었소? 저 자가 지금 수염을 저리 길렀지만, 실은 환자(宦子)라 하오!”
“아니, 그럼 저 수염이 가짜란 말이오?”
“그럼 뭐겠소. 마치 중놈처럼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하니, 환자가 분명하오.”
“그러고 보니 그렇구려. 일전에 동평관에 드는 왜인들은 시비(侍婢)에게 손을 대려는 경우가 드물잖게 있었는데 저자는 한 번도 없었으니. 어허, 고자 남만귀라.”
두 사람이 뭐라고 더 쑥덕거리려는 참에 뒤에서 근엄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들은 무엇을 하는가? 어서 갈 길을 가도록 하라!”
세스페데스를 흉보던 젊은 관원 두 사람은 찔끔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급히 줄행랑을 쳤다. 병조판서 박홍선이 그 뒤를 보면서 혀를 찼다.
“확실치도 않은 이야기를 들어 남의 험담을 하다니, 몹쓸 일이오. 더구나 불승들도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데, 저자도 교는 달라도 승려가 아니오? 이판 대감, 보아하니 저들은 이조에 속한 관리들인 모양이니 나중에 주의를 좀 주시구려.”
“비웃을만한 일로 비웃는데 누가 감히 나서서 제지할 수 있겠소? 본관은 남만승이 주상께 바짝 달라붙어 교언을 흘려 넣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소.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조판서 이형종은 딱딱한 얼굴로 내뱉었다. 주변에서 누가 듣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도, 박홍선이 임금의 명이라면 철석같이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지켜야 할 공맹의 옛 도가 있는 이상, 어쩌다 남만인을 들여보냈다 해도 친견하셨으면 곧 돌려보내야 할 일이오. 그것을 사소한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치게 한다는 핑계로 궁궐 깊숙한 곳에 자리한 소주방에까지 드나들게 하다니 말이 되오?”
세스페데스는 카스텔라 만드는 법을 전수한다는 핑계로 궁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상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동평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친과 고관들의 집까지 저자가 벌써 몇 차례나 드나들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필시 놈이 도성에 남만교를 퍼뜨리는 꼴을 보게 될 게요! 어쩌면 저놈이 이미 주상께 술수를 부렸는지도 모르오. 그날 향원정에서 전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하지 않았소?”
“그야 역관 놈이 잘못 전했다 하지 않으셨소.”
남만승이 처음 궁에 들어온 날, 임금이 남만승을 데리고 나가 잠시 독대를 했다. 갑작스런 자리라 미처 사관도 배석하지 못했는데, 홀로 그 옆에 있던 역관이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상감의 입에서 혀가 꼬일 듯한 남만인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그날 밤에 임금과 남만인이 나눈 대화에 대한 소문은 곧바로 퍼졌다. 다음날 조회가 열리자 대신들은 손발을 떨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임금에게 따져 물었다.
“전하! 전하께서 남만귀에게 홀리신 것입니까? 도무지 흉내도 내기 힘든, 이상한 남만인의 이름을 수월하게 말하시며, 신들이 어떤 책에서도 본 바 없는 이야기들을 남만승에게 줄줄이 늘어놓으셨다고 들었사옵니다. 부디 그 연유를 밝혀 주소서!”
“경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과인은 지난밤 낯선 남만주를 다소 과음하였기에, 자리에서 일찍 물러나와 침전으로 갔을 뿐이니라! 그대들이야말로 남만승이 진상한 남만주와 과자를 그대들끼리 과용한 뒤 취하여 헛것을 보고 들은 게 아니냐?”
실제로 세스페데스가 진상한 포도주와 화주, 카스텔라는 대신들이 다 먹어버린 게 사실이라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임금은 이들을 보며 혀를 찼다.
“남만인이 기껏 귀한 과자를 바쳤건만, 그대들이 다 먹어버렸으니 나는 겨우 맛밖에 보지를 못하였다. 다시 만들게 해서 맛을 보아야겠으니, 동평관에 명을 내려 남만승으로 하여금 궁에 들게 하여, 소주방 숙수들에게 남만병(南蠻餠) 만드는 법을 가르치게 하라!”
일이 이렇게 되니, 중신들이 항의하고 나선 일 때문에 남만승이 당당하게 궁궐에 드나들 수 있게 해준 셈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불똥은 여기까지만 튀고 그친 게 아니었다.
“내 남만승과 함께 향원정 밖으로 나선 기억은 난다만, 주고받은 화제는 남만 정세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느니라. 술기운으로 내 혀가 꼬였을 수는 있다만, 이를 기화로 해서 헛소문을 내다니 어찌 용서하겠느냐? 당장 역관 일가를 붙잡아 연해주로 전가사변을 시킬지어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임금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가 없다. 임금이 말하기를 역관이 잘못 들었다고 하면 역관이 잘못 들은 것이다. 졸지에 역관 일가족만 날벼락을 맞았다.
그날 이후로 세스페데스는 당당히 궁궐을 드나들었다. 이형종과 같이 남만인의 존재 자체를 마땅찮게 생각하는 이들은 몸서리를 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과자라는 것도 계란과 우유와 설탕을 엄청나게 넣어 만든다지 않소! 열성조께서도 그런 사치스러운 음식은 만들지 않으셨소. 아, 이 늙은 몸이 너무 오래 살아 못 볼 꼴을 보는구나!”
“그만하시오, 이판! 여기는 궁중이오!”
박홍선이 급히 이형종을 끌고 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전각 모퉁이로 사라지자 닫혀 있던 전각 문이 열리고, 나인 한 사람이 살그머니 나왔다. 나인은 조심스럽게 두 판서가 나간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2 –
『…벌써 조선의 수도, 한양에 도착한지 한 달이 되어 갑니다. 6월이지만, 이곳 달력으로는 이제 5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이곳 달력은 일본에서 쓰는 달력과 거의 같습니다.
저는 그동안 조선 국왕과 다섯 번 만났습니다. 첫날 공식 회견 이후 네 번 더 만났습니다. 처음 만날 때 자리를 함께 했던 통역관은 어쩐 영문인지 나타나지 않고, 다른 통역관이 나와 저와 임금 사이에서 통역을 합니다.
지난번에 드린 편지에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곳 한성은 바로 옆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서 무척이나 아름답고 수려한 풍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시가지가 강가에 접하진 않습니다. 조선인들 말로는 여름에 홍수가 지기 때문에 일부러 도시를 강과 떨어트려놓았다고 합니다.
한강이라 하는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나갑니다. 장차 이 나라가 경계심을 풀고서 우리와 정식으로 교류하게 된다면, 배를 타고 이 강으로 들어와 직접 한성에 다다를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강은 충분히 배가 지날 만큼 넓은 강입니다.
우리 지도에는 조선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저 바다만 그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국왕이 조선 지도를 보여주었는데, 조선이 마치 이탈리아처럼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북쪽은 타타르와 연결되며, 다른 세 방향은 바다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섬 몇 개가 있습니다.
수도인 한성이 위치한 장소는 로마와 비슷한 정중앙입니다. 다만 조선 영토가 이 반도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습니다. 대륙에도 상당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나, 춥고 척박한지라 거주하는 인구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냥과 목축을 영위하는 야만족이 일부 살고 있을 뿐이라 하며, 대부분의 인구는 반도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삽니다.
기후나 풍토는 대체로 일본과 비슷합니다. 다만 사람들의 행동이나 언어는 전혀 다릅니다. 일본인들이 분쟁을 검으로 해결하는 옛 기사들 같은 기풍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조선인들은 법률가들처럼 분쟁을 펜과 종이로 해결합니다. 무사보다는 학자가 높은 대우를 받습니다.』
펜을 멈춘 세스페데스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써내려갔다.
『여기부터는 조선인들에게 보여줄 검열용으로 동봉한 중국어본 편지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면담에서 일본에 편지를 보내고 싶다고 하자 국왕이 이리 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라틴어나 에스파냐어로 편지를 쓴다면, 뭐라고 쓰건 우리로서는 내용을 알 방법이 없다. 모든 편지를 한문본으로 쓰고 로마에 보낼 서한은 일본에서 라틴어로 옮기라고 요구할 수도 있으나, 그대의 양심을 믿기에 편지 작성은 자유에 맡기겠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국왕은 제가 라틴어 편지를 이용해서 신부님께 보고서를 몰래 보내려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묵인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합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국가기밀이 유출될 위험성을 경계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어만으로 편지를 쓰라고 할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조선에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은 확실한 만큼, 편지 길이가 지나치게 차이나는 정도만 아니라면 문제는 생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답장은 라틴어로만 써주셔도 됩니다.
아무튼, 지금 조선 궁정의 상황은 우리로서는 환영할만한 여건입니다. 왕비를 비롯한 다른 궁정인들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오직 국왕만 만났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국왕 본인이 가톨릭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조선 국왕은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신경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선교사가 조선에 온 적이 분명 없는데도 말입니다!
다만 국왕이 알고 있는 기도문은 조선말로 뜻을 풀이한 것으로, 라틴어로 된 본래 기도문이 아닙니다. 어디서 배우신 것이냐고 몇 번을 물어보았으나 책에서 보았다고만 말할 뿐, 제목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전부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심지어 세 번째 만남부터는 제가 고개를 숙이자 “그대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답하는 인사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라틴어가 아니고 조선어였습니다만, 가톨릭 예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건넬 수 없는 인사입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선교사들이 알려주지도 않는 옛날 일이나 최신 소식까지 적혀 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중국에 있는 회원들이 쓴 교리서가 혹시 흘러들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봤는데, 교리서에 포교와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내용이 적힐 리는 없습니다.
혹시 국왕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유럽 서적을 수단껏 구해 읽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국왕은 라틴어를 읽지 못합니다. 단 알파벳은 읽을 수 있습니다! 단어도 몇 개 알고 있습니다. 단지 라틴어 문장을 읽고 해석하지 못할 뿐입니다.
다소 섣부른 결론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제까지 나온 이야기들만 가지고 추측해보자면 정말 놀라운 진실이 숨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조선이야말로 사제왕 요한의 나라이고, 조선 국왕은 요한의 마지막 후손이 아닐까요?
옛 전설에 이르기를, 요한의 나라는 머나먼 동쪽에 있다고 했습니다. 조선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습니다. 또, 조선 국왕이 라틴어가 아닌 조선말로 된 기도문을 알고 있다는 말은 라틴어가 잊힐 만큼 오래전부터 이 기도문이 조선에서 구전되어왔음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이 일을 마카오에 알려 주십시오. 만약 조선 국왕이 정말로 요한의 마지막 후예라면, 우리는 열과 성을 다해서 조선이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금 조선인들은 신앙을 잊고 유학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만,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통치를 위한 철학입니다. 우리는 조선 유학자들과 얼마든지 타협을 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통치는 유학자들에게 맡기고 영혼의 구제는 우리가 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조선 국왕이 다시 세례를 받고, 동방에 우리 교회가 보루를 단단히 세울 미래를 생각하니 실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조선이 확고히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면 일본과 중국도 마땅히 그 뒤를 따르겠지요. 전 아시아가 주님 아래에서 하나가 되는 그날이 실로 기다려집니다.
다만 이는 아직 확증이 없는 제 추측에 불과함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통역을 거쳐 국왕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무래도 잘못 전해지는 부분도 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그런 오해를 다 피하려면 하루빨리 제가 조선말을 익혀야만 하겠지요.
제 조선말 실력이 꾸준히 좋아지고 있어서 곧 통역 없이 대화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날이 와야만 국왕이 어디서 기도문을 읽었는지, 그 많은 지식은 어찌 쌓았는지에 대한 깊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듯해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다른 형제들도 불러들여 조선에서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어서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주님의 축복을 담아 보냅니다.
1584년 6월 10일, 한성에서. 주님의 종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편지 쓰기를 마친 세스페데스는 잠시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린 뒤 조심스럽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조선종이가 잉크를 잘 빨아들여서 모래나 압지를 쓸 필요는 없었다.
봉투에 편지를 넣은 뒤에는 상자 속에서 밀랍 덩어리를 꺼내 촛불에 녹여서 봉인을 찍었다. 조선 관리에게 제출할 한문본 편지가 든 봉투도 이미 마찬가지로 봉인해 두었다. 제출용이라 해서 담당이 아닌 사람도 쉽게 보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봉을 마친 세스페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잠시 창문 바깥을 보았다. 고요 속에 잠든 한성 시내가 눈에 들어왔다. 곧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도시, 어서 돌아와야 할 도시가 보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