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76
2부 0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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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사나흘에 한 번 정도는 세스페데스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종교 교리에서 비롯되는 사상적인 문제에서는 도리어 충돌이 적었다. 역설적이지만, 대부분의 조정 신하들이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 생각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이 보건대, 남만승이 이야기하는 천주교의 특징이라 하는 것들은 죄다 불교와 같습니다. 교황이라는 조사가 승려 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에게 권력을 행사한다는데, 토번과 달단에서도 그런 불교 종파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는 역시 불교의 일파가 분명합니다.”
이미 알겠지만 토번은 티베트, 달단은 몽골이다. 그쪽이 믿는 티베트 불교는 정교 양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쥔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가 있으니 확실히 저런 지적에 부합한다.
그러고 보니 서양 선교사들이 티베트에 들어가서 라마교단을 보고, 옛날에 전해진 가톨릭이 타락한 결과인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이쪽 세계에선 그게 역으로 되는 셈인가?
“과거 그 폐해가 심각했음에도 우리 조정은 불교를 완전히 금지하진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섬겨오던 어리석은 백성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살폈던 것도 있고, 백성들이 살아가는 도중에 쌓이는 온갖 불만을 다소 해소하는 역할도 수행함을 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난달에 새로 뽑은 좌의정 이영송이 솔직한 답을 했다. 종교가 갖는 아편으로서의 역할, 그게 바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층이 원한 것이기도 했다.
“신도 남만승을 불러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천주교라는 신앙이 내세우는 바를 들어보니, 그 가르침이 딱히 인륜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신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계집이건 재산이건 남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했을 뿐입니다.”
음, 내가 좌의정은 확실히 잘 뽑았군. 이영송은 이장곤과 다지가 낳은 막내아들, 즉 중전의 외삼촌이다. 자기 부친을 닮아서인지 기골이 장대하기 그지없다. 내가 아꼈던 두 사람의 피를 받아서 그런지 아주 내 마음에 드는 소리를 골라서 한다.
“또한 교황을 받든다 하는 이야기도 어폐가 있는 것이, 저들의 경전을 보면 그 그리스도라 하는 신의 아들이 이리 말했다고 나온다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 했는데, 이는 신을 따르는 일이 군주에게 충성하는 의무와는 별개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예수가 로마 당국에 세금 내는 문제로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답변이었지. 이영송이 계속해서 발언하도록, 나는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들었다. 다른 신하들이 끼어들지도 못하게 했다.
“더불어 말하기를, 천주교를 믿는 남만국들 사이에서도 전쟁은 벌어지며, 교황이 지배하는 영토를 놓고 다른 군주들과 교황이 싸울 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경우 상대편 백성들은 당연히 자기 군주를 받들어 교황과 싸운다 하니, 그 문제로 걱정할 필요는 없사옵니다.”
“그 교황이란 자가 우리를 정복하려들 일은 없다는 말이렸다.”
“그렇습니다.”
뭐 나야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강조해서 들려줘야 하는 부분이고.
“허나 전하, 훗날 세를 키운 뒤에 저들이 태도를 바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들이 뱃속에 칼을 감추고 있으면서 오직 입으로만 달콤한 말을 한다면….”
이형종은 여전히 세스페데스에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 입을 다물게 만들기 위해서 나도 딱 한 마디를 던졌다.
“장래 반역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서 모조리 쳐낸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들이 끝까지 내 밑에서 충성하리라고 보장하는 근거는 있는가?”
과거 연산군 시절, 정호찬을 시켜서 사실상 역모를 조작하다시피 했던 생각이 갑자기 났다. 지금도 꼭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런 식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킬 용의가 있다. 누굴 찍어낼지 지금 정해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멀쩡한 사람을 억울하게 죄인 만드는 게 유쾌한 일은 당연히 아니다. 그래도 뭐든지 처음이 힘들지 몇 차례 하다가 보면 무덤덤해진다. 피가 튀는 현장을 보는 것만은 지금도 몸서리가 쳐지지만, 그것도 몇 번 더 보면 무감각해지겠지.
“신들이 어찌 전하께 역심을 품겠나이까. 부디 의심을 거두시옵소서!”
“의심을 거두시옵소서!”
영의정 박순이 크게 외치자 다른 신하들도 입을 맞추어 외치면서 일제히 엎드렸다. 이형종 역시 그 대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경들의 충성을 내 어찌 의심하겠느냐? 단지 남만승을 계속 경계함에 내 화가 나는 것이다. 낯선 이를 단지 친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내침이 옳겠느냐? 일단 기회를 주고, 그 태도를 살핌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으냐? 그대들은 나를 위해 저들의 동태를 살필 성의도 없느냐?”
일단 들여놓는다. 그리고 동태를 살핀다. 수상한 짓을 하면 그때 가서 처결한다. 이렇게까지 내 의도를 확실히 하자 신하들도 더 이상 크게 반발하지는 못했다.
예수회와의 관계는 단순히 감자, 고구마 같은 농작물 몇 가지만 도입하고 끝낼 게 아니다. 그들을 교사로 삼아서 서양 학문을 도입하고, 이제 얼마 안 가서 시작될 외교에서는 고문관 역할을 맡긴다. 직접 교섭 과정은 물론 서양식 외교문서 작성까지, 도움 받을 일은 많다.
아, 그러고 보니 외교나 교역을 시작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남만인이 우리 조정에 입시했음을 이번 동지사 편으로 대국 조정에 필히 알려야 하겠구나. 장차 저들과 교역을 하려 하니 승인해달라는 청도 함께 올려야 하는데, 사신으로 누구를 보내 청한다면 적절하겠느냐.”
“교역…이라 하셨사옵니까?”
신하들 사이에서 당황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래, 지금 이야기가 나온 참에 쐐기를 박자. 토론은 그동안 충분히 하지 않았나? 반대 의견이 모일 틈을 주지 않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그대들도 이번에 남만승이 가져온 물건들을 보지 않았느냐? 그런 물건을 들여올 뿐만 아니라 만드는 법까지 배운다면, 장차 우리도 그보다 더 좋은 물건을 여러 가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톱니바퀴! 용수철! 둘 다 시계 속에 잔뜩 들어 있다. 그 두 가지 부품만 조선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도 정말 엄청난 발전이다. 화승총처럼 매번 불씨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제대로 된 차륜총, 수석총을 만들 수 있다. 그 외에 수많은 기계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그런 물건들을 직접 만들면 남만인들이 우리에게 그 물건들을 팔 수 없게 됩니다. 그 이치를 저들이라고 모를 턱이 없는데, 어찌 저들이 우리에게 제조법을 가르쳐주겠습니까?”
이형종은 여전히 남만인과 교역하는데 대한 불신감이 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런 주장 자체는 나올 만한 소리니만큼 나 역시 성의껏 답해 주었다.
“남만국은 한두 나라만 있는 게 아니다. 남만 여러 나라에는 저런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이 수천, 수만 명이나 있도다. 그 중에는 보수만 넉넉히 준다면 기꺼이 조선으로 이주하여 자기 재주를 팔겠다는 자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중세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은 군인과 기술자와 학자를 불문하고 숱하게 바깥 세계로 나가서 자기 능력을 팔아댔다. 물론 유럽 내에서는 그런 인력시장이 이미 포화상태라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탓이 크다. 당연히 보수는 톡톡히 받았다.
나는 가능하면 시계공이나 대장장이 같은 전문 기술자를 고용할 생각이다.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조선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라고 해도 스페인 군인들이 사용하는 톨레도 강철검 같은 걸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건 21세기에도 팔리는 진짜 명품 칼이 아닌가.
“전하, 우리는 대국을 받들어 사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처지로 멋대로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한다는 것은….”
이번에는 대제학 오정운이 떨떠름한 태도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 그대도 경성군이 자기 성향에 딱 맞춰서 발탁한 사람이었지? 지금은 분위기를 내 중심으로 확실하게 휘어잡아야 할 시점이기에 거침없이 일갈했다.
“그대가 잊은 모양인데, 국초 태종대왕 때만 해도 남만에 있는 섬라국 사신이 와서 예물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가지 않았더냐? 도적들 때문에 해로가 위태로워지지만 않았으면 계속해 서로 오갔으리라. 그 일로 대국에서 우리를 문책한 적이 있었느냐?”
섬라국(暹羅國)은 샴, 즉 태국을 뜻한다. 정확한 횟수는 기억이 안 난다만, 중학교 국사수업 때 배운 건 확실히 기억한다. 그놈의 성질 더러운 쫌생이, 태국에서도 조선에 조공을 바치러 왔었다면서 조선이 잘나가는 강국이었다고 얼마나 강조하던지.
내 머릿속 옛일이야 어쨌건 오정운은 내 호통에 한 마디도 답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태종 때나 그 이후나, 명나라가 저 문제로 조선에 트집을 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국에서 경계하는 바는 우리가 멋대로 타국과 교역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힘을 키워 대국과 맞서려 획책할까 염려하는 데 있다. 허나 어찌 우리가 감히 그런 마음을 먹겠느냐? 이 나라가 평화로움은 대국에서 보호해 주는 덕인데, 어찌 그 은혜를 우리 손으로 쳐내겠는가?”
명나라와의 의리를 백만 번쯤 강조해도 상관없는 게, 임진왜란 없이도 명나라가 망하리라고 내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전에는 안 망할지도 모르겠지만 백년 안에는 분명히 망할 거다. 만력제 따위가 수십 년을 제위에 앉아 있는데 망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지.
명나라가 흔들려서 망하면 최소한 요동은 우리가 먹는다. 그리고 나머지 중원 땅은 지배할 필요까지는 없고, 분열시켜서 시장으로 삼는다. 영국이 유럽대륙에 통일세력이 생기지 않도록 끈질기게 견제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면서. 중국처럼 좋은 이웃이 하나뿐이면 서운하잖아?
“우리가 대국 조정에 남만승이 왔음을 먼저 알리고, 저들이 간곡히 청하기에 약간의 교역을 허락했다 설명하면 황제께서 안 된다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미 대국에서도 포도아, 서반아 등과 모두 교역을 하고 있지 않으냐.”
그리고 조만간 영국인, 네덜란드인들도 오겠지. 저들이 다 오면 자기들끼리 벌일 각축전도 볼만할 거다. 그때가 오면 우리도 스페인보다는 영국으로 교역선을 갈아타는 편이 좋겠지? 먼 훗날이긴 해도 스페인은 쇠락할 거고, 영국이 세계패권을 잡을 테니까 말이다.
그 시기가 현실이 될 때는 아마 내가 임금이 아니겠지만…일단 지금은 그 기반을 만들어야 할 때다. 망상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신하들을 채근했다.
“망설일 여유가 없다. 그대들은 남만인들이 왜인들에게 염초를 판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그 염초를 우리가 사들인다면 왜인들은 그만큼 무장을 하지 못하게 될 터이다. 또한 우리는 대국 조정이 언젠가 변덕을 부려 염초 반출을 금지해도 지장이 없는 다른 공급원을 얻게 된다.”
지금 조선군에 공급되는 염초는 대략 3할이 도성 인근 염초밭에서 나오고, 4할은 지방에서 공출한다. 나머지 3할이 사행길에 중국에서 수입되고 있다. 예수회에서 어느 정도나 공급해줄 수 있느냐에 따라 이 비율은 바뀔 거다.
이제 슬슬 분위기는 교역은 필요하다는 쪽으로 굳어졌다. 적어도 대놓고 반발하는 소리는 더 나오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형종이 앞으로 나섰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좌의정 이영송이 동지사로 가면 어떨까 하옵니다.”
“기껏 동지사를 보내는데 좌의정은 품계가 너무 높지 않은가? 나이도 많다.”
“허나 좌의정 이영송은 남만승을 우리나라에 들이는데 있어서 매우 긍정적이옵니다. 더구나 기존에 오간 적이 없던 이국과 교역을 시작하는 중한 일이옵니다. 사안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직급도 높은 이가 사신으로 가야 대국 조정에 우리 입장을 전하기 쉽지 않겠사옵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이영송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어떠한가. 이 일을 맡아 북경에 다녀오겠는가?”
“전하를 위한 일이라면 어디인들 가지 않겠나이까. 명하신다면 기꺼이 다녀오겠사옵니다.”
정말 대를 이은 충성일세. 감탄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다. 정사는 그대가 가라. 그리고 부사는…홍문관 제학 유성룡이 가면 좋겠다. 지난 왜국 주화사 일도 잘 다녀왔으니, 이번에 한 번 더 나갔다 옴도 좋으리라. 함께 다녀오라.”
유성룡은 작년에는 일본에 갔었지. 올해 초에 돌아왔으니 한 번 더 나가도 될 거다. 유성룡 개인은 이걸 내가 자기를 총애한다고 받아들일지, 미워한다고 받아들일지 모르겠네. 가능하면 전자면 좋겠다. 이참에 가서 명나라 조정에 라인 좀 만들고 오길 바라는 거니까.
유성룡만 고생시킬 생각은 없다. 이덕형, 이항복 같은 젊은이들도 여럿 뽑아서 이번 동지사 팀에 넣을 생각이다. 지금부터 팍팍 밀어줄 테니, 외교 경험도 쌓고 명나라 조정에 인맥들도 열심히 만들고 해보란 말이다. 분명 나중에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일본 쪽은 그사이 우에스기가 오다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세스페데스한테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사이 해치운 모양이다. 선발대는 함정에 걸려 패했지만 후속부대가 해치웠다는 걸 보면 역시 전투는 져도 전쟁은 이기는 오다구나 싶고.
자, 이제 고려황제께서 승인을 해주시면 남만선이 개성으로 들어오게 준비를 시작해 볼까? 아마 세스페데스는 이제 교역을 시작하면 포교도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거냐고 꿈을 품겠지만 그건 일단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등이 도착한 다음에 언제 허용할지 고려해 보도록 하지.
참,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이 들어오면 이름을 뭐라고 짓는다? 옥수수, 고추는 그냥 그렇게 불러도 되는데 고구마는 일본어니까 말이다. 고구마는 단 맛이 나니까 감저(甘藷)라고 하고, 대신 감자는 맛이 싱거우니까 담저(淡藷)라고 하면 어떨까? 담배는 그냥 연초라고 하자.
“전하께서 영감을 아주 총애하시는 모양입니다, 허허.”
사가독서(賜暇讀書)중인 홍문관 박사 이항복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사가독서는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재주를 인정받은 관리에게,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학문을 닦도록 휴가를 주는 제도다. 이항복은 작년부터 사가독서로 집에 있었다.
“어허, 이 사람. 영감께 실례가 되는 말은 삼가게.”
이항복의 둘도 없는 친구, 이덕형이 옆에서 나무랐다. 그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승문관에 속해 있었고, 역시 이항복처럼 작년부터 사가독서 중이었다.
“웃을 거 없네. 나랑 자네도 영감처럼 명나라에 가야 하지 않는가. 처음 타보는 배를 타고 멀미라도 하게 되면 큰일인데.”
“멀미로 사람이 죽기야 하겠는가? 난 대국 땅 구경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무척이나 기대가 되네. 왜국에 갔다 오신지 한 해 만에 대국에 또 가시게 된 우리 제학 영감이 안 되셨지.”
걱정인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걱정의 말에 유성룡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르겠네. 전하께서 날 아끼시는 건지, 괴롭히시려는 건지.”
이번 중국행은 달성해야 할 임무가 있으니 지난번 왜국행보다 부담이 더 크다.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