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88
2부 066화
– 6 –
“황제께서는 아직도 그리 바쁘시오?”
“그러하오. 친견을 원하신다면 더 기다리셔야 할 듯하오.”
조선 사신 일행이 북경에 온 지 보름이 지났는데도 만력제는 만나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는 닷새 안에 황궁으로 불러들여 조선 국왕의 근황을 묻고 친한 척을 했다던데, 지금 하는 양태를 보면 전혀 같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듣자 하니, 요즘 황제께서 정사를 거의 폐하고 계신다 합니다.”
동지사 일행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다섯 사람이 객관 안에 있는 큰 방에 모였다. 일행이 객관 안에서 노심초사하고 있는 동안, 혼자 북경 성내를 싸돌아다니며 소식을 모은 이항복이 나서서 보고를 했다.
“남만승들이 모이는 남만사를 찾아가 요즘 북경 소식을 물어 보니, 황제께서 무엇을 하면서 소일하시는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합니다. 조회에도 통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신다니….”
유성룡이 눈을 크게 떴다.
“남만승들은 그걸 어찌 아는가?”
“남만교 신도들 중에 조정 고관들이 여럿 있다 합니다. 그들이 남만승들을 찾아와서 평소에 있는 힘든 일들을 거론하며 푸념을 하는데, ‘폐하께서 통 정사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합니다. 사냥을 나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전에서 아니 나오신다지요.”
“허어.”
정사 이영송을 비롯한 사신단 수뇌부들은 일제히 탄식을 내뱉었다. 황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다니,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더구나 지금 조선에는 유례가 드물 정도로 큰 도적떼가 쳐들어왔다. 이를 가능한 적은 피해로 쫓아내려면 명나라 요동군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 이항복이 한 이야기에는 뭔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 의심을 이영송이 다소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풀어냈다.
“헌데 자네는 어찌 그리 기밀한 이야기를 남만승에게 들을 수 있었는가? 자네를 어찌 믿고 저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지? 군주의 근황은 함부로 발설하면 처형해도 마땅한 중범죄가 아닌가!”
“소관은 도성에서 세스페데스에게 소개장을 받아 왔습니다. 저들이 나전어(라틴어)라 부르는 남만 말로 적힌 소개장을 보여주니, 남만승들이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더군요. 소관이 원하는 이야기들도 얼마든지 들려…아니, 적어주었습니다. 필담을 나눈 뒤에 종이는 불살랐습니다만.”
이항복의 이야기를 들은 네 사람은 모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야 이영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관리라는 자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군주의 신상을 함부로 이국 승려 따위에게 누설하다니, 더구나 그 승려는 같은 교단에 있는 이에게 소개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또 다른 이국인에게 누설하다니! 실로 무서운 일일세. 역시 불교건 남만교건 승려를 궐에 들여서는 안 되겠네!”
이영송이 걱정하는 말을 부사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역시 승려란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여 미혹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그들 다섯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과거 고려 때는 왕좌에 가까이 자리한 불승들이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하면 왕권 자체를 흔들기까지 했다. 조선은 그런 고려를 부정하고 세워진 나라였다. 어떤 종교든 나라를 흔들게 할 수는 없었다.
“전하께서 남만교를 좋게 보아 선교를 허용하신다 해도, 무지렁이 백성들이나 믿게 해야지 궁궐 안에는 절대 들여놓아서는 아니 될 것일세. 아니, 신료들에게도 남만교를 절대로 믿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야.”
“아니올시다, 대감. 사람의 도리를 올바르게 익힌다면 어찌 임금에 대한 충성보다 이국에서 온 귀신을 중하게 여기겠습니까? 소관도 세스페데스에게 저들의 교리를 들어보았습니다만, 그 작자도 딱히 군주보다 신을 상위에 놓고 섬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영송은 자기보다 한참 높은 좌의정이다. 그럼에도 이항복은 이영송이 하는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명나라 관헌들이 입을 가볍게 놀려 남만승에게 중대한 기밀을 알게 한 것은 분명히 그들이 잘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남만승이 된 것은 우연히 그리 되었을 뿐이지요. 만약에 아내, 친구, 불승과 친했다면 그들에게 말했을 겁니다. 그들이 수양이 덜 된 겁니다.”
유성룡은 입을 딱 벌렸고 이원익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덕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그마하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영송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우리 조선 선비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에서라면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천주라는 남만신을 신앙한다 해도 신앙은 신앙, 충성은 충성입니다. 경전을 찢고 교당(敎堂)을 태우라는 왕명이라도 내린다면야 혹 모르겠습니다만, 그 전에야 물론 충성을 우선할 것입니다.”
“으흠!”
상관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남만교를 옹호하는 이항복이 불쾌한지 이영송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리고 크게 헛기침을 하고 방을 나가버렸다. 그 화난 뒷모습을 허망하게 쳐다보던 유성룡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항복은 태연하기만 했다.
“영감께서도 생각해 보소서. 우리가 앞으로 남만교를 우호적으로 대해준다면, 저들은 지금 소관에게 했듯이 대국이나 왜국에서 모아들인 온갖 첩보를 우리에게 알려줄 게 아닙니까? 그 이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가? 우리가 아무리 저들을 우대하더라도, 저들은 남만에서 온 남만인일세. 당연히 저들 나라를 더 위할 것인데, 저들이 우리에게 빼낸 첩보를 다시 남만 본국에 넘겨 우리를 침탈하려 한다면 어쩌겠는가?”
“그 지구의라는 물건을 생각해 보소서. 서쪽 땅 끝에 있는 남만 본국에서 이 동토(東土)까지 오는 데는 1년이 걸립니다. 그 먼 길을 거쳐 군사를 보낸들, 얼마나 많은 군사를 보내 우리를 치겠습니까? 그런 염려는 놓으소서.”
이항복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동안 세스페데스를 수시로 만나 남만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리고 얻은 확신이 저들은 조선을 침탈할 힘이 없다는 거였다.
남만국들 중에 조선을 치기로 마음먹은 나라가 하나 나와서 뱃길로 수만 대군을 보낸다고 하자. 그러면 원정의 성패를 떠나서, 곧바로 이웃한 다른 남만국들이 군사가 없는 그 나라를 쳐서 멸해버리리라. 그런 험악한 사이가 남만국들 사이에 유지되는 관계였다.
만약 조선 원정도 가능하고 본국을 지키는 것도 가능할 만큼 대군이 있다면? 그럼 그들은 이웃을 먼저 칠 것이다. 바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을 실천한다는 말이다. 이항복은 자기가 들은 남만 이야기를 자기 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니만큼, 우리 조선이 남만보다 압도적으로 약해지지 않는 한은 남만이 우리를 침략할 염려는 없습니다. 앞으로 저들이 가진 재주 중 쓸 만한 것을 골라 받아들이고, 정보를 수집할 수단으로나 생각하시지요.”
이항복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다른 세 사람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7 –
“화살을 쏘아라!”
화살 십여 개를 목책 너머로 날려 보내자 저쪽에서는 백여 개가 날아왔다. 군사들이 냅다 엎드리자 방금 전까지 군사들의 머리가 있던 곳을 화살비가 지나갔다.
“조총을 쏘아라!”
조총수가 목책 아래 구멍으로 살그머니 총구를 내밀었다. 방아쇠를 당기자 불붙은 화승이 화약접시 위에 살짝 닿았다.
“명중이로다!”
정일한이 쾌재를 불렀다. 막 화살을 쏘고 돌아서서 물러가던 여진 기병이 총에 맞아 말에서 나뒹구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두꺼운 철갑을 입었지만 조총에 맞자 여지없이 뚫렸다.
“조총수가 다섯 명 뿐이라 유감이구나.”
관찰사에게 여러 번이나 서신을 내서 총과 화약 등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했지만 정만기는 지원을 거절했다. ‘북평부에도 무기가 넉넉하지 않다’는 간단한 이유였다. 정일한이 백성들과 함께 있게 된 곳은 평소 야인들이 잘 침범하지 않는 한적한 지역이니 괜찮을 거라고만 했다.
하지만 그 ‘한적한 벌판’에는 야인들이 수시로 눈에 띄었다. 아무리 봐도 습격하려고 사전에 정찰을 나온 무리였다. 대비를 해야 하는데 괜찮다는 말만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괜찮기는 개뿔.”
아무리 혼잣말이라지만 상관을 욕하는 말이다. 주변에 있는 군사들이 듣지 못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말을 돌려 조총을 든 군사를 치하했다. 본래 사냥꾼이었던 사람이다.
“너희가 가지고 있던 무기 덕을 크게 보았다.”
“아닙니다, 사또.”
관찰사가 무기를 주지 않으니 따로 구할 밖에 없었다. 마침 조부가 아직 관직에 계실 때 그 밑에 있었던 이 하나가 경차관으로 내려왔기에 무기를 부탁했더니 활 스무 장과 화살 2천 개,창 마흔 자루를 평안도에서 구해다 주었다. 덕분에 관아 무기고가 풍족해졌다.
여기에 거느린 백성들 중 짐승 잡는 포수들을 고르니 서른 명이 있었다. 이들 중에 사냥에 쓰던 조총과 화약을 가져온 이 다섯이 있었고, 쇠뇌를 만들 줄 아는 이도 둘이나 있었다. 그 덕분에 그동안 쇠뇌 열 개를 만들었다.
비록 상부에서 무기는 받지 못했지만 봄이 올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식량은 받았다. 그래서 정일한은 마을을 둘러싸는 목책을 세우고 난 뒤로는 장정들을 뽑아 군사훈련만 했다. 어차피 다른 할 일도 없었다. 이미 땅이 얼어 있어서 봄이 올 때까지는 농사도 지을 수 없다.
“목책에는 덤불을 덮고, 물을 부어 얼려 놓았으니 불을 지를 수도 없다! 굳세게 버텨라!”
시간이 넉넉했다면 허리 높이 정도 되는 토담이라도 쌓았겠지만 땅이 얼어서 불가능했다. 그래서 베어 온 통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사람 키 정도 높이로 둘러 세우고, 그 사이를 모아온 잡목과 덤불 따위로 메운 다음 매일 밤마다 물을 부었다. 이렇게 얼음성을 쌓았다.
“사또, 양식이 떨어질 때까지 원병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요?”
“주상께서 이 백성들을 버리실 리가 없지 않으냐? 믿고 기다려라. 공연히 겁을 먹고 군민을 두렵게 하는 자가 있으면 내 손으로 베리라!”
조부께서 말씀하시길, 무종께서는 수시로 암행을 다니시며 민정을 살피실 정도로 백성들을 아끼셨다고 했다. 금상께서는 무종의 진짜 후손은 아니지만 엄연히 그 후계자가 아닌가? 지난 20여년 세월을 보아도 백성을 아끼는 모습은 충분히 보았다. 분명 원군이 올 것이다.
– 8 –
“북병사는 예하에 있는 기병 5천과 보병 3천으로 북평을 지키시오. 또한 적이 북으로 돌아 빠져나가려 할 경우 그 앞을 막도록 하시오.”
“예, 영감.”
부여주 좌병사 신각이 휘하 장수들을 모아놓고 작전을 하달했다. 주요 임지인 흑룡강변으로 순시를 나갔다가 급히 돌아온 북병사 최호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다른 도도 마찬가지지만, 문신이 우위에 있는 조선에서는 본래 관찰사가 병권을 통할한다. 하지만 지금 관찰사 정만기는 갑작스레 벌어진 참사 때문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도저히 병권을 행사할 상태가 아니었다.
부여주에 있는 세 병사들 중 가장 선임은 좌병사다. 결국 부여주에서 이번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일 전권은 신각에게 돌아왔다.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군권이 들어왔으니 다행이었다. 정만기는 도무지 그걸 놓으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신각이 보기에 정만기는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문제였다. 자기가 군무를 다룰 재주가 아예 없다면, 병사들에게 몽땅 위임하는 편이 분명히 낫다. 그런데도 끝까지 본인이 책임을 지고 만사를 수행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일은 잘못되고 본인은 병이 나는 게 아닌가.
신립이 부여주에 있었을 때, 신각은 평안병사로 있었다. 옆 지역에서 보면 신립과 정만기는 나름 나쁘지 않은 협조관계를 이루었다. 정만기는 군무에는 정말로 지독하게 재주가 없었고, 신립은 사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양자가 서로 부족한 점을 잘 채워주었다. 잘 될 때는.
“일단 본관이 이끄는 군사 1만은 목단강을 따라 올라가며 놈들의 퇴로를 차단한다.”
신각이 등채로 지도 위를 짚었다.
“우병사에게는 수하 군사 7천으로 담당구역을 철저히 지켜 적도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지금 적도들은 가능한 많은 사람과 가축을 빼앗아 돌아가고자 할 터, 수령들이 일을 소홀히 하여 방어가 허술한 촌락을 주로 노리리라.”
빤한 이야기라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촌락의 방어도는 대체로 세운 뒤 경과한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울타리를 세우고 담장을 쌓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이다. 북방에서는 돌이 귀하다 보니 북평 정도를 제외하면 석성을 쌓은 곳은 사실상 없다.
“구원 요청을 보낸 곳들은 대개 목책이라도 견실히 세운 곳들입니다.”
판관 김시민이 동조하면서 지적했다.
“애초에 방비가 튼튼했던 봉수대들은 하나도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봉수대에 딸린 둔전촌은 여럿 함락되었습니다만, 이들은 적이 봉수대를 피하리라 생각하고 방책을 세우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외에 침탈당한 촌락도 대부분 방어가 허술했습니다.”
둘러선 장수들은 대부분 병사 밑에 속한 무장들이었다. 사실상 군무만 전담하면서 북방에서 쭉 근무하는 이들이 보기에, 새로 부임한 수령들 중에 상당수는 북방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우선순위 파악이 미숙했다. 일단 방어부터 제대로 갖춰야 농사건 뭐건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조금만 버티면 도성에서 원군이 내려올 것이다. 그러면 적들을 토멸하여 이 원한을 갚도록 할 터이니, 그대들은 힘써 싸우라!”
“예!”
장수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인사를 받는 신각의 표정은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