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93
2부 071화
– 19 –
“안 됐군, 저 도적놈들. 사흘만 더 가면 목단강인데.”
신립이 지도를 살피며 비아냥거렸다. 포위망에 걸려든 해서부 야인들은 약 1만 2천, 거기에 1만에 달하는 조선인 포로와 수천 두나 되는 소와 말을 끌고 있었다. 그 외에 약탈품을 실은 수레도 수백 량에 달했다.
놈들은 어떻게든 해서부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눈이 쌓여 길이 좋지 않은 데다 김우서, 유극량 등이 쉴 새 없이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을 가했다. 노략질한 재물을 실은 수레에 불화살이 꽂히고, 뒤처진 자들은 화살꽂이가 되었다. 포로들은 틈만 보이면 도망쳤다.
오직 정면인 서쪽에서만 공격이 없었다. 저들은 이게 조선군이 병력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서쪽, 목단강을 향해서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대열을 추스르지 못해 탈출하는 포로와 낙오자가 속출하는데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목단강까지 사흘거리를 둔 여기에서 신립이 이끄는 1만 2천 대군이 그 앞을 단단히 가로막았다. 이제 와서 측면으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남쪽에는 호랑이처럼 강한 왜인여진 수천기가, 북쪽과 동쪽에는 포상에 눈이 먼 여진 토병들이 깔려있으니까 말이다.
탈출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달려왔을 녀석들에게 신립은 한 조각 동정심까지 느꼈다. 하지만 저들은 이제 그물에 걸렸고, 완벽하게 때려잡을 일만 남았다.
“참모장, 좌군장과 우병사에게 서한을 보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포위를 풀지 말라 이르게. 지금 적들이 비록 수세에 몰렸다고는 하나,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는 없음이야.”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도 있다. 지금 아군은 북방에 있는 북병사 최호가 거느린 군사를 빼도 적보다 세 배나 되지만, 분산되어 있다는 게 약점이다. 자칫하면 저놈들이 죽을 각오로 포위를 뚫을지도 모른다. 노략질한 재물과 사람을 버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예, 대감.”
허리를 숙인 이일이 바로 휘하에 있는 종사관들을 시켜 명령서를 쓰게 했다. 신립이 작성된 명령서를 받아들고 내용을 검토하는데 예관 홍응송이 급히 군막 안으로 들어왔다.
“도순변사 대감, 급보입니다!”
“무슨 일인가? 적이 돌진을 개시했는가?”
적이 진격했다면 바라던 바다. 지난 수일 동안 적이 치고 나올 만한 평지에 거마목을 치고 호를 파서 기병이 돌진할 수 없도록 장애물을 만들었다. 신립이 후방에 두고 왔던 보병 5천이 지금 막 도착해서 그 뒤에서 숨을 가다듬고 있다.
이들 보병은 장창병 2천에 강선조총으로 무장한 조총병 3천이다. 신립 자신이 도성에 가서 철저하게 훈련시킨 정예병들로, 적 기병이 눈앞까지 달려들어도 꼼짝도 하지 않을 정도로 잘 훈련된 정예들이다. 그 양익은 먼저 이끌고 온 기병 1만 2천이 맡고 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면 함성이 들릴 텐데 조용한 걸 보니 그건 아니군. 그럼 무슨 일인가? 놈들이 남쪽으로 움직일 기미라도 보이는가?”
“아닙니다, 그것이….”
홍응송이 잠시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적괴가 사자를 보내왔습니다. 포로로 잡은 우리 백성들을 풀어줄 테니 퇴로를 열어달라고 합니다.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 백성들을 화살받이로 세우고 결전을 벌이겠답니다.”
“뭣이라고?”
군막 안에 있던 이들 전원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 20 –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흥분한 전사들이 침을 튀기며 삿대질을 하는가 하면, 거친 말이 오간 끝에 칼을 뽑아드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게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냐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런 교섭을 시도한 게 아니겠습니까.”
이순원 역시 허공에 욕지거리를 퍼붓는 중이었다. 그 곁에서 부두목인 판차가 조용히 화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이순원은 지금 모든 포로를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고 펄펄 뛰고 있었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조선군은 적어도 3만 명은 된다고 합니다. 자칫하면 사방을 포위당해 전멸하기 십상이니, 포로를 내주고서라도 무사히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진영 안이 아비규환이 된 게 바로 이 명령 때문이었다. 조선군에게 포로를 내주고 목단강을 통과하기로 했으니, 각 부대가 잡은 포로를 모두 내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적게는 백여 명에서 많게는 3천여에 이르기까지, 포로들은 각 부대가 갖은 고생 끝에 얻은 노획물이었다. 이들을 노예로 부리면 수확을 지금보다 몇 배나 거둘 수 있다. 그런데 전부 다 내놓으라니, 눈이 돌아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좋게 생각하시지요. 가축과 다른 재물은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좋다지 않습니까.”
판차가 달래려고 시도했지만 분노한 이순원은 하늘을 향해 내갈기던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욕할 대상이 늘어났을 뿐이었다.
“자네 같으면 포로를 돌려준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노획물은 그대로 가져가게 놔두겠나? 다 거짓말이야! 어슬렁어슬렁 조선군 총구 앞을 지나가다가 벌집이 되는 거라고!”
이순원은 도적떼를 이끌고 국경을 넘나들면서 조선 관헌들에게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었다. 이순원 패거리는 강도질만 하는 게 아니고 밀수도 했는데, 조선군은 이들을 잡기 위해 매복을 하거나 허위정보를 흘려 꼬여냈다. 늘 주의했는데도 몇 번이나 거기 넘어가 잡힐 뻔했다.
“저 개자식들이 하는 말을 믿고 포로를 풀어줘 봐야, 길목을 빠져나가다가 시체가 될 거야. 그냥 지나가는 척하다가 놈들을 칠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수가 통할 상대들이 아니야!”
조선군이 통로를 열어줄 수는 있다. 하지만 통로 좌우에는 함정과 목책이 파여 있을 거고, 총과 활이 빽빽하게 놓여서 이들을 겨누고 있을 거다. 그리고 이쪽에서 뭔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만 하면 옳다구나 하고 화살과 탄환을 쏴대겠지!
“두목! 두목!”
“뭐야!”
진영 내 다른 패거리들 상황을 알아보러 나갔던 부하 하나가 숨이 턱에 차서 허겁지겁 뛰어왔다. 행동은 가볍지만 이곳저곳 싸다니면서 소문을 주워듣는 재주 하나는 기가 막힌 부하다.
“저기, 대추장들 부하 놈들이 자기네 포로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있어요!”
“뭐라고!”
이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늘 침착하던 판차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이에요! 한 2천 되나? 그쪽 포로들만 조선옷을 벗기고 우리 옷을 입히고 있어요. 옆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면서요.”
이순원의 턱이 맞물리더니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놈들이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개놈의 새끼들! 두고 보자. 내가 아주 네놈들을 요절을 내 줄 테니!”
이순원은 급히 말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두 부하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뒤를 따랐다. 워낙 주변이 난리 통이라 이들 셋이 어디로 움직이건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20 –
꽁꽁 얼어붙은 목단강은 갑옷을 입은 기병이 말을 탄 채 건너가도 괜찮을 정도로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명령 한 마디만 내리면 수천 철기가 그대로 강을 건너리라.
“하지만 그런 칙명은 없었으니까.”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장수 하나가 서편 강둑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입고 있는 갑옷은 명나라 식 두정갑, 타고 있는 말은 서역에서 온 준마였다.
그 옆에는 약간 형태가 다른 여진인들이 입는 두정갑을 걸친 젊은이가 역시 말을 타고 서 있었다. 이쪽은 이십 대 중반, 새파란 젊은이였다.
호위병들은 조금 떨어진 아래쪽에 있었다. 두 장수는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총병께서는 혹시 칙서를 직접 보셨는지요?”
“아니. 하지만 요동도사께서 명하시기를, 해서4부를 모조리 진압하여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고, 그 뒤에는 멈추어 명을 기다리라 하셨네. 이제 임무를 완수했으니 명을 기다려야지.”
요동도사 이성량은 이번에 직접 출병하지 않았다.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직할군 3만과 요동 각지에 있는 여진 부족들이 제공한 지원부대 2만을 보내 해서부를 제압하게 하고, 그 지휘를 자기 장남인 총병 이여송에게 맡겼을 뿐이다.
“그래도 참 해서부 놈들도 맥이 없습니다. 아무리 총병 대인께서 대군을 끌고 오셨다지만, 이리 저항이 없다니 말이죠. 저희 건주위였다면….”
얼굴에 비웃음을 띄고 있던 누르하치가 급히 말을 멈추었다. 이여송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건주위였다면 어쨌을 거라는 말인가?”
“그야, 이런 난리 자체를 일으키지 않았겠지요. 저희는 일찍이 황제께서 내리신 명에 따라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교역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누르하치가 추장이 된 지는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 조부와 부친이 명군에게 사망하면서 건주위 추장 자리에 오른 이 청년은 이성량의 소집령을 받자마자 휘하에 있는 기병 3백 명을 모조리 끌고 달려왔다.
이여송은 요양에서 이곳 목단강까지 오면서 누르하치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이 젊은 여진 추장이 제법 영리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장차 대추장이 될 수 있을 그릇이 보였다. 그 그릇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지는 자신의 손에 달려 있겠지만 말이다.
“평화롭게 사는 자가 어찌 단 1년 동안에 병사를 백 명에서 3백 명으로 늘렸는가?”
“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그야 저를 위협하는 자들에 대한 합당한 대응이었을 뿐입니다.”
조부와 부친의 유산은 여러 후손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누르하치가 받은 것은 그중 일부뿐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누르하치는 곧바로 주변 소부족들과 전쟁에 돌입했고, 자기 세력을 키워나갔다.
소집령에 곧바로 응한 행동도 세력 확대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성량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출병이 끝난 후 전리품을 더 많이 나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 두지. 그대는 적어도 압록강 너머 조선을 범하거나, 요동도사께서 내리시는 명을 거역한 적은 없으니까. 여진족 사이 다툼이야 우리가 알 것 없고.”
요양에서는 변방에 사는 여진족들이 서로 다투는 양상에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인 정착지를 습격하거나 국경 너머 조선 땅을 침공해서 외교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자기들끼리 죽여준다면 고마울 뿐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여진 전체를 장악할 기세인 강성한 부족이 나타날 때였다. 그럴 때는 놈들이 미처 성장하기 전에 다른 부족들을 움직여서 합공을 가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패자가 나타날 가능성을 없애고 자신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마침 잘 되기도 했어. 요즘 해서부가 내분을 끝내고 하나가 될 조짐을 보여서, 손을 좀 봐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거든. 이놈들이 힘을 합치면 분명히 골치 아픈 존재가 될 테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건주위까지도 위험해질 겁니다.”
누르하치가 변죽을 올렸다. 여진 부족들은 언제나 서로 빈틈을 노리는 사이, 영토 면적이나 인구에서 밀리는 건주위는 해서부가 약화될수록 당연히 유리했다.
물론 지금 요동을 지배하는 자는 이성량이다. 이성량 밑에서, 경계심을 살 만큼 강해지지는 않으면서 다른 여진부족들을 능가할 만큼은 강해지는 게 누르하치의 목표였다. 실로 달성하기 매우 어려운 목표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하나 드려도 될는지요.”
요양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쌓은 친분을 걸고 도박을 한번 해보았다. 이여송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뭔가?”
“혹시 요동도사 노야께서는 해서부가 조선을 치려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아셨으면서, 조선을 약화시킬 생각으로 일부러 방관하신 건 아닙니까?”
개연성은 있었다. 해서부가 뭉치면 이성량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상대다. 외부자인 조선군을 이용해서 이들이 가진 힘을 깎아내고자 의도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동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힘을 가진 조선군도 약화시킬 수 있는 건 덤이다.
“나도 모르지. 결정권을 가진 건 내가 아니고 요동도사 노야시니까.”
이여송은 부친인 이성량을 꼬박꼬박 요동도사라고 불렀다. 이성량이 남들 보는 앞에서 절대 사적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습관을 들여 놓은 탓인 모양이다.
“어쨌든 별 손실 없이 해서부 제압에 성공해서 기분이 좋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여송이 이끌고 온 요동군을 맞이한 해서부에서는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바로 동원할 수 있는 가용병력이 거의 조선에 가 있는 탓에 여력도 없었고, 그나마 동원한 병력은 조선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막강한 요동군이 눈앞에 나타나니 부여주에 간 원정대 지원 따위는 거론할 수도 없어졌다. 게다가 자칫하면 요동군과 조선군 사이에 끼어 부족 전체가 박살이 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 한겨울에 부족 전체가 어디로 피난을 갈 수도 없다.
해서부 대추장들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그 결론이 이여송에게 맞서지 않고, 두 손 들고 항복하는 것이었다. 전투는 거의 없었고, 사상자는 양쪽을 합쳐 백 명도 나지 않았다.
전투가 없으면 전리품도 없다. 누르하치를 비롯한 여진족 지원부대들은 전리품이 없어 무척 실망했지만, 세금으로 당당하게 전비를 뜯어낼 수 있는 이여송은 이 문제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었다. 그저 앞으로 사태의 추이가 궁금했을 뿐이다.
“조선군이 어떻게 해서부 군사들을 섬멸할지 기대가 되는군. 그대는 혹시 살아서 강을 넘어 돌아오는 자가 있는지 잘 살피게. 범경(犯境)한 죄로 조선에 인도해야 할 테니까.”
“예, 대인.”
누르하치가 예를 표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직은 열과 성을 다해서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말이다. 전리품이 없는 거야 아쉽지만, 속으로 삭이면 그만이다. 어떻게든 다시 벌충할 길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