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294
2부 0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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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여 명을 좀 넘는 사람 무리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개중에 앞선 무리는 기병으로, 그 수는 4천기 정도 되었다. 그 뒤로 가축과 수레를 중심으로 보병이 주위를 둘러싼 폭 넓은 대형이 꽤 간격을 두고 따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속임수를 쓸 생각이었단 말이지.”
언덕 위에서 말을 타고 적진을 살피던 신립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이제 놈들을 싹 쓸어버릴 순간이 드디어 왔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적이 포로들을 석방할 테니 통과시켜달라고 했을 때, 신립과 참모장 이일을 비롯한 조선군 수뇌진은 당연히 이건 적이 뭔가 술수를 쓰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처음 생각했던 가능성은 반환하는 포로 속에 병사를 숨겨 조선군 진영 안으로 들여보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만약 조선인으로 위장한 야인이 진영 안에서 난동을 일으킨다면 엄청난 소동이 빚어지리라. 자칫 흥분한 군사들에게 무고한 백성들까지 덤터기를 쓰고 살해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이 빚어지면 저들이 쉽게 탈출할 틈이 생길 수도 있다.
헌데 놈들의 계획은 달랐다. 포로들 중 일부만 석방하고 일부는 옷을 갈아입혀서 이편 눈을 속이고 강을 건너가겠다니, 맹랑하지 않은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명나라 요동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저러는지도 모른다. 코앞에 이성량 군대가 와서 지켜보고 있는데, 조선에서 대규모 난동을 벌이면 어찌어찌 돌아가도 국경을 범한 죄로 이성량에게 살아남지 못할 게 아닌가 말이다.
“대감. 만약 귀순한 이가 놈이 놈들의 속임수를 제보하지 않았다면, 혹시 약속대로 놈들이 강을 건너가게 해줄 생각이셨사옵니까?”
신각이 질문하자 신립이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있는가!”
우리 땅을 유린하고 백성들에게 해를 입힌 적이다. 놈들이 실컷 날뛰고, 재물까지 챙겨서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감께서는 도적들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다. 포로를 돌려받았으니 놈들을 쳐 없애지 못하게 하던 유일한 걸림돌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놈들을 몽땅 쓸어버리는 데 망설일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애초에 도적놈들일세. 사람과 재물을 모조리 내놓고 우두머리가 목을 바쳐 사죄해도 다른 부하들을 살려줄지 말지 확답을 해줄 수 없는데, 포로만 내놓고 곡식과 가축은 챙겨가겠다고? 아니, 그게 말인가, 소인가? 게다가 그것도 거짓 제안이 아니었는가.”
신립이 그답지 않은 우스개를 던졌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하긴, 포로는 어찌 돌려받았다 해도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 땅을 침탈한 도적놈들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걸 사지가 말짱히 붙은 채로 보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더구나 저들이 애초에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었다는 점도 확인했다. 마침 운 좋게도 놈들 스스로 명분을 주었으니, 약속을 깨는 데 대한 부담도 전혀 없다. 다만 아직 잡혀 있는 백성들이 걱정될 뿐이다. 중군장을 맡고 있는 좌병사 신각이 연락군관을 시켜 명령을 전했다.
“중군에서 준비한 조총은 적 기병을 상대로만 쓰게 하라. 자칫 오인사격을 할 우려가 크니 보병은 쏘지 마라. 적 보병은 근접한 뒤에 확실히 가려서 처치해도 충분하다.”
군사들은 눈에 띄지 않게 목책 뒤에다 몸을 숨긴 상태다. 목책도 위장해 두었다. 총에 불은 붙여 놓았으니, 신호만 올라가면 그 즉시 사격을 개시할 수 있다. 장창병들도 바로 뛰쳐나가 앞을 가로막는 진형을 세울 것이다. 치고 나갈 기병들도 좌우 숲에 숨어 있다.
“저들이 과연 우리 코앞까지 얌전히 다가올지 걱정입니다.”
일단 대응할 준비는 다 마쳐두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신각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립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염려 마시오. 어제 답신을 보내면서 ‘포로만 풀어주면 길은 열어주겠다’고 했고, 지금 우리 군사들은 눈과 나뭇가지로 철저히 몸을 숨겼으니 저들에게 보이지 않소. 놈들은 이 앞에 우리 군사가 매복했다고는 생각도 못 할 거요.”
김우서 휘하 야인 ‘사냥꾼들’ 때문에 적은 정찰을 내보내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전투대형이 아니라 이동대형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언덕 위에 있는 이들 세 사람을 보고서도 척후라고 여겼는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의 단순한 움직임에 신각이 의심을 표했다.
“정말 이쪽이 약속대로 길을 열었다고 보고 안심한 걸까요. 그 약속을 믿었다면 바보라는 소리밖에 안 되는데….”
“천병(天兵)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안심했는지도 모릅니다. 천병이 눈앞에 있는데 설마 우리가 약속을 깨겠느냐 하는 생각인지도 모르지요.”
참모장 이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의견을 밝혔다. 지금 저 아래쪽에는 요동도사 이성량의 아들, 명나라 총병 이여송이 전투를 보겠다고 와 있었다. 도적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이미 귀띔해 두었으니, 이쪽이 약속을 깼다고 그에게 비난을 받을 염려는 없지만 말이다.
“총병에게 강선조총이 들키면 곤란합니다. 처음 생각보다 더 끌어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일이 진언했다. 신각과 신립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강선조총은 4백 보까지 쏠 수 있지만 명나라에서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굳이 알게 해줄 필요가 없다.
“백오십 보에서 쏜다. 놈들이 상황을 알아챌 때까지 적어도 세 번은 쏠 수 있겠지. 저들이 달려올 거리가 짧아지니, 장창수들이 대응하기에는 도리어 이편이 나을 수도 있다.”
장창대가 들고 있는 창은 2단 분리가 가능하고 나무와 대나무, 철재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길이는 열여섯 자(4.8m), 이것 역시 임금의 명으로 만든 새 무기였다.
“적 기병을 무너뜨린 직후에 좌군과 우군이 일시에 치고 나가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굳이 대감께서 진두에 서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립이 기존에 분리시킨 좌군, 우군은 좌군장 유극량을 별군장으로 임명해서 지휘권을 주고 별군으로 새로 편성했다. 지금 좌우군은 신각이 이끄는 군사와 통합해서 재편성한 부대다.
“장수된 자로서, 앞에서 말을 달리고 칼을 휘두름에 어찌 기쁨이 없겠는가.”
호랑이 병마사라는 별명이 괜히 생겼던 게 아니다. 신립은 뒤에서 지휘나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싸움에서는 언제든 선두에서 창과 활을 휘두르는 자, 그것이 신립 자신이었다.
여진인들이 점점 다가왔다. 횃불을 들고 명령을 기다리는 군관의 얼굴에 진땀이 흘렀다.
– 22 –
수천 발이나 되는 총성이 구령에 따라 일제히 울렸다. 순식간에 뿌연 화약 연기가 피어올라 통로 전면에 연기로 벽을 쌓았다. 무방비 상태로 다가오던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오르고 그 위에 타고 있던 기병들이 줄줄이 말에서 떨어졌다.
“장전하라!”
구령에 따라 조총병들이 총을 곧추세우고 죽관에서 총구에 화약을 부었다. 꽂을대로 화약을 다지고 탄환을 떨어트려 넣자 장전이 끝났다. 한때 사용하던 종이 탄포는 실화(失火)로 사고가 여러 번 나서 다시 대나무로 만든 죽관으로 바뀐 지 꽤 되었다.
강무관 생도군 소속인 이수일은 소대장으로써 장창병 소대를 이끌고 대열 한복판에 있었다. 첫 출전이었지만 자신은 지휘관이었다. 전장의 혼란 속에서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며 주변을 세심하게 살폈다.
“1열 방포!”
첫 사격은 가능한 큰 피해를 주기 위해 3천 병력 전체가 일제히 조준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연속사격이 가해졌다. 엄지손가락 끝마디만한 탄환이 잇달아 갑옷을 뚫고 사람과 말의 뼈와 살을 짓뭉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장창수, 앞으로!”
호령이 울리자 이수일도 자기 군사들을 끌고 앞으로 나갔다. 숲에서 자른 소나무와 눈으로 덮어두었던 목책 뒤에 창병들이 일제히 늘어섰다. 빛을 발하는 창날을 적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내밀었다.
뾰족하지만 짧은 뒤끝은 땅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한 발로 창대를 밟아 버티는 힘을 크게 키웠다. 혹시 여기까지 도달하는 적이 있어도 저지할 수 있도록.
“놈들이 온다!”
뿌연 화약연기가 사방을 가리고 있다. 하지만 그 틈으로 얼핏 적 기병들이 돌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되는 대로 무기를 휘두르면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 만사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이수일이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호통을 쳤다.
“놈들은 정신이 나갔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사격을 시작한 거리는 겨우 백 오십 보다. 이 정도 적이 거리에서 작심하고 달려들어 봐야 말에 제대로 속도도 안 붙는다. 그러니 저들이 조선군 조총수들이 쏘는 총탄 세례를 무릅쓰고 돌격을 하더라도 결국 장창에 저지될 수밖에 없다.
함성 사이로 조총대 지휘관이 내리는 명령 소리가 들렸다.
“계속 쏴! 멈추지 말고!”
일제히 총을 쏜 사수들은 뒤로 물러나 화약과 탄환을 쟀다. 뒷줄에 있던 다음 열 사수들이 앞으로 나가 방아쇠를 당겼다. 연달아 울리는 총성과 함께 또다시 희뿌연 화약 연기가 창병들 사이로 퍼졌다. 이번이 여섯 번째 사격인가, 일곱 번째 사격인가?
“부딪힌다! 버텨라!”
여진족 기병들은 총탄 세례를 뒤집어쓰면서도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날아든 화살은 대개 초연 속에서 빗나가거나 창대에 부딪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명중한 화살도 창병들이 착용한 든든한 갑주를 뚫지 못했다. 재수가 없는 몇몇은 얼굴에 화살을 맞았지만 말이다.
만약 이쪽에 있는 전력이 장창병 뿐이라면, 저들은 돌입하는 대신 코앞을 맴돌면서 화살만 계속 퍼부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그런 짓을 하다가는 총에 맞아 낙마할 뿐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여진 기병들은 어떻게든 조선군을 돌파해 보려고 장창진에 그대로 뛰어들었다.
“위치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버텨라!”
속도를 낼만한 거리가 부족했던 탓에 부딪히는 힘도 약했다. 하지만 말과 사람, 몸에 걸친 갑주까지 합쳐진 무게는 역시 감당하기 버겁다. 창에 찔린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쳐들자 몸에 박힌 창대가 휙 하고 내팽개쳐지며 옆에 있던 병사 서넛을 때려 쓰러트렸다.
“나가라! 틈을 막아!”
이수일이 명령하자 뒤쪽 열에 있던 창병들이 즉시 앞으로 나가 틈을 메웠다. 땅에 쓰러졌던 병사들도 몸을 일으키는 대로 창을 잡고 다시 대열 뒤편에 섰다. 창을 찾지 못한 자들은 예비 창을 쌓아둔 위치까지 물러났다. 그 김에 죽거나 다친 군사들도 뒤로 빼냈다.
말은 본능적으로 뾰족한 물건을 겁낸다. 뾰족한 목책과 번쩍이는 창날 앞에 멈춰선 말들은 그 속으로 선뜻 뛰어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안장 위의 기병들은 악에 바쳐 말을 채찍질하다 총에 맞거나 창에 찔려 바닥에 떨어졌다. 날뛰는 다른 말들이 그 몸뚱이를 짓밟았다.
“적이 측면으로 돈다!”
돌진해 오는 적은 수천 기나 되었다. 정면으로 달려든 선두는 목책과 장창진에 저지되고, 총탄을 뒤집어쓰면서 말과 사람의 시체로 벽을 쌓아올렸다. 뒤늦게 달려온 후진의 기병들은 길이 막혀있자 목책도, 창날도 보이지 않는 통로 양편 소나무숲으로 방향을 틀었다.
숲은 울창했지만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기마가 산개해서 통과할 정도 간격은 있었다. 필시 적은 그 틈을 이용해 조선군 방어선을 뒤에서 타격하거나, 아니면 숲을 빠져나가 개별적으로 후퇴할 심산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숲속은 아무도 없는 공간이 아니었다. 이수일은 그 숲에 누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 23 –
신기전 한 발이 펑하는 소리와 함께 터졌다. 좌군, 우군에 돌격을 명하는 신호였다.
“쳐라!”
좌군 기병들의 선두에 서 있던 신립이 크게 호령했다. 내리막을 이용해서 속도를 낸 신립 휘하 최정예 기병 2천기가 그 뒤를 따랐다. 신립이 도성에서 데려온 경군 기병들이다. 나머지 1천기는 별군장 유극량이 이끌고 있다.
두꺼운 갑옷에 장창으로 무장한 경군 기병대 좌우에는 왜인여진 2천기가 있다. 측면 엄호를 맡은 이들은 가벼운 차림에 강궁을 들고, 갑작스럽게 출현한 조선군 기병대 때문에 당황하는 적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우군도 마찬가지였다. 우군에는 신각 휘하에 있던 부여주 소속 함경도 기병 2천기가 중심에 서고, 역시 왜인여진 2천기가 좌우를 맡았다. 이들 함경도 기병 역시 경군 기병들처럼 두꺼운 갑옷에 기창을 들고 있었다.
“이놈들! 내가 바로 호랑이다!”
신립은 우렁차게 외치며 연이어 편전을 날렸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날아가는 족족 해서부 전사들의 갑옷을 뚫었다. 시복이 비자 신립은 안장에 끼워두었던 편곤을 뽑아들었다.
“도적놈들을 모조리 쳐 죽여라! 우리 백성은 되도록 해치지 마라!”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신립은 군사들에게 확고한 지침을 내려 두었다.
“말을 탄 놈들은 모조리 쳐 죽여라! 하지만 땅바닥을 걷고 있는 놈들은 무기를 들고 있는 놈만 골라서 쳐라.”
저들이 포로에게 말이나 무기를 줄 리는 없지 않겠는가? 설사 맨손으로 돌아다니는 놈들이 끌려간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무기를 버린 적은 저항을 포기했다는 소리니까 서둘러서 죽일 필요가 없다. 일단 잡아두었다가 나중에 죽여도 된다.
신립은 두 다리로 말이 가는 방향을 바꾸면서 두 손으로 잡은 편곤을 힘껏 휘둘렀다. 활을 버리고 칼을 뽑아들던 적병이 머리가 박살났다. 그놈도 투구는 쓰고 있었지만, 편곤의 무게에 휘두르는 힘과 말이 내닫는 속도가 더해지자 버티지를 못했다.
옆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립은 활과 편곤을 사용했지만 휘하 기병들은 대개 기창을 들었다. 몇몇 여진족 기병들도 창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이 가진 창은 조선군이 쓰는 창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짧았다. 찔러봐야 닿지 않는,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돌격에 맞부딪친 선두 병력이 줄줄이 꼬치가 되자 삽시간에 적은 기세를 잃었다. 보병진을 뚫으려고 발악하던 기병들이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뒤쪽으로 줄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뒤를 따라오다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자기편 보병들을 무시하고, 무리지어 후방으로 도망쳤다.
“저거 봐라! 역시 우리 백성들을 잡아두고 있었구나!”
적을 쫓아 앞으로 나서자, 아직까지 흩어지지 않고 있는 해서부 본대의 모습이 신립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수레 수백 대를 둘러싸고 뭉친 약 8천 명에 달하는 여진인 무리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놈들이 전부 야인 군사였다면, 기병이 달려들 때 그 뒤를 따라 한꺼번에 우리 진영으로 달려들어 죽기로 싸웠을 것이다! 허나 잡아둔 우리 백성들이 다수이기에 움직이지 못하고 저 자리에 서있지 않겠느냐!”
사실 신립은 이순원이 고발한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그저 적을 당당히 후려칠 수 있는 명분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고 드러나면 이순원에게 책임을 미루면 되었다. 어쨌든 사실이 분명해졌으니 잘 된 일이다.
“모두 외쳐라! 우리 백성들에게, 엎드리라고 말이다!”
주변에 있는 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적진으로 돌입하지 않고 옆을 지나가면서 공격하면, 엎드려 피한 사람을 굳이 다치게 할 일은 없다. 물론 일부 희생자가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건 불가항력이라 할 것이다.
적도 제대로 저항할 수 없다. 여진족 보병이 가진 짧은 창으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지나가는 아군 기병을 찌를 수 없고, 활을 쏘더라도 이쪽 활이 더 많다. 이제 적에게는 진영 좌우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고슴도치가 되는 길밖에는 남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는 적을 향해 화살을 겨눈 신립이 크게 외쳤다.
“모두 쏘아라, 함성을 지르면서!”
신립을 따르던 군사들이 입을 모아 엎드리라고 외치는 함성이 전장을 울렸다. 경황 중에도 그 말을 알아들은 백성들이 자리에 엎드렸다. 뒤이어 쏟아진 화살이 여태 서있던 여진인들, 그리고 아직 미처 엎드리지 못한 몇몇 불운한 조선 백성들을 쓰러트렸다.
화살비를 맞고 아우성을 치는 여진인들에게 달려든 조선 기병들은 편곤을 휘둘렀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고, 비명과 살려달라는 애원이 사방을 채웠다. 그제야 뒤쪽에 있던 여진족 병사들이 무리를 흩어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사방은 조선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제 적에게 퇴로는 없었다. 죽음과 비명만 남았을 뿐이었다.
– 24 –
“옵니다. 예상대로군요.”
이억기가 말고삐를 잡은 채 중얼거렸다. 그 옆에 있던 별군장 유극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젊은 장수가 무척 마음에 들어 자주 옆에 두었다.
“좋아. 모조리 쳐 없애게!”
“예, 영감!”
유극량은 적이 후퇴한다면 퇴로로 삼을만한 길목에 6천 기병을 이끌고 매복해 있었다. 주변 산과 숲으로 흩어질 적은 김우서 휘하에 있는 야인 토병들이 맡아 소탕하기로 했고, 유극량은 아직 흩어지지 않은 적 주력을 칠 계획이었다.
신립과 연락하며 잡은 매복 위치는 아주 적절했다. 무방비 상태로 달려오던 적 기병 2천여 기는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아군 기병 6천기를 보고 급히 그 자리에 멈췄다. 말고삐를 당기는 선두와 숨이 턱에 차서 달리는 후미가 뒤엉켜 혼란이 빚어졌다.
“돌진하라! 모조리 찔러 죽여라!”
이억기가 선두에서 외치며 달려들었다. 중대원들은 진두에 선 중대장을 따라 함성을 외치며 달렸고 잘 닦은 창날에서는 번쩍이는 광채가 났다. 그 광채의 흐름이 여진 기병들을 들이치자 적은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이제 두 무리 사이의 충돌은 더 이상 전투가 아니었다. 학살일 뿐이었다. 해서부 병사들은 이미 두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겼고, 세 번째 위기를 맞아서 악착같이 도망쳤다. 이들을 쫓는 조선군의 창과 활은 열렬히 피를 탐했다. 그 소리도 오래 가지 않았다.
“도순변사 대감! 별군장에게 파발이 왔습니다. 적도를 8백여 명이나 참하였으며, 또 1천여 명은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좋아. 훌륭하다.”
전령군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신립이 한껏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진두에서 분전한 탓으로 그 역시 투구와 갑옷이 선혈로 얼룩져 있었다. 물론 전신을 적신 피 중에서 신립 자신이 흘린 피는 단 한 방울도 없었다.
“그만하면 빠져나간 놈들은 거의 없겠지?”
“예, 도망친 자들은 아마 열에 하나도 안 될 겁니다.”
신립은 유쾌한 표정으로 싸움터를 돌아보았다. 구출된 백성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끼고 있었고, 포로가 된 야인들은 비참한 얼굴로 시체와 부상자를 운반해 모으고 있었다. 감시하는 왜인여진 병사들이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잡혀 있던 우리 백성들이 조금 다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대부분은 무사히 구해냈습니다. 적도들은 반 이상 쏘아죽이거나 목을 베었고, 나머지는 거의 붙잡았습니다. 이제 전하께 승첩 장계를 올리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일의 목소리도 한껏 들떠 있었다. 신립을 도와 적을 토벌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니, 최소한 예전 지위로 복귀하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다. 들뜰 수밖에 없다. 기분이 들뜬 덕분인지, 이일이 깜짝 놀랄 제안을 하나 했다.
“마침 찾아온 손님이니, 승전을 축하할 겸해서 이 총병을 모시고 성대하게 환영 연회라도 베푸시면 어떨지요? 그 자리에서 전과를 보고받으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 총병에게 우리 조선군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인식시킬 겸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괜찮은 이야기였다. 신립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여기에 자기 생각도 하나 덧붙였다.
“옳은 말일세. 셈이 빠른 군관들을 시켜 도적들을 쏘아 죽인 수와 붙잡은 수, 구출한 우리 백성 수, 노획한 재물과 무기를 빠짐없이 세게 하게. 그리고 진중에 있는 물자로 잔치를 열되, 이 총병만 대접할 게 아니라 고생한 군사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주어 위무하도록 하세.”
신립은 부하 군사들을 챙길 줄 아는 장수였다. 하지만 이곳저곳 신경 쓸 일이 많은 이일은 신립보다 한 발짝 더 나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감, 이번에 구출한 백성들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시지요. 만여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그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적도들에게 끌려 다녔는데, 그들에게도 음식을 걸게 내주어서 원기를 차리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대가 한 말이 옳군. 그러도록 하게.”
신립의 승인을 얻은 이일은 잔치 준비를 지시하기 위해 잽싸게 호관을 찾아 나섰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이관을 불러오게 했다. 임금에게 올릴 승첩 장계를 쓰는 건 이관이 맡은 일이니까 말이다. 자, 장계를 어찌 적어야 상감께서 자신의 공을 크게 평가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