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
1부 003화
내관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내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정면으로 마주보지 못하는 거야 내가 왕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잠깐 보인 그 눈빛이 영 유쾌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내 말이 안 들려요? 오늘이 언제냐고요!”
“오, 오늘은 저, 을묘년 정월 정유일이옵니다.”
한 번 더 윽박지르자 개미 기어가는 소리 같은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목이 콱 막히는 답답함이 치솟았다. 을묘년, 을묘년이라고? 그래서 그게 언젠데?
난 을묘년은 을묘왜변이 일어난 해밖에 모른다! 제기랄, 그게 1555년…이었나? 그리고 위아래로 60년씩 가면…1615년, 1495년, 1435년? 그 정도로 후보가 좁혀지나?
아니다. 내가 선입견 때문에 옛날이라면 당연히 조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지, 어쩌면 여기는 고려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시대가 확 어긋난다. 일단 좀 더 확실히 물어보자.
“저기, 아저씨. 이 나라가 조선이 맞아요?”
“어이 당연하신 바를 물으시옵니까. 이 나라는 조선이고, 전하께서는 이 조선 땅을 다스리며 만백성을 돌보시는 지존의 몸이십니다.”
내관 아저씨는 여전히 고개를 처박은 채 대답했다. 고개를 들게 하고 싶지만 그건 포기했다. 일단 방금 들은 한 마디로 고려가 확실히 아닌 걸 확인한 데 의의를 두자.
“중국 명나라랑 바다 건너 일본 사이에 있고, 삼천리 강토에 경상도에서 함경도까지 팔도강산이 있는 조선이 맞다 이 말이죠?”
“그러하옵니다, 전하.”
지리적으로는 맞다. 그럼 시기는…아, 을묘년이랬지. 제기랄, 지금이 어느 을묘년이냐고 물어봐야 소용없겠지.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일생에 딱 한 번밖에 을묘년을 경험할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16세기 이전인 것 같다는 아까 생각도 확신할 수가 없다. 고추가 조선에 들어온 건 분명 17세기 초, 이르면 임진왜란 무렵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것이, 내가 알기로 조선 말기까지도 궁중요리에는 고추를 거의 넣지 않았다!
아아,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지금이 언제야?!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선대왕이 누구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대행대왕’이라고 했잖은가. 아직 묘호가 정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내’ 이름이나 ‘부왕’의 이름을 물어봐야 피휘 때문에 제대로 말해 주지도 않을 거고, 내가 다 알지도 못한다. 조선 왕들 이름이 웬만큼 괴상한 한자들이어야 말이지. 세종대왕 이름은 ‘이도’라고 들어서 알고 있다만.
아…한 가지 떠올랐다. 명나라 연호로 몇 년인지 물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문제는, 안타깝게도 내가 명나라 연호를 하나도 모른다는 거다.
이제까지 나온 힌트는 지금이 을묘년이라는 거 하나…아, 한 가지 좋은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건 확실하다!
“아, 그럼, 내가 몇 번째 왕이에요?”
이 질문만큼 확실한 해답은 없지. 내가 몇 번째 임금인지 아는 것만큼 이 시대가 언제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항이 있나? 내심 의기양양해 있는데 고개를 처박은 내관이 황공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께옵서는 이 조선의 아홉 번째 임금이시옵니다. 천하에 자명한 일을 왜 이토록 세세히 하문하시는지 소신으로서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청하오니 시정잡배와 같은 말투는 부디 거두어 주소서. 체통을 지키셔야 하옵니다.”
움찔했다. 그래, 일단 지금 나는 임금이지. 임금이니까 말투를 고치라지만…도저히 못 하겠다. 평소 안 쓰던 저런 말투를 어떻게 쓰란 말이냐. 어떻게 말을 해야 예법에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홉 번째 왕…이면 성종인가? 잠깐, 아냐! 아까 누가 ‘부왕의 상을 갓 치렀다’고 했지? 제기랄, 안 맞잖아! 사망한 해는 확실히 기억이 안 나는데, 성종 아빠 덕종은 왕이 되지 못하고 왕세자 때 죽었다고!
“저, 전하! 옥체가 불편하시옵니까?”
내가 신음을 하며 머리를 싸쥐자 내관 아저씨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쩔쩔매며 안절부절 못했다. 뭐 임금의 상태를 살피고 돌보는 게 이 양반 일이니 당연한 행동이겠지만 심기가 불편한 내 입장에서는 짜증을 더할 뿐이었다.
“내가 말 안 시키면 그냥 조용히 있어요! 골 아프니까!”
꽥 하고 내지르자 내관 아저씨는 곧바로 방바닥에 이마를 붙이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 이 아저씨 궁궐 생활 얼마 안 해봤나? 왕이 신경질 좀 낸다고 왜 이리 겁을 먹어?
문득 등에 소름이 끼쳤다. 내가 어느새 남에게 갑질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9급 공무원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내가, 내게 험한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을 윽박지르고 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저기, 화내서 미안해요. 내가 지금 좀 힘들거든요. 이해해요.”
“마, 망극하신 말씀이옵니다!”
내관 아저씨는 또 방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저러다 코가 남아날지 모르겠지만, 내 코가 아니니 신경 끄기로 했다. 지금 고민해야 할 문제는 저 따위가 아니니까.
정리해 보자. 저 내관은 내가 조선의 아홉 번째 왕이라고 했다. 아홉 번째 왕은 성종인데, 공시 준비하느라 우겨넣은 지식에 따르면 성종이 재위한 기간은 1457년부터 1495년까지다. 을묘년인 1435년, 1495년은 모두 성종이 재위한 때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지금이 언제지?
“전하, 어서 옥체를 추스르시고 대전으로 납시시옵소서. 대소 신료들은 물론이고 전하께서 옥체 미령하시다는 기별을 받자오신 대왕대비께서도 크게 걱정하고 계시옵니다.”
아 제발 쓸데없는 잡소리 좀 닥치라고. 지금 나한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문득 머릿속을 번갯불이 스쳤다. 그래, 이거다! 이거면 확실히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 있어!
“아저씨, 다시 물어볼게요. 태조 이성계가 이 조선을 세웠잖아요? 지금이 그때부터 몇 년이나 됐죠? 그러니까, 올해가 개국 몇 년이에요?”
가관이었다. 내 머릿속을 번갯불이 스쳐 지나갔다면, 이 내관은 얼굴에 정통으로 벼락을 맞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엎드렸다.
“저, 전하! 어찌 태조대왕의 옛 휘(諱, 죽은 사람의 이름)를 그리 망령되게 부르시나이까! 태조대왕께서는 전하의 조상이십니다. 선대 조상을 지칭할 때는 마땅히 예를 갖추셔야 합니다!”
내가 이성계의 후손인 왕실 사람은 맞는 모양이다. 그러면 이 조선이 내가 아는 그 조선과 아주 많이 일치한다는 이야긴데…하지만 9번째 임금이면서 지금이 을묘년일 수가 없다는 문제는 아직 해결이 안 됐다. 신경질이 나서 내관을 향해 짜증을 좀 부렸다.
“아니, 그래서 태조대왕께서 개국하신 지 몇 년이냐고요!”
“올해가 배, 백 사년 째가 되는 해입니다.”
“백 사년?”
조선 건국은 1392년이다. 104년째 되는 해라면 올해는 1495년. 을묘년이 맞다.
하지만 아홉 번째 왕인 성종은 올해 초에 죽었다. 음력으로 하면 94년이지만 뭐 그런 건 넘어가고. 아무튼 내가 아홉 번째 왕인데 아홉 번째 왕은 올해 초에 죽었고, 나는 그 아들이다? 이건 뭔가 모순되지 않나?
“아니, 잠깐….”
뭔가 뇌리에 떠올랐다. 그 생각이 구체화되면서 머릿속에 한 가지 공포스러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하, 하나 더 물어볼게요. 저, 저기, 내 군호가 뭐…뭐였죠?”
“전하…전하께서는 군호를 받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18년 전 태어나시자마자 곧바로 원자로 책봉되셨고, 8세가 되자마자 세자로 책봉되셨사옵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내관은 울 듯했다.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전하, 전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곧바로 어의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전하, 진맥을 받으시고 적당한 탕약을 복용하시면 곧 용태가….”
“아니, 아니. 제발 조용히 있어 줘요.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지금 깨달은 사실 때문에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설마…?
아니다. 아직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것만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곳은 조선 같지만 조선이 아닌 그런 곳이다. 마땅히 나 역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일 거다. 그래.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정말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으로…딱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아저씨, 혹시 노산군이라고 알아요?”
내관이 잠시 멈칫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내가 노려보자 곧바로 고개를 숙여 납작 엎드리며 답했다.
“노산군은 권세 있는 간신들에게 휘둘리어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므로 세조대왕께서 크나큰 뜻으로 그 잘못을 징치하시고 선양을 받아 즉위하셨습니다. 하지만 노산군을 부추겨 난을 일으키려는 무리가 많았고, 이에 슬퍼하다가 자진하였습니다.”
두 손이 떨렸다. 가까스로 두 손을 맞잡았지만 맞잡은 상태에서도 두 손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그 광경을 본 내관이 또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전하!”
“나가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다. 손은 떨면서도 목소리는 차갑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당장 나가요.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말아요.”
“예, 예, 전하. 그럼 소인은 밖에 있겠습니다.”
내관이 허겁지겁 나갔다. 나는 그대로 다시 이불을 덮어쓰고 웅크렸다.
이제야 아귀가 다 맞아 들어갔다. 조선, 1495년, 아홉 번째 왕, 노산군.
대부분 다 알 거다. 문종의 아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다음 살해당했다. 하지만 단종이라는 묘호는 17세기 말 숙종 때 가서야 주어졌다. 즉, 지금, 1495년에 단종은 조선 임금이 아니다! 단지 노산군일 뿐이다.
단종을 빼고 9번째 임금…그리고 1495년이라는 연도…군호도 없는 날 때부터의 원자. 확실해졌다. 이 이상 더 정보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악문 입에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내가 연산군이라니!”
수수께끼를 풀고 나자 힘이 쫙 빠졌다. 그냥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조선 왕이 되다니, 그것도 연산군이라니.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배는 고팠다. 저녁밥은 언제 주나 했더니 어느새 그 내관 아저씨가 밥을 가져왔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라고 했더니 내 눈앞에 나타난 ‘수라상’은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었다. 국상중이라 고기는 없었지만 상이 세 개에 반찬은 스무 가지가 넘고, 찌개와 밥과 국이 두 가지에 전골냄비까지 있었다. 식사 시중을 드는 상궁도 세 명이나 따라 들어왔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퍼 넣었다. 바로 옆에 앉은 상궁 한 명(기미상궁이지 싶다)이 내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약간 표정을 굳히는 것 같았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배가 부르도록 먹고, 모두 내보낸 뒤 혼자 앉아서 곰곰이 생각했다.
하루가 다 지났는데도 깨지 않는 걸 보면 꿈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정말로 연산군의 몸속에 들어온 모양이다. 하필 연산군이라니, 제기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일단 연산군은 막장 폭군으로 유명한데, 그건 연산군의 인성이 개차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연산군이 아닌 내가 웬만큼만 왕 노릇을 한다면 그럭저럭 순탄하게 세월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연산군 정도면 매우 좋은 조건이다. 내가 세종대왕이라도 되었다면, 이 나라 역사가 어떻게 망가졌을지 모르지 않나? 나는 도저히 그만한 능력자가 될 수가 없다. 위대한 위업을 쌓은 왕으로 빙의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에 반해 연산군은 딱히 치적이 없다. 그러니 그만큼 자리만 적당히 지키면 충분하다. 게다가 연산군 재위 시기는 별다른 외적의 위협도 없고, 국내에서도 큰 일이 없었다. 세조 이후 강화된 왕권 덕분에 하려면 뭐든 할 수 있는 시기고, 국력도 제법 충실했다.
이런 조건이면 단지 평범한 왕으로 재위기간을 마치는 정도가 아니라 뭔가 대단한 위업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밤 술자리에서 현수 녀석이 떠들어댄 것처럼 만주 벌판…까지 가능할지도?
일단 왕 노릇을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집에 가고 싶지만, 부모님이 뵙고 싶지만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그리고 남가일몽, 한단지몽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듯이, 어쩌면 이 새로운 생이 죄다 꿈일지도 모르는 거니까…구운몽은 아직 안 나왔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