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0
1부 030화
– 2 –
해가 지기도 전에 도성을 둘러싼 모든 성문이 닫혔다. 도성 민심이 흉흉해질 게 뻔했지만 분명 아직 도성 안에 있을 테러의 배후조종자를 잡아야만 했다.
“이런 망극한 일이! 전하, 자객은 필시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일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이런 대역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들은 삼족을 멸해야 하옵니다!”
급히 소집된 어전회의에서는 격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훈구건 사림이건 ? 이번 사화는 사림 세력이 설치지 못하도록 기를 꺾었지, 사림들을 물리적으로 전멸시킨 게 아니다 ? 모두 한목소리를 내었다. 감히 임금을 암살하려고 하다니, 이건 도저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장 의금부와 포도청의 모든 관원들을 풀어 역적을 색출하소서! 국가의 근본에 위해를 가하려 하다니, 천번 만번 찢어서 죽여야 할 자이옵니다!”
지난봄에 내 장인인 신승선이 사직한 뒤 아직 후임 영의정이 없는 고로, 지금 조정 영수인 좌의정 한치형이 분개하여 외쳤다. 이제 이조판서가 된 내 처남 신수근도 거들었다.
“전하, 어서 도화서(圖?署)에 명을 내려 이미 잡힌 자객의 초상을 그리게 하소서. 그리고 이를 도성 내외에 내붙여 관련된 자를 찾게 하소서.”
“옳은 말이다. 즉시 도화서에 영을 내려 화원(?員)으로 하여금 의금부로 가서 자객의 얼굴을 그리게 하라.”
자객은 이미 죽었지만, 그와 같이 있던 자를 찾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그 자가 홀로 도성 안을 돌아다녔다’는 증언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겠나.
“전일의 변으로 인한 충격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큰 변고가 터지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신이 늙었으나 이런 일이 생기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노사신이었다. 노사신은 사화 때 사림들을 구하느라 신경을 너무 쓴 탓인지 요즘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조정에도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너무도 중대한 일이 터지니 아픈 몸을 끌고 출석한 모양이었다.
조선은 왕조국가다. 왕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며, 이 나라는 왕과 왕실이 건재해야만 흔들리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후세에 사는 우리는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왜군으로부터 도망간 선조를 욕하지만, 선조는 그 시대의 임금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오늘 병조참의 박원종이 실로 큰 공을 세웠다. 과인을 노리는 자객이 나타났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활로 한 방에 흉수를 맞혀 잡았으니, 얼마나 큰 공이냐? 그 공을 높이 사서 박원종에게 두 등급을 가자한다. 또한 저화 천 섬을 하사하노라.”
내 목숨을 살렸는데 쌀 천 섬이면 싼 거다. 만약 박원종이 조금만 늦게 활을 쏘았어도 자객은 말이 아니라 나를 맞힐 수 있었다. 아니, 감사할 사람은 또 있다.
“무령군은 더 큰 공을 세웠다. 무령군이 소리 높여 경고하지 않았다면, 과인은 첫 화살조차 피해내지 못했으리라. 무령군에게는 두 등급을 가자하고 저화 천 섬에 노비 스무 명을 더 하사하노라. 또한 두 사람을 모두 정난공신에 봉한다!”
쌀 이천 섬에 노비 스무 명, 분명 큰 지출이다. 노비는 논외로 하고 쌀만 쳐도 조총 2백 자루는 만들 수 있는 돈이다. 큰돈이지만 사실 이제까지의 상례와는 어긋난다. 공을 세운 신하에게는 노비는 물론 ‘토지’를 주는 게 이제까지 조선왕조의 관습이었다.
토지가 아니라 저화를 상으로 준 건 내 화폐통용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나라 살림을 생각한 조치이기도 하다. 공신에게 지급되는 공신전은 면세인 데다가 상속권까지 있다. 두고두고 국가 재정에 빵꾸날 일을 하느니 현금으로 한방 크게 쏘고 퉁치는 게 낫다.
어쨌든 내 목숨을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앞으로 이들 둘 때문에 골치가 좀 아파질 것 같다. 이제 이들이 ‘임금의 목숨을 구한 공’을 내세우면 무시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앞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암 덩어리가 될지….
아니, 일이 터지기도 전에 고민하지는 말자. 한참 뒤에나 문제가 될 일이다. 게다가 유자광은 나이도 이미 환갑이니, 몇 년 안에 늙어죽을 공산이 크다. 그러면 절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고 라이벌이 사라진 박원종의 독주가 시작되려나. 박원종은 이제 겨우 서른셋이니까.
에라, 그때 가서 생각하자!
– 3 –
긴급 어전회의를 끝내고 서둘러 편전으로 돌아왔다. 죽을 뻔 한 탓인지 입맛이 없어 식사도 거절하고 이불 덮어쓰고 누웠다. 김처선 영감이 제발 수라를 드시라고 읍소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X발, 도대체 범인이 누굴까?
1순위 범인 후보는 역시 사림 쪽 인물, 혹은 그에 얽힌 사람이다. 물론 사림들이 군대를 몰고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 군권을 쥐고 있는 이들은 대개 훈구파니까 말이다.
지방에서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도 없다. 사림들이 주로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경상도 일대인데, 지금 영남은 대규모 민란이 일어날 만큼 민심이 어지럽지 않다. 아직 사림들에게 충분한 사회적 지배력이 있지도 않다.
그러니만큼 범인이 사림 쪽이라면 역시 개인적인 복수가 목적이라고 봐야 한다.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닥칠 것을 뻔히 알면서 일을 벌였다면 더더욱 그렇다. 대의가 아닌 복수가 목적이기 때문에 후폭풍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복수에 눈이 멀면…자기 때문에 피해를 입을 이들은 보이지도 않는 법이지.”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는 워낙 많으니 하나하나 떠올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개인적인 복수, 가족을 위한 복수, 친구를 위한 복수, 대의를 위한 복수…한도 끝도 없으니 말이다.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범죄에서, 범인은 그 범죄로 인해서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내가 암살당한다면, 누가 가장 득을 볼까?
사림들은 득을 보기보다는 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방금 떠올렸듯,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나 이번 사화로 숙청된 사림의 잔당, 또는 그 인척 되는 자가 범인이라고 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결말은 사림 인사들의 멸문지화밖에 없다.
이번에는 내가 분위기만 잡으면서 행동은 자제한 것도 있고, 노사신을 필두로 한 일부 대신들이 말린 것도 있고 해서 6명 – 김종직도 사회적으로 죽였다고 치자 – 밖에 안 죽이고 끝났다. 하지만 내가 자객에게 죽는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세 자릿수로 사람이 죽을 거다.
그만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제거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은…있다. 여기서 제2의 용의자가 추가되었다. 내 ‘동생’인 진성대군이다. 우리 역사에서 중종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쫓아내고 왕이 된 사람 말이다.
우리는 친형제가 아니지만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나는 진짜인 척 하느라 수시로 잔치를 열어 ‘동생’인 진성대군을 초대하거나 선물을 하사했다. 진성대군 역시 내게 형제로서의 우의를 숨기지 않았다.
내 앞에서 그렇게 ‘전하, 전하’ 하며 따르던 진성대군을 생각하면 설마 그 어린애가 이번 일을 꾸몄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올해 11살 난 어린애가 무슨 암살 모의란 말인가.
다만 진성대군 본인은 아니더라도, 주변 인물들 중 누가 모의했을 가능성은 있다. 현재 내게는 아들이 없고, 따라서 1순위 왕위 계승자는 진성대군이다. 이번 사화로 해를 입은 자의 복수인 척 위장해서 나를 제거하고 진성대군을 보위에 올리려는 자가 있다면?
실제로 조선시대에 있었던 수많은 역모 사건들을 보면, 역적들이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 왕족은 역모에 동참하기는커녕 자신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유력한 왕족을 제거하려고 정권에서 ‘누가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면 또 다른 용의자가 있다. 선왕인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의 서자이자 독자, 올해 14세인 덕풍군 이이다. 왕통이 장자인 월산대군으로 이어지지 않고 차자인 성종으로 이어진 데 대해서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이를 되돌리기 위해 거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생각할수록 혐의자가 늘어가기만 했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이런 의논은 누구와 함께 하기도 힘들다. 여간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닌 이상 밖에 나가서 말을 퍼트릴 가능성이 크고, 왕이 누구누구를 의심하고 있다는 단 한 마디만 새어나가도 그 파급력은 엄청나다. 곧바로 조정 여론이 형성되고 비난 상소가 줄을 이을 게 뻔하다.
대통령제인 대한민국에서도 주요 안건에 대해 대통령이 한 마디만 하면 나라가 흔들린다.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임금이 내뱉은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질지는 명약관화하다.
이불 속에 숨어서 고민하는데 갑자기 더럭 겁이 났다. 그동안 내가 정말 미쳤었구나.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그동안 거의 매일 말을 타고 성 밖에 나갔지만 경호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겸사복 기병 십여 명과 유자광, 박원종 등 무인 출신 신하 두세 명 외에는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자유롭게 나다녔다. 그러지 말라고 대간들, 신하들이 붙들고 늘어지다시피 했지만 늘 흘려들었다.
이 조선 땅에서 감히 임금에게 무기를 들이댈 자가 누가 있겠냐는 근거 없는 확신은 오늘로써 처참하게 무너졌다. 겸사복 기병이 아무리 국왕을 직접 지키는 조선 최정예 기병이라지만, 겨우 십여 명이다. 갑옷도 입지 않았다. 작정하고 덮치면, 이번처럼 틈을 노리면 대책이 없다.
만약 유자광이 자객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박원종이 활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생각하면 할수록 온몸이 떨리고 오한이 났다.
이불 속에서 혼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심신 양면으로 종일 쌓인 피로가 마침내 의지의 한계를 넘은 모양이었다.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 4 –
아침이 왔다. 전날 편치 못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지만 아침이 오니 그래도 기운이 났다.
“전하, 대비전 문안인사는 어쩌시겠사옵니까.”
“가겠다.”
이럴 때일수록 손자 노릇을 해야겠지.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한 십년쯤 먼저 돌아가셨지만, 나는 할머니와도 사이가 좋았다. 물론 인수대비는 우리 할머니와는 딴판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일로 불안해하고 계실 텐데, 얼굴 보이고 안심시켜 드려야지.
“전하, 의금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들라 이르라.”
암살미수 사건이 있었어도 정사는 봐야 한다. 조정에서는 오늘도 회의를 열고 갖가지 나랏일을 처리했다. 물론 분위기는 최악인지라, 가능한 빨리 끝내고 돌아왔다.
“전하, 이 문제는….”
“공조판서가 처결 후 보고하라.”
“전하, 일전에 말씀드린….”
“의정부에서 논의 후 조치토록 하라.”
편전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보료 위에 누웠다. 이 X같은 기분은 자객을 움직인 배후조종자가 잡힐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던 참에 의금부에서 사람이 왔다.
“신 의금부 도사 정호찬이 주상 전하를 뵈옵니다.”
도사(都事)는 바로 그 ‘금부도사’ 중 하나로, 의금부 내에 있는 종5품 관직이다. 금부도사는 전체 10명으로, 종4품인 경력(經歷)과 도사를 합쳐 10명이다.
“그대의 얼굴이 낯이 익구나. 근래 어디서 과인과 만난 적이 있느냐?”
“지난달 양화진에서 역적들에게 형을 집행할 때 뵈었사옵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김종직 이하 죄인들, 그들의 사지를 분해할 때 집행관으로 나와 있던 젊은 의금부 관리였다. 그 끔찍한 꼴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아, 기억이 난다. 그날은 참으로 의연하게 일을 처리하더구나. 그래, 무슨 일인가?”
어제 자객의 시체를 의금부에 보내면서 어떤 단서든 발견되면 경복궁으로 가지고 오라고 말해 두었다. 조선시대 수사관들을 신뢰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이 사건은 피해자로서 내가 직접 관련된 사건이고, 그만큼 나 스스로가 관련사항을 다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이르신 대로, 자객의 몸에서 중요한 증거품이 발견되었기에 가져왔나이다.”
“그래? 무엇이냐!”
증거다. 놈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증거다! 심장이 뛰고 얼굴에 피가 올랐다. 과연 뭘까?
정호찬이라는 금부도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가져온 주머니 속에서 천으로 싼 물건 하나를 침착하게 꺼냈다.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