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03
2부 0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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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참으로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소녀가 묵고 있는 원각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성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라 해도 담을 쌓고 호를 파 방비함이 마치 성채와 다를 바가 없거늘, 조선에선 국왕이 다니는 절에도 전투를 위한 대비가 전혀 없어 놀라웠습니다.”
요도기미, 차차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예뻤다. 혹시나 하고 걱정했던 시커먼 치아화장과 눈썹을 싹 밀고 그 자리에 검은 점만 찍은 눈썹화장도 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다. 만약 그런 몰골로 나타났으면, 조정 신하들 모두 웬 도깨비가 나타났느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래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렀던 여러 고을에서도 저를 성대하게 환대해 주었습니다. 소녀는 이런 나라에 시집을 오게 되어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건 네가 뿌린 돈이 한몫 크게 했을 텐데…더불어 네가 가마에서 내려 얼굴을 종종 보여준 탓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조정 중신들도 별 말을 못하고 네 얼굴만 보고 있는 걸 보면 분명히 효과가 있었을 거다.
내가 하는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차는 다소곳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날씨마저도 맑고 화창하여 여행에 아무 지장이 없었으니, 실로 산야와 하늘도 보잘것없는 소녀를 맞이하는 데 있어 호의를 베풀지 않았나 합니다. 다만 이로 인해 비가 적게 와서 조선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데 불이익이 되었을 것이라, 그 점에서는 무척 마음이 아픕니다.”
아니, 왜 이렇게 예쁜 소리만 한데? 이게 내가 아는 그 요도기미가 맞나? 더구나 조선말도 어떻게 이렇게 능숙하지?
억양에서는 아직 좀 티가 난다. 하지만 요도기미가 구사하는 조선말은 정말 유창했다. 겨우 며칠 정도 연습한 솜씨가 아니었다.
“조선말 솜씨가 매우 유려하구나. 언제 익혔느냐?”
“국혼이 결정된 뒤로 저기 고니시 공을 스승으로 하여 익혔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 저놈이 고니시였지. 얼굴 봐 놨다. 어디 두고 보자. 헌데 요도기미는 ? 아오, 귀찮다. 이젠 그냥 차차라고 부르자. 어차피 요도 성도 아직 받지 않았으니까. – 자기가 정략결혼으로 여기 팔려온 데 대해서 별 불만이 없나 본데? 어째 결혼을 기정사실로 이야기한다?
“일본은 지금껏 백여 년이나 이어진 전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비록 권세가인 외숙 덕분에 일신의 안녕은 얻었습니다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는 좀처럼 세상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난세에 임한 외숙께서 살고자 행하시는 일들을 제지할 수도 없었고….”
옥구슬 같은 눈물이 눈가에 살짝 맺혔다. 나를 비롯해 대전 안을 가득 메운 여러 신하들은 끼어들지도 못하고 멀거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홀로 부처님께 공양하며 이 난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사 빌었을 뿐이옵니다. 허나 어떻게 해도 소녀의 힘만으로는 일본 땅을 벗어날 수 없겠기에 체념하고 있었는데, 외숙께서 조선에 가서 조선 왕실과 혼인하라 명하셨습니다. 이 어찌 부처님의 축복이 아니었겠습니까.”
차차가 눈가에 눈물방울을 단 채로 활짝 웃었다. 그 눈빛을 보고 나도 모르게 심장이 덜컹 흔들릴 정도였다.
“이제 조선에 오게 되었으니 비로소 소녀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바라오니, 전하께서는 부디 소녀에게 좋은 배필을 점지해 주시어 훌륭한 집안을 이루게 해주소서. 소녀가 전하께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옵니다.”
“거…걱정 마라, 내 훌륭한 신랑을 찾아주도록 하마.”
외모지상주의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차차, 내가 생각하던 것처럼 나쁜 계집애는 아닌 듯한데? 역시 우리 역사에서는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애가 삐뚤어진 거고, 이쪽에서는 그동안 편히 잘 살았으니까 심성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으음, 그동안 괜히 쟤를 경계했나 보다. 저 정도로 예쁘고 착하면 ? 나중에 오사카 성에서 한 짓을 보면 절대 똑똑하지 않은 건 분명하니 그건 확실하게 빼고 ? 세자빈까지는 절대 안 되겠지만 세자의 후궁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을까? 차마 내가 손대진 못하겠고….
차차에게 손댈 생각을 하는 순간 눈에 쌍심지를 켠 중전과 상희가 내 양편에 서있는 광경이 절로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잔등에 식은땀이 흐르는데 차차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상대는 누구건 좋으니, 부디 정실부인으로 들어가게 해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소녀는 훌륭한 집안을 세우고 싶사온데, 측실은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격이니 어찌 일가를 이루겠습니까? 부디 정실로써 한 집안을 일으키게 하여 주소서.”
으음, 하긴 일본 여자라고 해서 측실이 되는 걸 좋아하지는 않겠지. 기왕이면 정실이 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본말이 전도되어, 얘가 원래 볼모로 온 거라는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린 뒤였다.
“알겠다. 꼭 훌륭한 배필을 찾아주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청이 있사온데….”
“청이라? 이번에는 또 무엇이냐?”
“수일 내에 세자 저하께서 혼인을 치르신다고 들었사옵니다. 외람되옵니다만, 그 혼인식을 소녀가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어…궁 안에서 열리는 국혼을 외부인이 관람할 수 있었던가?
물론 왕실 결혼식이 궁궐 안에서 전부 치러지는 건 아니다. 도성 안을 누비고 다니는 혼인 행렬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차차가 원하는 건 궁궐 안에서 일반인은 볼 수 없는 부분을 보고 싶다는 의미인 듯하다. 이걸 허락해도 되…나?
“역시 아니 될까요? 이국인인 소녀에게는 바랄 수 없는 일이옵니까…. 참으로 송구합니다. 어린 마음에 호기심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행사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소녀의 어리석음을 부디 꾸짖어 주시옵소서.”
사라진 것 같던 눈물방울이 다시 글썽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혀가 움직였다.
“그 정도야…자리를 마련해줄 터이니 들어와서 보도록 하여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당장 차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서도 드러내 흥분하지 않고 내게 감사를 표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차차 때문에 정신이 혼란해서 정작 그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나다 부자와의 대담은 몇 마디 제대로 진행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다. 정말 내가 아는 그 사나다가 맞는지, 왜 조선에 자원해서 왔는지 정도만 겨우 물었다. 대답도 형식적이었다.
헌데 알현을 끝내고 나니 그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사나다가 조선행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스러운 속사정이 있다 해도, 사실대로 털어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가마스를 비롯한 오다 측 인물들이 눈을 빤히 뜨고 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이쪽은 나중에 두 사람만 따로 불러서 한번 이야기를 해 보자. 아직은 상대를 안 정했지만, 적어도 차차 결혼할 때까지는 다른 일본인들도 다 도성에 머무를 테니까 말이다. 그동안 한번 데려다가 우리 편 통역 놓고 진솔한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아주 깊이.
– 21 –
“조선 국왕이 네게 세자의 혼인식에 참석하라 명했다고?”
“네, 숙부님.”
차차의 숙소는 원각사지만, 나가마스와 함께 동평관에 가는 정도는 가능했다. 이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도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경호하는 조선 관리들도 제지하지 않았다.
원각사는 승려도 많고 하인도 많다. 드나드는 참배객도 많으니 누가 이들의 말을 엿들을지 모른다. 그에 비하면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하는 동평관 쪽이 밀담을 나누기에는 제격이었다.
“일본에서 볼모를 보내왔다고 천하에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습니다. 구경거리는 되고 싶지 않으니 제발 숙소에서 머무르게 해달라고 울면서 비는데도 나오라고 하더군요.”
차차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 나가마스와 여러 일행은 혀를 차며 분노를 토했다.
“나와 대화할 때는 그리 점잖더니, 네게는 그런 무도한 요구를 했단 말이냐! 어린 처녀를 남들 앞에 드러내 희롱감으로 삼으려 하다니!”
고니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진땀만 흘렸다. 아까 차차는 조선 국왕과 조선말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일행 중에서 그 대화를 알아들은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대궐에서 물러나올 때, 차차는 고니시를 아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적어도 일본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임금과 자신의 대화 내용을 누설하지 말라는 뜻이 확실했다.
“하지만 나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숙부님과 다른 신하들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저 혼자 창피를 당하고 말 일이라면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나가마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부터 하고 싶은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치우고, 하기 싫은 일이라면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든 하지 않던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던 탓일까. 하지만 차차는 외삼촌에게 깊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군사를 많이 데려가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테니, 여기 고니시 공만 제게 딸려서 보내주십시오. 고니시 공은 조선 궁정에 아는 이들도 여럿 있고, 조선말도 능숙하니 궁내에서 제 신변을 보호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추후 궁전에 출입할 때도 말입니다.”
고니시는 고개를 숙인 채 방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동안 차차가 나가마스를 닦달한 이야기는 이미 다 들은 터, 자기만 데리고 다니려는 의도는 빤했다. 적당한 조선 왕족을 찾아 낚아채는 하수인으로 쓸 심산이리라.
더구나 자신은 일행 중에서 차차가 조선 국왕에게 거짓으로 꾸며서 한 고백을 모조리 들은 유일한 사람이다. 자신이 나가마스를 비롯해서 다른 일행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하도록 일부러 밖으로 끌어내 압력을 주려는 의도도 있을 게 분명하다.
“그래, 알겠다. 고니시 공, 그대는 내 조카와 함께 궁에 들어갈 때마다 조선 궁정에서 캐낼 만한 정보를 가능한 많이 얻도록 하시오. 마침 예상과 달리 다른 이들이 숙소를 벗어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잘 되었소.”
조선인들은 대문을 봉쇄하고 나가마스의 시종들이 동평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도성 안팎이 국혼 준비로 소란하다느니, 왜인을 보면 과거에 왜구에게 시달렸던 백성들이 불쾌해 한다느니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나리.”
– 22 –
북방에도 봄이 왔다. 늘 겨울만 있을 것 같던 땅에 훈풍이 불고, 눈이 녹으면서 검은 흙이 드러났다. 가끔은 누더기를 걸친 해골이 그 사이에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늑대들이 뜯어먹다 남긴 모양이군. 아깝네그려.”
고을 주변을 순시하던 권율이 옆에 선 군관을 향해 혀를 찼다. 이미 시기도 늦었고, 상태도 너무 좋지 않아서 수급으로 올리기에는 힘든 상태였다.
“그래도 사또께서 지난 겨울에 거둔 수급이 넉넉하니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말에서 내려 시체를 살피던 부여주 판관 황진이 안장에 발을 걸며 한 마디 했다.
“관찰사께서도 탄복하고 계십니다. 고을을 지키기만 하면서 이런 전과를 올린 수령은 거의 없다고 말이지요.”
작년 겨울, 권율은 습격해오는 해서부 야인들을 네 차례나 물리치면서 수급 73급을 거두고 포로 22명을 붙잡았다. 든든하게 구축해 둔 목책과 토담에 의지해서 싸운 덕분에 이쪽이 입은 손해는 전사 7명, 부상 26명에 불과했다.
“과찬일세. 본관이야 미리 축성할 시간이 있었고, 전하께서 따로 내려주신 조총까지 있었던 덕분에 쉽게 전과를 올렸네. 그럼에도 보다 더 어렵게 싸워 큰 전과를 올린 이들과 같은 상을 받았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네.”
늦가을에 도착해서 방책을 쌓을 시간이 없었던 옆 고을 현령이 사용한 대책을 듣고 권율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덤불에 물을 부어 얼음성을 쌓고 이에 의지해서 적을 물리치다니, 정말로 대단한 장수가 아닌가! 게다가 그 현령은 총도, 활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관과 같이 군수로 올랐을 뿐이니, 실로 아쉽네. 더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을.”
벼슬이 현령에서 군수로 올랐지만 권한에서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어차피 상관은 관찰사 한 사람뿐이고, 지도에서 담당하는 구역은 커졌지만 그 땅은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다. 실질적으로는 같은 고을을 다스리면서 포상으로 감투만 바뀐 셈이다.
권율이 생각하기에는 부사, 목사로 벼슬이 오른다 하더라도 여전히 같은 고을을 다스리면서 감투만 바뀔 것 같았다. 임금께서 필요하다고 하시면 그리해야 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소관이 북평에서 듣기로는, 올 가을쯤에는 사또께도 추가로 백성들이 배정될 거라 합니다. 더 넓은 땅을 개간하여 많은 작물을 거두시라는 거지요. 그 뭐더라, 담저라는 것을 보낼 테니 내년에는 꼭 심어 거두라는 어명이 있으셨습니다.”
“음, 그건 나도 조보에서 보았네.”
조정에서 보내는 조보는 한 달에 한 번씩 각 군현에 도착했다. 기재된 날짜를 보면 날마다 찍어내기는 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이런 종이 한 장 보내자고 매일 파발을 띄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굵직한 종이다발이 왔기에 풀어 보니 한 달 분량 조보였다.
야인들에게 우리 사정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조보는 꼭 관아 안에서만 읽고 외부로 들고 나가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보가 도착하면 주민들 중 식자층들이 꼭 관아로 몰려왔다. 도성 소식, 팔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전하께서 남만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 구해오신 작물이라지.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가리지 않고 잘 자라고, 그 뿌리가 맛이 좋다 하니 종자가 도착하거든 잘 심어 볼 생각일세.”
“뿌리를 먹는다 하니 이 북방에서는 더더욱 좋은 작물이 아닙니까. 야인 놈들이 약탈하러 오더라도 땅 밑에 묻힌 뿌리를 캐 갈 재주는 없을 터이니까요.”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노략질하러 온 야인 기병들이 활을 쏘는 대신 괭이와 호미를 들고 밭고랑을 파헤치는 상상을 한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세자 저하께서 국혼을 하신다지 않았나?”
“맞습니다.”
조보에서는 국혼과 같은 국가지대사도 날짜를 적어 알렸다. 참여할 사람은 이를 보고 참석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변방에서는 안다 한들 마음대로 가볼 수는 없다. 권율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내 사위라는 놈은 이런 대사(大事)가 있는데도 도성 사정을 알려주는 편지 한 장이 없군. 무척이나 바쁜가 보이.”
“곧 연락이 있겠지요. 오거든 제게도 좀 보여주십시오.”
황진이 웃으며 달랬다. 그 역시 도성 소식이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