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04
2부 0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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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페데스는 처음 구경하는 동양 왕실의 결혼식 광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화려한 행렬이 주는 위압감은 유럽 왕실이 벌이는 행진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아 보였다.
“어떤가? 우리 조선도 어디서 뒤질 나라는 아니지?”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합니다. 실로 나라가 융성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세스페데스를 데리고 나온 이항복이 짐짓 뽐내는 투로 말을 건넸다. 세스페데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일본에 있을 때 다이묘들의 행차를 본 적은 있습니다만, 지금 이 행렬만은 못합니다. 역시 다스리는 영토 범위가 다르니 동원할 수 있는 힘에서도 차이가 나는군요.”
세스페데스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모두 말하지는 않았다. 일본 다이묘들이 지배하는 영토와 인구는 조선 국왕보다 작을지 몰라도, 거느린 군사력은 그에 비하면 충실하니까 말이다. 물론 두 나라가 지향하는 방향이 서로 다른 것이니 우열을 논할 바는 없었다.
“궁궐 안까지 저를 데리고 들어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럽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대가 내게 남만의 갖가지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있으니, 본관은 보답으로 우리 조선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보여줌이 마땅히 옳…어엇?”
이항복이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눈을 휘둥그레 뜨자 세스페데스도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조선옷이 아닌 다른 복장을 입은 미녀가 한 사람 서있었다. 조선 여인들과 달리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는데, 얼굴을 보니 뜻밖에도 세스페데스가 아는 사람이었다.
“아, 며칠 전 도성에 도착했다던 기쿠코히메로군요. 전하께서 손님으로 혼례식에 초청하신 모양이지요?”
이항복이 뭐라고 하기 전에 세스페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항복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역시 일본에서 온 ‘왜희’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삼남 일대에서 소문이 얼마나 크게 퍼졌는지 모른다. 모를 수가 없었다.
“기쿠코히메? 그게 신장의 조카딸이라는 저 왜희의 이름인가?”
“그렇습니다.”
세스페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 일본에 있을 때 차차를 직접 만난 적도 있었고, 자기보다 먼저 일본에 온 프로이스로부터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들었다.
“노부나가 공은 기쿠치히메의 모친인 누이, 오이치노카타와 무척 의가 좋습니다. 거북하실 이야기지만, 왜인들 중에는 기쿠치히메가 실은 노부나가 공의 조카가 아니라 공과 여동생인 오이치노카타가 상피(相避)해서 낳은 딸이 아니냐고 험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이 했다. 조선 및 일본에 모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자칫 잘못된 소문을 상대 국가에 퍼뜨려 양국간 감정을 나쁘게 만들어버리는 일은 피해야 했다. 이항복이 가볍게 입을 놀릴 사람은 아니리라 보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귀띔해준 것이다.
“일본에서도 미녀라고 듣긴 했지만 저렇게 아름답게 차린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본래는 꽤나 성격이 드세다고 하던데, 오늘은 중요한 자리라서인지 잘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군요.”
이항복이 보기에도 왜희는 미모로, 그리고 키로 주목을 받았다. 옆에 있는 자기 시녀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주변에 있는 조선 남자들하고도 비슷해 보였다. 조선인들이 관을 쓰고 있음을 감안하면 왜희가 더 크다고 할 것이다.
키와 미모 때문인지, 그들 둘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수군거리며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 주목받던 사람인 세스페데스 쪽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헌데 혼인식을 지켜보다가 이쪽을 우연히 본 왜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와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수행원과 시녀들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 혼자서 말이다.
“바테렌! 세스페데스 바테렌 맞지요? 여기서 만나니 무척 반가와요.”
바테렌(伴天連, バテレン)은 일본에서 가톨릭 신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래는 포르투갈어로 신부를 뜻하는 파드레(Padre)다.
“오랜만입니다, 기쿠치히메. 노부나가 공과 오이치노카타께서도 평안하신지요.”
남만인과 왜인이 자기 눈앞에서 조선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도 이들에게 쏠렸다. 이항복은 다소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잠자코 방관자가 되기로 했다.
“두 분께서는 모두 건강하십니다. 저를 바다 건너로 보내면서 무척이나 슬퍼하셨지요. 아참, 저는 이제 조선 왕실에 속한 사람이 될 겁니다. 혼인을 하는 이상 어린아이였던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일본에서 제가 보인 미숙했던 모습들은 그만 잊어주셔요.”
이 말과 함께 그녀가 보인 미소는 꽃이 피는 듯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항복은 미소 속에 섞인 살벌한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눈 깜박할 사이 나타났다가 번개처럼 사라졌지만,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의사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어려서 범한 실수들은 성장한 뒤에는 즐거운 추억이 됩니다. 하지만 그건 본인이 떠올렸을 때나 그런 것이지, 남이 의도적으로 파헤칠 일은 아니지요. 더구나 가족도 아닌 남이, 자기도 남에게 들은 풍문을 가지고 함부로 퍼뜨릴 성질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세스페데스 역시 왜희의 눈에 서렸던 살벌한 기운을 본 모양이었다. 아무 말도 않겠다는 그 표시에 왜희의 얼굴에는 또다시 웃음꽃이 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도성 서문 밖에 남만사를 차리셨다면서요? 다음에는 그쪽으로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왜희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항복은 그제야 그녀에게서 조선 여인들은 쓰지 않는 낯선 향내가 풍기는 것을 알았다. 으음, 사향은 아닌데 무엇이려나.
주변을 쓱 둘러보니 관리들, 종친들이 계속 왜희를 흘끔거리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모습이 보였다. 개중에는 눈을 빛내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필시 왜희의 행색에 대해 저들 나름대로 품평하는 중이리라.
왜희가 상감에게 ‘종친의 정실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 말은 이항복도 들었다. 도성에 오면서 왜희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백성들에게 뿌렸는지에 대한 소문도 들었다. 둘 다 이미 시중에 퍼져 있다. 게다가 오늘은 그 미색을 온 궁궐이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재물에 대한 소문만 퍼졌을 때는 혼담에 관심을 보이는 종친이 많지 않았다. 아무리 재물이 많다고 해도 상대는 왜인이다. 일반 사대부 집안이라도 왜인과의 혼사를 꺼릴 텐데, 종친들이 쉽게 관심을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오늘 저 미색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니…어른들은 아직 망설일지 몰라도, 젊은 종친들 중에는 왜희에게 열을 올리는 자가 분명히 나올 것이다. 지금도 도성에서 첫째가는 망나니가 타는 듯한 눈으로 왜희를 쫓고 있지 않은가.
이항복이 보기에, 신랑감이 갖춰야 할 첫째 조건은 왜희가 가져온 재물을 기반으로 엉뚱한 짓을 벌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그런 고로 저 ‘놈’은 후보로 거론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마 상감도 저 작자는 안중에 두지도 않고 있을 터였다.
– 24 –
“나가마스라 하였지! 그대 조카가 그날 벌인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분 잡쳤다. 기껏 준비한 내 ‘아들’의 결혼식인데, 엄청나게 진행에 지장을 받았다. 차차 그년이 입고 나타난 일본식 예복이 세자빈이 입은 대례복만큼이나 화려했으니, 어떻게 우리가 피해를 안 보겠는가?
더구나 일본식 예복은 낯설고 신기한 물건이니 더더욱 눈길이 쏠렸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결혼식 하객이 신부보다 화려한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에티켓 같은 게 없지만, 그런 정도는 당연히 챙겨야 할 거 아닌가! 더구나 그 주변에서는 몇몇 종친들이 몰려 소란까지 벌였다!
지난번 알현에서 매우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던 호감도 게이지도 단박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나한테 보인 태도, 눈물, 그거 다 거짓이었나? 이 망할 년이 세자를 못 먹게(…) 되니까 일부러 결혼식에 깽판을 놓으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년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알아야겠다. 차마 계집애를 잡아다 무릎을 꿇릴 수는 없으니, 만만한 게 보호자인 나가마스였다. 그래서 불러다 놓고 한참을 깠다.
“말해 보라! 혹시 왜국에서는 이게 일반적인 관습인가?”
실컷 두들기다가 그것도 지쳤다. 추궁을 그만두고 다그쳤더니, 쩔쩔매던 나가마스가 뭐라고 대답을 했다. 나가마스보다 조금 뒤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고니시가 급히 통역했다.
“왜국에서는…명문가가 혼사를 치를 때면 일족 모두가 예복을 입고 임석합니다. 제 질녀는 자신도 이제 조선 왕실의 일족이라고 생각하고, 한껏 정성을 다해 차린 것입니다만…전하께 이토록 실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행동을 조심하게 하겠습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 하니 조금 화가 가라앉았다. 열여섯 살 어린애가 잘 모르고 저지른 실수라고 하면 용납하지 못할 바도 아니고.
“알겠다. 조선에서는 그리 화려한 복식을 즐기지 않으니, 앞으로는 가급적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도록 하면 좋겠다.”
일본 무가들 생활방식은 나도 잘 모른다. 그런 화려한 옷이 정말로 하객들이 입는 예복이 맞는지 그것도 모르고, 그러다 보니 나가마스한테 그거 되는대로 둘러대는 거짓말 아니냐고 반박하지도 못하겠다. 오늘은 이 정도로 그치는 수밖에 없겠다.
“예, 전하. 조심하게 하겠습니다.”
나가마스가 재차 사과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락의 뜻을 표했다.
– 25 –
“아아, 조선 국왕이 빨리 결판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원각사에 있는 차차의 숙소를 향하면서 나가마스가 장탄식을 했다. 조카의 배필이 정해지는 그날까지, 그가 겪어야 할 고난은 끝이 없을 모양이었다.
“첫 알현을 했던 그날부터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어. 그러더니 이런 일까지 벌어지다니.”
조선 국왕을 처음 만난 날, 차차는 조선 국왕에게 협박을 당했다고 했다. 헌데 나가마스가 듣기에는 차차의 말이 별 설득력이 없었다. 조선말로 오간 대화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선 국왕의 표정이나 어조는 살필 수가 있었다. 사람을 겁박하는 투가 전혀 아니었다.
지금 한 이야기가 정말이냐고 따져 물으려고 했지만, 차차는 외숙에게 말할 틈을 아예 주지 않았다. 자기가 할 말만 냉큼 끝내고는 자기 숙소인 원각사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고니시가 그날 국왕과 차차 사이에 오간 대화에 대해서 실토한 뒤에야 진상을 알 수 있었다.
발끈한 나가마스가 원각사로 찾아가 따지자 차차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조선 국왕이 자기를 혼인식에 나오도록 허락했으니 그 자리에서 괜찮은 조선 왕족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러려면 눈에 띄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아즈치에서 가져온 자기 혼인예복을 입고 세자의 결혼식에 갈 줄이야.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 나가마스는 차차가 고니시에게 조선말과 유학 경전만 배우는 줄 알았다. 헌데 알고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동안 차차가 중요하게 여겨 배운 것은 조선에서는 어떻게 꾸민 여자를 좋아하는지, 어떤 태도를 보여야 남자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지 등등이었다. 그에 따라서 행동한 결과, 그날 알현장에서 국왕과 신하들 모두가 넋이 나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잘 해 놓고 어제는 왜 그랬단 말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고니시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와 동료들은 조선에서 필요한 정보를 모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주군인 히데요시가 차차의 모친 오이치를 연모하고 있음은 알고 있지만, 차차의 결혼 문제에까지 관여하라는 지시는 받지 않았다.
나가마스도 더 이상 고니시를 추궁하려들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고니시에게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쪽은 자신이 아니라 차차였다. 형 노부나가의 그늘 아래에서 즐기기만 하면서 살아온 자신에 비하면 차차 쪽이 훨씬 힘이 강했다.
이제는 국왕이 하루빨리 배필을 정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되든 빨리 저 망할 계집애를 차고앉아야 자신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흠, 저놈들도 원각사에 머무르고 있단 말이지. 여차하면 해치워야 하나.”
나가마스 일행이 원각사 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바로 옆 골목에서 보며 건들거리는 무리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불량해 보이는 왈패 네 명이었다.
“아니, 저 왜놈들 둘은 동평관에 머무르는 놈들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각사 여승방에는 저희가 말씀드렸듯이 왜희와 왜인 시녀 스무 명만 있습니다.”
우두머리가 씩 웃었다. 원각사 여승방이라면 이미 두어 번 담을 넘어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자루에 넣어 메고 나오고, 밤이 새기 전에 도로 갖다 넣는 정도는 손바닥을 뒤집듯 쉽다. 작정만 하면 오늘 밤이라도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나리, 예전에 가지고 놀 비구니 하나씩 빼낼 때랑은 다르지 않을는지요? 아무래도 경비가 더 엄중할 터인데, 예전보다는 어렵지 않을까요. 게다가 후환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못 건드리면 전하께서 진노하실 텐데….”
그동안 두목과 함께 별의 별 짓을 다 했고, 단 한 번도 관가에 잡히지 않는 등 도성 안에서 무서울 게 없었던 졸개들이다. 하지만 지금 두목이 하려는 짓은 걱정이 되었다. 그런 부하들 심정을 이해했는지 두목이 부하들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라. 당장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은 우리 어르신한테 졸라서 정식으로 청을 한 번 넣어볼 테다. 그게 안 되면, 그때 가서 시도해 보도록 하지. 이미 언질은 넣었으니 저쪽에서도 싫다고 하진 않을 거다. 아니, 그냥 좋아하는 것 같던데.”
두목의 눈가에서 비릿한 광채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