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06
2부 0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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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평관에서 분노의 일성이 터져 나왔다. 건물 밖으로까지 퍼져나가진 않았지만 방에 앉아 그 소리를 마주 대한 사람은 등을 움츠릴 정도였다.
“조선 국왕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혼인할 사람은 저예요. 제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혼인하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거죠?”
나가마스는 또 국왕에게 호출을 받았다. 죽을상을 하고 입궐해 보니, 역시나 차차 문제였다. 귀한 처녀가 어찌 외간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마음대로 혼약을 맺느냐는 이야기였다.
차차가 임해군과 혼약한 줄은 나가마스도 몰랐다. 쩔쩔매고 있으니 국왕 쪽에서 임해군에 대한 악평을 신나게 쏟아놓았다. 그리고 가능한 빨리 제대로 된 신랑감을 구해줄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노부나가 숙부님이라면 모를까, 조선 국왕은 저보고 혼인을 해라 마라 할 권리가 없어요. 다른 신랑감을 보여주는 정도라면 모를까,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하세요.”
“네 말대로다. 하지만 국왕이 내게 말하길, 그 왕족은 세평이 매우 나쁜 불량배라고 하더라. 국왕의 충고대로 보다 착실한 다른 남자를 택하면 어떻겠느냐. 도대체 그 임해군이라는 자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든 거냐?”
“임해군님은 강해요. 조금만 잘 다듬어주면 분명히 대단한 무사가 될 거예요. 그리고 무척 단순해 보이더군요. 너무 영리한 남자는 제게 필요 없어요.”
차차가 눈을 빛냈다. 좌우를 물리고 차차와 독대하던 나가마스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차차가 남자를 고른 기준이 자기 예상과는 너무도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네가 고른 그 청년에겐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도 없어. 지금 조선왕에겐 아들이 여덟이나 있다고 하더구나. 네가 정녕 조선의 왕비가 되고 싶다면, 결혼한 세자 말고 나머지 왕자들 중 하나를 고르는 게 훨씬 온당하지 않겠느냐.”
“안 돼요! 다들 너무 어리다고요. 하지만 임해군님은 당장이라도 공훈을 세울 수가 있어요. 세자님과 대군님보다 훨씬 많은 공을 세우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인정하면, 국왕님도 자기 자리를 임해군님께 물려줄 거예요. 그게 당연한 일이잖아요?”
일본에서는, 더구나 생존이 최우선적인 목표가 된 전국시대 이후로는 적자, 장자라고 해서 부친의 지위를 그대로 계승하는 일은 드물었다. 설사 물려받더라도 자리를 지킬 충분한 힘이 없다면 유능한 형제에게, 혹은 신하들 중 하나에게 쫓겨나기 일쑤였다.
영주들이 자기 후계자를 선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크게 보는 조건이 가문과 영지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었다. 친아들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일족 중에서 양자를 뽑아 지위를 물려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
“차차야, 조선에서는 아들이 하나도 없을 때나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물려준다고 하더라. 네가 정말로 조선 왕비가 되고 싶다면, 남은 왕자들 중 하나를 얻은 다음 세자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제가 열 살이라면 그래도 되겠죠. 하지만 그 어린애들과 결혼하고 싶진 않아요. 저는 지금 조선에 남편을 찾으러 왔지, 돌봐줘야 할 어린애를 찾으러 온 게 아니에요.”
차차가 딱 잘라 대답했다. 외삼촌의 의견 같은 건 전혀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조선도 전쟁을 하잖아요. 지난겨울에도 북방인들과 전쟁을 치렀다고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이제 노부나가 숙부님이 천하통일을 이뤘으니 전쟁이 없겠지만, 조선에서는 계속 전쟁이 있을 거예요. 노부나가 숙부님이 제가 있는 조선을 치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 명나라나 북방인들과 싸우겠죠?”
노부나가가 조선에 대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모르는 나가마스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차차의 계획이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임해군님은 이제 15세예요. 전장에 나가기만 하면, 분명 용명을 떨칠 거예요. 다듬어지지 않은 무재이긴 하지만, 자질은 있어 보였어요.”
“힘을 모아서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이냐?”
“아니요. 조선은 큰 나라에요. 10개 쿠니(?) 정도는 된다고 하더군요. 이런 커다란 나라를 지배하는 국왕에게 맞서서 반란을 일으키기가 쉽겠어요? 임해군님은 영지가 없으니 그럴만한 군대를 모으기도 쉽지 않아요.”
일본에서는 나라 국(國, ?) 자를 사실상 조선에서의 도 단위 정도 의미로 쓴다.
“어디까지나 실력으로, 당당하게 성과를 보이고 공훈을 쌓아서 국왕이 임해군님을 계승자로 고르게 만들겠어요. 세자는 늘 방에서 글만 읽는다는데, 그럼 전장에는 나갈 엄두도 못 낼 거 아니에요? 그만큼 임해군님이 부각되기 쉽겠지요.”
“조선에서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자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누가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먼저 쳐들어가면 되잖아요. 임해군님이 장수가 되어 북방인들과 명나라를 정벌해서 넓은 땅을 얻으면, 조선 국왕도 누가 다음 국왕으로 더 어울릴지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겠지요.”
나가마스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알기로 조선은 전쟁 자체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나라였다. 저 야심찬 계획이 과연 현실성이 있을까?
“조선은 80여 년 전에 규슈를 공격한 적이 있다. 만약 조선왕이 임해군에게 일본을 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어쩔 테냐?”
“노부나가 숙부님이 먼저 조선을 공격하지만 않으면, 제 얼굴을 봐서라도 그런 곤란한 일은 없을 거예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부처님께 비는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까지 나오니 나가마스로서는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멍하니 있다가 가까스로 한 마디를 더 꺼냈다.
“하지만 무재가 있다 한들, 성품이 엉망진창이라면 좋은 남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세평이 저렇게 나쁜데, 임해군이 좋은 남편감일까?”
“괜찮아요. 제가 원하는 남자는 저를 왕비 자리에 앉혀줄 사람이지, 평범한 남편 노릇이나 할 사내는 아니거든요. 물론 아내를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다면 끝장을 낼 거지만요.”
차차가 눈을 빛냈다. 조선 국왕이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허락하게 만들어버리면 된다. 고니시를 통해 임해군의 집 위치는 이미 확인해두었다. 시녀들 중에 한 사람 섞여 있는 여자 무사에게 시켜서 전언을 보내야겠다. 움직이라고. 그 김에 고리도 하나 더 걸자.
몸놀림도 재빠르고 변장도 능숙한 여자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다녀올 수 있으리라.
– 30 –
원각사 주변에 부쩍 순라군이 늘었다. 아예 움직이지 않으면서 한 자리에 죽치고 번을 서는 군사들도 여럿 보였다.
“이래서야 담을 넘기가 영 어렵겠는뎁쇼.”
담장 모서리로 머리를 내민 을동이 투덜거렸다. 어르신께서 궁에 들어갔다가 상감께 면박만 당하고 돌아오셨다더니, 아무래도 그 탓이 분명해 보였다.
“나리, 역시 계획대로 해야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무리 밤이라지만, 횃불을 치켜든 순라군이 저렇게 자주 도는데 전혀 들키지 않고 담장을 넘을 재주는 없었다. 게다가 필시 절 안에도 파수를 서는 중들이 있을 것이다.
“처소 바로 옆에는 파수를 서지 못하게 했다 했지만, 확실히 어렵긴 하겠구나.”
임해군이 혀를 찼다. 그 역시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밤나들이 때 입는 검은 옷으로 온몸을 싸고 있었다. 손짓이 부하들을 움직였다.
“갑동이 네놈은 당장 가서 미리 보아둔 집에 불을 질러라. 불길이 오르면 순라군들이 그쪽으로 주의가 쏠릴 테니, 그 틈에 을동, 병동, 정동 너희 셋은 나와 함께 담을 넘는다.”
당연히 갑동, 을동, 병동, 정동 다 본명이 아니다. 패거리 내에서 진짜 이름을 숨기기 위해 쓰는 가명이다. 이들은 임해군 밑에서 패거리를 맡아 각자 움직이는 부두목들이었다. 나이는 다들 임해군보다 많지만 임해군의 지위가 지위니만큼 철석같이 따랐다.
평소라면, 담장 안에서 먹잇감을 낚아채 나오는 건 이들 부두목들이 나서서 실행했다. 허나 오늘은 임해군이 직접 나설 필요가 있었다. 비구니야 그년이 그년이니 아무나 하나 낚아채면 그만이지만, 오늘은 안에서 거사까지 확실히 치를 작정이니까.
“불꽃이 보이면 절간 안에서도 소동이 날 텐데 들어갈 수 있을까요?”
“병동이 네놈은 잔말이 많구나. 소란이 난 만큼 안으로 숨어들기는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 다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임해군은 음흉하게 웃으며 기억을 되살렸다. 분명히 왜희는 임해군을 허락한다고 했었다.
“그대가 모시는 분께서는 남편을 찾으러 오셨다지? 나는 스스로 장부로 자부하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적당한 남편감이 아닌가?”
아무리 임해군이라도 궁궐 안에서 외간 여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는 부담스럽다. 마침 왜희 옆에 통역으로 따라온 듯한 왜인 수행원이 있었다. 왜인 사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주변을 살피며 우물쭈물했다.
“왜인들은 강한 자를 좋아한다더군. 나는 앞을 막아서는 어떤 자도 쓰러트릴 자신이 있네. 혹 믿지 못하겠거든 자네가 시험해보든가.”
왜인들이 칼을 잘 쓴다지만, 임해군도 칼이라면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조선의 종친이다. 이 왜인이 미치지 않은 이상 자기를 다치게 할 리가 없었다.
“어허! 왜희는 전하께서 모신 손님이거늘, 어디 점잖지 못하게 외빈 앞에서 소란인가!”
갑자기 옆에서 누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종형 당은군이었다. 당은군은 하성군의 큰형 하원군의 장남이다.
“당은군께서도 왜희에게 흥미가 있으십니까? 허나 이미 혼인하셨으니 곤란하겠습니다. 제가 듣기로 왜희는 정실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측실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하니, 이미 혼인하신 당은군께서는 유감이지만 자격이 없으십니다.”
“아니, 이놈이!”
당은군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궐내였고 지금 세자의 국혼이 치러지는 중이며 바로 저쪽에서 상감이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당은군은 이를 악물고 인간성 더러운 종제에게서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저희 히메께서는 귀공의 위엄이 무척 훌륭하다 하십니다.”
당은군과 드잡이질을 하느라 잠시 눈을 돌린 사이 왜희가 살짝 귀엣말을 건넨 모양이었다. 수행하던 왜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상전이 내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왜희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 채 혼인식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인이 자기 주인을 대신해서 질문에 답했다. 코앞에서 귀를 대고 들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나리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맞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임해군은 눈을 들어 왜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때마침 살짝 고개를 틀어 눈을 마주친 왜희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임해군은 그 볼에 깊게 파인 보조개 속에 그대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어제는 시녀를 보내 자기를 빨리 만나러 오라고까지 했지. 전하께서도 이미 벌어진 일로 하면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하실 거라고. 자, 그러니 하는 거다. 불길은 아직 오르지 않았나?”
마치 임해군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재촉을 받은 듯, 상당히 떨어진 민가 두 곳에서 동시에 불길이 올랐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순라군들이 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뛰어라!”
네 사람이 일제히 원각사 담장에 달라붙었다. 몸을 날려 담장 둘을 연달아 넘자 곧 목표로 삼은 여승방 앞에 도착했다. 이곳은 화재 소동과 상관없이 조용했다.
임해군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에 부하들에게 망을 보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미리 들은 것처럼 방에는 이불을 덮은 여자 한 명이 미동도 하지 않고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안 보였지만 키와 몸피, 머리카락 길이가 대략 그날과 같았다. 틀림없다.
“자, 그럼 우리 일을 치러 보자!”
임해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훌러덩 벗어던진 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일을 치르고 튀는 게 목적이 아니라, 현장을 남들에게 들킴으로써 왜희와의 관계를 공인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도망칠 준비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아 자고 있나 했던 상대는 뜻밖에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쪽에서 옷을 헤쳐서 살을 드러내는데도 반항하지 않았고, 급히 몸을 벌려 사내를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임해군은 속으로 환호하며 그대로 자신을 던졌다. 역시 상대를 정확히 보았다고 생각하면서.
방 안은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퍽퍽 하는 살 부딪는 소리,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뭐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비명 소리도 들렸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상관하지 않기로 작심한 임해군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마침내 쌓아두었던 정(精)을 토해내고서야 뜨겁고 강렬했던 그 여체 위에 온몸을 쓰러트렸다.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은 이제 자신의 것,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소유물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두 귀를 찔렀다. 필시 소리가 나서 달려온 여승이리라. 모든 힘을 한껏 쏟아내고 나른해져 있던 임해군이 유유히 돌아누웠다. 보고도 모르냐고 한 마디 핀잔을 주려는 순간 그대로 몸이 굳었다. 눈앞에는 옷을 멀쩡하게 차려입은 왜희가 서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시녀와 오늘 방을 바꾸었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너무도 끔찍하여 뭐라 말을 할 수 없군요.”
무의식적으로 자기 몸 아래에 깔려 있던 얼굴을 보았다. 키도 몸피도 다 왜희와 흡사했지만 얼굴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순간적으로 힘이 쫙 빠졌다.
“임해군님, 소녀는 임해군님을 마음에 두어 깊은 인연을 맺으려고 생각했었습니다만…이런 일을 저지를 분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궁궐에 계시는 전하께 알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벌거벗은 몸 아래에는 여자가 깔려 있고, 이미 밖에는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은 원각사 중들이 몰려오고 있다. 부하들은 잡혔는지 도망갔는지 하나도 없다. 임해군은 지금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