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07
2부 085화
– 31 –
“저 무도한 놈을 매우 쳐라!”
이번에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그동안 벼르고 별렀다. 그동안 증거를 못 잡아서 혼을 못 내고 놓아둔 건데, 뻔뻔하기도 하지 감히 이런 짓을 저질러? 그것도 왕실 원찰에서?
“전하, 그래도 종친인데 다짜고짜 매를 치라 하심은….”
“닥치라! 비록 왜희가 볼모로 이 나라에 왔다 하나, 엄연히 손님으로 맞아들였고 종친들 중 적당한 이를 골라서 혼인을 시키기로 했다. 이는 왜희를 우리 종실에 받아들인다는 의미인데, 그런 상대를 겁간하려 하였으니 이 어찌 가벼운 죄란 말이냐!”
임해군에게 차차를 넘겨줄 바에는 차라리 세자한테 후궁으로 주는 게 낫다. 아니면 본인이 측실은 싫다고 하니 아직 미혼인 광해군과 맺어주든지. 그 예쁘고 착한 미소녀를 임해군 따위 망나니의 품에 안기게 하다니, 그게 될 말인가? 멀쩡한 종친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성군이 대궐로 달려왔지만 궐문도 넘어서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대로 잡아다 의금부 다른 감방에 처넣었다. 생각 같아서야 두 부자를 한데 묶어놓고 같이 매를 때리고 싶었지만, 하성군이 아들을 부추겼다는 확증은 없어서 일단 가둬만 두었다.
“전하! 아니옵니다! 겁간이 아니었사옵니다!”
형리가 매를 들고 다가서자 형틀에 묶인 임해군이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면서 소리를 쳤다. 빤한 변명이겠지만 한 번은 들어주기로 했다.
“그날, 국혼 날 왜희를 만났습니다! 그날 왜희가 신에게 호감을 표했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신의 부친이 전하께 허혼을 받지 못하자 왜희 쪽에서 ‘그럼 우리 두 사람이 먼저 일을 저질러 전하께서 허혼을 하실 수밖에 없게 하자’ 하였고, 신은 그에 응했을 뿐입니다!”
“이런 못난 놈이 종친이라니.”
진심으로 기가 찼다. 종친, 아니 남자 자격도 없는 놈이 아닌가. 분명히 놀아나서 재미를 본 건 지 X인데, 왜 여자를 탓해? 더구나 차차는 임해군과 어떤 약속도 한 바 없다고 했다. 그저 자기 앞에 와서 건들대는 사람이 있기에, 그냥 좋게 대했을 뿐이라고 했다.
“즈, 증인이 있사옵니다! 신이 원각사를 월장하기 전, 신의 집으로 찾아왔던 왜희의 시녀가 있습니다! 그 시녀를 불러다 신과 대질시켜 주소서! 그리하시면 신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을 전하께서도 아실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화간(和奸)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만 실수로 시녀를 범했을 뿐입니다.”
임해군은 악에 바쳐서 고함을 지르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제놈이 생각하기에도 자기가 벌인 짓이 맞아죽을 잘못인 줄은 아나 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대로만 처벌한대도 강간범은 교형(교수형), 강간미수범도 장 100대에 3천리 유배형에 처하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헌데 이걸 화간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겨우 장 80대로 낮아질 뿐이다. 하긴, 죽도록 맞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긴 하겠지.
“좋다. 원각사에 나장을 보내 왜희가 거느린 시녀들 중 임해군에게 사자로 갔던 자를 찾아 데려오게 하라! 허나, 설사 화간을 하려 했다 해도 임해군이 실제 범한 대상은 왜희가 아니라 그 시녀였으니, 강간죄를 범했음은 틀림이 없다. 일단 장 30대를 먼저 집행하라!”
“저, 전하! 살려주옵소서!”
“쳐라!”
엉덩이가 피범벅이 된 임해군이 반쯤 정신을 잃고 있을 때 심부름을 보낸 나장이 돌아왔다. 헌데 보고를 들은 금부도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전하, 송구하오나 왜희의 시녀들 모두가 임해군저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부인하니, 그중에 정확히 누가 사자 노릇을 한 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단 말이냐?”
“아니, 그것이…왜희가 자기 시녀들 스무 명을 모조리 데려왔다고…하옵니다. 신들로서는 그리하는 연유를 도저히….”
“…들어오라 하여라.”
저 계집애가 무슨 심사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일단 들여놓고 뭘 하려는지 보자.
차차는 친국장에 시녀 스무 명을 줄줄이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내게 예를 올렸다.
“전하, 소녀에게는 무척이나 무섭고 당황스러웠던 일이오나, 전하께서 가급적이면 공정하게 일을 처결하고자 하신다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에 왔사옵니다. 임해군님께 제 시녀들 얼굴을 보여드리면 되는 것이옵니까?”
차차가 조선말이 능숙하긴 해도 압존법은 아직 못 배운 모양이군. 하여튼 증인을 대질시켜 주겠다니 칭찬을 해야 할 일이다. 사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그냥 ‘그런 시녀 없다’고 부인해 주는 편이 더 좋겠는데.
차차가 지시하자 시녀 스무 명이 한 줄로 늘어섰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임해군은 고개를 들라! 네 눈앞에 왜희의 시녀들이 도열했으니, 그중에 사흘 전에 네 집에 찾아온 자를 찾아 지목해 보아라!”
임해군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형틀 위에 엎드린 채 간신히 좌우로 돌리던 얼굴이 돌연 창백해졌다. 그리고 힘겹게 한 마디를 뱉었다.
“어…없습니다, 그 시녀가…없습니다, 전하. 시, 신을 희롱하…지 말고 그 시녀를 보내달라 해주소…서. 제게 전갈을 가지고 왔던…그 시녀가 분명….”
“전하께서도 보셨겠지만 임해군님을 찾아간 제 시녀는 없었습니다.”
차차가 임해군을 무시하고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 그 인사를 받았다. 그냥 없다고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확인까지 시켜 물고 늘어질 소지를 없애다니, 차차도 꽤 꼼꼼한 성격인 모양이다.
“그대야말로 이 일로 분격했으리라. 내 범인인 임해군을 엄히 벌하고, 피해를 당한 시녀는 그 아픔을 충분히 배상케 하겠으니, 그만 화를 풀도록 하라.”
“배려에 감사드리옵니다. 허나 소녀에게 청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내 들어주마.”
임해군을 거세시켜 달라거나 사형에 처해 달라는 부탁이라면 기꺼이 들어주지. 헌데 차차가 내놓은 부탁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임해군님을 남편으로 맞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맹세컨대 눈이 동그래진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친국장에 있던 사람들 전부 말을 잇지 못했으니까.
“그날 국혼을 하는 자리에서 혼약을 맺은 것은 아니나 호감을 느낀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임해군님이 독단으로 요바이를 벌이기는 했으나, 그 역시 소녀를 마음에 깊이 두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정을 받아들이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거 강간미수 피해자가 할 말이 맞는 거야? 아니, 일본 여자들은 원래 생각하는 방식이 저런가? 요바이는 또 뭐야? 남자가 여자 방에 숨어드는 걸 그렇게 부르나?
“저 불한당은 그대를 겁간하려 했다. 그런데도 남편으로 맞겠다는 것인가? 엄중히 처벌하여 그대에게 사죄하게 하고, 이 일을 잊은 뒤 다른 이를 남편으로 찾음이 마땅하지 않은가?”
“임해군께서 소녀를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무도한 행동은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하나 이는 어린 나이 탓, 장차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귀한 분께서 마음을 보이신 이상 그에 답하는 것도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이게 16세기라 그런가, 쟤가 일본인이라 그런가, 그냥 쟤가 특이한 건가? 강간 시도가 무슨 사랑의 표시야, 미친놈의 개X랄이지. 머리를 싸쥐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은 탓에 차마 실행하지 못했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질문을 하나 했다.
“내가 너희 둘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는가?”
“왜국 땅에 있는 외숙에게 편지를 내어 이번 일에 대해 상세히 고하고, 어차피 원하는 이를 맞아 혼인할 수 없다면 조선에 있는 의미가 없으니 다시 돌아가게 해주십사 청하겠습니다.”
이건 사실상 나한테 하는 협박이다. 상세하게 알린다고? 자기 수행원들을 내가 흩어 놓고, 2백 명이나 데려온 호위병들도 하나도 신변에 두지 못하게 하고, 군사 하나 없는 절간에 둬서 제대로 보호도 못 받다가 강간당할 뻔하게 만들었다고 노부나가한테 이르겠단 말이지?
그 편지를 받은 노부나가의 반응은…상상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임진년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쳐들어올지도 모르지. 제기랄, 강간범 새끼 하나 때문에 전쟁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다니. 혹시 이 망할 계집애도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아님 그냥 저놈이 잘생겨서?
“알겠다, 좋도록 하라…하지만 그대의 시녀를 겁간한 죄, 그리고 애꿎은 백성들 집에 불을 질러 일가를 거지로 만든 죄는 엄히 묻겠다.”
방화죄는 장 100대에 2년 동안 유배되는 벌을 받는다. 여기에 강간죄 처벌을 더하면 이건 갈데없이 사형인데…젠장, 죽이면 결혼을 시킬 수 없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차차가 먼저 나서서 선수를 쳤다.
“전하, 강간죄는 면하여 주옵소서. 제 시녀가 말하길, 궁에서 임해군님을 처음 보았을 때 그 훌륭한 자태에 반해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불 속으로 침입했을 때도 임해군님임을 알고 기꺼이 받아들였었다 하니, 이는 강간이 아닌 화간이라 할 것입니다.”
“화간이라 해도 장 80대는 맞아야 한다.”
“이미 30대나 맞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책임은 임해군님이 이 시녀를 측실로 맞아 거느리게 함으로써 지게 하소서. 방화에 대한 벌은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충분히 배상하여 대신하겠나이다. 임해군님에게 그럴 재산이 없다면 제가 가져온 재물이라도 쓰겠나이다.”
이건 임해군에게 천사가 내려왔다고밖에 말을 못 하겠다. 저 망나니가 전생에 우주라도 구했나? 도대체 어떤 콩깍지가 눈에 씌면 여자가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걸까. 차차, 너 네가 무슨 평강공주인줄 알아? 내가 장담하는데, 저 XX는 바보온달이 아니야.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 차차가 또 입을 열었다. 또 무슨 부탁을 꺼내려나 싶어 긴장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내게도 환영할만한 이야기였다.
“다만, 치기어린 실수는 단 한 번이면 족할 것입니다. 추후 임해군님께서 또다시 이런 짓을 반복한다면 소녀는 즉시 이혼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이번에 면한 처벌까지 모두 한꺼번에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좋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혼인했다 해서 임해군이 얌전히 지낼 수 있을 리 없다. 비록 지금은 멀쩡하게 생긴 얼굴에 혹했을지 몰라도, 차차도 나중에는 저 인간의 막장성을 깨닫게 되리라. 그때까지만 참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지.
만약에 임해군이 차차의 정성에 감동해서 새사람이 되기라도 하면? 뭐 사람 하나 막장에서 건진 꼴이 되겠지. 짜증은 나겠지만, 크게 나쁠 건 없는 일이기는 하다. 임해군 때문에 왕실이 싸잡아 욕먹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는 일이니까.
물론 이 사태를 이렇게 마무리할 생각은 없다. 책임질 사람은 아직 하나 더 있으니 말이다.
– 32 –
추국장에 끌려나온 하성군은 바들바들 떨었다. 장남이 강간에 방화까지 저질렀다. 그나마 인명이 상하지는 않았다지만 두 사건 다 분명한 중범죄였다. 게다가 도망도 못 가고 여자를 범한 현장에서 잡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덮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집안을 잘못 다스린 죄를 인정하는가?”
“물론이옵니다.”
하성군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은 그래도 선은 넘지 않았다. 주색잡기로 도성에서 명성은 떨쳤지만, 강간을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방화라니, 상상도 못할 일이다.
“헌데 왜희가 임해군을 용서하고, 남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그 정성이 갸륵하여 내가 허락하였다. 허나 임해군은 실상 왜희가 아니라 왜희의 시녀와 방화로 집이 불탄 백성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느냐? 그 죄는 없어지지 않았다.”
하성군은 엎드린 채 떨고 있을 뿐이었다. 길게 끌고 싶지 않아서 간단하게 조치를 내렸다.
“그대가 가진 재산 중에서 삼분지 이를 몰수한다. 이는 임해군이 겁간한 시녀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배상금으로 줄 것이다. 또한 그대는 왜국으로 가서 돌아오지 말라.”
사실 차차와 사나다 부자를 받을 때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기브 앤 테이크,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없다면 볼모는 원래 교환하는 거다. 우리도 누구 하나는 보내야 하는 건가, 생각하던 참에 잘 됐다. 아들 일 책임지라고 할 겸 하성군을 보내자. 명목이야 뭐 만들면 그만이지.
“저, 전하! 왜국이라니요! 통촉하여 주소서!”
낯빛이 새파래진 하성군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대는 신장 일가와 사돈을 맺게 되었다. 그럼 사돈 일가가 어떤 배경을 갖췄는지 가보고 올 법도 하지 않은가? 또한 저들은 야만적인 왜인이니 교화가 필요할 것이다. 사돈인 그대가 머무르면서 교화하면 아무 인연도 없는 이가 가 있는 것보다 성과가 크리라.”
하성군은 엎드린 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아들이 지은 죄가 워낙 크니까 여하간 처벌은 각오했으리라. 하지만 기껏해야 재산 몰수나 봉작 취소 정도를 생각했지, 자기를 바다 건너로 쫓아내리라고는 정말 꿈에서도 생각을 못 했을 거다.
“전하, 바라건대 신의 죄를 용서하소서. 종친 지위도 내놓고, 재물도 더 많이 내놓겠나이다. 그러니 제발 뜻을 돌리시어….”
“필요 없다. 섬에 사는 야만인들을 교화시킴은 실로 큰일이니, 그대가 가서 신장을 다스려 난폭한 성정을 누그러뜨리고 앞으로는 우리와 우호적인 이웃으로 지낼 수 있도록 다스리라.”
지금 와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하성군을 마주할 때마다 늘 불편했다. 이 인간이 조선을 말아먹을 뻔한 왕, 선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까닭이 그거다. 물론 임해군의 깽판질도 보기 싫었지만.
하지만 그 집이 망할 집구석인 것과 별개로 하성군이 글씨 잘 쓰고 예법에 밝고 학문도 잘 하는 건 사실이다. 문화대사로 보내기에는 제법 어울리는 인물이라고나 할까. 명나라도 아닌 일본에서 그게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다만.
처음에 차차 보고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부분인데, 임해군과 결혼한다니까 뒤늦게 고민이 되는 사안이 있었다. 내가 똑같은 생각을 했듯이, 노부나가도 조카사위를 지원한다는 핑계로 조선 내정에 개입하려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내 아들이 줄줄이 있는 시점에서, 임해군이 가진 계승권 로또는 가능성 0%에 가깝다. 설사 내 아들들이 서자까지 전멸한다고 해도, 혈통도 먼데다가 인망도 나쁜 임해군이 보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은 그냥 0%다. 차라리 얘 동생 광해군이나 사촌들이 가능성이 높다.
그런 조선의 내부 사정을 모르는 노부나가라면, 조카딸을 위해서든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든 조선에 힘을 미치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성군을 일본에 보내 두면, 그런 헛된 일을 포기하도록 사전에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노부나가가 임해군을 지원한답시고 쓸데없는 짓을 벌이면 임해군은 곧바로 역적이 된다. 또한 광해군을 비롯한 나머지 형제자매들, 임해군의 모친을 비롯한 다른 하성군의 처첩들도 모조리 역적의 일족이 된다. 설마 하성군이 그 생리를 모르겠는가.
하성군은 바보가 아니다. 자칫 역모에 걸리면 자기 일족이 몰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안다. 그러니만큼 노부나가가 차차를 위한답시고 뭔가 뻘짓을 하면 전력으로 말릴 거다. 설득이 잘 되면 노부나가가 어리석은 짓을 멈출 거고, 안 되면 하성군이 죽고 끝나겠지.
하성군 자신이 노부나가와 결탁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는 잠시 해봤다. 하지만 처자식을 모조리 조선에 놓고 가는 주제에 설마 무슨 일을 꾸미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하성군 일가는 당연히 멸족일 테고, 본인도 잘 알 테니까.
“어서 돌아가 차비를 하라! 수행원은 딸려줄 터이니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 가면 내가 죽든 하성군이 죽든 둘 중 하나가 늙어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할 거다. 그러니 수행원도 죄다 하성군 집 문객이나 노비들로 구성하게 시켜야겠다. 그래도 종친이라고 그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놈들이 여럿 있으니, 그놈들에게 벼슬 줘서 같이 보내버려야지.
어쨌든 이 건은 이걸로 마무리를 짓겠다. 앞으로 임해군이 차차한테 쥐여 살건 말건 그거야 내 알 바 아니다. 기왕이면 빨리 혼인관계가 파탄을 맞아서 임해군을 처단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 그때까지는 그냥 잊고 살자.
참, 그러고 보니 하성군한테 딸려서 경호원으로 보내기에 딱 좋은 장수가 있구나. 둘이 참 죽이 잘 맞을 게다. 얼른 북변에서 불러와야겠다.
“잠시 일을 멈추어라!”
급히 달려온 군관이 고함을 질렀다. 흙투성이가 되어 괭이로 땅을 갈고 있던 병졸들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군관 쪽을 쳐다보았다. 올해 농사를 위해 둔전을 갈던 중이었다.
“전 만호 원균이 여기 있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마르고 수척해진 원균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 좋았던 풍채는 어디로 갔는지, 그간 겪은 고생 때문에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원균을 확인한 군관이 평소와 달리 얼굴에 살짝 웃음을 띠더니 말을 전했다.
“즉시 첨사께 출두하여 어명을 받들라. 듣자하니 전하께서 명을 내리시어 그대를 도성으로 부르라 하셨다 한다.”
순간적으로 원균의 거무튀튀하게 탄 얼굴에 광채가 떠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지난번 전쟁 때 전공을 세워 벗어나려고 했더니 야인 놈들이 북쪽으로는 거의 올라오지 않는 바람에 기회를 잡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일이 마침내 손을 써준 모양이다. 역시!
군관을 따라 뛰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복직만 되면, 원래 자리만 찾으면 그동안 여기서 자신을 괴롭혔던 뭣도 아닌 놈들에게 모조리 앙갚음을 해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이놈들아, 각오해라! 이 원균이 다시 살아났다! 다시 살아났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