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09
2부 087화
– 2 –
“전하께서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신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고래는 바다에 사는 동물인데 무슨 신앙이 있겠소?”
고래(古來)를 고래(鯨)로 받아친 내 언어유희를 팔레데스 신부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2분 가까이 지난 다음에야 그 얼굴에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아직 조선말 솜씨가 서투른 데다, 스페인 출신인 그에게는 이런 말장난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하, 전하께서는 재담을 아주 즐기시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 중 이탈리아인인 로카넬라 신부만 폭소를 터트렸다. 역시 국민성이라는 건 존재하는 모양이다. 나머지 스페인인 신부들은 모두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전하, 바쁘신 시간을 내어 저희를 만나주신 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도 저희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부디 진지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그나마 나랑 제일 잘 아는 세스페데스가 내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자식, 장난인 줄 알아챘구나. 하지만 이 골치 아픈 상황이 전부 네 편지 때문에 비롯된 거란 말이야. 내 화를 풀자면 이 정도 장난쯤은 쳐도 되지 않아?
신부들이 왔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작물 종자를 잔뜩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진정 하느님의 축복으로 보였다. 헌데 이들을 환영하고자 간소하게 자리를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닌가.
“옛날 우리 교회에서는 몽골을 지배하는 칸이 사제왕 요한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세스페데스 형제가 조선에서 보낸 서한을 보니, 조선이야말로 진짜 사제왕 요한의 땅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 의문을 풀어주신다면 진실로 기쁠 것입니다.”
새로 온 선교사들 중 좌장격인 팔레데스 신부가 내게 꺼낸 첫인사가 이 말이었다. 아놔, 그 낚시에 세스페데스 혼자만 걸린 게 아니었어? 마카오까지 걸린 거야? 설마 바티칸에서까지 확인하겠다고 사람이 몰려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추궁해보니 팔레데스 신부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께서 세스페데스 형제의 보고서를 로마에 보내셨습니다. 조선, 옛날에는 고려라고 불렀다고 하지요? 이 조선 땅에 신앙이 전해진 적이 있는지, 로마에 보존되어 있는 자료를 조사해 달라고 말이지요.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반쯤 장난으로 시도한 드립이 이런 식으로 파문을 일으킬 줄이야. 솔직히 난 교황청이 프레스터 존 따위는 이미 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다. 전설 속에 존재하는 기독교 왕국 따위는 이제 체념하고 실존하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 않았었나?
적당히 꾸며내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결국 머릿속에 떠오른 드립이 바닥나자 말장난이 튀어나온 것이다.
“전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옛 조상들께서 물려주신 그 신앙이 없다면 어떻게 이를 지켜 오실 수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신다 해도 이는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부디 상세하게 알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젠장, 그런 대단한 신앙심이 보고 싶으면, 날 붙들고 괴롭히지 말고 저기 3백년 뒤 일본에 가보라고. 그러면 2백년이 넘게 지하에 숨어 있었던 숨은 기독교도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뭐, 노부나가가 살아남은 이쪽 역사에서는 어쩌면 안 생길지도 모르긴 하겠다만.
– 3 –
군기시 방문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하고 있다. 별 생각 없이 만났던 신부들과 한참 땀을 뺀 뒤 군기시를 찾으니 청량한 휴식처를 찾은 느낌이었다.
“거 참, 이제 와서 실은 프레스터 존 따위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나는 프레스터 존의 후손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 버리면, 내가 이제까지 거론한 기독교와 유럽에 대한 지식을 어디서 얻었는지 그 출처를 다시 밝혀야 한다. 이게 처음부터 거짓말로 관계를 시작했더니 갈수록 거짓말만 쌓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음 회동 때 선교사들에게 ‘내가 아는 바는 모두 돌아가신 부왕께서 입으로 직접 전해주신 것이며, 전해진 문서 따위는 없다’고 확실히 말해야겠다. 왕위를 계승할 때가 되어서야 비밀히 구전되던 전설이지만, 이제 내 대로 끝낼 생각이라고 해야지.
“전하, 연락도 없이 어인 일이시옵니까.”
“내가 언제 미리 알리고 오더냐.”
많이 마르고 쇠약해진 김지가 나를 맞았다. 밭은기침 소리를 들으니 왠지 미안해졌다. 기껏 발명한 귀차 생산계획을 내가 각하했을 때, 김지가 얼마나 실망했는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뭐, 이해해라. 그놈은 너무 비실용적이었단 말이다! 조립식 보루로 전용한다면 혹 모르겠다만.
“건강이 좋지 않은 듯한데, 등청하지 않고 쉬어도 좋다.”
“아니옵니다. 나랏일을 하는 몸으로써 어찌 편히 쉴 생각을 하겠습니까.”
김지는 참아도 나오는 기침을 억지로 억누르며 군기시 내를 안내했다. 비어있는 건물 앞을 지나려니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서 작업하던 증기기관 제작팀 하나가 양수기 제작을 전담하게 되어, 공조 산하에 있는 치수도감으로 빠져나간 덕분에 빈 곳이다.
“공간을 잘 활용해야지. 지금 쓰는 공간이 좁다고 불평하는 자들이 혹 있는지 확인해 보고, 개중 적당한 자들을 이쪽으로 옮겨라.”
“예, 전하. 신의 불찰이옵나이다.”
건강이 안 좋은 탓인지 김지가 하는 일처리에도 허술한 부분이 약간 보이고 있었다. 정력이 넘쳐흐르던 양반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니 좀 안타까웠다.
“귀차는 지금 예순 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후장조총은 이제까지 총 2백 정을 만들었으나, 이번에 새로 받은 치륜총은 만들기 너무 어려워 아직도 스무 정이 안 됩니다.”
지금 말하는 귀차는 당연히 내가 설계한 소형버전이다. 또한 생산해 놓은 일반 강선조총은 굳이 수량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거야 뭐 생산이 이미 안정되었다 보니.
경군 조총수는 이제 전원 강선조총을 지급받았다. 하지만 지방군에게까지 보급하기엔 아직 물량이 달렸다. 어쩔 수 없지, 지방군은 활강조총으로 몇 년 더 버티라고 하는 수밖에. 풍년만 이어지면 얼른 바꿔 주마.
지금 급한 걱정은 이미 늙고 건강도 안 좋아 보이는 김지가 얼마나 오래 군기시를 담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비록 가끔 정신 나간 듯한 물건을 만들기는 해도, 발명가로서는 물론 행정관으로서도 충분히 유능한 사람이다. 솔직히 이만한 후임자를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대가 나이가 올해 몇인가?”
“일흔이옵니다. 아무래도 노쇠하다 보니 요즘 제 할 일을 잘 하지 못하여 죄스럽습니다.”
김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요즘 들어 중한 일을 많이 맡기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서리 한 사람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누구를 불러오라고 시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근래에 신이 군기시에서 가장 믿고 맡기는 세 사람이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군기시에서 일하는 관원들이 누군지, 이름도 전부 모르는구나. 한참 때는 군기시 장인들 전원을 얼굴에 생일까지 기억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김지를 제외한 다른 관원들은 누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다.
“전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검댕투성이가 다된 작업복을 입은 관원 세 사람이 내 앞에 넙죽 엎드렸다. 김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내게 소개했다.
“오른쪽에 있는 이는 종6품 주부(主簿) 변이중이라 합니다. 일찍이 문과 병과에 붙었으나, 문자를 읊는 것보다 병기를 개량하는 일에 흥미가 있어 군기시에 들어왔습니다. 장기로 삼는 분야는 화차와 화전 개량입니다.”
오, 그 ‘변이중 화차’를 만들었던 그 변이중이란 말이지? 원래는 지방관 하다가 임진왜란 터지니까 무기개발을 했을 텐데, 이쪽 세상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군기시에 들어갔구나. 과연 이 양반이 어떤 물건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된다.
“가운데 있는 이는 종7품 직장(直長) 이장손입니다. 본래 관노였으나, 솜씨가 뛰어나 신분이 면천되고 품계를 받았습니다. 화포와 폭탄을 잘 다룹니다.”
아, 우리 역사에서 비격진천뢰를 발명했다는 그 이장손인가? 그러고 보니 이 친구도 이름이 기억난다. 김지가 직접 이 친구를 면천해달라고 청하는 상신서를 올렸었지.
“왼쪽에 있는 이는 종8품 봉사(奉事) 나대용입니다. 무과에 합격한 후 강무관에 들어갔으나, 강무관에서 듣는 수업이 도무지 자신에게 맞지 않아 퇴관하고 군기시로 옮겨왔습니다. 여기선 아주 우수한 재주를 보여서 이 늙은이를 무척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나대용? 충무공 어르신과 함께 거북선을 만들었다던 바로 그 나대용? 그러고 보니 강무관 입학생 중 그동안 퇴관한 이가 7,8명 정도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에휴 못난 놈들이 떨어져 나갔구나 하고 대충 훑고 잊어버렸었는데, 그 안에 나대용이 있었단 말인가!
그 보고가 올라왔을 때 내가 좀 바쁘긴 했었다만, 너무 대충 읽었다. 처음 입교했을 때도 빠르게 훑다가 나대용 이름을 놓쳤었는데, 나갈 때도 제대로 못 보다니. 미안하네 이거.
어쨌든 개인의 적성을 살린다는 면에서 보면 나대용은 야전군보다는 군기시로 가는 편이 더 좋게 풀린 방향일수도 있겠다. 본래 역사에서도 거북선 제작에 크게 한 몫 했다는 사람이니, 여기라고 그 재주가 어디 사라졌겠는가? 어디, 한 번 물어보자.
“나 봉사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증기로 움직이는 전선을 만들고자 연구하고 있습니다.”
증기선! 그거 내가 만들라고 했다가 돈만 처먹고 중단했던 그거잖아. 나대용이 그걸 만들고 있다고? 벌써 수십 년 전에 중단된 그 프로젝트를?
“당장 만드는 건 아니옵니다. 일단은 과거 만들었던 도면과 문서들을 모아 살피고 있사온데 그 정리가 끝나야만 실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사옵니다. 갑자기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혹시 옥체라도 불편하시옵니까?”
“아니, 별 거 아니다.”
증기선 프로젝트를 살리려고 연구하는 자가 있다니 정말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선다. 몇 년 안에는 분명히 전쟁이 터질 텐데 ? 하성군을 일본에 보내면서 그걸 약간이라도 늦출 수 있기를 바랐지만 ? 과연 증기선이 때맞춰 만들어질 수 있을까?
재수가 없으면 개발은 개발대로 늦어지고, 또 돈만 처먹고 실패할지도 모른다. 정말 엄청난 낭비가 되겠지. 전쟁을 앞두고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손실이다.
“알겠다. 잘 진행해 보도록 하라.”
그래도 기술적인 필요사항을 파악하고 설계시안을 만드는 정도라면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증기기관 제작하는 솜씨도 80년 전보다는 나아졌으니, 그때는 제대로 안 됐던 기관의 소형화나 추진기구 제작도 잘 될지도 모른다. 한번 맡겨 보자.
– 4 –
“그때는 이렇게 춘향전 분위기를 잡을 수 있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지.”
그게 몇 년 전인가. 내 시간으로는 딱 10년 전, 상희의 시간으로는 14년 전? 처음 상희가 나 같은 회귀자인 줄 알았을 때가?
처음 만나서 춘향전 드립을 쳤던 건 그보다 5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고전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으면 그때 이미 상희가 회귀자인 걸 알았을 텐데, 춘향전 성립 시기를 정확히 몰라서 그만 기회를 놓쳤었다.
“춘향이가 이씨라서 미안하게 됐네.”
상희가 웃었다. 지금은 승은상궁으로써 그에 맞는 의상을 입고 있어서 의녀 때와는 복장이 다르다. 의녀 때 가지고 있던 직급도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여전히 내의원에서 일하고 있다. 혹시 하고 걱정했지만 딱히 따돌림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지만, 지금 상희 성씨가 이씨라서 입궁할 때 조금 껄끄러워질 뻔 했다. 하지만 중전도 아닌데다, 본관을 따지면 전주 이씨는 아니라서 적당히 유야무야됐다.
“뭐 어때. 어차피 배역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이니셜은 같지만 여기도 광한루가 아니라 경회루잖아.”
상희와 이런 식으로 편하게 대화를 나눌 때는 늘 사방이 트인 경회루나 향원정을 애용한다. 멀찍이 사람을 떨어트려놓고 엿듣지 못하게 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다. 침전에서야 뭐 다른 사람들이 들을게 뻔하니 다른 궁인들 대할 때처럼 말하지만.
“백신 제작은 다 됐어? 이제 필요해질 것 같은데.”
“응. 당장이라도 접종은 시작할 수 있어. 물량을 댈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하지만.”
종두법 준비 과정에서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두묘(痘苗), 즉 접종용으로 채취한 우두균을 보관하는 일이었다. 물론 효과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건 소에게서 채취한 고름을 바로 몸에 넣었을 때지만, 접종이 필요할 때마다 병 걸린 소를 현장에서 확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현대라면 냉장고를 써서 채취한 고름을 생으로 보관할 수 있을 텐데…보존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건조한 상태로 만들어 가루로 보관하는 중이야. 접종할 때는 증류수에 녹여서 쓰고. 이게 약효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시험기간을 넉넉히 잡고 실험을 해봐야 알 테지만.”
의외겠지만, 조선에서도 증류수는 만들 수 있다. 소주를 달일 때 쓰는 소줏고리로 증류해서 만든다. 진짜 소주는 에탄올에 물 탄 술이 아니라 막걸리 같은 밑술을 증류한 증류주니까.
“한의대에서 그런 것도 배웠어?”
“기본적인 약학이나 의학사 같은 건 우리도 배우니까…물론 양방 애들이 하는 것보다는 좀 약하게 공부하고 넘어가지만 말이야. 화학, 생물학도 배워.”
상희가 한의사가 아니고 일반 의사였으면 어땠을까. 예전에도 가끔 한 생각이지만,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 한의사라 조선 사회에 적응하기 쉬웠던 점도 있겠지만, 그래서 부족한 부분도 역시 있으니까.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우두가 너무 금방 낫는 병이라는 점도 문제야. 계속 새 소를 구해서 접종을 해야 하고, 한 번 감염시킨 소는 다시 쓸 수 없어. 두묘를 생산할 소를 마련하는 것도 큰일이라서.”
지금은 내의원이 보유한 소를 다 털어서 두묘를 생산하는데 쓰고 있다. 내의원에서 소라니, 무슨 소를 키우느냐고 하겠지만 정말로 내의원에는 소가 있다. 우유를 임금 전용(덤으로 중전, 세자 정도) 보약(?)으로 쓰기 때문이다. 이 소들은 낙산에 있는 왕실 전용 목장에서 방목한다.
멀쩡한 소를 우두에 걸리게 한다 하니 당연히 내의원에서는 펄쩍 뛰었다. 아무리 우두가 별 피해 없이 낫는 병이라 해도 기분이 찝찝한 건 찝찝한 것이니, 일부러 병에 걸리게 만들기를 꺼려하는 이들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또 거짓말이 동원되었다.
“우두에 걸린 소는 우역에 걸리지 않는다니, 전혀 설득력이 없었어. 나라도 안 믿겠더라.”
“다른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는걸. 그래서 야인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도 지어내야했다고.”
이 건에서 상희는 총대를 메고 머리를 쥐어짰다. 승은상궁이라는 지위는 궁정 내 질서로는 정식 후궁도 아니고 일반 궁녀도 아닌 참으로 애매모호한 위치지만, 내의원에서 필요한 일을 하는 데는 충분한 지위였다. 어의도 의녀도 상희가 하는 일을 딱히 제지하지 못했다.
“혹시 말린 두묘가 효능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제 겨우 몇 달 된 거니까 그렇게까지 약하진 않을 거야. 여차하면 효과 볼 때까지 반복해서 접종하면 돼.”
“벌써 도성에서 두창 환자가 발생한지 열흘은 됐는데 나부터 좀 맞을까?”
“안 돼. 어의들이 보면 무슨 난리가 나려고.”
상희가 딱 잘라 거절했다. 상희 자신이 내의원에서 일하는 만큼, 이 문제에 대해서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우두건 진짜 두창이건, 네 몸에 발진이 생기고 딱지가 앉는 시점에서 이미 난리가 날 거야. 내가 소 고름을 몸에 넣어서 그렇게 된 걸 알면 온 조정이 날 죽이려 들걸. 그런 꼴이 안 나려면 당당하게 우두 접종을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 필요해.”
“계기라, 계기라….”
그날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그리고 사흘 후, 광해군이 두창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성군의 아들이자 임해군의 동복동생인 바로 그 광해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