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29
2부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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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들어 농사가 어렵다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더더구나 그 일이 돈 안 드는 일이라면 더더욱 이럴 때 해두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돈 생겼을 때 바로바로 해치울 수가 있으니까.
“무종께서 이미 초안을 만들어 두셨으니 손만 보면 되지 않느냐? 서둘러 정리를 마쳐라.”
“예, 전하.”
이일을 비롯한 강무관 교관진은 장차 조선군 전체가 사용할 야전교범 작성 임무까지 맡아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 지난번 난리 때 실전 경험을 쌓은 생도들도 한몫 보태고 있고.
여기에는 전열 짜는 법이나 무기 다루는 법만 포함되는 게 아니다. 옛날 로마군처럼 숙영지 건설 때 지켜야 할 규격, 식량 보급 시 준수해야 할 사항까지 모조리 집어넣었다. 이런 거야 꼭 필요하지만 당장 돈 드는 게 아니니 흉년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연산군 때는 평락사라는 비공인 조직을 가지고 이 작업을 추진했었다. 그 당시 사림들한테 전쟁준비가 워낙 안 좋은 소리를 들었던 탓인데,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효율이 나빴다. 인적 구성이 자꾸 바뀌니 안정적으로 진행하기도 힘들었고.
지금은 전 조선군에서 가장 머리 좋고 경험 많은 장수들을 선발해서 대놓고 만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잠시 이순신도 여기 합류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기는 너무 아까우니 그러지 말아야지. 3년 상도 안 끝났고.
그리고 장차 전쟁비용을 마련하려면 세금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이것 역시 연산군 시절에 내가 손만 대다가 말았던 개혁을 되살려야 할 상황이다.
“몇 년을 계속 가뭄이 들고 농사 상황이 좋지가 않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세금을 줄여서 받음이 옳을 듯하다.”
조회에서 이 말을 꺼내자 신하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성리학적으로 따져도 흉년으로 농사가 안 되는데 세금을 원래대로 징수하는 건 안 될 일이니까. 마침 조헌이 바친 상소에서도 가뭄 때문에 힘든 백성들을 위해 노력하던 권징을 쫓아낸 정여립을 크게 비난했다.
“전하, 그러하시면 전세를 얼마나 감하여주려 하시는지요.”
영의정 유전이 나서서 물었다. 이 양반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별 존재감이 없이 일만 하던 신하다. 원래 좌의정이었는데, 전임 영의정 이영송이 고구마게이트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자 어부지리로 영의정이 되었다. 시식회 날 복통으로 불참한 게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지금 세액은 결당 40두로 고정이 되어 있사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나라에서 소요되는 비용과 가뭄으로 인한 작황 손실을 생각하면 8두 정도 감하여 줘도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세금을 20% 까주자는 말이렸다. 사실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했다간 자칫 농촌에서 식량부족 사태를 일으켜 구휼곡 재투입이라는 극약처방을 불러오게 되니, 그 꼴이 날 거라면 처음부터 안 걷는 게 맞다. 나도 그 의견에는 동의한다. 다만 실행 과정에는 이견이 있다.
“영상은 전세를 말하였으나, 나는 전세보다는 공납을 줄임이 좋다고 생각한다.”
“공납…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러하다. 이것도 이미 무종께서 그 기반을 닦지 않으셨느냐.”
공납을 전면 폐지하고 모든 세금을 전세로 통합하는 대동법. 중세적인 조용조에 기반을 둔 조세 징수 구조를 근대화하고, 현금 수입을 늘려서 재정 활용의 자율성을 높인다. 더불어서 재산 소유에 따라 세금 부담을 차등화함으로써 사회적 공정성도 개선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뭄 때문에 논밭에 물을 대느라 바쁜 백성들에게 공물을 구하러 산과 들을 돌아다니라 할 수 없다. 올해 공납을 절반으로 줄이고, 정 필요한 물품은 시전에서 매입해서 쓰도록 하라.”
종로 일대에 펼쳐진 시전은 진짜 조선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황이다. 조정 관리들이 봉급으로 현물이 아닌 저화를 받아온 지 몇십 년이나 되다 보니, 적어도 도성에서는 이들에게 필요한 갖가지 물품을 제공하기 위한 시장이 번성할 수밖에 없다.
아직 철도는 없지만, 부역으로 만든 신작로는 있다. 그 위를 소나 말이 끄는 수레와 사람이 끄는 목륜마가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거기에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배들도 있다. 흉년이라고 해도 돈 버는 데 게으른 사람은 없어서, 도성이 필요로 하는 물자 조달에는 문제가 없다.
“허나 전하, 공납으로 받아들이던 물화를 모두 시전에서 매입하면 비용을 더 비싸게 치르게 됩니다. 재정에 부담을 크게 미칠 터이니 보류하심이 어떠할지요.”
호조판서 김승석이 우려를 표했다. 이 양반도 전임 호조판서가 정철과 얽혀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갑자기 판서 자리에 앉았지만, 행정에 대한 능력 자체는 충분히 갖춘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찾아서 하는 창의력은 좀 아쉬운 듯하다.
“내 공납을 반으로 줄이라고 했지 아예 없애라고는 하지 않았다. 가뭄이 들었으니 씀씀이를 아끼고, 꼭 필요한 물품만 시전에서 구입하면 비용을 크게 들일 일이 없지 않겠느냐.”
흉년이야말로 공납이라는 제도를 없애버릴 기회다. 연산군 때도 느낀 바지만, 전세는 토지 면적에 따라 부과되는 데 반해 공납은 각호에 메겨지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 현장에서 집행할 때야 부담을 줄이려고 마을 단위로 처리하는 곳도 많다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일단은 절반으로 줄였지만, 내년에 혹시 또 가뭄이 들면 내년에는 아예 폐지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니 기왕 없앤 걸 뭐하러 부활시키냐 이대로 가자…하고 밀고 나가는 거지.
지금은 이 감세가 흉년에 따른 임시조치라고 여기니까 다들 보충할 재원 같은 건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풍년이 들면 당연히 세금을 다시 올려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전세, 즉 토지에 붙는 세금이 되어야 한다. 왜냐고? 그야 세금은 돈, 땅 많은 놈이 더 내야 하니까.
분명 반발은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돈이 나와야 전쟁을 하고, 그 싸움에 이겨야 나라는 지킨다. 그래야 이 조선이 살고 한민족이 산다.
다만 공납을 폐지하고 조정에서 직접 물품을 구매하게 되면 구매를 맡은 담당자가 장사꾼과 결탁해 단가를 부풀리거나 불량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걸 단속해서 잡아들이는 역할은…역시 의금부와 금위사에서 해결할 몫이겠지?
– 5 –
“이조좌랑 자리는 할 만한가?”
좌랑은 정6품직으로, 정5품인 정랑을 도와 육조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한다.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자리지만, 내 눈앞에 있는 이 양반은 딱히 바빠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옵니다, 전하.”
조선의 법도를 따르자면 신하를 따로 불러서 독대하기도 은근히 번거롭다. 원래 밀실정치를 배격하는 게 조선 시스템이다 보니, 불러도 꼭 여러 명을 함께 부르고 사관이 배석한다. 물론 하려고 하면 은밀히 부를 수 있지만,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그래서 내가 요즘 잘 써먹는 방법이 지금처럼 산보하는 척 나갔다가 집무실로 들이닥치는 거다. 당하는 쪽이야 뭐 놀라겠지만, 나는 독대하고 싶은 상대와 편하게 볼 수 있다. 주변을 물리기도 어렵지 않고 말이다.
“병조에서 이조로 갑자기 옮겨서 어렵지는 않았는가?”
“주상께서 명하시는 일이온데 어찌 부처를 가리겠나이까.”
말 내용만 본다면 겸손해 보이지만 표정은 전혀 겸손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자리에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시켜만 보라는 자신감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게 너무 당당하니까 건방져 보인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그냥 호감 레벨이 치솟았다.
“좋다. 그럼 그대를 형조정랑에 임명할 터이니 금위사장을 겸임하도록 하라. 맡아 일할 수 있겠느냐?”
“전하께서 명하신 이상, 기꺼이 수행하겠사옵니다.”
원래부터 이항복이 머리가 좋은 줄은 알고 있었다. 고구마게이트 때 보인 상황판단 능력을 봐도 이 양반은 금위사도 능수능란하게 휘두를 수 있을 듯하다. 과거 정호찬이, 그리고 최근 정여립이 그렇게 했듯이 말이다.
정여립은 체포령이 내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내가 보낸 선전관 ? 평소처럼 의금부를 거쳐 명령이 내려가면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당사자인 정여립에게 새나갈 우려가 있었다 ? 들에게 붙들려 조금 전까지 자기가 관리하던 옥사에 갇혔다. 수사관이 졸지에 피의자가 된 셈이다.
국문은 조헌의 상소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직접 했다. 얼마 안 가서 정여립은 자기가 권징 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누명을 씌웠다고 인정했다. 끝까지 부인할 낌새기에, 정여립이 시키는 데 따라 정철의 첩에게서 손톱을 뽑았던 형리를 불러왔더니 바로 불었다. 무서웠던 모양이다.
일가가 모조리 움직인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정여립은 혼자서만 북방으로 쫓겨났다. 가족과 함께 보냈다간 앙심을 품고 튀어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괄의 난 때 이괄 잔당들처럼 누르하치 편으로 도망가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때문에 정여립의 가족들은 모두 도성에 연금해 두고 철저히 감시했다. 만약에라도 정여립이 북방에서 엉뚱한 수작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건, 주변에서는 이 조치가 도리어 정여립에 대한 우대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이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정여립의 뒤를 이어 금위사를 통할할 사람을 뽑는 일이다. 다행히도 체포가 워낙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탓에, 정여립은 금위사 운영에 대해 사보타주를 할 여유도 없었다. 문서와 기록도 모두 고스란히 남았다. 대동계 소속 끄나풀 명단까지.
명부를 손에 쥐었으니,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모조리 정여립과 함께 제거하든가, 아니면 이들을 다독여 추스를 수 있는 사람을 새 금위사장으로 앉혀서 휘어잡게 하든가. 고민 끝에 나는 후자를 택했다.
애초에 대동계원들은 정여립이 거느린 사병도, 가신도 아니었다. 돌아가며 부임하는 상관들 중에서 유독 보스기질이 있는 녀석이 정여립이었을 뿐이다. 그동안 양자간에 쌓인 유대감이 있다 하더라도, 정여립을 위해 반역을 저지를 만큼은 아니리라고 판단했다.
만약 저들을 믿지 않고 모조리 제거한다면, 수백 명이나 되는 끄나풀들을 모조리 잡아내어 죽이거나 추방해야 한다. 사실상 모든 종친과 고관들 집에 박아놓은 정보망이 사라지는 거다. 지방 각지에 심어놓은 놈들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끄나풀들을 한날한시에 검거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공연히 설건드려서 들쑤셔 놓으면, 도망친 놈들이 이번에야말로 진짜 역도로 돌변할 공산이 높다. 그뿐만 아니라 재구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황당하기 그지없는 꼴을 보느니 유능한 후임 한 사람을 앉혀서 빨리 조직을 장악하게 하는 편이 낫다.
“전임자였던 정여립은 사원(私怨) 때문에 지위를 남용하여 신세를 망쳤느니라. 그대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항복이 맡은 금위사는 다른 의미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집단이 될 것 같다. 멋대로 놀아나서 통제할 수 없는 게 아니고, 주관이 너무 뚜렷해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다. 이항복은 내가 뭐라고 해도 기획수사 같은 건 안 하지 싶으니까.
뭐, 금위사가 꼭 내 개가 될 필요는 없다. 배신하지 않고 반적들을 찾아내는 일만 수행해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항복은 위트 있게 그 일을 잘 해치울 듯하다. 나는 운용예산이나 넉넉히 보태주면 되는 거겠지.
– 6 –
뚝딱거리는 망치질 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톱과 망치가 움직이는 데 따라서 목재가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곤잘레스 덕분에 드디어 우리 모두 바닥에서 자는 신세를 면하겠군.”
“역시 일행에 목수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동료들의 칭찬을 받은 곤잘레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망치를 휘둘렀다. 옆에서 돕는 조선인 하인들에게 적당히 지시를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휴, 저부터도 바닥에서는 못 자겠습니다.”
이들은 관사가 준비될 때까지 노고산 성당에 딸린 숙소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거기 머물면서 비로소 조선에는 침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의 전담 통역을 맡은 알라르콘 신부가 이 문제에 대해 조언했다.
“조선인들은 실내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맨바닥에 침구를 깔고 잠을 자지. 그대들도 얼른 익숙해지는 편이 좋을 거요.”
“침대 정도는 저희가 만들어서 써도 되지 않습니까?”
“원한다면. 다만 겨울이 되면 후회할 거요.”
한동안은 알라르콘 신부의 말대로 솜이 든 조선식 침구를 펴고 지내는 정도로 참아보았다. 하지만 영 불편했다. 방바닥에 이불이 있으니 움직일 때마다 밟히고 걸리적거렸다. 더군다나 방 안에 신을 신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제 좀 편하게 지내겠군. 방에 들어갈 때마다 신을 안 벗어도 되고.”
“너무 번거로웠습니다.”
없는 건 침대뿐이 아니었다. 탁자도, 의자도, 책상도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용병들은 다 자기들이 직접 만들기로 했다. 목수 출신인 곤잘레스가 조선인 하인들을 인솔해서 목공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손에 익지 않은 조선식 공구로 14인분 가구를 만들려니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만드는 로드리고 대위의 침대만 마무리하면 다 끝난다. 대위는 일부러 자기 순서를 맨 뒤로 미뤘다.
“세바스티안, 빼먹지 말고 적어줘. 내가 우리 대원들 모두를 위해 한 달이나 걸려서 침대를 만들었다고.”
“물론이지.”
용병대 기록 담당자 세바스티안이 마루에 놓인 책상에 앉아서 일지를 쓰며 대꾸했다. 이들 모두는 지금 용병으로 조선에 와 있지만, 장차 마닐라로 귀환하면 여기서 있었던 일을 죄다 총독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그 보고를 위해서 일지를 쓰는 것이다.
“지리, 풍속, 군사…모든 것을 기록해 오라는 게 총독 각하의 엄명이었지.”
잠시 부업으로 용병 노릇을 한다 한들, 이들이 본래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의 신하라는 데는 변화가 없다. 이들에게는 입수한 모든 정보를 국왕을 위해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조선군은 적과 무기를 맞대고 벌이는 백병전을 가능한 회피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들을 데리고 에스파냐식 검술과 테르시오 전술을 교육하고 있다. 조선군 자신도 자신들이 백병전을 치를 능력이 떨어지는 사실은 알고 있는지, 매우 열심히 배우고 있다.
특기할 점은 이들이 이미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인 교관단을 고용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 교관단은 200명에 달하며, 영주 한 사람과 그 가신들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자기들보다 수가 적은 우리를 보고 경쟁의식과 함께 우월감도 느끼는 듯하다. 이미 일본인들을 고용했으면서 조선인들이 우리를 또 채용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양자가 가진 실력을 비교한 뒤 더 강한 쪽을 주력으로 채택할 셈일까?
조선군이 선호하는 전투 형태는 백병전 대신 원거리에서 사격전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들은 유럽제와 약간 차이가 있는 화승총과 소형 대포, 전통적인 활로 무장했는데 놀랍게도 모두 다 같은 급의 유럽제 무기보다 사거리도 길고 정확도도 높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무기는 화승총이다. 우연히 조선 소총수들이 사격훈련을 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우리 화승총보다 무려 4배나 멀리 날아가서 목표를 정확히 맞혔다. 그제야 우리는 조선인들이 화승총 훈련은 필요 없다고 거절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만 화약을 알갱이로 뭉치는 법은 모르고 있기에, 그거 한 가지는 가르쳐주었다….』
잠시 펜을 내려놓은 세바스티안이 생각에 잠겼다. 만약 조선군과 싸우게 된다면, 에스파냐 병사들은 탄환이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총탄 세례를 받게 될 게 분명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비참한 경험이 되리라.
가능한 조선과는 충돌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개 기록관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장차 내려질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권한은 없지만, 결정을 내릴 사람들이 기반으로 삼을 자료는 충분히 기록해야 하리라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