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3
1부 0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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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구름 속에 가린 깊은 밤중. 온몸을 검은 옷으로 싼 네 개의 그림자가 경복궁 담장 옆으로 접근했다. 이들은 순라군이 지나간 직후에 담장에 바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중 둘은 패거리의 어깨를 딛고 훌쩍 몸을 날려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나머지 둘은 그대로 사라졌다.
경복궁 담장 위에는 기와가 얹혀 있다. 두 괴한은 그 기와 위에 소리가 나지 않게 엎드린 채 기회를 살폈다. 아래쪽 공간에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서자 그대로 뛰어내렸다. 마치 고양이가 뛰어내리듯,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 명의 괴한들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진짜 그림자인 것처럼 보였다. 건물 사이 공간에 몸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담장 밑과 건물 그늘로 몸을 숨겨 가면서 말소리도, 발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였다.
소리 없이 흘러가듯 움직이는 이들 앞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순라를 도는 내금위 군사 두 명이 나타났다. 이들이 별 이상을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가자 마룻장 밑에서 두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잠시 후 둘은 옆 구획과 이쪽의 경계를 나누고 있는 담장에 도착했다. 중문(中門)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좀 더 체구가 작은 괴한이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나머지 한 사람이 살짝 담장에 매달려 담 너머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 가자.”
가볍게 몸을 날린 두 사람은 다음 구역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또 담장에 마주쳤다. 멈칫거리던 키 작은 괴한이 살짝 욕설을 뱉었다.
“젠장, 담을 아직도 몇 개나 더 넘어야 합니까…?”
앞서 가던 키 큰 괴한은 짝패가 투덜거리는 데는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무겁게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한 놈 잡아서 길을 물어야겠어.”
“형님, 진심이에요?”
키 작은 괴한은 놀란 듯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층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사람을 납치하려면 그저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것보다 더 신경을 써서 움직여야 했다.
아닌 밤중에 왜 갑자기 배가 아픈지 모를 일이다. 저녁식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했건만, 왜 내 배만 아픈 건지. 하필이면 궁에서 자는 당직 날에.
자다 말고 두 번째로 뒷간에 다녀오던 무수리 계금은 투덜거리며 걸음을 빨리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물을 긷고 불을 때야 하는데 화장실을 여러 번 가면 잠잘 시간이 그만큼 줄어든다.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말년이 그년이….”
갑자기 누가 뒤에서 입을 막았다. 버둥거리려 했지만 어느새 칼날이 목에 닿아 있었다. 온몸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여기는 궁궐인데, 이 조선 땅에서 가장 경계가 엄중한 곳인데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소리 지르면 죽인다! 묻는 말에만 답해라?”
계금은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죽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죽으면 나이든 부모님은 어쩌란 말인가.
무수리 일이 급료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살림에 보탬은 됐다. 혼수도 마련할 수 있었다. 새 상감마마가 궁 밖에서 출퇴근하는 무수리들은 혼사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신 덕분에 시집도 갈 수 있는데,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괴한이 아주 천천히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막혔던 숨이 트였다고 기뻐할 사이도 없이 왼팔을 잡아 비틀었다. 계금은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았다.
“자, 솔직히 대답해라. 형님, 거 뭐라고 했지요?”
목에 칼을 댄 괴한이 잠시 머뭇거리자 주변을 살피던 두 번째 괴한이 빠르게 속삭였다.
“임금이 자는 집.”
“그래, 임금이 자는 집이 어디야?”
계금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감히 궁에 침입했다 했더니 역시 보통 괴한이 아니었다. 상감마마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분명했다.
“빨리 말해. 순순히 말하면 놔주겠지만 시간을 끌면 죽여 버리겠다. 우리 바쁜 사람이야.”
칼날이 점점 더 목을 강하게 눌렀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부 위를 흐르는 핏방울의 느낌이 무섭도록 생생했다.
“빨리 말하라니까? 어디야?”
“모, 몰라요.”
정말 몰랐다. 계금과 같은 무수리는 임금이 있는 대전이나 편전에는 가까이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말 그대로 허드렛일이었고, 그것도 상감과 중전을 위한 허드렛일이 아니라 정규 궁녀들의 시중을 들기 위한 허드렛일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넌 궁녀 아냐? 궁녀가 임금이 자는 집이 어딘지도 몰라?”
칼이 목둘레를 따라 움직이면서 천천히 목을 그었다. 섬뜩한 고통이 목 전체로 퍼져가면서 점점 더 많은 피가 흘렀다. 계금은 당장이라도 저들이 원하는 상감의 소재를 알려주고 칼날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계금이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고 끄윽끄윽거리며 울먹이며 눈물만 흘리고 있으려니, 뒤에서 칼을 들이댄 괴한이 냉혹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안 되겠다, 죽어라.”
“교, 교태전이에요!”
중전마마가 계시는 전각이 교태전이라고, 가본 적은 없지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밤이니까 아마 상감께선 중전마마께 가셨으리라.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계금은 임금이 가서 잘 만한 다른 전각 이름을 전혀 몰랐다.
“교태전, 교태전에 계시는 중전마마께 가서 주무실 거예요. 틀림없어요.”
“사실인가?”
앞에 서 있던 두 번째 괴한이 의심스럽다는 듯 뇌까렸다.
“이년이 아무렇게나 막 뱉는 거 아냐? 믿을 수 있어, 이거?”
뒤에서 칼을 들이대고 있던 괴한이 능물스럽게 답했다.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 거짓말이 나오겠어요? 나만 믿어요. 가는 길까지 알아낼 테니까. 야, 이년아. 교태전? 거기까지 어떻게 가는지 얼른 불어라.”
“여, 여기 있는 중문을 지나서 이쪽 방향으로 쭉 가세요. 세 번째 전각에서 왼쪽으로 돌고, 중문 두 개를 더 지나가면 교태전이에요.”
자기가 알려준 대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 계금 자신도 몰랐다. 교태전에 한 번이라도 가봤어야 방향을 알지.
하지만 그녀는 살고 싶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저 괴한들이 원하는 어떤 대답이라도 할 수 있었다. 계금은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필사적으로 빌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이쪽으로 집 세 개만큼 가고, 다시 왼쪽으로 문 두 개만큼만 가면 왕이 있다고?”
두 번째 괴한이 조용히 물었다. 계금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흔들었다.
“네, 네!”
“칼 치워.”
이 자가 두목인 모양이었다. 목에 칼을 대고 있던 괴한은 아무 말 없이 단박에 칼을 치웠다. 안도감이 든 계금이 비틀거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두 번째 괴한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움찔하는 계금을 향해 다정하게 속삭였다.
“잘했다. 약속대로 풀어주마. 말세가 된 이 세상이 주는 속박에서 말이야.”
이야기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계금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정면에서 비수가 젖가슴 아래를 파고들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뒤에 있던 괴한이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을 불로 찌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 곧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저쪽, 어두운 나무 밑에 이 년을 숨겨라.”
검은 옷은 어둠 속에서 행동하기 편하게 해줄 뿐더러 피가 묻은 것도 가려 주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계금의 시신을 치웠다. 잠깐이면 충분하니 묻을 필요도 없었다.
“어서 이년이 가르쳐준 대로 가보지요. 가서 거짓말이면 다른 년을 하나 또 잡아서 길을 물으면 될 테니까요.”
“그러자.”
“문 하나만 더 지나면 그년아 말한 거기에요.”
두 자객은 조심스럽게 무기를 확인했다. 품속에 있는 비수 여섯 개, 그리고 기름 한 병은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여기까지는 안 들키고 잘 들어왔다. 이제 주변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자고 있는 그놈만 해치우고 올 때처럼 조용히 빠져나가면 된다.
“잠깐. 틀렸는지도 모르잖아. 그년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어. 치기 전에 한번 잘 살펴봐.”
지시를 받은 자객이 고개를 담장 너머로 살짝 내밀었다. 건물 앞에 있는 커다란 화톳불과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내금위 군사가 네 사람 보였다.
“틀림없어요. 지키는 병사가 있어요, 형님.”
왕이 자는 곳이니까 저렇게 지키는 게 분명하다. 두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왕이 어디서 자는지도 모르고 들어왔지만 우린 성공했다. 이제 비수를 던져 파수병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 임금을 해치우자. 그러면 우리는 이 말세를 끝낸 영웅이 되는 거야!”
두목을 보고 씩 웃은 키 작은 자객이 담장 위로 살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파수병이 눈치 채지 못하는 틈을 타서 막 오른손에 든 비수를 던지려는 참인데 갑자기 호통소리가 들렸다.
“웬 놈들이냐!”
두 사람 모두 담장 너머에 너무 신경을 썼다. 뒤쪽에서 나타난 순찰조를 그만 놓치고 만 것이다.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내금위 군사 8명이 일사불란한 태도로 이들을 포위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당장 손에 든 흉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지 못할까!”
내금위 군관쯤 되면 그 무예를 무시할 수 없다. 당황하는 순간 담장 안쪽에서도 고함소리가 울렸다.
“밖에 수상한 놈들이 나타났다! 모두 나와라!”
두 사람은 일순 머리를 철퇴로 후려친 듯한 충격을 받았다. 모두 나오…라고? 왕이 자는 곳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를 악문 두목이 이를 악물더니 갑자기 짝패의 어깨를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갑자기 움직이리라 예상하지 못한 군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저, 저놈이!”
담장 위에 내려선 순간 두목은 보고 말았다. 궁녀가 왕이 자고 있는 곳이라고 했던 그 건물에서 갑주 차림을 한 내금위 병사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말이다. 속은 것이다.
“아악! 형님! 구해주세요!”
짝패는 담장을 등지고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금위 병사 8명이 일제히 창을 겨누어 위협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담장 위로 도망칠까봐 막은 듯했다.
“윽!”
돕기 위해 뭔가 행동하기도 전에 어깨에 화살이 박혔다. 전각 안에서 뛰어나온 군사들 중 하나가 이쪽으로 겨눈 시위를 막 놓은 참이었다.
“네 이놈들! 당장 무릎을 꿇으면 목숨을 살려줄 것이로되, 도망하거나 저항하려 들면 그 자리에서 어육(魚肉)이 되리라! 꼼짝 말고 포박을 받아라!”
눈앞에 닥친 여덟 자루의 창날, 십여 장의 활. 그뿐이 아니다. 그 뒤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창칼을 들고 이들을 포위하고 있다. 게다가 궁궐 전체에 등불이 켜지고, 대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 있을지 모르는 침입자를 찾기 위함이리라.
“혀, 형님, 어쩌죠?”
“어쩌기는.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을 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미륵께서 바라시는 일이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형님이라 불리던 키 큰 자객이 담장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쏘아라!”
놈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던 내금위 군사들은 놈아 도망치도록 두지 않았다. 삽시간에 화살비가 퍼부어졌다. 고슴도치가 된 두목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담장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담장 밑에 있는 두 번째 자객이 허망하게 웃었다.
“제길, 형님, 혼자서 그토록 빨리 가시면 어떡해요. 새 세상 만들자고 미륵님 밑에서 그렇게 같이 고생했는데. 나도 갈래요.”
웃는지 우는지 구분되지 않는 표정을 짓던 두 번째 자객이 비수를 쳐들었다. 주변을 둘러싼 내금위 군사들은 놈이 비수를 던지려는 줄 알고 긴장하며 무기를 겨누었다. 다음 순간 자객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자기 목을 그었다.
“막아라! 자진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배후를 캐야 한다!”
뒤늦게 나타난 내금위장이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맥박이 뛸 때마다 자객의 목에서 피가 한 사발씩 쏟아졌다. 놈은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뭣이라? 간밤에 궁에 자객이 들었다고?”
푹 자고 눈을 뜨자마자 기가 막힌 소리를 들었다. 말 그대로 어이가 승천하는 기분이 들어 속으로 욕을 퍼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미친 일이 다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