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33
2부 111화
– 15 –
8만 대군이 진격하자 앞을 막아서던 시마즈 군은 그대로 녹아서 사라졌다. 저항을 고민하던 성문들도 길어야 이틀 안에 모두 문을 열었다. 히데요시가 예상한 대로였다.
“이쪽 방면에 있는 시마즈 군이라고 해 봐야 실상은 모두 규슈의 소호족들이 아닌가.”
백 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살아남은 이들이다. 세력이 기울어지는 방향을 판단하는데는 어떤 갈대풀보다 민감하다. 어느 쪽에서 부는 바람이 대세가 되느냐에 따라서 그 방향으로 잽싸게 허리를 숙인다.
히데요시는 이들이 가진 생존에 대한 욕구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시마즈 편을 떠나 오다로 넘어가겠다고 서약하는 자들은 모두 받아들였다.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성주의 아들이나 형제 하나만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하게 해서 인질로 삼고 더 이상은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형님, 오토모 령을 공략하던 시마즈 군 본대가 철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히데나가에게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소 서둘러 행군한 보람이 있었다. 당주 시마즈 요시히사도 히데요시 군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으리라.
아무리 위험한 상태라 해도,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되다 보면 일상이 되어버린다. 히데요시가 처음 모리를 무너뜨리고 주고쿠에 주둔했을 때는 시마즈도 경계했다. 하지만 해가 몇 번이나 바뀔 만큼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들이 꼼짝도 하지 않자 시마즈도 해이해진 것이다.
“우리가 이대로 진격하면 시마즈 본령이 위험해지니까. 그걸 생각하면 놈들에게도 분고나 공격하고 있을 여유가 없을 거다. 지금 시마즈 군 본대는 병력이 얼마나 되느냐?”
“4만 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4만이라면 분고에 있는 오토모 군, 시코쿠 연합군만으로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숫자다. 그쪽에 있는 아군만 해도 5만이 아닌가.
“우리 앞에 있는 요시히로 군이 1만 정도니까 다 합치면 5만이군. 좋다. 계속 밀어붙이도록 하자.”
시마즈 군은 고쿠라에 상륙한 히데요시 군이 히고 방면을 통해 침공해오자 당황했지만 휴가 방면에 집중해놓은 주력부대를 빼낼 수가 없었다. 요시히사의 동생 요시히로가 급히 동원한 예비병력을 끌고 북상했으나 진격을 저지하지는 못하고, 다소 속도만 떨어트렸을 뿐이었다.
“가능하면 요시히로가 우리 군과 정면으로 격돌하게 하고 싶다. 어려울까?”
“어려울 겁니다. 요시히로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지금 히데요시 군은 후위부대 2만을 빼고도 8만을 유지하고 있다. 규슈에서 새로 받아들인 소호족들의 병력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1만에 불과한 요시히로 군이 정면으로 도전한다면 그대로 둘러싸서 섬멸해버릴 수 있다. 그 뒤에는 사쓰마로 가는 길이 열린다. 남아있는 요시히사 군도 본거지를 잃을 상황에 처하면 더 이상 싸울 용기를 잃고 항복할 게 분명하다.
요시히로 역시 이 이치를 잘 알았다. 히데요시가 포위망을 펼쳤을 때마다 매번 아슬아슬한 시점에 그 안을 빠져나갔다. 요시히로의 용병술도 상당한 경지였다.
“허나 놈이 이렇게 매번 몸을 빼는 데도 한계는 있다. 과연 우리가 사쓰마에 도착한 뒤에도 저렇게 빠져나가서 도망칠 수 있을까.”
히데요시가 웃음을 터트렸다. 요시히로가 전투를 회피할 수 있는 건 아직 사쓰마가 전장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쓰마에 도착하면 요시히로도 더 이상은 싸움을 회피할 수 없다. 자기네 영지를 지키려면 싸울 수밖에 없다.
“더이상 밀린다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시마즈 놈들이 불의의 기습을 시도할 수도 있다. 혹시 보초들이 방심하지 않도록 대장들을 시켜 단속하게 해라.”
“예, 형님.”
지금 시마즈 군이 몰리는 상황을 생각하면 저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소수 병력으로 본진에 기습을 가해 오거나, 총이나 활로 무장한 암살자를 숨겨두었다가 히데요시 한 사람을 노릴 수도 있다.
제대로 붙으면 상대도 안 되는 적이지만, 혹시 죽을 각오로 덤비면 저런 시도가 성공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저렇게 어처구니없이 죽고 싶지는 않다. 행여 적이 벌인 시도가 성공하지 않도록, 경계는 철저하게 해 두자.
– 16 –
1차 명나라 무역선단이 무사히 거래를 마치고 돌아왔다. 과연 명나라 상인들이 산동 끝자락 깡촌까지 와줄지 심히 걱정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확실한 내 기우였다.
“신이 지난번 성절사 편으로 사행을 갔을 때만 해도 성산위는 분명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바닷가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가보니 텅 비어 있던 해변에 부두가 늘어서고, 번듯한 주루가 들어섰으며 상품을 넣을 창고가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이번 상행(商行)에서 실질적인 행수 노릇을 한 역관 홍순언이 대전 한가운데 서서 열심히 보고했다. 조정 대신들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그 보고를 들었다.
직책이 직책이다 보니 조정에서 명나라 사정에 가장 밝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역관이다. 이들은 그동안 사행길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던 사무역도 도맡다시피 했다.
이제 명나라와 정식 무역을 시작하면서 그 형태를 호조가 주관하는 공무역으로 한 이상, 그 실무 역시 자연스럽게 역관들이 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양반 출신 관료들은 이런 일에는 아주 젬병이었고, 내수사는 내가 나서서 잘랐으니 말이다. 어차피 대외교역은 얘들도 경험이 없고.
“단 몇 달 사이에 항구가 들어섰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흐음, 거 참 기묘한 일일세. 모래사장에 짐 내리고, 천막이나 치고 들어앉아서 손님이 오길 기다리기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고 다른 이가 짜놓은 무대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대국 조정에서 그새 항구를 세웠던가?”
“아니었습니다. 탐문해 보니 오씨라 하는 강남 거상이 순전히 자기 돈을 들여서 부두, 전각, 창고를 지어 우리 배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했습니다. 눈 닿는 곳까지, 해안선 전체가 상인 오씨가 소유한 땅이라 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쪽 세계고 저쪽 세계고 간에 관리, 공무원이라는 작자들이 그렇게 부지런할 리가 없다. 우리를 위해서 항구까지 지어줄 정도로 정성이 있었으면, 애초에 촌구석에 처박힌 성산위 같은 곳을 개항장으로 지정하지도 않았을 거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 우리는 오가라는 자 손바닥 위에 있는 것 아니냐? 그래서야 제대로 장사를 할 수가 있느냐?”
근본적으로 그 오씨가 세운 마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닌가! 오씨라는 그 장사꾼이 의도적으로 강도질을 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좋을 일이 없다. 무엇보다,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상인들은 아예 출입을 막아버릴 게 뻔하지 않은가?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
젠장, 기껏 우리 쪽 창구를 일원화했더니 저쪽도 창구를 일원화해버릴 줄이야. 이거 제대로 재미를 보기는 영 글렀네. 인삼 가격을 놓고 밀당을 벌이다가 임상옥이 했다는 것처럼 재고 인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태우기라도 해야 하나?
내 인상이 구겨진 걸 보고 잠시 움찔했던 홍순언이 급히 보고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어째 내가 예상한 것과 딴판이었다.
“그 오씨가 인삼 대금을 산정해 주기를, 북경 상인들이 통상적으로 지불하는 액수에 2할을 가증하여 지불해 주었사옵니다. 더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고 더 비싼 값을 받았으니, 어찌 큰 이득을 보았다고 아니하겠습니까.”
역관은 중인이다. 그러다 보니 이득을 보았다는 말도 편히 할 수 있다. 만약 양반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으리라.
“어인 연유로 그리 값을 높이 쳐주던가?”
“그동안 강남으로 가는 인삼은 모두 중간상을 거쳤기 때문에, 강남에 도착할 때쯤이면 거의 두 배 가까운 가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신에게 제안하기를, 계속 물건을 자기에게 독점으로 넘긴다면 북경 가격에 2할을 붙인 가격으로 모두 구매하겠다 하였습니다.”
눈이 확 떠졌다. 그 정도라면 독점이라고 해도 전혀 나쁜 조건이 아니다. 무조건 더 비싸게 받겠다고 튕기고 싶은 기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저쪽이 짠 판에서 하는 게임인 것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항구도 창고도 이용할 수 없게 될 공산이 크다. 우리 임의로 다른 항구로 옮길 수도 없는 이상, 그자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헌데 전하, 그자가 제안하기를 북경에서는 아예 인삼거래를 그만두고, 전량을 자신에게만 넘겨준다면 지금 거래되는 가격에 2할이 아니라 5할을 덧붙여주겠다 합니다. 선뜻 받아들이긴 다소 곤란한 점이 있겠습니다만….”
대전이 술렁거렸다. 단박에 인삼 수출액이 여섯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될 말이다. 성산위로 가는 무역선은 북경으로 가는 사행길과는 별도임을 분명히 하라. 그 오가가 엉뚱한 짓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북경으로 가는 판로를 유지해야 한다.”
그 오씨에게 인삼 독점권을 줘버리면 나중에는 그자가 우리 목줄을 쥐고 흔들 수도 있다. 다른 거래선이 모조리 초토화되고 나면, 그자가 쳐주는 값밖에는 받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온다. 그건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북경 거래선은 오씨와 경쟁시키는 차원에서 유지한다. 게다가 이쪽은 조정에 있는 고관들과 연계된 자들이 많아서, 잘못 끊었다가는 명나라 조정 차원에서 보복이 돌아올 수도 있다. 돈 몇 푼 때문에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럼 우리가 매입하는 물화도 그 오가가 독점으로 공급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삼만 독점해도 큰 이익이니 굳이 다른 상인들에게 지나치게 원성을 사지 않겠다며, 다른 상인들도 물화를 가져와 팔 수 있게 하였습니다. 덕분에 구리도 더 많이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인삼으로 바로 치르지 못하고 은으로 치르니 다소 낯설었습니다만.”
그야 인삼을 오가놈이 독점으로 처먹고 그 값으로 낸 은으로 결재를 했으니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그래도 어쨌든 경쟁이 조금이라도 붙어서 가격이 낮아졌다면 다행이다.
“그만하면 만족이로다. 고생이 많았다.”
나중에 무역 규모를 더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 인삼 수요야 뭐 끝이 없으니까, 몇 년 뒤에 재배삼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면 아주 그냥 엄청나게 팔아제껴야지.
“헌데 전하, 그 상인 오가가 다소 맹랑한 제안을 하였사옵니다.”
“이번엔 어떤 제안이기에 그러는가?”
보고 끝난 거 아니었나? 홍순언이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들어보니 정말 맹랑하고 황당한 제안이었다.
“감합선 스무 척으로 실어나를 수 없을 만큼 많은 물품이 필요하면, 자기가 따로 배를 내어 운반해 주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원하는 물품도 염초, 구리, 양곡 등 뭐든지 가져다주겠다고 합니다.”
“아니, 그건 잠매가 아니냐?!”
우리 배들은 감합에 도장 찍어 가면서 명나라를 오간다. 명나라 배가 우리 항구에 오려면…모르겠다. 뭐가 필요한지. 명나라에서 발행하는 무역허가증? 일단 조선에는 관련된 법이 없다. 아예 그런 경우를 상정도 하지 않았으니까.
“신도 그 점이 걱정되어 오가에게 캐물었습니다만, 소리내어 웃기만 할 뿐이고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사옵니다.”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는 걸 보면 그 오가 놈, 밀수를 할 작정인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든든한 백이 있는 모양인데.
놈이 직접 배를 몰고 찾아온다면 무역선 숫자에 제약이 있는 우리 쪽 입장에선 대환영이다. 구리건 뭐건, 우리가 수송 가능한 양보다 더 들여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만 명나라 조정에 들켰을 때 뒷수습이 문제될 뿐이지.
“전하, 잠매는 훗날 문제가 될 수 있사옵니다.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니 허락하지 마소서.”
우찬성 이산해였다. 정철의 난을 앞장서서 수습한 공으로 이조판서에서 벼슬이 올랐다.
“신은 괜찮을 듯하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불러들인 게 아니라 저들이 알아서 찾아오면, 딱히 우리 잘못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대국에서 금지한 금제품만은 빼놓고 교역한다면 유사시에도 충분히 변명이 되리라 생각하옵니다.”
형조좌랑 이항복이었다. 음, 역시 잔머리라면 이쪽인가. 좋다. 채택!
“홍순언, 그대는 다음 상행 때 오가를 만나 벽란도에 내도하는 선박 숫자와 규모에 대해서 은밀히 교섭하도록 하라. 싣고 올 물건에 대해서는 호조 내에서 협의하여 결정하되, 대국에서 금지한 염초나 물소뿔은 가져오지 않도록 하라.”
예전이었다면 이 두 가지가 금제품이든 말든 손에 넣으려고 기를 썼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남만선이라는 좋은 대체 공급선이 생긴 덕분이다.
지금 벽란도에는 산 안드레아 호가 두 번째로 닻을 내리고 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주문한 인도산 염초 3천 근, 물소뿔 5백 본을 싣고 도착한 것이다. 설탕과 후추도 덤으로 싣고 왔다.
인도산 염초는 정말 질이 좋다. 국산이나 중국산하고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다. 폭발력이 두 배 가까이 나오므로 총포에 넣는 양을 그전보다 반으로 줄여도 된다. 유사시에 공급이 끊길 걱정만 없으면 전량을 인도산으로 쓰고 싶을 정도다. 값도 안 비싸다.
물소뿔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중간상을 안 거치고 산지에서 직송한 물건이다 보니 훨씬 값이 싸졌다. 덤으로 실어온 후추나 설탕도 일본에서 산 값보다 훨씬 싸다. 덕택에 이들 두 가지 물건은 모두 시장에서 가격이 폭락했다고 들었다.
염초건 물소뿔이건, 둘 다 훨씬 싸게 구할 수 있는 경로가 있는데 굳이 중국에서 밀수할 필요가 없다. 명나라 조정에 밉보일 위험까지 무릅써가면서 말이다.
“추후에는 남만에서 염초를 더 들여오고, 대국에서는 아예 수입을 끊도록 한다. 그러더라도 우리 스스로 굽는 일을 전폐해서는 안 된다.”
인도산 염초는 전량 군용으로 쓸 거다. 고로 민간인 포수들은 자기들이 직접 염초를 굽든지 아니면 시장에서 사서 써야 한다. 덕분에라도 전통식, 아니 재래식 염초제조법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배편에는 염초를 1만 근쯤 주문해 볼까? 남만인들은 어차피 곡식이 아니라 모피와 차, 도자기로 값을 받으니까 흉년이 들어도 이쪽 교역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올해는 가뭄도 치명적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 심적 부담도 훨씬 덜하다.
슬슬 1586년도 꺾어져 가는구나. 겨울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