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45
2부 1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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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온 사절단을 맞아 그 접대와 답방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은 결국 작년에 준비한 그대로 결정했다.
“올해도 가뭄이 심하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주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작년에 절반으로 줄인 공납을 올해는 전폐하도록 하라,”
“전하, 답방사에게 주어 보낼 방물을 마련하느라 드는 비용도 만만찮은데 모든 공납을 지금 폐하신다면 실로 그 부담이 클 것입니다. 백성들이 고되지 않게 하고자 하심은 분명 자애로운 처사이시오나, 당장 필요하니 공납을 얼마라도 유지하소서.”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관고와 궁중의 물건을 털어서 보낸다 해도, 그건 결국 전부 다시 채워 넣어야 하는 물건들이다. 다 필요가 있어서 그만큼 쌓아뒀던 거니까.
“허나 연속된 가뭄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너무 크다. 벌써 4년째가 아니냐? 과인이 부덕하여 하늘이 시련을 주시는 바이니, 마땅히 세금을 감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또한 하늘에 용서를 구해야 하리라.”
아, 젠장. 연산군 때부터 이놈의 부덕 드립은 정말 싫었는데.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젠장 벌써 4년째 계속되는 가뭄을 이용해서 이놈의 공납제를 폐지하고 대동법으로 몰아가려면 다른 수가 떠오르지를 않는다. 아 XX 가뭄 생각하니 욕만 자꾸 떠오르네.
내가 경성군으로 눈을 뜬 게 임오년(1582년)이었다. 그런데 정해년(1587년) 올해까지 비가 제대로 온 해는 앞에 2년뿐이다. 4년 연속 가뭄이라니, 제기랄! 이제 저수지는 다 말라붙었고 강물도 줄어들었다. 강물 수위가 낮아져서 수차도 높이를 낮춰 재설치해야 할 판이다.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가 아니었으면 아사자가 줄줄이 나왔어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이다. 덕분에 올해는 사신단을 환영하는 잔치에서밖에 술을 마시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임금이고, 그동안 하고 싶은 건 다 했다지만 가뭄이 4년째인데 술을 마실 배짱은 없었다.
“양인들이 선물로 가져온 포도주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치워두어라. 술을 마실 기분이 들지 않는다.”
초반 가뭄 2년은 저수지에 담아둔 물과 수차로 퍼 올린 물을 쓰면서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작년에는 지하수를 동원하고 감자, 옥수수 재배를 시작해서 겨우 넘겼다. 올해는…구황작물을 재배하는 면적을 더 넓히고 지하수를 더 퍼올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강남 오가에게 곡식을 주문하여 식량을 들여오도록 하라. 적어도 십만 석 정도는 들어와야 최소한 기근을 막지 않겠느냐.”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작년보다는 쌀 수확이 줄어들 테지. 부족한 식량을 감자나 옥수수가 어느 정도 채워준다고는 해도, 재배가 아직 충분히 퍼지지 않은 데다 아예 비가 안 와버리면 그것들도 방법이 없다. 그러니 식량을 명나라에서 수입하면서 어서 전가사변을 서둘러야겠다.
“그러고 보니 호판, 오가가 하듯이 자유롭게 우리 땅에 와서 무역함이 대국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는가?”
그 오공충이란 자가 조선에 무역하러 오는 걸 보면 완전히 배짱이다, 배짱. 그만한 배들이 출항하는 걸 남들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공공연하게 장사하러 오지?
“대국 호부에 조회해 보니, 지금 대국에서는 외국 선박이 찾아와서 교역함은 엄히 제한하나 대국 선박이 나가서 장사함은 크게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합니다. 게다가 강남 오가는 그 선대 조상이….”
잠시 머뭇거리던 김승석이 곧 실토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오가의 조부가 당시 황제인 정덕제께 환관 유근의 비행을 고하였는데, 유근이 처형된 뒤에 그 포상으로 면사금패(免死金牌)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웬만한 죄는 묻지도 않으니, 사사로이 하는 사무역 정도는 관에서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도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면사금패는 소지자가 사형 판결을 받을 죄를 지어도 한 번은 그 벌을 면해준다는 특별한 사면장이다. 기능이 딱 부루마불 우대권이다.
그 장사꾼 오씨가 그렇게 거물이었나? 개국공신도 아닌 집안이 면사금패를 받을 정도로? 솔직히 말하자면 그 유근이란 환관 녀석은 정덕제가 버리는 말로 취급해서 그냥 이용가치가 끝나자마자 폐기해버린 게 아닌가 싶긴 하다만.
그런데 그러고 보니 부루마불 우대권은 일회용이잖아? 면사금패도 분명히 일회용일 텐데?
“대공을 세워 면사금패를 받을 정도의 집안이니, 웬만해서는 시비를 걸 자도 없고 관에서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또한 왠만한 사안은 각계에 걸친 영향력과 돈으로 해결해버려서, 황제께 받은 면사금패는 여전히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거 참 정말 대단한 양반하고 내가 얽혔구나. 기왕이면 힘센 파트너를 잡아서 나쁠 건 없고, 나도 이득을 보고 있으니 괜찮은 결과긴 하지만.
“알겠다. 그럼 올해는 오가에게 다른 물품보다는 곡식을 좀 넉넉히 가져오도록 하라. 괜히 사치품 같은 거 가져오지 말고.”
이미 작년에 오던 교역선들부터 조짐이 슬슬 보였다. 분명히 쌀을 실은 배가 들어왔는데, 갑자기 중국산 비단이 개성 일대에 대량으로 돌기 시작했다. 오공충이 직접 시킨 건지 아니면 선원들이 남몰래 챙긴 건지는 몰라도, 밀무역이 있었던 거다.
덕분에 몇 안 되던 벽란도 일대 색주가들이 돈벼락을 맞았다. 명나라 선원들이 술값에 여자 값으로 비단을 뿌려댔으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돈 냄새를 맡은 개성상인들이 당장 벽란도 일대에 화려한 유흥가를 지어대기 시작했다. 스페인 선원들도 열심히 거기에 드나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더럭 겁이 난다. 혹시 그 자식들이 개성에서 매독을 옮기면 어떡하지? 젠장, 이건 정말 반갑지 않은 선물인데! 선원들한테 상륙하기 전에 모두 바지 내리고 하초를 까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왜 난 작년에 산 안드레아 호가 왔을 때는 이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일단 개성유수한테 명령해서 향의원에 있는 여의관들을 보내 색주가에 있는 여자들을 모조리 검진하게 해야겠다. 혹시 매독 징후가 보이는 여자들이 있으면 전부 다 당장 격리해야지. 그래야 병이 거기서 더 전염되지 않게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 서양 남자들은 계속해서 밀려들 텐데 우리 여자들만 계속 위험에 드러내다니 될 말인가? 하지만 이런 장사는 위에서 금지한다고 바로 금지되는 게 아니다. 일단 유지하게 놓아두면서 안전장치를 추가하는 수밖에 없다.
“어의 허준을 불러라! 양인들이 혹시 개항장에서 퍼트릴 수 있는 악질(惡疾)을 방지할 만한 방안을 논의해야겠다.”
19세기까지도 유럽에서 매독 치료약은 수은밖에 없었다지. 수은 증기를 쐬거나 수은 연고를 바르거나 데운 수은탕에 몸을 담그거나. 매독에 걸려서 미쳐 죽는 것보다 수은중독으로 죽는 게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현대인으로서 그런 치료법은 오금이 떨린다.
제대로 치료를 하자면 당연히 제대로 된 항생제가 필요하지만, 그런 건 없다. 혹시 현대에 한의학을 배운 상희라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치료법을 알까? 아니다, 현대에 매독에 걸린 환자가 제정신이라면 한의원이 아니라 비뇨기과를 가겠지. 상희가 치료법을 알 리는 없겠네.
그건 나중에 고민하더라도 일단 할 수 있는 거부터 해야겠다. 돼지 창자라도 써서 콘돔을 만들어 사용하게 해 볼까? 물론 고무 콘돔보다야 못하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물론 피임 효과는 덤으로 보는 거고. 이것도 역시 고무 콘돔보다는 못하겠지만.
…문제는 그러자니 돼지 사육두수도 부족하다는 거군. 얼른 저 스페인산 돼지를 번식시켜서 숫자를 늘려야겠다. 순 토종돼지는 번식은 빠르지만, 덩치도 작고 성장이 너무 느리다. 콘돔을 만들려면 창자가 좀 굵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돼지도 커야…아니, 늘어나니 상관없으려나?
그러고 보니 오공충한테 돼지도 좀 가져오라고 할까? 한 돼지 하는 나라가 또 중국 아닌가! 중국은 예로부터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으니 품종개량도 꽤 돼있을 터다. 연산군 때 잔뜩 심은 참나무 덕분에 사료로 쓸 도토리 공급도 풍족하니, 어디 중국산 돼지도 한번 들여와 보자.
– 13 –
“누르하치가 서한을 보내?”
“예, 전하. 평안감사가 전해왔습니다.”
서양인들 접대하느라 한참 잊고 있던 평안도 소식이라, 그것도 북변 여진족 일이라니.
요즘 북방정책은 사실상 부여주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사행로도 해로로 바뀐 지 여러 해가 되고 보니, 평안도가 갖는 위상은 예전보다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요동과 맞닿은 접경이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땅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평안도를 발전시킬 계획을 계속 구상하고 있다. 워낙 부여주가 시끄러워서 자꾸 관심이 그쪽으로 쏠려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평안감사 이승훈은 누르하치를 경계해야 한다면서, 서둘러 토벌하자는 장계를 자꾸 올리곤 했지. 과연 이 편지가 올라오기 전에 평양에서는 어떤 소동이 있었으려나.
“관찰사 영감, 건주위사 누르하치가 전하께 시급히 올려야 한다면서 이 편지를 바쳤습니다. 파발을 시켜 얼른 보내시지요.”
평안도 관찰사, 즉 평양감사의 위상은 옛날 같지는 않다. 과거 평안도는 명과 조선 사이를 오가는 사신들의 통행로였고 외적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자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고 후자만 남았다. 그것도 부여주에 밀려 훨씬 주목을 덜 받는다.
“누르하치? 그 젊은 놈이 또 무슨 말을 한 건가?”
관찰사 이승훈은 누르하치가 하는 짓이 의뭉스럽기만 했다. 조부와 부친이 비명횡사하면서 갑작스레 부족장 지위를 물려받은 주제에, 어찌나 수완이 좋은지 서른도 되지 않은 놈이 벌써 건주위를 손아귀에 쥔 실력자로 자라나 있었다.
겨우 5년째다. 할아비 교창가가 죽고 놈이 부족을 물려받은 게 지난 계미년이었으니 올해가 딱 5년째 되는 해다. 그때 누르하치는 유산으로 받은 병사 1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누르하치 밑에 있는 군사는 1만 명에 달한다!
“그 도둑놈의 새끼는 우리 백성들을 도둑질해서 세력을 키우고 있지. 그러면서 우리 앞에서 살랑거리기는 또 얼마나 하는지!”
“하지만 감사또 나리, 건주위는 압록강을 넘어오는 일은 없지 않사옵니까?”
“그야 넘어오기만 하면 요절이 날 테니까 그런 게 아닌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압록강을 넘어오는 도적들이 가끔 있었다. 하지만 해서부가 대대적인 침입을 했던 을유년 이후 누르하치는 어떤 소란도 일으키지 않았다. 다른 소부족들은 압록강 남쪽에 종종 노략질을 위해 넘어왔으나 누르하치가 건주위의 패권을 잡자 이것도 사라졌다.
을유년에는 평안도에서도 상당한 군사가 지원차 출병했었다. 이승훈은 이들의 입을 통해서 그때 누르하치가 한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군이 가진 힘에 크게 경탄했을뿐더러, 장수들과 교분도 두텁게 맺었다고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이 난동을 부렸다간 이번에 해서부를 때려 부순 포구가 자기를 겨눌 거라는 예측을 하지 못 할 수가 없으리라. 누르하치도 살고 싶으면 헛된 수작 따위는 부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리께서는 왜 자꾸 저들이 우리 백성을 도적질한다 하시는지요?”
“아니, 그럼 부여주에 사는 야인들은 다 우리 백성이 아니란 말이냐? 누르하치 패거리가 그 야인들을 도적질하고 있지 않으냐!”
을유년에 벌어진 난리 이후 조정에서는 야인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적극적으로 군사를 내서 싸웠던 부락은 우대했지만, 해서부를 도왔거나 눈치만 본 부락들은 엄한 통제를 받았다. 거기에 그동안 보물처럼 간직하던 칙서까지 몰수당했다.
견디다 못한 야인여진 부족들 상당수가 목단강을 넘어 서쪽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해서부를 약탈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던 누르하치가 이들 이탈자 상당수를 흡수했다. 노예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우고 같이 노획물을 나누는 부족민으로서 말이다.
“놈이 상감마마께 진정으로 충심을 보이고자 한다면, 도망친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 게 아니라 마땅히 묶어서 송환해야 할 것이다! 자기 세력을 넓힐 궁리만 획책하는 그놈을 이제는 더이상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되는데!”
겨우 5년 사이에 병사 백 명을 만 명으로 키워낸 놈이다. 이승훈은 누르하치가 두려웠다. 허나 놈을 쳐부술 수단이 없었다.
“감사또께서 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올해도 또 지독한 가뭄인데다, 병사또께서는 건주위를 철석같이 믿고 계시는걸입쇼.”
평안병사 조성은 을유년 난리 때 부여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싸웠다. 그때 건주위 군사들을 만나 저들이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인상을 받았고, 지금껏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훈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이제 모든 군권은 병사또께 있지 않사옵니까. 건주위를 토벌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사소한 핑계라도 만들어서 군사를 몰아 토벌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 정철이 일으킨 난리 때문에 관찰사들은 군권을 빼앗겼다. 그런 판이니 이승훈으로서는 욕이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그 서한에서 뭐라고 적었느냐?”
“전하께 올리는 글이라고 워낙 단단히 봉해 놓아서, 자칫 서한이 상할까 염려되옵니다. 원 봉투를 아예 버려야 할지도 모르니 뜯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승훈이 험악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알겠다. 그대로 보내라.”
“몽골인들이 건주위에 반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이건 또 무슨 놀라운 소식인가 싶었다. 몽골 놈들, 명나라랑 피 터지게 싸우다가 지금은 다 북쪽으로 물러가서 숨을 고르고 있는 시기 아니었나?
이놈들이 해서부는 물론이고 건주위까지 자기들 부하로 여기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줄은 몰랐다. 물론 누르하치가 그 말을 순순히 듣는 건 아니지만, –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나한테 그 서한 내용을 고해바치지 않았겠지 ?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누르하치의 제보에 따르면 몽골,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몽골에 해당하는 코르친 쪽이 우리 영토인 부여주 쪽에 야욕을 품고 있다고 한다. 아니, 이놈들은 왜 또 지랄이야?